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 - 교양인을 위한 구조주의 강의
우치다 타츠루 지음, 이경덕 옮김 / 갈라파고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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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주의의 핵심 사상가들 4명의 사상을 대중의 눈높이에 맞추어 쉽게 풀어쓴 책. 구조주의의 개념 자체에 대해서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일본 문화에 맞춰진 비유에 의해 오히려 책의 이해를 제한한 느낌이었다. 구조주의가 무엇인지, 어떻게 발전되었는지를 알고 싶다면 흥미롭게 읽을만 하나, 4명의 사상가들 전부를 흥미롭게 읽기엔 다소 무리가 있을 것 같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본인은 언어철학과 기호학에 점철되는 사상에만 관심이 있었으므로 푸코와 라캉의 사유에 대해서는 다소 거리감이 느껴졌다. 어차피 입문서의 의의는 자신이 흥미로운 분야를 세부적으로 발견해나가는 과정에 속하기 때문에 이 책의 역할은 개인에게 제 몫을 충분히 했다고 판단한다.

p 9
입문서가 제공할 수 있는 최고의 지적 서비스는 ‘대답할 수 없는 물음‘과 ‘일반적인 해답이 없는 물음‘을 제시하고, 그것을 독자들 개개인에게 스스로의 문제로 받아들이게 함으로써 천천히 곱씹어보고 음미하게 하는 것입니다.

p 27
세계에 대한 견해는 시점이 바뀌면 달라집니다. 따라서 하나의 관점만을 고집하며 ‘나는 다른 사람보다 바르게 세상을 보고 있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우리는 현재 그렇게 생각하며 살고 있습니다. ...

우리는 늘 어떤 시대, 어떤 지역, 어떤 사회집단에 속해 있으며 그 조건이 우리의 견해나 느끼고 생각하는 방식을 기본적으로 결정한다. 따라서 우리는 생각만큼 자유롭거나 주체적으로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대부분의 경우 자기가 속한 사회집단이 수용한 것만을 선택적으로 ‘보거나, 느끼거나, 생각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집단이 무의식적으로 배제하고 있는 것은 애초부터 우리의 시야에 들어올 일이 없고, 우리의 감수성과 부딪치거나 우리가 하는 사색의 주제가 될 일도 없다.

우리는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자율적인 주체‘라고 믿고 있지만, 사실 그 자유나 자율성은 상당히 제한적이라는 사실을 철저하게 파헤친 것이 구조주의의 성과입니다.

p 33
헤겔이나 마르크스 모두 ‘자기로부터의 괴리 = 조감적 시야‘의 확보는 단순한 관상(홀로 안락의자에 앉아서 깊이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노동‘에 몸을 던짐으로써 타자와의 관계 속으로 들어갈 때에만 달성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즉 노동하는 사람만이 ‘나는‘이라는 말을 입에 올릴 수가 있다는 뜻입니다.

p 34
‘생산=노동‘에 의한 사회관계에 뛰어들기 전에는 본질이나 특성이 결정된 ‘내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내가‘ 존재하기는 하겠지만 ‘나는 무엇인가‘를 정의한다는 면에서 생각해보면 ‘나‘는 결코 스스로를 직관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를 직관한다‘는 것은 타인들 속으로 뛰어든 ‘나‘를 풍경으로 조망할 때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아이가 없는 사람에게 내재하는 ‘부모의 사랑‘이나 제자를 갖지 않은 선생에게 내재하는 ‘스승의 위엄‘과 같습니다. 잠재적으로는 있을지도 모르지만 현실의 인간관계에 실재하지 않는 이상 그것이 ‘정말로 존재하는가‘를 검증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p 136
인간이란 이런 존재입니다.
일상적인 경험에서도 알 수 있듯이 우리는 확고한 견해를 가진 인간으로 텍스트를 읽고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앞에서 말한 영화의 예에서 보듯이 텍스트 쪽이 우리를 ‘그 텍스트를 읽을 수 있는 주체‘로 형성합니다.

p 155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라는 말은 사르트르의 유명한 말로서, 특정한 상황에서 어떤 결단을 내리는가에 따라 그 인간이 본질적으로 ‘누구인가‘가 결정된다는 뜻입니다. (근본은 좋은 사람이지만 현실적으로 나쁜 일만 저지르는 인간은 실존주의적으로는 나쁜 사람으로 평가됩니다.)

p 161
어떤 영역에 대해 개념이나 어휘가 풍부하다는 것은 그 집단이 그 영역에 대해 깊고 강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문명인‘과 ‘미개인‘은 그 관심을 갖는 방법이 다를 뿐, ‘문명인‘처럼 세계를 보지 않는다는 것이 ‘미개인‘은 지적으로 열등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어느 쪽이든 세계는 사고의 대상, 즉 최소한 다양한 욕구를 채우는 수단‘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p 181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인간인‘ 것이 아니라 어떤 사회적 규범을 수용하면서 ‘인간이 된다는‘ 레비스트로스의 생각은 분명 푸코와 통하는 ‘탈인간주의‘의 징후를 보여줍니다. 그러나 나는 레비스트로스의 탈인간주의가 구조주의에 대한 통속적인 비판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인간의 존엄이나 인간성의 아름다움을 부정한 사상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웃 사람에 대한 사랑‘ 이나 ‘자기희생‘과 같은 행동이 인간성의 ‘잉여‘가 아니라 인간성의 ‘기원‘임을 간파한 레비스트로스의 통찰을 어떻게 반인간주의라고 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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