버티는 삶에 관하여 (2017 리커버 한정판 나무 에디션)
허지웅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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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버티는 삶에 관하여, 2015년 3월 7일 읽음, 알라딘 서점

 

글쓰는 허지웅입니다. TV에 곧잘 아니 이젠 대세남이 되어 여러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허지웅. 이젠 낯익은 이름, 낯익은 얼굴이 되었다. 하지만 방송인이 아닌 글쟁이 허지웅은 아직 낯설다. 그의 글을 한겨레신문에서 곧잘 보곤 했지만, 그의 책은 이게 처음이다. <버티는 삶에 관하여>.

그의 삶과 생각을 이야기하는 1부, 나는 별일없이 산다. 시대와 사회에 대해 이야기하는 2부 부적응자들의 지옥, 3부 그렇게, 누군가는 괴물이 된다. 그리고 영화에 대한 이야기 4부 카메라가 지켜본다. 이렇게 4부로 구성된 이 책은 일관되게 '버티어 내는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버팀'이란 웅크리거나 숨는 수동적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현실을 냉정하게 판단하고 견뎌낼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것을 말한다. 

고시원에 살면서 겪었던 그의 일화들, 그리고 어머니와 관련된 일화들은 울컥, 하는 감정이 치솟게 한다. 버티어내는 것이 얼마나 고단한 것인지를 과장하지 않고 담담하게 말하기 때문일까. 고시원이라는 작은 공간, 세상의 끝처럼 얇고 허약한 공간에서도 그는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였기 때문에 그것이 오히려 좋았다고 이야기한다. 책임질 수 있는 최소한의 것에 만족할 줄 아는 것. 그것이 버티어내는 삶에 필요한 지혜겠다. 
그의 삶과 그의 사회에 대한 이야기도 좋았으나, 개인적으로 제일 좋았던 것은 4부. 영화에 대한 이야기들. 특히 영화 <록키>에 대한 이야기가 좋았다. 자기 삶을 스스로 건져올린 남자의 이야기. 아직 철들지 않은 어린아이의 감수성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이른바 자립, 자수성가의 이야기를 나는 좋아한다. 승리하지는 못했으되, 패배하지 않은 삶에 대한 이야기. 구질구질한 진창을 구르면서도 자기비하를 하지 않고 일어설 순간을 꿈꾸는 이야기. 영화 <록키>가, 그리고 실베스타 스탤론의 그 이야기들이 좋다. 더불어 그걸 알려준 허지웅의 글도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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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 않는다는 말
김연수 지음 / 마음의숲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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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2015년 1월 31일 읽음.

김연수의 글은 소설보다는 산문이 좋다. 예전 글보다 요즘 글이 더 낫다. 책을 낼 때마다 더 훌륭해진 글들이 책을 가득 채우고 있다.

'지지 않는다는 말'이라는 다소 이상한 이 문장은 이 글을 읽어야 비로소 이해가 된다

"그중 내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건 지지 않는다는 말이 반드시 이긴다는 걸 뜻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깨달음이었다. 지지 않는다는 건 결승점까지 가면 내게 환호를 보낼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안다는 뜻이다. 아무도 이기지 않았건만, 나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았다. 그 깨달음이 내 인생을 바꿨다."

말하자면, '이겨야 산다'는 세상과는 다른 세상에서 살자는 이야기다. 누구에게 기를 쓰고 이기지 않아도 살 수 있다. 마찬가지로 누구에게도 지지 않아도 된다. 그런 삶이 있고 그런 깨달음이 세상을 다르게 만들고, 나를 다르게 만든다는 것.

신문에 연재했던 글을 모았던 것인지 비슷한 길이의 짧은 산문들을 모은 산문집이다. 한 편 한 편이 짧막하면서도 생각해볼 거리를 던져주어 좋다. 김연수스러운 유머, 누굴 놀리지 않고서도 누구 하나 바보를 만들지 않고서도 빙그레 웃을 수 있게 만드는 유머가 살짝 배어난다. 이 뒤에 나온 <소설가의 일>에 비하자면 아직 유머가 양념수준으로 살짝 넣은 편. 짐짓 도덕 선생처럼(이런 비유는 윤리교사에게 참 미안한 표현이지만^^) 무거울 수 있는 인생론의 주제들을 매우 가볍고 경쾌하게 가로지르며 이야기를 풀어간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인생과 자신의 글쓰기를 달리기에 자주 비유했던 것처럼 김연수도 인생을, 글쓰기를 달리기에 곧잘 빗댄다. 그 비유는 뛰어본 사람의 생생한 경험을 바탕으로 삼았기 때문인지 정말 그럴 법하다는 생각에게 고개를 주억거리게 한다. 의도한 바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달리기 예찬론'으로 이 책의 부제를 붙여도 무방한 수준. 정말 읽다보면 책장은 잠시 덮고, 당장 달리기를 하러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달리기 선수들은 어쩜 그리 명언을 잘 남기는가 감탄을 하게도 된다. 마라토너들의 이야기를 다룬 책들을 어디서 구해읽어야 하는 건 아닌가 하는 고민도 살짝 든다 ^^

다 좋았지만 좋았던 글 몇 편을 골라보면,
로자는 지금 노란 까치밥나무 아래에, 146쪽
이건 믿음의 문제가 아니라 사실의 문제, 212쪽

두 편이 좋다. 둘 다, 지금 이 순간 순간을 생생하게 충실하게 사는 것이 제대로 사는 것이며 그런 삶은 영원히 자기 자신만의 것으로 남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한다. 결국 이 책은 어떻게 사는 게 잘 사는 건지 그 이야기를 한다. 읽고 나면 정말, 잘 살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듬뿍! 솟아나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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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한 사랑의 실험
신형철 지음 / 마음산책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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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한 사랑의 실험> 2015년 2월 7일 읽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이 씨네21에 연재한 영화관람기를 모은 책이다. 모두 20편의 글이 실려 있다. 그 중 영화 <테이크 쉘터>, <설국열차>, <라이프 오브 파이>, <케빈에 대하여>를 다룬 네 편의 글이 가장 흥미로웠다. 내가 안 본 영화를 다룬 글은 읽지 않았다. 모르는 것에 대해 논하는 것을 읽을 수는 없으니. 흥미롭다고 말한 글은 모두 내가 영화에서 풀지 못한 궁금증에 대한 답을 들려주었다. 그것은 물론 신형철의 답이었지만, 내게는 그것이 가장 진실에 가깝거나 혹은 내게 가장 설득력이 있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테이크 쉘터>. 영화 말미에 나오는 대해일. 그건 무엇인가. 정신병원에 입원하기로 한 주인공의 환상이 정말 현실화된 것인가. 아니면 주인공의 환상인가. 주인공의 환상이라면 이미 주인공이 정신병자라고 판명된 마당에 그걸 다시 보여주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에 대해 신형철은 이것은 주인공의 환상이며, 자신이 정신병원에 입원하기로 한 결정을 내린 것은 세계의 종말과 같은 의미이기 때문에 구태여 다시 보여주어야 했다는 것. 우리는 그것이 환상이라고 인정을 하면서도 주인공의 내면에 동의한다면 그것을 현실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

또 <설국열차>. 왜 모두가 죽고 단 둘만이 살아남는 것으로 영화가 끝나버렸나. 신형철은 이렇게 말한다. '이 영화는 절망도 희망도 선택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선택할 수 없음 그 자체를 선택한 것이다.' 커티스가 타락한 설국열차를 이어받는 것은 관객이 도덕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고, 모든 승객이 무사히 설국열차에서 나오는 것은 현실적으로 말이 안 된다고 할 것이기 때문에, '이 시대가 체념도 낙관도 모두 허용하지 않는 시대인 것이라면, 이 열차가 이상한 곳에 도착했기 때문에 우리는 정확한 현실 인식에 도착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책은 '영화'에 대한 책이면서도 동시에 '서사', '이야기'에 대한 책이며, '해석'에 대한 책이다. 본격적인 문학 이론을 설명하지 않으면서도 '좋은 이야기'란 무엇인지, '이야기의 층위'는 어떤 것인지, '해석'이란 어떤 의미를 가지는 작업인지를 잘 전달해준다. 소설론에 대한 어설픈 책보다 이 책이 낫다. '좋은 이야기'가 무엇인지 궁금해하는 사람이라면 읽자.

한 가지 더. 신형철의 글은 겸손하다. 작품 비평을 한답시고 어깨에 잔뜩 힘을 준 채 대상이 되는 작품을 갈가리 찢어내는 긴장감만 넘쳐나는 글이 진짜 비평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에게 신형철은 좋은 글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어려운 것을 쉽게, 모호한 것을 분명하게, 어지러운 것을 간결하게 풀어내어 전달하면서도 신형철은 그것이 자기가 내놓은 하나의 답일 뿐이며 정답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런 겸손함이 이 책의 모든 글에서 또렷이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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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형철 <정확한 사랑의 실험> 중에서 몇 부분을 옮겨본다.

27쪽
문학(글쓰기)의 근원적인 욕망 중 하나는 정확해지고 싶다는 욕망이다. 그래서 훌륭한 작가들은 정확한 문장을 쓴다. 문법적으로 틀린 데가 없는 문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말하고자 하는 바의 본질에 가장 가까이 접근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에 다른 문장으로 대체될 수 없는 문장을 말한다. 그러나 삶의 본질은 수학적 진리와는 달라서 100% 정확한 문장은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문학은 언제나 '근사치'로만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근사하다'라는 칭찬의 취지도 거기에 있다. '근사'는 꽤 비슷한 상태를 가리킨다.) 어떤 문장도 삶의 진실을 완전히 정확하게 표현할 수 없다면, 어떤 사람도 상대방을 완전히 정확하게 사랑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정확하게 표현되지 못한 진실은 아프다고 말하지 못하지만, 정확하게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은 고통을 느낀다. "정확하게 사랑받고 싶었어." 이것은 장승리의 두 번째 시집 <무표정>(문예중앙, 2012)에 수록돼 있는 시 <말>의 한 구절인데, 나는 이 한 문장 속에 담겨 있는 고통을 자주 생각한다. 

113쪽
텍스트를 읽는다는 것은 세 단계를 차례로 밟아가는 일이다. 그 세 단계를 각각 '주석', '해석', '배치'라고 명명할 수 있다. 우리는 우선  텍스트가 다루고 있는 것들의 '사실' 관계를 확인해야 하고(주석), 확인된 사실에 근거해서 텍스트의 '의미'를 추론해내야 하며(해석), 이렇게 추론된 의미가 어떤 '의의'를 갖는지를 평가하면서 그 텍스트가 놓일 가장 적절한 자리를 찾아주어야 한다(배치). 특별할 것도 없는 이런 정리를 시도해본 것은 이 세 작업의 몫을 혼동하거나 작업의 단계를 무시하는 사례들이 더러 있어서다. 예컨대 밝혀지지 않은 사실 관계 앞에서 고된 실증 작업을 생략하고 상상력을 발휘해 공백을 메우거나(주석을 해석으로 대체하는 경우), 지난한 해석의 노동을 건너뛰고 신속히 텍스트를 분류한 다음 그것으로 해석이 완료되었다고 믿거나(해석을 배치로 대체하는 경우) 하는 일들 말이다. 우리가 이 영화(<테이크 쉘터>)를 두고 '금융 대란 이후 중산층의 불안'을 다룬다고 말할 때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은 이 텍스트를 더는 '해석'할 필요가 없도록 신속히 '배치'해버리는 일이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해야할 일을 충분히 한 사례는 아직 많지 않은 것 같다. 

117쪽
많은 훌륭한 이야기들의 원천이 대체로 인간의 행복이 아니라 불행인 것은 왜인가. 말년의 프로이트는 인간이 행복해하기보다는 불행해지는 데 더 많은 재능을 타고났다는 사실을 착잡하게 인정해야만 했다. "인간을 행복하게 하려는 의도는 '천지창조'의 계획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다(<문명 속의 불만>, 1930, 2장) 세 종류의 고통이 우리를 지속적으로 위협하기 때문이라는 것. 자주 고장 나고 결국 썩어 없어질 '육체', 무자비한 파괴력으로 우리를 덮치는 '세계', 그리고 앞의 두 요소 못지않게 숙명적이라 해야 할 고통을 안겨주는 '타인'이 그것들이다. 

118쪽
 '주석'은 최대한의 정확성을, '해석'은 최대한의 단독성을, '배치'는 최대한의 보편성을 추구하는 작업이다. 어떤 텍스트가 최대한의 보편성을 가질 수 있도록 '배치'할 필요가 있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은 그 텍스트를 세상에서 하나뿐인 것으로 만드는 작업이며, 그것이 바로 '해석'이라 불리는 행위의 이상일 것이다. 특히 그 텍스트가 타인의 불행을 다루는 것일 때에는 더욱 그렇다. 타인의 불행을 놓고 이론과 개념으로 왈가왈부하는 일이 드물게 용서받을 수 있는 길 중 하나가 그 불행이 유일무이한 것으로 남을 수 있도록, 그래서 쉽게 분류되어 잊히지 않도록 지켜주는 일이다.

169쪽
"터질 듯한 긴장감으로 팽팽하던 기차가 마침내 폭발하고 마는 장면은 사정을 상징합니다."프로이트식으로 말한다는 것은 '기차는 남근, 터널은 질' 운운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 이 영화에는 기차가 터널을 통과하는 장면이 한 번 나온다. '예카테리나 다리'를 통과하면서 '해피 뉴 이어'를 외친 다음 기차는 터널에 진입하고 그 어둠 속에서 피의 살육이 자행된다. 기차, 터널, 피. 여러모로 불길한 설정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아니나 다를까, 이 장면을 '첫 경험과 처녀막의 파열'을 상징하는 것으로 읽어낸 글을 어디선가 볼 수 있었다. 이런 해석은 틀렸다기보다는 무익한 것이다. (...) 프로이트적인 해석은 모든 사물을 성적 상징으로 변환하는 기술이 아니라, 이성과 의지의 산물인 것처럼 보이는 행위와 사건들에 (어쩌면 그런 것들일수록 더) 무의식적 요소가 얼마나 깊숙이 '매개'되어 있는지를 따져보는 작업이다. 그런 의미에서 <설국열차>는 프로이트의 관점에서 보자면 그야말로 커티스가 주인공인 서사일 것이다. 말을 바꾸면, '아들의 서사'를 읽어낼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아들의 서사란 결국 '어떻게 아버지로부터 벗어나서 스스로 아버지가 될 것인가'하는 문제의 해결 과정이다. 그리고 이 문제는 집단의 층위로 옮겨지면서 '어떻게 이 집단의 아버지(리더)가 될 것인가'하는 문제로 매개된다. 

195쪽
어떤 영화가 '한 소년이 망망대해에서 표류하다 구조된 이야기'라고 규정될 때 그것은 1차원의 서사다. 그런데 모든 이야기는 그것을 들려주는 사람에 의해 가공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근거해 이 이야기를 '한 소년이 자신의 표류 체험을 사후에 재가공한 이야기'로 다시 규정할 경우 이 서사는 2차원이 된다. 뿐인가. 이야기는 그것을 듣는 사람의 해석에 의해서 비로소 완성된다. 그래서 이 서사가 '이야기를 듣는 사람에게 그 이야기를 믿을 것인지 말 것인지를 선택하게 하는 이야기'이기도 한 것으로 규정되면 이것은 3차원의 서사가 된다. 나는 지금 리안 감독의 <라이프 오브 파이>에 세 개의 차원이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특수 안경을 쓰지 않고 보아도 이것은 3D 영화다.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214쪽
어쩌면 애초에 질문 자체가 틀린 것일까. 나쁜 질문을 던지면 답을 찾아낸다 하더라도 그다지 멀리 가지 못하게 되지만, 좋은 질문을 던지면 끝내 답을 못 찾더라도 답을 찾는 와중에 이미 꽤 멀리까지 가 있게 된다. 일단은 좋은 질문이라 믿고 계속 물어나갈 수밖에 없겠지. 나는 내 생명의 절반을 살았다. 나 역시 어떤 식으로건 나를 다시 낳아야 할 때가 되었다고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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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대탐닉 - 신이현의 열대를 보내는 다섯 가지 방법
신이현 지음 / 이야기가있는집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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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2월 19일 읽음.

열대에 가고 싶다. 열대 과일이 먹고 싶다. 수영장에 옷을 입은 채 뛰어들고 싶다. 열대의 소낙비에 흠뻑 젖고 싶다. 흙먼지 폴폴 날리는 열대의 밤길을 타박타박 걷고 싶다. 열대의 더위를 온몸으로 받아들이며 이마에서 콧등에서 겨드랑이에서 등에서 땀을 뚝뚝 흘리고 싶다. 한여름 아니 태양의 한복판에 서 있고 싶다.

신이현이란 작가는 잘 모른다. 1994년 <숨어있기 좋은 방>이란 작품으로 데뷔했다고 하니 20년이 된 중견 작가다. 데뷔작만 어렴풋이 읽은 기억이 나지만 그것도 확실치 않다. 프랑스 남편을 두고 남편을 따라 캄보디아에서 여섯 해를 살았단다. 이 책은 그 때의 기억을 풀어낸 것. 여행기라기보다 일종의 소설일 듯. 소설은 아니지만 소설이다. 

캄보디아에 살며 만난 인연들, 다섯 인물을 열대 과일에 빗대어 풀어낸 이야기이니까 실제 이야기면서도 그 인물들의 사연을 작가가 다시 풀어써냈으니 소설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다섯 인물과 과일을 소개해본다.

청년 잭 푸르트의 경우, 시시껄렁하고 뒤죽박죽인 열대의 나날들
망고 아저씨의 경우, 이 세상에서 가장 게으른 사나이의 열대의 나날들
두리안의 경우, 조금은 로맨틱하고 서글픈 열대 호텔에서의 나날들
불꽃씨의 경우, 모든 길에 벌레들의 이름을 붙여 준 열대의 나날들
파파야의 경우, 대체로 퇴폐적인 상상으로 흘러가는 열대 우기의 나날들

나는 열대 과일을 잘 못 먹는 편인데 이 책을 읽고 나면 열대 과일이라면 무엇이라도 아구아구 먹을 수 있을 것 같다. 책을 읽는 내내 열대 과일을 눈으로 먹은 듯 하다. 더불어 그 인물들의 삶도 함께 살아온 듯. 이 세상에 사연없는 사람은 없다지만 이들의 사연은 어찌나 소설 같은지.

그런데, 이들의 삶은 열대적이다. 무엇인가를 이루고 쟁취하고 성취하며 얻고자 하는 것이 없다. 삶의 팽팽한 대결 따위는 열대의 뜨거움에 녹아버린지 오래다. 이들의 삶은 애쓰지 않아도 절로 피어 자라난 열대의 나무들과 절로 영글은 과일들처럼 그저 더위 속에서 시간과 함께 흘러간다. 그런 무위의 인생에 온갖 감정과 사연이 넘친다. 애써 키우지 않아도 향과 즙이 흘러넘치는 열대 과일처럼. 신기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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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대회의 <벽광나치오>를 읽고 있다. 조선 후기 한분야만을 파고들어 그 분야의 프로패셔널이 된(이 책의 원제이기도 하다 <조선의 프로패셔널>) 열 한 명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이 책은 조선 시대에도 이런 인물들이 있었구나 하는 색다른 발견의 재미가 쏠쏠하다.

아직 다 읽지는 못했지만 최근의 인기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를 떠올리게 하는 재미난 부분이 있다. 조선 시대 최고의 책거간꾼 책중개상이었던 '조신선'의 이야기가 그것인데, 이 인물의 일대기를 읽다보면 400년간 늙지 않고 살아온 도민준이 자꾸 연상된다.

조신선이란 이 사람은 타고난 부지런함과 비상한 기억력 해박한 지식으로 조선 후기 학자들에게 필요한 책들을 두루 유통시킨 탁월한 책거간꾼이었는데 그에 관련된 기록들 중에 눈에 뜨이는 것은 도무지 나이를 종잡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정약용의 기록에 따르면 그를 처음 보았을 때 대략 삼십대 후반의 나이로 보였는데 몇 십년 지난 다음에 보았을 때에도 역시 삼십 대 후반으로 보였다고 한다. 게다가 그에 관한 기록들이 남아있는 걸 연대기에 따라 늘어놓으면 적어도 백살 이상은 살았던 거 같다.

그때 사람들 눈에도 그렇게 나이를 알 수없고 외모가 늙지 않는 조신선이란 사람이 신기했던 모양이다. 조신선을 언급한 거의 모든 기록에 빠지지 않는 것이 바로 그의 나이 이야기라고 한다.

이렇듯 유별났던 책거간꾼 조신선의 존재를 별그대의 작가들은 알고 있었던 것일까? 도민준의 비밀서가에 가득한 장대한 장서들은 아무래도 내겐 조신선의 생애와 겹쳐 보인다.

뭐, 그렇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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