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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연대기 - 현대 물리학이 말하는 시간의 모든 것
애덤 프랭크 지음, 고은주 옮김 / 에이도스 / 2015년 1월
평점 :
품절


유독 대중교통을 이용하기 싫어하는 친구가 있었다. 이유를 물었더니 기다리기 싫어서란다. ‘기다림을 싫어하는 사람은 인간의 한 유형으로 나눌 수 있을 정도로 많아보인다. 수많은 사람들이 기다림을 싫어한다.

인간관계라든지 인생에서 수많은 시기에 찾아오는 기다림이 주는 것과는 달리, 대중교통의 기다림은 끝이 있다. 전자에서는 기다림 자체가 싫다기보다, 기다려봤자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아 이 기다림이 무용지물되지는 않을까하는 불안함이 크다. 그에 반해 대중교통을 이용하며 생기는 기다림은 몇분 후에 끝날 것임을 아는데 왜 이리 진절머리 나게 싫은 것일까? 답은 시간의 성질에 있다.

 

 ▲기다리기 싫어.

 

현대 사회에서 시간은 나의 관리의 영역안에 들어서며 이는 곧 효율성과 관련된다. 현대인의 착각 중 꽤 큰 것이 시간을 스스로 관리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사는 것이다. 하지만 대중교통을 기다리는 그 시간만큼은 나의 관리 영역에 들어가지 않는다. 어쩔수 없이, 하염없이, 무조건 나는 기다려야 한다. 다른 이들과 똑같이, 플랫폼에 서서 시간을 때우며 말이다. 효율성 없이 말이다. 애덤 프랭크의 <시간 연대기>는 이러한 시간에 대한 역사서이자 철학서이다.

 

책의 삼분지 이는 시간과 물리학, 우주론에 대한 이론적 설명이지만 시간에 대한 인문학적, 철학적 성과를 설명하는 위주로 훑어도 의미있다. 물리학과 과학에 흥미가 없는 독자라면 책의 꽤 가치있는 많은 부분을 뛰어넘어야 할 것이기에, 저자는 미리 흥미를 잃지말라며 용기를 북돋운다.

 

고등학교 과학시간을 떠올리면서 자신에게는 물리학을 이해하는 직관이 전혀 없다고 생각할 사람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심리학자 엘리자벳 스펠크는 달리 본다. 스펠크는 아주 어린 아이들조차도 물리적 사물의 움직임을 분명하게 이해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아이들의 삶이 다른 사람들과의 상호작용을 중심으로 만들어지고 아이들은 사람과 사람 이외의 생물, 무생물의 속성들을 분명하게 구분한다. 가장 중요한 건 아이들이 고체, 중력, 관성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점이다. 진화론적 관점에서 보면, 직관 물리학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38p)

 

이처럼 어떠한 고정관념이나 독자들이 쉽게 할 법한 생각을 물리학과 우주론으로 설명하는 방식은 책 전반에 흐른다. 보통 시간에 관한 이야기를 인문학이나 철학으로 풀 때 놓칠 수 있는 부분을 색다르게 풀어낸 셈이다. 물리학에 기본적인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물리학의 전반적 내용을 정리할 수 있고, 인문학적 성찰까지 짚어볼 수 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시간에 대한 현대사회의 통념을 보자. 현대 사회에서 시간이 곧 성과임을 주창하는 분석은 이미 제러미 리프킨이 언급했다.

 

제러미 리프킨은 자신의 책 <시간 전쟁>에서 이렇게 썼다. 효율성이 도입되면서, 현대의 시간 운영 방식이 완성되었다. 효율성은 중요한 가치인 동시에 방법이다. 가치 측면에서 효율성은 모든 인간이 시간을 어떻게 이용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사회적 기준이 된다. 방법 측면에서 효율성은 물질적 진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효율성이 시간을 사용하는 최선의 방법임을 알려준다. (467p)

 

 

▲<시간전쟁>은 한국판으로 없는 듯. 외국 도서도 품절.    

 

시간은 내 안에 있고 완벽히 통제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완전히 반대다. 지금 우리가 시간이라고 생각하는 개념, 그 개념은 그렇게 오래된 것도 아니고 인간이 시간을 통제한 날들보다, 시간이 인간을 통제한 역사가 더 길다.

 

지금같이 시계라는 개념이 널리 퍼진 것은 거의 14세기가 지났을 무렵이다. 책에 따르면 1393년 무렵에 유럽의 많은 도시들에 최신식 장치가 설치되었다고 한다.(120p) 지금과는 달리, 시계가 생기면서 권력은 사람들은 관리할 수 있었고 사람들은 마치 시계에 따라 움직이는 노예처럼 움직였다.

 

종탑이 경제적 정치적 활력의 직접적인 상징으로 변모한 것 역시 물질이 개입하며 제도와 서로 얽힌 것을 보여준다. 14세기에 밀라노의 갈바노 피아모(Galvano Fiammo)는 이렇게 썼다. “종을 자기 마음대로 울릴 수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도시를 쉽게 지배할 수 있다.” 1179년 프랑스 에스댕에서 지방 권력에 대항해 반란에 가담한 소작농들을 불러 모으기 위해 종을 울렸을 때, 플랑드르의 백작은 그에 대한 응징으로 종탑을 무너뜨렸다. 종은 시간을 지배했고, 시간은 새로운 도시경영을 좌지우지했다. 126p

 

이러한 경향은 영국의 산업혁명을 맞아 더욱 심해졌다. 산업혁명기에는 곧 시간이 돈으로 환산되던 시기이기에, 노동자들이 허투루 보내는 시간은 곧 자본가들의 돈으로 흘러나간 것이다. 그렇기에 영국 혁명기 당시에 시간 감시관이라는 직업이 있었던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현대에는 사라졌지만 종종 이 시간 감시관이 현대인 스스로에게 이미 내재되어 있어서 필요없어진 직업은 아닐까라는 생각도 해본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시간을 활용한 삶, 즉 자기계발의 시초가 이미 기원전 7세기에 존재했다는 것이다.

 

아직 현존하는 고대 그리스의 많은 역사기록과 주석, 극장 역시 그리스 문화가 시간의 질서를 잡는 섬세한 감각을 가진 문화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시간의 질서는 기원전 7세기 농민 시인 헤시오도스가 쓴 <노동의 나날>에 가장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헤시오도스의 책은 농경기법과 지침이 반씩 섞여있다.

 

앤서니 애브니에 따르면, <노동의 나날>은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산악지역에서 농사를 지을 때 질서 있고 체계적인 생활을 영위하는 법을 노래하는 시를 담은 고대의 자기계발 서적이나 다름없다. (...)헤시오도스의 시는 우리에게 힘들지만 정직한 노동을 하는 것만이 철의 시대를 사는 그리스인들이 스스로를 구언하고 세상의 완전한 명망을 미리 막을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이야기한다. 80p

 

 

 

기원전 7세기, 혹은 시계가 막 생겨난 유럽의 14세기, 시간시간이 돈이 되었던 18세기의 영국, 그리고 시간에 대한 물리학이 고도로 발전된 지금에 이르기 까지. 평범한 인간들의 삶은 무엇이 달라졌을까. 시간에 따라 노예처럼 살고, 시간에 의해 지배받는 삶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저 달라진 것이라고는 이전의 인간들과는 달리 현대인은 스스로 시간을 관리하고 있다고 착각하며 부려진다는 점 뿐이다.

수백년이 지난 후 시간을 설명하는 물리학과 우주이론들은 발달할 것이다. 그때마다 문화는 변할 것이다. “문화는 문화적 제도를 뒷방침 하기 위해서, 또 문화를 조직하는 원리를 뒷받침하기 위해서 항상 우주론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477p)라는 저자의 마지막 말처럼 말이다. 하지만 시간에 의해 노예처럼 부려지는 인간의 삶의 본질적 양상은 달라지지 않을 것 같다. 더 큰 착각으로 더 어리석어지지 않을 것만을 기대할 뿐이다.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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