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 23 나는 지방대에서 10년 이상을 가르친 요즘에야 비로소 깨닫는다. 성실이란 상황을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주어진 매뉴얼대로 하는 것이다. 영혼 없이. 어차피 나는 노력해도 성취를 이룰 수 없으니 성실하게라도 임하자는 생각이 지방대생들 사이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p 59 어떤 사람의 실천적 자아 이미지는 고프먼의 용어를 빌려 말하면 타자와 노선을 함께 만들어나가야 할 그의 공안, 즉 승인된 사회적 속성들에 따라 윤곽이 그려진 자아 이미지이다. 공안, 즉 공적 얼굴은 사회적으로 승인된 긍정적인 자아이미지이다. 조우 중에 있는 행위자들은 서로의 공안을 보호해야 하고 최소한 위협하지 말아야 할 도덕적 의무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타자에게 제출한 자신의 공안과 긍정적인 관계를 맺어야 한다. 다시 말해 자신이 제출한 공안과 실제 자신의 모습을 일치 시키고, 이를 바탕으로 타자와 노선을 함께 만들어 가야 한다. 공안과 진정한 관계를 맺어야만 하는 것이다.
p 61 그렇다면 누구를 대화의 망으로 상정하는가? 그것은 가족, 친구, 대학 동료와 선후배 등 일차 집단이다. 가족에 대해서는 비록 공부는 못하지만 착하고 성실한 아이로 자신의 자아를 드러낸다. 어릴 적 친구에 대해서는 무엇이든 함께하는 의리 있는 아이로 자신의 자아를 표출한다. ... 지방대생은 이런 자아에 대해서 결코 도구적 관계를 맺을 수 없다. 자신의 자아와 진정된 관게를 맺고, 이를 활용하여 주변 사람들과 관계를 이어간다. 이 모든 자아가 일차 집단과 함께 노선을 만들어가기 위해 진정으로 제출한 공안이다. 사랑이라는 인정 형식 속에서 자신의 자아를 제출하는 것이다.
p 78 이러한 압박감은 주변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온다. 그렇다면 이들의 습속이 지닌 이러한 평범함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김홍중의 언어를 빌려 말하면 다음과 같을까? "착한 척 하지만 사실은 시린 영혼을 소유하고 있는 청년들. 그들의 평범함은 도저한 선함의 둔각을 은닉한다. 그들은 선함의 평범함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것이 선함이 되는 세상을 보여준다." 착한 척하지만 실상은 지방대의 패배의식을 안고 살아가는 시린 영혼들. 주변 어디를 둘러봐도 쉽게 만날 수 있는 서로 가족같은 평범한 영혼들. 자신의 시린 영혼을 드러내지도 남의 시린 영혼을 파헤치지도 않는 그 도저한 선함.
p 144 지금 와서는 대체로 모든 것에 가치부여를 하지 않는 편인 것 같아요. 대신에 이런 건 있어요. 남이 좋아하는 가치에 대해서 많이 이해해주려고 하는 노력. 내가 뭔가를 좋아하고 뭔가 좋다고 하면 누군가가 나를 존중해줬으면 좋겠어요. 그런 거만 있으면 내가 뭘 하고 살든지....
p 261 지방대 졸업생에게는 가족의 인정을 추구하는 집단주의와 자신의 감각적. 쾌락적 경험을 추구하는 개인주의가 혼재되어 있다. 이를 보수주의적 가족주의와 나르시시즘적 개인주의의 불안한 동거라고 말하면 될까? 가족주의가 보수주의적인 이유는 가족 또는 유사 가족의 인정을 추구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그들의 요구에 순응하게 되기 때문이다. 자꾸 주변을 둘러보게 되고, 나 자신을 그들의 기대에 마추게 된다. 문제는 기대가 매우 낮다는 점이다. 큰 거 바라지 말고 작은 거에 마족하며 살아가자고 서로 북돋운다. 기대가 워낙 낮다보니 충족시키는 것이 그다지 어렵지 않다. 끼리끼리 어울릴 때는 행복한 거 같다. 하지만 가끔씩 나 자신만의 방이 필요하다고 느낀다. 이때 나르시시즘적 개이주의가 등장한다. 남의 판단이나 의견에 신경쓰지 않고 내 안에서 느끼는 감각적, 쾌락적 경험을 추구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