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일간의 세계일주 쥘 베른 베스트 컬렉션
쥘 베른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림원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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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동용 도서로 오해받는 대표적인 고전이다. 우리는 제목 정도는 익히 알고 있지만 정작 읽어본 기억은 희미하다. 어쩌면 영화로 먼저 만났을지도 모른다.

이야기의 얼개는 단순하다. 멋진 신사 포그, 약간 우둔하지만 충직한 하인 파스파르투, 우연처럼 등장하는 여인 아우다, 그리고 그들을 뒤쫓으며 위기를 만들어내는 무능한 경찰 픽스. 이 네 인물이 위기와 모험을 거쳐 우여곡절 끝에 런던으로 돌아온다. 세계일주는 당연히 80일 만에 성공한다. 서쪽에서 동쪽으로 여행하도록 하여 마지막 하루를 만들어내는 반전은 작가의 풍부한 지식과 계산에서 나온 장치다. 물론 치밀한 포그라면 이런 착각을 했을 리 없지만, 독자를 위한 장치라고 이해하는 편이 자연스럽다.

포그는 런던 중심가 상류층 사교모임인 개혁클럽의 회원이다. 돈도 있고 체면을 명예처럼 여기는 영국 신사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1872년 가을, 이 클럽에서 사소한 논쟁이 벌어진다. 영국은행에서 발생한 5만5천 파운드 도난 사건이 계기가 됐다. 도둑이 이미 먼 나라로 도망쳤을 것이라는 의견과, 이제는 교통이 발달해 오히려 잡기 쉬워졌다는 의견이 맞섰다.

“아무리 세계일주라 해도 세 달은 걸리겠지.”
누군가 이렇게 말하자 한 신사가 정색하며 대답한다.
“80일이면 됩니다.”
이 한마디로 포그의 세계일주가 시작된다.
“원한다면 내기를 하죠. 2만 파운드를 걸겠습니다.”
출발은 언제냐는 질문에 그는 말한다.
“오늘 당장 떠나죠.”

포그는 숫자와 시간에 집착하는 인물이다. 하루 일과는 분 단위로 정해져 있고, 물의 온도도 일정한 수치만 사용한다. 심지어 클럽까지 걸어가는 발걸음 수까지 계산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늘 같은 장소만 오가는 인물처럼 보인다. 그러나 머릿속에는 세계지도가 들어 있다. 세상을 떠돌아본 적은 없어도 지리에는 누구보다 정통한 괴짜다.

포그의 세계일주가 가능했던 이유는 소설 속 상상 때문만은 아니다. 그보다 2~3년 전 세계 곳곳에서 거대한 교통 인프라가 완성됐다. 1869년 미국 대륙 횡단철도, 같은 해 개통된 수에즈 운하, 1870년 완공된 인도 반도 철도다. 쥘 베른은 이 새로운 교통망을 이용해 런던에서 출발해 서쪽에서 동쪽으로 돌아오는 80일 여행을 설계했다. 소설이면서도 철저히 현실 위에 세운 상상이다.

이 소설은 공간을 가로지르는 여행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시간을 계산하는 이야기다. 포그가 집착하는 대상도 거리보다 시간이다. 마지막 반전, 하루를 앞서가는 장치 역시 지구 자전과 시간 계산에서 비롯된다. 세상이 좁아졌다는 말보다, 세상이 빨라졌다는 말이 더 정확할지도 모른다.

프랑스 작가 쥘 베른이 왜 영국인을 주인공으로 삼았는지도 흥미로운 대목이다. 당시 세계 질서와 관련이 있다. 19세기 후반 세계의 교통과 금융의 중심은 런던이었다. 해운과 철도, 무역 네트워크가 이 도시를 중심으로 움직였다. 세계일주라는 설정을 현실적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영국 신사가 가장 자연스러운 인물이었을 것이다.

소설이 쓰인 시기 영국은 지구 곳곳에 식민지와 항로를 가진 제국이었다. 인도, 홍콩, 요코하마, 미국 등 주요 경로가 모두 영국의 교통망과 연결되어 있었다. 영국인을 주인공으로 두면 이런 세계 네트워크를 자연스럽게 이용할 수 있다. 결국 이 소설은 단순한 모험 이야기가 아니라 19세기 영국 중심의 세계 시스템 위에서 작동하는 이야기다. 프랑스 작가가 영국 신사를 주인공으로 선택한 것은 우연이 아니라 꽤 계산된 선택이었다.

쥘 베른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강력한 팬덤을 가진 작가다. 미국과 유럽에는 그의 세계를 추종하는 ‘베르니안’이 있다. 베르니안은 쥘 베른의 이름에서 나온 말로,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미지의 세계가 실제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을 가리킨다. 지구 내부 세계를 과학적으로 탐구하거나 소설 속 장소를 찾아 탐험을 떠나는 이도 있다.

이 책에는 여러 장점이 있지만 읽는 내내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지점도 있다. 아시아 여러 나라를 미개한 지역처럼 묘사하는 부분이다. 생활 방식이 다르다는 이유로 ‘미개한 민족’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당시 서양인이 가진 편견이 그대로 드러난다. 물론 이런 한계가 있다고 해서 작품의 가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고전을 읽을 때 우리가 함께 바라봐야 할 그림자이기도 하다.

쥘 베른의 작품 제목을 나열해 보면 그는 마치 미래에서 온 사람처럼 느껴진다. 순수한 상상만으로 이런 이야기를 만들었다는 사실이 놀랍다. 그의 작품을 모두 읽어보고 싶지만 이미 절판된 책도 많다. 더 아쉬운 점은 쥘 베른의 작품이 여전히 아동용 공상과학 소설 정도로 취급된다는 현실이다.

번역자 김석희 선생의 말은 이런 현실을 정확히 짚는다.

“고전, 고전하는데 재미없는 고전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재미있는 것을 읽게 만들어야지요. 서울대에서 추천하는 고전 목록을 보면 기가 차요. 선생들이 자기 전공만 추천하지요. 제가 번역한 『해저 2만 리』 같은 작품은 대학에서 가르치지도 않습니다. 그걸 아동도서라고 하니 천만의 말씀이지요.”

대학에서 밥벌이하는 사람이 어떤 책을 고전이라 부르는지 생각하게 된다. 동시에 고전은 결국 재미있어야 한다는 말에도 공감하게 된다.
재미없는 고전은 고전이 아니라 단지 오래된 책일 뿐이다.

—80일간의 세계일주, 쥘 베른, 김석희 옮김, 열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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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그림 - 세계 미술사의 획기적인 그림 51
박영택 지음 / 마음산책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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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눈은 항상 무언가를 찾아 헤맨다. 호기심 많고 지칠 줄 모른다. 그림을 본다는 것은 그림 안에서 해독하고 느껴지고 인지될 수 있는 대상, 얼룩, 흔적을 찾는 행위와 다름없다. - P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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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그림 - 세계 미술사의 획기적인 그림 51
박영택 지음 / 마음산책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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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다는 것은 사유하는 것이다.

미술평론가인 저자가 서양 회화 작품 중 51개를 뽑았다. 왜 51개 작품, 51명의 작가일까? 아직도 이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그림을 읽어주는 방식으로 전개한다. 미술관에서 도슨트가 작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미술비평가적 시각’을 유지한다. 장점이다. 그림에 대해 미처 보지 못하는, 설명을 듣지 않으면 알기 어려운 부분을.

책에서 말하려는 내용과 무관하게 책을 보며 생기는 의구심, 다시 이 책을 보았을 때 생각할 거리에 대해 적었다. 저자의 방식과 같이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일 뿐 책의 내용을 오롯이 전달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 )의 내용은 글에 대한 생각이다.



회화란 세계의 피부에 매달리는 간절한 일이다.

(이해하기 어려운 문장이다. ‘세계의 피부’라는 게 뭘까? 몇 번이고 곱씹어도 잘 모르겠다. 모른다고 큰일이 나는 것도 아니고 …  저자의 다른 설명을 읽어도 ‘탁’하고 들어오질 않는다.

회화란 세계의 피부에 매달리는 간절한 일이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지닌 얇은 피부의 표면을 회처럼 떠내는 일이다. 그러니까 작가는 특정 공간의 피부를 그렸는데 그 피부는 죽은, 사물화 된 벽만은 아니다. 분명 건축물은 생명체는 아니지만 그 말없는 공간에 생명력을 불어넣어 주는 것은 빛이고 공기의 흐름이고 온도와 바람이다. 그 양과 농도의 정도에 따라 공간은 다채로운 표정으로 환생한다. 그것이 공간으로 스며들고 안개처럼 퍼져나가면서 모든 표면을 애무하는 것이다.)

무엇을 그리는가보다, 어떻게 그리는가가 문제다. 최종 생산물인 작품을 결정짓는 것은 언제나 ‘어떻게’ 그리는 가이다.  —로버트 라이먼

(책에서 인용한 이유는 아마도 … 그림을 본다는 것은 작가의 의도도 중요하지만 보는 이가 어떻게 바라보는가가 더 중요한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작가의 손을 떠난 그림은 이미 작가의 것이 아니다. 그것을 느끼고 이해하고 바라보는 나의 것임에 틀림없다.)

이 책은 서양미술사를 기술하려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서양미술사에서 회화만을 추리고 그중에서 최고의 회화 작품을 선별해보고 싶었다. 나만의 서양 회화 수집 목록을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최고’라는 말에 딴지를 걸고 싶다. 뭐가 최고인가? 생각은 제각각 다르겠지만 ‘나만의 회화 수집 목록’이라는 말에 바로 수긍했다.)

여기 선정된 그림은 철저하게 나 자신이 매혹된 회화작품이다. 그렇게 매료된 작품의 정체를 알고 싶어서, 회화가 무엇인지 엿보고 싶어서 그것을 글로 썼다.

(의구심을 가지고 되묻는 독자를 위해 다시 말한다. “여기 선정한 그림은 철저하게 나 자신이 매혹된 회화작품이다.” 의구심 보다 선택한 그림을 쫓아가는 게 좋은 듯하다.)

작가 51명의 대표 작품 한 점씩을 선정했고 작품이 제작 순서에 따라 배열했다. 독자가 서양 회화가 어떤 흐름 속에서 진행되어 왔는지, 그리고 각 작품이 어떻게 서로 영향을 주면서 이어져왔는지를 입체적으로 인지할 수 있기를 원했다. 결국 서양미술사에서 회화란 무엇이었는지, 무엇이 되고자 했는지를 해명하고자 했다.

(저자의 의도와 다르게 읽힐 것이다. 순차적으로 읽기를 원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순차적으로 영향을 주었을 리 없었을 것이라 믿는다.)



작가마다 회화에 대해 지녔던 독창적인 관점과 해석, 그리고 이를 실현한 독특한 방법론에 주목하고자 했다. 작가의 전기적인 사항이나 에피소드, 관련 활동 등은 가능한 한 배제했다. … 미술비평적인 시각을 유지하면서 글을 써 내려갔다.

(그림이 주는 의미와 분석하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기존 그림을 차용한 책과 다름을 보여준다. 공감 가는 부분이다. 미술평론가, 큐레이터의 관점에서 아쉬웠던 점에서 보여주고자 한 것이다. 하지만 모든 책이 그런 것은 아니나, 많은 그림을 보여주는 책이 그림보다 그림을 차용하고 있다는 점에는 공감한다.)

시중에는 서양미술에 관한 상당한 양의 책이 쏟아져 나와 있다. 미술사가나 평론가뿐만 아니라 인문학자, 철학자, 미술기자, 도슨트 내지 열정적으로 그림을 사랑하는 이들이 저마다 그림을 고르고 이에 대해 글을 쓰고 책을 내고 있다.

그러나 그림 자체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정보를 전달하는 해설서 내지 그림을 빌린 문학적인 에세이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다는 생각이다. 그림을 보는 안목보다는 이야기가 될 만한 것을 가져다가 다소 장황하게 서술하는 식이다. 작가의 삶과 그의 행적, 에피소드, 그리고 익히 알려진 상식을 반복하면서 결론적으로 기존의 사실을 계속해서 재생산하는 경우다. 한편 당대의 철학자나 인문학자가 그림을 통해 자신의 사유를 소개하는 경우 제한된 작가, 작품만이 반복해서 등장하고 아울러 작품 자체의 질에 대한 논의보다는 인문학적인 의미만이 도해한다는 아쉬움이 있었다. 미술에 대한 사유의 폭을 넓히고 작품 해석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가능하게 해주는 반면 특정 논리의 체계 안에서 한정된 그림만을 읽게 한다는 생각이 이 책을 쓰게 한 또 다른 동기다.

(기존 책과 어떻게 다른지 설명한다. 지금껏 보아 온 많은 미술책일 것이다. 그림을 오롯이 그림으로 보여주지 않고 그림을 통해 다른 의미를 부여하는, 그림이 주체가 아니라 보조제로 쓰인 많은 책.)

우리 눈은 항상 무언가를 찾아 헤맨다. 호기심 많고 지칠 줄 모른다. 그림을 본다는 것은 그림 안에서 해독하고 느껴지고 인지될 수 있는 대상, 얼룩, 흔적을 찾는 행위와 다름없다.

(그림을 본다는 것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지적 허세를 충족하기도 하지만 그 안에서 해독하고 해석해서 ‘대상, 얼룩, 흔적을 찾는 행위’이다.)

(그래서 결국 그림은 …) 그림은 구상이자 추상이면서 환상이고, 실재이기도 하며, 동시에 그 모든 것으로부터 멀리 달아난다.

본다는 것은 사유하는 것이다. 예술의 역할은 인간으로 하여금 보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며, 예술에서 보는 것이란 직관을 의미한다. 이 직관은 지적 지식이 아니라 대상의 내부로 뚫고 들어가 대상이 가진 내성과 합일하는 공감이다. 선입견이나 학습에 의해 내재화된 시선에서 벗어난 안목이다. 일정한 조망의 거리를 확보했을 때 인간은 비로소 사유하고 깨닫고 인식한다.

(그림도 글과 마찬가지로 사유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회화란 단순하게 말해 평면에 환영을 주는 장치다. 회화의 개념은 매 시기마다 조금씩 다르게 해석되고 당대의 테크놀로지와 이미지 사이의 관계 속에서 새로운 삶을 부여받는다.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을 거치면서 회화는 사실상 무력해졌다. 구상과 추상회화란 이미 과거의 것이 되었다. 그러나 회화는 죽지 않고 매번 새롭게, 다르게 출현해서 다시 살아날, 그리고 죽어갈 기회를 엿본다.

(그림을 설명하는 책을 읽어야 할 이유이다. 구상과 추상회화가 이미 과거의 것이라는 것은 경계가 없다는 것이다. 매번 새롭게, 다르게 출현해서 다시 살아난다. 보여주는 형태만 바뀐 것이다.)

인간은 항상 자기를 중심으로 사물과 세계를 본다. 그러나 사물은 이미 나와 무관하게 그 자리에 존재하고 있다. 우리가 사물이라 부르는 것은 우리의 선입견에 의해 지배되고 있고, 폭력을 수반하는 종교와 도덕법칙에 의해 지배받고 있다. 이런 사물을 지워내고 원초적인 사물의 모습을 홀연 보여주는 것이 바로 예술의 영역에서 만나는 사물이다.

(선입견을 버리고 사물을 바라보자. 늘 편견에 자유롭지 못한 게 인간이다. 선입견은 편견이 된다. 편견은 사물과 세계를 왜곡하여 보이게 한다.)

그림 감상이 화가가 그려놓은 구도와 색상을 보는 것에서 멈춘다면 화가와 감상자, 작품과 감상자 사이에 깊은 교감이 이루어지기 어렵다. 훌륭한 그림이란 말을 거는 그림일 것이다. 그림은 분명 우리에게 어떤 말을 하고 있으며, 그림의 소리를 들을 수 있을 때 진정 살아 있는 그림이 된다.

(글을 읽는 것과 같다. 행간을 읽어야 한다. 그림을 본다는 건 작품이 말하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 듣는다는 것은 이해하고 공감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진정한 그림이다. 살아있는.)

—『오직, 그림』, 박영택, 마음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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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 배우기의 기술 - 딱 필요한 만큼만 배워서 바로 써먹는 실행의 법칙
팻 플린 지음, 김지혜 옮김 / 어크로스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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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은 가장 우아한 도피다, 그냥 시작하라

지금 우리의 문제를 ‘아는 것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알고 있음에도 움직이지 못하게 만드는 우리의 사고방식에서 찾는다. 배우는 행위가 더 나은 선택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불안을 잠시 미루는 은신처가 될 때 우리는 가장 성실하게 아무것도 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물속으로 뛰어든 사람만이 수영을 배운다

‘무언가를 안다’는 느낌은 짜릿하다 하지만 실제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도 유용할까?

‘무언가를 시작하기 전에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는 생각을 내려놓고, 작은 진전과 끊임없는 개선 그리고 과정에서 배우려는 태도를 받아들이도록 우리를 이끈다.

지금 이루고 싶은 목표를 분명히 한 뒤, 그다음 행동을 가능하게 할 만큼만 배우고 곧바로 움직이는 방식이다. 배움과 실행 사이의 간격을 최대한 줄이는 것이 핵심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린 러닝은 단순한 전략이나 기법의 집합이 아니다. 그것은 학습과 성장을 바라보는 근본적으로 다른 접근법이다. ‘무언가를 시작하기 전에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는 생각을 내려놓고, 작은 진전과 끊임없는 개선 그리고 과정에서 배우려는 태도를 받아들이도록 우리를 이끈다.

아직 부족하다고 생각하지 마라. 이미 시작할 만큼 충분히 알고 있다.

메시지는 분명하다. 더 이상 완벽한 준비를 위해 시간을 낭비하지 마라. ‘만물박사’가 되겠다는 환상에서 벗어나, 배움을 멈추고 성취를 시작할 때다. 당신은 이미 시작할 만큼 충분히 알고 있다. 만약 당신이 또 다른 지식과 영감을 찾아 이 책을 집어 들었다면, 이 책은 당신의 마지막 ‘학습’이 될 것이다.

그래도 시작이 어렵다면
모호한 ‘영감’을 구체적 ‘결과’로 만드는
그만 배우기의 기술 8가지를 익혀라

1.호기심에도 가지치기가 필요하다
2.배움은 가장 우아한 도피다, 그냥 시작하라
3.똑똑한 고립에서 벗어나라
4.적시에 필요한 정보만 배워라
5.자발적 강제 장치를 만들어라
6.맹목적 질주를 멈추고 방향을 점검하라
7.작게 나누어 익히고 크게 도약하라
8.배웠다면 가르치고, 받았다면 나누라

더 나아지는 건 충분히 가능하다.
하지만 그 과정에는 집중된 호기심과 끈기가 필요하다.

배움은 가장 우아한 도피다.
그리고 그 도피는 실행을 미루는 가장 세련된 핑계가 된다.
그러니 그냥 시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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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이든 공화당이든 미국 대통령은 평화를 말한다. 그러나 미국의 전쟁 기계는 멈춘 적이 없다.

 

1961년 1월 17일, 퇴임을 사흘 앞둔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는 미국 민주주의가 직면한 위험을 경고했다. 그는 ‘군산복합체’라는 표현을 남겼다. 군부, 군수업체, 의회, 과학·공학 집단이 서로 기대며 거대한 영향력을 형성하는 구조다. 의도하지 않더라도 이 집단이 부당한 권력을 획득할 수 있으며, 부적절한 권력이 재앙적으로 성장할 잠재력이 이미 존재한다고 그는 말했다.

군비 확충은 돈만 들어가는 게 아닙니다. 노동자의 땀과 과학자의 뛰어난 두뇌, 어린이의 희망도 소모됩니다.

 

아이젠하워의 경고 이후 미국의 군사 예산은 세계 최대 규모로 팽창했다. 의회는 국방부 요구를 넘어서는 예산을 승인했고, 무기 산업은 정치권을 넘어 문화와 학계까지 스며들었다. 전쟁은 전장에만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산업이고 고용이며 지역 경제다. ‘전쟁 기계’라는 표현은 비유가 아니라 구조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정권은 바뀌었지만 구조는 유지되었다.

 

존 F. 케네디는 대선 과정에서 대륙간탄도미사일 생산 확대와 일자리 창출을 약속했다. 국방비는 늘어났고 베트남 주둔 미군 군사 고문단은 700명에서 1만 6천 명 이상으로 증가했다. 미국 개입 확대의 씨앗은 이때 뿌려졌다. 리처드 닉슨은 직접 병력 파병을 줄이는 대신 무기 판매 확대를 선택했다. 분쟁 지역에서는 현지 세력이 싸우고 미국은 무기를 공급하는 구조가 자리 잡았다. 지미 카터는 인권을 말하며 무기 판매 축소를 약속했지만 집권 후 중동 군사 개입의 기반을 구축했다. 필요하다면 군사력을 사용하겠다고 선언했고 이를 위해 신속배치군을 창설했다. 오늘날 중동 미군 기지의 토대가 이때 형성되었다.

 

로널드 레이건은 ‘힘을 통한 평화’를 내세워 대규모 군비 증강을 단행했다. 1981년 약 1,340억 달러 수준이던 국방 예산은 1980년대 중반 2,300억 달러를 넘어섰다. 냉전이 끝나면 평화가 올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지만 현실은 달랐다. 조지 H. W. 부시는 1991년 걸프전을 주도했고 첨단 무기 체계가 대규모로 사용되었다. 냉전 종식은 군사 개입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었다. 빌 클린턴은 방위산업 합병을 장려했고 51개에 달하던 방산업체는 5개 수준으로 재편되었다. 군수 산업은 더욱 거대해졌고 권력은 더욱 집중되었다.

 

2001년 9·11 이후 조지 W. 부시는 ‘테러와의 전쟁’을 선언했다. 아프가니스탄 침공이 시작되었고 2003년 이라크 전쟁이 개시되었다. 대량살상무기라는 명분은 거짓으로 드러났지만 전쟁은 멈추지 않았다. 전쟁은 장기화되었고 해외 파병은 상시화 되었다. 버락 오바마는 “어리석은 전쟁”에 반대한다고 말했지만 아프가니스탄 병력을 증강했고 드론 공격을 확대했다. 노벨 평화상 수상자였지만 두 개의 전쟁을 지휘했다. 도널드 트럼프는 끝없는 전쟁을 끝내겠다고 약속했지만 집권 후 군사 예산 확대 계획을 발표했다. 조 바이든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했지만 전쟁 구조 자체를 끝내지는 않았다. 가자지구 전쟁을 수행하는 이스라엘에 무기 지원을 확대했고 우크라이나 전쟁을 지원했다. 군수업체와 노동자를 “민주주의의 병기창”이라고 불렀다.

 

이들에게 미국은 절대선이었다. 미국적 가치는 늘 옳았고 미국의 제도는 우월하다고 믿었다.

“자유가 위기에 처했을 때 이를 수호할 역할을 부여받은 세대는 극소수였습니다. 저는 그 책임을 환영합니다.”

 

케네디의 취임 연설에 담긴 이 문장은 미국이 세계 질서를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을 드러낸다. 그 사명감은 미국을 패권 국가로 만들었지만 동시에 수많은 전쟁으로 이끌었다. 여기에 또 하나의 기억이 작동한다. ‘뮌헨의 교훈’이다. 1938년 영국 총리 네빌 체임벌린은 독일의 체코 일부 점령을 묵인하는 협정을 맺었다. 그러나 1년도 지나지 않아 독일은 체코 전체를 점령하고 폴란드를 침공했다. 이 사건은 침략에는 무력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교훈으로 남았다.

 

미국 대통령은 “제2의 뮌헨을 만들지 않겠다”는 인식 속에서 세계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현실은 훨씬 복잡했다. 제국주의에 맞서 싸운 호찌민은 히틀러가 아니었고 베트남은 미국 안보에 나치만큼 위협적이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 깊이 빠져들었다. 전쟁의 이유를 역사적 기억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군사 예산은 지역 경제와 연결되어 있다. 군수 공장은 일자리다. 국회의원은 지역구 공장을 포기하기 어렵다. 대통령은 안보에 약하다는 비판을 감수하기 어렵다. 정치와 경제가 얽히면서 전쟁은 하나의 산업이 된다. 수사는 달라지고 명분도 바뀐다. 인권, 자유, 안보, 질서, 민주주의. 그러나 군사 예산은 줄어들지 않는다.

 

그래서 민주당이든 공화당이든 미국 대통령은 평화를 말한다. 그리고 전쟁 예산에 서명한다. 아이젠하워의 질문은 여전히 남아 있다. 민주주의가 군산복합체를 통제하는가, 아니면 군산복합체가 민주주의를 길들이는가.

 

대통령은 바뀐다. 그러나 전쟁 기계는 멈추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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