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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칼이 될 때 - 혐오표현은 무엇이고 왜 문제인가?
홍성수 지음 / 어크로스 / 2018년 1월
평점 :
나이를 먹어가며 성인이 되어가고 주변 사람들이 하나둘 이성을 다져가면서 혐오의 표현들, 철없는 생각들은 입 밖으로 나오기 전 뇌 속에서 한 번 숙고하게 되어진다. 어느정도의 지성을 갖추고 해야될 것과 하면 안 될 것을 충분히 구분할 줄 알기에. 그러한 표현으로 인하여 누군가가 상처를 받고 피해를 입는 다는 것을 공감할 수 있기에. 우리는 그 사실을 인지하고 그렇게 어른이 되어가는 것이다. 하지만 요즘 사회에서 거론되어지는 혐오의 요소는 무척 복잡다단하다. 민주화 운동을 통해 힘겹게 쟁취해낸 표현의 자유를 빌미로 혐오와 멸시, 비난, 조롱 등을 정당화 하는 극우의 입장들부터 우리 생활에서 알게모르게 쓰여졌던 누군가를 차별하는 단어들까지. 그 안에 깃들어 있던 의미들을 다시금 깨닫고 선입견으로부터 비롯되어진, 혹은 자극적인 재미를 위해 놀림감의 대상이 되어지는 혐오 표현들의 문제점을 파악할 수 있었다.
내 주변에도 어느정도의 혐오표현이 오가는 짖궃은 대화가 이어지기도 한다. 물론 그러한 부분에 일일이 대응해가며 예민하게 구는 것은 감정의 낭비라 여기지만 혐오의 대상이 되는 인물들에게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상황을 무마하기 위해 적당한 반응을 하며 화제를 돌린다던지, 적당히 웃어넘기곤 한다. 내 스스로는 신념에 영향을 받지 않고 그냥 떨쳐낼 수 있다하더라도 그로부터 시작된 혐오의 발화는 한 집단에게 일정한 편견을 심어주는데 공조한다. 누군가에게는 정체성이 송두리째 부정당하는 존엄의 문제가 되지만, 그것을 느끼지 못하는 자들은 단순히 장난, 자극적인 소재로써 의례가 바탕이 되는 일상에서 맛보지 못했던 새로운 감각이 되어 그것에서 희열을 얻는다. 이러한 자극적 장난이 반복되고 그들의 차별적 언행이 당사자들에게 직접 가닿지 않는다해도 그러한 행위들은 차별적인 인식의 체재를 만들어내어 소수자들을 배척하는 자신들만의 둥지를 쌓아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소 정신건강하고 사회로부터 아무런 문제없이 자라난 건아들이 한데 뭉쳐지는 군대야말로 혐오표현 주축의 장이 된다. 그들 대다수는 건장하고 기득적인 입장에 속해있기에 소수자들의 고통을 이해할 줄 모르며 자신들만의 소셜을 생성하고 소수자들을 배척하는 환경이 만연해진다. 그것에 대해 확실한 인식이 없던 사람들 마저 그것을 혐오하는 한 명의 주도자로 인해 악의적인 표현들에 친숙해지는 것이다. 그것은 심각한 차별적 인식을 낳는다. 사회가 바뀌어가는만큼 표현의 자유로 무마되서는 안된다. 그런 콘텐츠의 규제가 강화되어야하며 유년시절의 교육이 가장 필요할 것이다.
절대다수의 문화로부터 비롯된 잔재는 아직도 무척이나 많이 남아있다. 결국은 모두가 그것들을 의식하고 소수의 입장을 헤아리는 노력을 한다면 혐오발언은 자제가 되지 않을까. 이제는 소수자의 목소리를 드높이고 당당하게 활보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 다수에게서 비롯된 음지 속에 갇혀 불안에 떨고 있을 그들을 따뜻한 마음으로 포용할 수 있도록 인식이 개선되어야 한다. 그렇기에 아직도 그런 표현에 대해 고민하며 혼란스러워하고 있을 주변인들에게 이 책을 건네주고 싶다.
p 14 표현의 자유는 인간의 보편적인 권리이자 우리 헌법이 느끼는 정도가 각기 다르고 사회의 자정 능력에 의해 그 해악이 치유될 수도 있다. 그래서 표현에 대한 개입은 항상 신중해야 한다.
p 25 이 말은 그 의도와 무관하게 여대생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고착화시키고 여성을 무시하거나 열등한 존재로 보고 차별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그런 말들이 자꾸 발화될수록 그런 이미지가 더욱 강화되어 사실로 둔갑하고, 이것이 다시 차별을 낳게 되는 것이다.
p 28 일본에서는 최근 몇 년 동안 반한감정이 고조되어왔고 반한시위대가 거리를 활보하기도 했다. 대자보는 전혀 다른 맥락에 놓인 것이고, 따라서 전혀 다른 효과를 낳게 된다. 그 대학을 다니는 한국인 학생들은 극도의 공포와 불안감을 느낄 것이다. 익명으로 붙었지만 누군가가 자신에 대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을 생각하면 소름이 끼칠 것이다. ... 이렇게 대자보가 붙은 장소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지는 이유를 찾는 건 어렵지 않다. 한국에서는 한국인이 소수자가 아닌데, 일본에서는 한국인이 소수자이기 때문이다.
p 31 정리해보자면, 혐오표현이란 "소수자에 대한 편견 또는 차별을 확산시키거나 조장하는 행위 또는 어떤 개인, 집단에 대해 그들이 소수자로서의 속성을 가졌다는 이유로 멸시, 모욕, 위협하거나 그들에 대한 차별, 적의, 폭력을 선동하는 표현" 정도로 그 개념을 정의해볼 수 있다.
p 73 혐오표현이란 그런 것이었다. 자신의 정체성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말을 들어야 한다는 것, 그건 당사자가 아니면 쉽게 상상하기 어려운 고통이었던 것이다. 이것이 과연 실체가 없는 고통일까? 개인의 특수한 고통일 뿐일까?
p 83 편견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누구나 그것을 내뱉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옆 사람이 그런 말을 하는 것을 듣는 순간 얘기가 달라진다. "어라, 저렇게 말해도 괜찮네." 한 사람, 두 사람 거침없이 혐오를 드러내기 시작하고 어느 순간 더욱 강도 높게 말하는 것이 인기를 끌게 되어 혐오표현에 대한 비판적 문제의식을 무력화시키기도 한다.
p 88 하지만 혐오표현의 문제에서 저자의 의도는 중요한 고려 대상이 아니다. 나쁜 의도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나쁜 효과를 낳고 있다면 그 자체로 문제가 될 수 있다. 중국 동포들에게 영화를 영화로 봐달라고 요구하기 이전에 그들이 영화를 영화로만 볼 수 없게 된 사정을 헤아려야 한다. 영화와 같은 예술에서 조롱이나 희화화는 흔한 일이다. 하지만 그 집단이 사회적 강자나 권력자가 아닌 소수자일 때는 얘기가 다르다. 그 부정적 효과를 충분히 고려하고 성찰하는 것은 예술의 영역에서도 반드시 필요한 윤리다.
p 153 표현의 자유를 증진하는 개입이야말로 부작용이나 규제 남용의 위험 없이 혐오표현을 억제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금지와 허용의 무익한 대립을 넘어설 수 있는 제3의 선택지이기도 하다.
p 207 편견이 혐오가 되고 차별이 되어 폭력으로 이어지는 것은 단계적인 과정이 아니다. ‘저들을 좋아하지 않는다‘가 ‘저들을 반대한다‘가 되고, ‘저들을 반대한다‘가 ‘저들을 박멸하자‘가 되는 건 순간이다. 나치가 반인륜적 선동에 나섰을 때만 해도 그들이 끼칠 해악을 예상한 이들은 없었따. 하지만 그들은 결국 그렇게 유대인을, 성소수자를, 장애인을, 소수민족을 탄압하고 학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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