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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글자 사전
김소연 지음 / 마음산책 / 2018년 1월
평점 :
유쾌한 김소연 시인의 시선집.
나도 가끔 한 단어로부터 떠오르는 아이디어들을 기록해두기도 한다. 그런 기록들은 순간의 온상으로써 머리를 스치며 포착해내 메모를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순식간에 머릿속에서 사라지고 만다. 마치 머릿속을 순회하는 대어를 낚아 올리는 낚시 같은 느낌이다. 그렇게 사소한 메모로부터 아이디어들이 탄생하고 예술의 영감이 찾아온다. 작가들 사이에서 우스갯소리로 적는 사람들이 살아남는다는 뜻으로 ‘적자생존’이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의 휘발성 메모리들을 쉽게 믿어서는 안 된다.
김소연 작가도 우리에게 친숙한 한 글자 단어들의 생각들로부터 떠오르는 영감들을 낚시해내었다. 글자 순으로 정리되어 있는 단어들 속에 독창적인 시선이 잘 느껴졌다. 때로는 순수하게, 때로는 유쾌하게, 때로는 날카롭게. 시인 특유의 시각으로 바라본 세상에 내 시선이 공감되기도 하고 새롭게 확장되기도 하고 무척 즐거운 글 읽기가 되었다. 어쩌면 지루하게 느껴질수도 있을 것 같단 글을 간결하고 과감하게 짧게짧게 적음으로써 부담스럽지 않은 독서가 되었다.
정말 한글에서만 느낄 수 있는 고유 매력이 돋보인 책이었다. 사전이라 칭한 네이밍이 좋았는데 영감을 얻기 위해 자주 접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특히 그 중에 ‘삶’에 관해 쓴 글이 있었는데 그 산문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돌연변이 어른으로 성장해 가는 것이 삶이란 것. 그런 세상 속에서 과연 돌연변이가 아닌 진정한 나의 모습을 찾아 성장해 나갈 수 있을까? 김소연 시인은 어떨까? 우리 모두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는 돌연변이의 모습을 잘 간직한 채 살아가는 것일까. 금쪽같은 글들이 너무 많아 이것저것 전부 저장을 해두었다. ‘악’을 주제로 쓴 글도 삶으로 쓴 글과 비슷해서 인상적이었는데 우리 모두 불안감과 불신을 가지고 살아가면서 악에 타협하게 되는 우리 인생에 대한 통찰이 맘에 들었다. 선이 언젠가 악을 이긴다는 믿음을 점점 상실하고 있다는 것. 어쩌면 그만큼 사회에 존재하는 악에 대해 너무 익숙해져 있게 되어버려 그런 것일까. 엿을 너무 쉽게 단정 짓지 않으려는 시인의 태도, 끈이 끊어져도 사람이 단단하면 온전할 수 있다는 발상. 재치 넘치는 발상들을 보며 많은 영감을 흡수해가는 것 같다. 짧은 글들이 오히려 다양한 주제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게 해주어 무척 다채로운 책읽기였다.
p 17 갓 변해가는 것들에마 이 수식어를 붙일 수 있다. 이제 시작되었다는 뜻과 아주 잠깐의 과정일 뿐임을 나타내는 말로서 기대감을 잔뜩 품을 때 사용된다. 이 기대감이 긍정적일 때는 애틋함과 설렘을 나타내는 쪽으로 작용된다. 갓 태어난 아기, 갓 피어난 꽃, 갓 구워진 빵, 갓 시작된 사랑.... 이 기대감이 부정적일 때는 두려움과 막막함을 나타내는 쪽으로 작용된다. 갓 시작된 불행처럼. 갓 이별한 사람이라는 표현은 지금은 엄청나게 괴롭겠지만 서서히 정신을 차리고 회복하게 될 것까지 내포한다.
p 31 곁 - ‘옆‘보다는 조금 더 가까운. ‘나‘와 ‘옆‘, 그 사이의 영역. 그러므로 나 자신은 결코 차지할 수 없는 장소이자, 나 이외의 사람만이 차지할 수 있는 장소. 동료와 나는 서로 옆을 내어주는 것에 가깝고, 친구와 나는 곁을 내어준다에 가깝다. 저 사람의 친구인지 아닌지를 가늠해보는 데 옆과 곁에 관한 거리감을 느껴보면 얼마간 보탬이 된다.
p 37 관 - 처음 들어가 눕지만 영원히 눕는다. 가장 어두운 곳에서 영원히 혼자가 된다. 가장 차갑지만 어쩌면 따듯할지도 모르며, 가장 딱딱하지만 어쩌면 아늑할지도 모른다.
p 60 끈 - 물건 같은 것을 한데 묶을 때 사용하는 물건. 끈이 끊어질 때 대열은 흩어져도 물건이 단단하면 온전할 수 있다. 사람의 끈도 마찬가지 경우.
p 70 남 - 남자, 타인, 남쪽. 이 세가지를 모두 이 한 글자로 적는 데는 다음과 같은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다. 멀리 두고 보아야 좋다.
p 248 씨 -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쪼개어 알아내는 것이 아니라 심고 물을 주어 키워가며 알아내는 것.
p 251 악 - 바야흐로 진화를 거듭하여 악은 가시적인 폭력을 휘두르지 않게 되었다. 특정한 집단과 특정한 인물에게, 특수한 상황과 특수한 입장에게 귀속되지 않은 지도 오래되었다. 악은 모두에게 알맞게 배분되어 있다. 모두가 나눠 가졌기 때문에 좀처럼 악이라고 느껴지지 않는다. 믿음직한 친구의 얼굴을 바라볼 때도 우리가 불신 한 줌과 불안감 한 줌을 손에 꼭 쥐고 있는 것은 친구의 얼굴이 어째서가 아니다. 선이 언젠간 악을 이긴다는 믿음을 점점 상실하고 있는 것도 내 얼굴 깊은 곳에 악의 그림자가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늘 스스로의 악과 보이지 않는 싸움을 한다. 보이지 않는 손으로 자기 멱살을 잡는다. 멱살을 잡히는 나와 멱살을 잡는 나의 조용한 악다구니, 하루를 하는 것 없이 지낸 날에도 이유없이 피곤이 몰려온다.
p 268 엿 - ‘엿같다‘라는 말과 ‘엿먹어‘라는 말은 엿을 너무 쉽게 단정짓는다. 호박엿 한 주먹을 얻으려면 호박 한 소쿠리를 삭히고 고으며 저어야 한다.
p 281 욱 - 삼킨 것들이 역류할 때 나는 소리. 욱하는 건 순간이지만 욱해서 쏟아진 것들의 냄새는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p 371 펜 - 펜이 칼보다 강할 수는 없지만 펜이 칼이 될 수는 있다. 펜을 가장한 칼이 도처에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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