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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버거 지음, 최민 옮김 / 열화당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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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물을 보는 방식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 또는 우리가 믿고 있는 것에 영향을 받는다.


이 책은 기존의 우리가 예술 작품을 받아들이는 고전적인 방식. 그러니까 화가의 그림을 연구하는 학자들의 해석이나 화가들마다마다 사용되어진 오브젝트들, 선의 방식, 색감, 구성 등에 대해서 학술적인 내용들을 전부 걷어내고 자신만의 시선으로 바라보아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래서 책의 제목 또한 the way of seeing이 아니라 ways of seeing이 되는 것이다.


책이 쉽게 쓰여진 것이 아니라 잘 읽히지 않는 부분도 많았지만, 재미있게 다가왔다. 정말 우리가 어떤 그림이나 이미지들을 볼 때 상투적인 고정관념에 얽매여 받아들이는 경우가 너무 많은 것 같다. 그렇게 주류를 따라가며 받아들이려고 하고, 그것에 대해 오로지 문외한인 개인의 생각은 비주류라 생각하며 의견을 굽히기 일쑤다. 나도 모르게 권위 있는 학자들의 의견에 동조하게 되고 자주적인 판단력은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사실 이런 생각에 대해서 그렇게 어긋났다라는 생각을 해본적도 없고, 나만의 시각을 가지기 위해서 주류의 지식을 배워야 한다고만 생각했었다. 그렇게 나 또한 고정관념을 습득함으로써 정해진 방식으로 보는 것을 원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며 그런 편견은 걷어내게 된 것 같다. 


그러면서 이 책은 기존의 사회가 여성을 바라보는 방식에 대해 묘사를 한다. 이미지에서의 여성은 벗은 몸을 통해 남성의 시선을 끌어당기는 역할이 대다수이다. 그래서 벗은 몸에 대해서 naked와 nude로 구분을 짓는다. 과거 테이트 누드 전시회에서도 같은 이야기를 본 적이 있었다. 그 당시에도 보여지는 누드를 컨셉으로 남성들의 시선을 끌어당기는 그림들, 그런 불평등한 시선의 역사를 전시해둔 전시였다. naked는 자연적으로 몸이 벌거벗겨진 상태이지만 그 상태에 타인의 시선이 깃들어 간다면 nude가 된다. 누군가에게 보여지기 위한, 전시의 대상으로써의 벌거벗은 상태이기 때문에 그런 용어로 정의를 하는데, 현대 광고의 대다수가 그런 누드의 이미지를 차용해서 성적 호기심을 이끌어내는 용도로 사용이 되고 있다. 현실 속 이미지에 대한 불평등한 시선에 대해서 생각하게 해주었다.


주관없는 현대 사회 속에서 자신만의 고유한 생각을 갖추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작품들을 보면서 자신만의 보는 독창적인 시각을 길러낸다면, 그것처럼 자신만의 그림을 그리는 일도 수월하게 이루어지지 않을까? 

p 10
우리가 사물을 보는 방식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 또는 우리가 믿고 있는 것에 영향을 받는다. 지옥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었던 중세 사람들이 보는 불타는 광경은, 오늘날 우리가 보는 불타는 광경과는 다른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옥에 대한 그들의 관념은 불에 타서 재만 남고 모든 것이 다 소멸되는 시각적 정경과 불에 덴 고통의 체험에서 생겨난 것이라 할 수 있다.

p 39
하지만 이런 변화를 인식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복제 수단은, 이제 대중들도 그런 복제 덕분에 한때 문화적 헤택을 받은 소수들만 누릴 수 있었던 예술을 향유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만 제외하고는, 여전히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는 환상을 끊임없이 선전하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대중은 여전히 무관심하고 회의적인 상태로 남아 있다.

p 76
하지만 여자를 보는 방식, 즉 여자의 이미지를 사용하는 방식은 본질적으로 바뀌지 않았다. 여자들은 남자들과는 아주 다른 방식으로 묘사되는데, 이는 여성성이 남성성과 다르기 때문이 아니라, ‘이상적인‘관객이 항상 남자로 가정되고 여자의 이미지는 그 남자를 기분 좋게 해주기 위해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만약 이 말에 의심이 든다면 다음과 같은 실험을 해보면 된다. 이 책에서 전통적인 누드화를 아무 작품이나 하나 고른 다음, 그림 속 여자를 남자로 바꾸어 보자. 머릿속에서 생각만해도 좋고 직접 그려봐도 좋다. 그리고 그런 전환이 얼마나 폭력적인 것인지를 살펴보기 바란다. 이미지 자체에 대한 폭력이 아니라, 관객들이 가지고 있는 기존 관념에 대한 폭력 말이다.

p 171
개인적인 행복의 추구는 만인의 권리로 인정되었다. 그러나 실제의 사회적 환경은 개인으로 하여금 무력하게 느끼도록 만들고 있다. 그는 그가 되었으면 하고 바라는 상태와 현재 그 자신의 상태와의 모순 속에 살고 있다. 그리하여 그 모순과 원인을 충분히 깨닫고 진정한 민주주의를 향한 정치적인 투쟁에 참가하거나, 아니면 자기 자신의 무력감과 함게 뒤섞여서 백일몽으로 융해되어 버린 선망에 사로잡힌 채 살아가야 한다.
왜 광고가 그럴듯해 보이는지에 대한 납득할 만한 대답은 바로 여기에 있다. 광고가 실제로 제공하는 것과 광고가 약속하는 미래 사이의 간극은, 광고를 보고 물건을 사는 사람 자신이 느끼는 현재의 처지와 그가 되고 싶어하는 처지 사이에 벌어진 간극과 일치한다. 그 간극은 하나가 된다. 그러나 실제 행동과 생생한 경험에 의해서 다리가 놓여져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간극은 매혹적인 백일몽으로 채워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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