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어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사상선집
육가 지음, 장현근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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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가 정치 이념이 통치이데올로기로 자리 잡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책 《신어》. 도덕적 순수주의를 중시하여 공자, 맹자 외에는 이단으로 여겨 순자와 그를 따르는 육가를 주류 유학자는 철저히 배척하였다. 순수 유학과 더불어 ‘유학 현실주의’ 또한 유가사상의 또 다른 한 축이다. 역자는 이를 “중국이 저 거대한 규모로 통합될 수 있었던 이유 가운데 하나는 한나라 때 유가를 중심으로 사상이 통일되었기 때문이다. 전국시대 말기에 나온 《순자》 등은 이러한 학문적 통합의 전형을 보여주는 책이며, 육가의 《신어》도 그 연장선에 있다.”라고 한다.

육가가 《신어》를 쓴 유래는 다음과 같다. 유방은 “나를 위해 진이 천하를 잃게 된 까닭과 내가 천하를 얻게 된 까닭, 그리고 예로부터의 국가적 성공과 실패에 대하여 글을 써주시오.”라고 말했다. “육가는 국가 존망의 증험에 대하여 거칠게 서술하여 모두 12편을 썼다. 매 1편씩 상주할 때마다 고조가 칭찬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며, 좌우 신하는 만세를 불렀는데 그 책 이름을 《신어》라 부른다.”

도를 품은 사람은 그에 맞는 환경이 갖추어져야 하고, 박옥을 가진 사람은 기술자의 가공을 기다려야 합니다. 도는 지혜로운 사람을 만나야 제대로 발휘되며, 좋은 말은 훌륭한 말몰이꾼을 만나야 능력을 발휘하며, 현자는 성인을 만나야 제대로 쓰이며, 변론은 지혜로운 사람을 만나야 제대로 소통되며, 경서는 깨친 사람을 만나야 제대로 전파되며, 사리는 분별력 있는 사람을 만나야 제대로 밝혀집니다. 따라서 일을 관리하는 사람은 그에 맞는 규칙을 지켜야 하고, 약을 먹는 사람은 좋은 처방을 따라야 합니다. 좋은 책이 꼭 공자의 문하에서만 나오는 것은 아니며, 좋은 약이 꼭 편자의 처방에서만 나오는 게 아닙니다. 도에 합치하는 것이면 모두 좋으며, 모범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세상의 변화에 따라 잘 저울질하여 권력을 행사하기만 하면 됩니다. _<술사 術事>, 42쪽

성자를 지팡이로 삼으면 제帝가 되고, 현자를 지팡이로 삼으면 왕王이 되고, 인자를 지팡이로 삼으면 패覇가 되고, 의로운 사람을 지팡이로 삼으면 강자强者가 됩니다. 중상모략을 일삼는 사람을 지팡이로 삼았다간 나라가 멸망하고, 도적을 지팡이로 삼았다간 목숨을 잃게 됩니다. _<보정 輔政>, 46쪽

일하는데 어떤 사람은 매우 잘하는데도 잘한다는 칭찬을 받지 못하고, 어떤 사람은 잘못하는데도 잘한다고 칭송되는 것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그것을 관찰하는 사람이 잘못한 데다 논평하는 사람이 그릇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행동이 세속의 요구에 부합되거나, 말이 세인의 귀에 순응하는 것은 모두 윗사람의 뜻에 영합하기 때문이요, 윗사람의 취지에 순종하기 때문입니다. _<변혹 辨惑>, 58쪽

세상이 쇠락해가고 도덕이 상실된 상황은 하늘이 그렇게 만든 게 아니라 군주 자신이 그런 행위를 했기 때문에 얻어진 결과입니다. 사악한 정치는 사악한 기운을 낳으며, 사악한 기운은 재앙과 이변을 낳습니다. _<명계 明誡>, 112쪽

《주역》에 “가옥이 튼실하고 그 위에 덮개를 눌렀으니, 지게문을 들여다보려 해도 고요하여 아무도 없는 듯하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 없다는 말은 그 어떤 사람도 없다는 말이 아니라, 그것을 다스릴 사람이 성현이 없다는 말입니다. _<사무 思務>, 123쪽

선한 사람은 반드시 그런 선량한 군주가 있기에 몰려드는 것이며, 악한 사람은 반드시 그런 불량한 까닭이 있기에 다가오는 것입니다. 선과 악은 공연히 지어지지 않으며, 화와 복은 제멋대로 생겨나지 않습니다. 오직 군주의 마음이 향한 바와 군주의 의지가 실천하는 바에 따라 결정될 따름입니다. _<사무 思務>, 124쪽

역자는 짧은 이책을 읽어야 할 필요성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신어 新語》는 도덕의 이상 국가를 꿈꾼 선진 유가의 정치 이념이 제국의 정치안정이라는 통치이데올로기로 전환해 가는 기초를 다져준 매우 중요한 책이다. 그럼에도 역사적으로 중시되지 않았던 것은 내용상 여러 사상이 융합되어 있거나 통합적으로 논의를 전개하고 있기 때문인 듯하다. 특히 맹자를 추종한 송나라 이후 성리학자가 도덕지상이란 순수성만을 강조해 순자 등 유가내의 현실주의자를 비판하면서 《순자》, 《신어》 등은 주류 유학에서 완전히 배척되었다. 하지만 순자, 육가로 이어지는 유학 현실주의자야말로 공자로부터 비롯된 유가사상의 또 다른 한 축이었음을 상기하고 균형 잡힌 시각에서 이 책을 읽을 필요가 있다.

짧은 책이지만 꼭 읽기를 권한다. 군주의 도리를 말하지만 리더의 도리와 통한다. 지도자가 없는 이 땅은 육가의 12편을 받아들인 유방의 유연함이 필요하다. 모든 진리는 시간과 공간을 아우른다. “아름다운 것은 꼭 같은 색깔이 아니더라도 모두 아름다우며, 추한 것은 꼭 같은 형상이 아니더라도 모두 추한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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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미술관에 다녀왔습니다 - 미술 전문기자의 유럽 미술관 그랜드투어
김슬기 지음 / 마음산책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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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을 다루지만, 읽고 나면 남는 건 미술이 아니라 ‘시간의 격차’다. 런던에서의 1년, 그리고 유럽을 가로지르는 미술관 동선. 이 여정은 아름답지만 동시에 잔인하다. 누구에게나 허락되지 않는 시간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미술관을 천천히 걷는다. 한 작품 앞에서 멈추고, 다시 걷고, 또 멈춘다. 이 반복은 단순한 관람 방식이 아니라 어떤 조건의 결과다. 충분한 시간, 이동할 수 있는 자유, 그리고 그것을 지속할 수 있는 삶의 기반. 이 책은 그 조건을 설명하지 않지만, 독자는 자연스럽게 그것을 감지하게 된다.

문장은 두 겹으로 읽힌다. 표면에서는 미술관의 풍경과 감각이 흐르고, 그 아래에서는 따라갈 수 없는 삶의 속도가 드러난다. 누군가는 하루의 끝에서 겨우 한 페이지를 넘기는데, 누군가는 도시를 옮겨가며 미술관을 쌓아간다. 이 간극은 조용하지만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편하게만 읽히지 않는 이유는, 저자가 끝까지 ‘관람자의 위치’를 유지하기 때문이다. 권위 있는 해설자가 아니라, 그저 보고 있는 한 사람으로 남는다. 이 태도는 독자의 거부감을 낮추고, 대신 다른 질문을 남긴다. 우리는 왜 그렇게 살지 못하는가가 아니라, 지금의 조건 안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미술관은 이 질문의 배경으로 기능한다. 작품 자체보다 중요한 건 그 앞에 서 있는 시간이다. 아주 짧더라도, 아주 드물더라도, 우리는 그런 시간을 가질 수 있는가. 거대한 여행을 보여주면서도, 동시에 아주 작은 실천을 요구한다.

몇 곳은 이미 지나온 장소다. 책 속의 그림과 조각을 따라가다 보면, 그때의 공기와 감정이 뒤늦게 떠오른다. 함께였던 시간, 그 옆에 있던 사람. 미술관은 작품을 남기기보다, 그 순간을 남긴다.

책을 덮고 나면 남는 감정은 단순한 부러움이 아니다. 약간의 거리감, 그리고 미묘한 자극이다. 저자의 삶을 그대로 따라갈 수는 없지만, 그 태도까지 불가능한 건 아니다. 잠시 멈추는 일, 오래 바라보는 일. 어쩌면 그 정도는 가능하다.

삶은 잔인하고, 불행은 집요하다. 그리고 대부분의 시간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예술은 더 사치처럼 보인다. 그러나 바로 그 지점에서, 예술은 다른 의미를 갖는다. 도망이 아니라, 잠깐의 균열로서.

이 책은 그 균열을 보여준다. 그리고 묻는다.
당신은, 어디에서 멈추고 있는가.

—오늘도 미술관에 다녀왔습니다 (미술 전문기자의 유럽 미술관 그랜드투어), 김슬기, 마음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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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책을 권합니다 - 북큐레이터가 들려주는 책방 이야기
노희정 지음 / 소동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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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이상 운영한다는 건 나름의 노하우가 있다는 뜻이다. 북큐레이션, 북클리닉, 서재 만들기 등 책방지기의 실제 경험을 담아 알려준다.

‘곰곰이 책방’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만의 북큐레이션이 독자에게 감동을 주기 때문이다.

책방은 공간의 한계로 많은 책을 둘 수 없다. 그래서 공간을 잘 활용해야 한다. 책에 대한 정보는 인터넷에 넘쳐나지만, 정보가 많다는 것은 오히려 기준이 없다는 뜻일 수도 있다. 실물을 보기 전에는 판단하기 어려운 시대다. 그래서 책방이 유용해진다.

한정된 서가를 어떻게 활용하느냐는 결국 큐레이션에 달려 있다. 독자가 원하는 방향과 주제에 맞게 책을 선정하고 꾸려야 한다. 북큐레이션이 잘 되어 있으면, 책을 멀리하던 사람도 책을 찾게 되고,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새로운 책을 고르는 안목을 키우게 된다.

북클리닉은 책방에서 추천받은 경험을 바탕으로, 더 체계적인 책 관리를 원하는 독자를 위한 맞춤형 서비스다. 북클리닉을 이용하다 보면 예산과 분야를 정해 서재 만들기로 확장하기도 한다.

좋은 책만으로는 팔리지 않는다는 현실도 숨기지 않는다. 책방 역시 장사다. 손님을 기다리는 곳이 아니라, 오고 싶게 만들어야 유지할 수 있다.

책방지기는 원칙에 따라 일관성 있게 움직여야 한다. 책방은 내 서재가 아니라는 점, 매입과 매출을 매일 기록해야 한다는 점, 서가를 꾸준히 정리하고 안 팔리는 책은 수시로 반품해야 한다는 점. 오픈 시간과 휴무 같은 기본 약속을 지키고, 그 규칙은 손님뿐 아니라 운영자와 가족도 함께 따라야 한다. 지나친 자부심은 오만으로 보일 수 있다는 말도 빠뜨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책방을 하겠는가.



—오늘도 책을 권합니다 (북큐레이터가 들려주는 책방 이야기) - 노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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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된 전략 - 외교 역사와 이론으로 살펴보는 국제정치 속 오판의 메커니즘 그레이트 하모니 4
비어트리스 호이저 지음, 이혜진 옮김 / 21세기북스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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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은 틀린다. 문제는, 우리가 그것을 틀렸다고 인정하지 않는 순간이다.

히틀러는 갑자기 등장한 괴물이 아니었다. 그는 신호를 읽었고, 그 신호에 따라 움직였다. 라인란트, 오스트리아, 그리고 주데텐란트까지. 영국과 프랑스는 매번 한 걸음씩 물러섰다. 전쟁을 피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그러나 그 선택은 또 다른 신호가 되었다. 더 나아가도 괜찮다는 신호. 뮌헨에서 체임벌린이 들고 온 ‘평화’는 사실상 전쟁의 예고장이었다.

여기서 질문이 생긴다.
우리는 왜 그들이 틀렸다고 쉽게 말할 수 있는가. 그리고 더 중요한 질문은, 우리는 정말 다르게 행동하고 있는가.

이 책이 겨누는 것은 특정한 역사적 실패가 아니다. 그 실패를 가능하게 만든 사고의 방식이다. 우리는 상대를 이해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실제로는 우리 기준으로 해석할 뿐이다. ‘거울 이미지’. 상대도 나처럼 생각하고, 같은 의미로 신호를 받아들일 것이라는 가정. 소통은 이 가정 위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어긋난다.

히틀러를 상대하던 유럽은 그를 ‘합리적인 행위자’로 이해했다. 스탈린은 독일이 자신을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 믿었다. 그들은 정보를 몰라서가 아니라, 너무 잘 안다고 믿었기 때문에 실패했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남겼다. 전략은 그 위에서 만들어졌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과거로 밀어 넣는다. 그러나 이 책은 묻는다. 정말 과거의 이야기인가. 우리는 여전히 같은 방식으로 판단하고 있지 않은가. 상대도 나와 같은 정보를 가지고, 같은 방식으로 계산하고, 같은 결론에 도달할 것이라고 믿고 있지 않은가.

전략은 언제 틀리는가. 상황이 바뀌었을 때가 아니다. 그 상황을 다르게 해석할 가능성을 닫아버렸을 때다. 반대 의견이 사라지고, 질문이 사라지고, 확신만 남았을 때. 그때 전략은 이미 틀릴 수 없는 구조가 된다. 그리고 바로 그때부터 틀리기 시작한다.

그래서 이 책의 결론은 단순하다. 완벽한 전략은 없다. 전략은 언제나 불완전하다. 중요한 것은 맞는 전략이 아니라, 틀렸을 때 바꿀 수 있는 태도다. 그러나 우리는 그 태도를 가장 늦게 배운다. 아니, 끝내 배우지 못하기도 한다.

결국 남는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는 정말 상대를 이해하고 있는가.
아니면, 이해하고 있다고 믿고 싶은 것인가.

그리고 더 불편한 질문.
우리는 지금, 무엇을 틀릴 수 없다고 믿고 있는가.
우리는, 모른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결정하고 있지 않은가.

덧_
아쉬운 점.
독일연방군 지휘참모대학교, 독일군 정예 장교, 참모, 제독을 교육하는 최고 수준의 군사·정치 훈련 기관을 위해 쓰인 만큼, 일반 독자가 따라가기에는 다소 거리가 느껴진다.

번역은 아쉬움을 남긴다. 몇몇 문장은 한 번이라도 읽어봤다면 그대로 두기 어려웠을 표현이다. 이는 단순한 번역의 문제가 아니라, 텍스트를 대하는 태도의 문제처럼 보인다. 문장이 걸리는 순간, 사고의 흐름도 함께 끊긴다.


—잘못된 전략 (외교 역사와 이론으로 살펴보는 국제정치 속 오판의 메커니즘)- 비어트리스 호이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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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토』, 『빈 산』, 『애린 1』, 『애린 2』, 『검은 산 하얀 방』, 『별밭을 우러르며』, 『중심의 괴로움』


1999년 7권의 지하의 시집에서 100편의 김영현이 시를 모아 펴낸 시집. 시보다는 지하의 긴 시론이 더욱 좋은 시집이다.


편집자이자 발행인인 김영현의 ‘김지하를 어떻게 이해애햐 할 것인가?’ 에서 지하를 말한다.


나 또한 “그의 시를 읽으면서 나 역시 몹시 아팠다”


그가 시인이라는 사실에, 그것도 탁월한 시인이라는 사실에 이의를 달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의 시와 시인으로서의 고난은 우리 현대사의 상징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시를 읽으며 청춘을 보냈고, 피가 끓었고, 눈물을 흘렸으며, 감옥으로 흘러갔다. 우리뿐만 아니라 그는 전세계 피압박 민중들의 살아 있는 양심이었다. 그러나 그는 지금 시작(詩作)보다는 자기 사상의 체계화에 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지난여름, 나는 그에게 이제 다시 문학의 자리로, 시인의 자리로 돌아가기를 바라면서 그 동안 써온 시를 뽑아 새로운 젊은 독자들을 위해 시선집을 만드는 게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했다. 그는 흔쾌히 허락을 했고, 그 선(選)하는 작업 을 일체 내게 일임하였다. 나는 물론 극구 사양하였다. 내가 그런 일을 맡는다는 자체가 주제넘고, 외람되기 짝이 없다 는 사실을 스스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내가 그 일을 해주기를 바랐다. 내가 어떤 기준에서 선(選)하든 관계치 않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가 그 동안 펴낸 일곱 권의 시집(담시 형식의 장편시를 빼고)을 발표 시간대별로 펼쳐놓고, 내 마음 이 가는 대로 백여 편을 추려 뽑았다. 딱히 기준은 없다. 다만 좀 부드럽고 아름다운 시를, 어둠보다 밝음을, 분노보다는 따뜻함을, 그의 강함보다는 약함을, 투사적 면모보다 실존적인 외로움을 드러내주는 시를, 그야말로 마음가는 대로 골랐을 뿐이다.


그렇게 읽어가는 동안 내내 내 가슴속에는 지난 시절의 그 불꽃 같았던 추억들이 떠올랐다. 서대문 구치소에서 세면장으로 가다 흘낏 창문 너머로 바라본, 한복을 입고 한쪽 구석에 단정하게 앉아 있던 그의 모습, 강고한 독재의 발톱 밑에서 피 흘리던 청춘 시절 봉천동 시장 뒷골목 선술집에 서 목이 메어 읽었던 「황톳길」, 「타는 목마름으로」, 「빈 산」 등의 시들……. 그러나 연대가 지나갈수록 그의 시는 짧아지고 침묵은 깊어 가고, 한없는 외로움이 빈 여백으로만 남아 있다가 마침내 사라지고 말았다. 해남 이후의 바람 소리 같은 그의 시를 읽으면서 나 역시 몹시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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