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가는 먼 집 문학과지성 시인선 118
허수경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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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과 함께 이 저녁

(허수경)

 가지에 깃드는 이 저녁

고요한 색시 같은 잎새는 바람이 몸이 됩니다

살금살금, 바람이 짚어내는 저 잎맥도

시간을 견뎌내느라 한 잎새에 여러 그늘은 만드는데

그러나 여러 그늘이 다시 한 잎새 되어

저녁의 그물 위로 순하게 몸을 주네요

나무 아래 멈춰서서 바라보면 어느새 제 속의 그대는

청년이 되어 늙은 마음의 애달픈 물음 속으로

들어와 황혼의 손으로 악수를 청하는데요

한 사람이 한 사랑을 스칠 때

한 사랑이 또,한 사람을 흔들고 갈 때

터진 곳 꿰맨 자리가 아무리 순해도 속으로

상처는 해마다 겉잎과 속잎을 번갈아내며

울울한 나무 그늘이 될 만큼

깊이 아팠는데요

 

그러나 그럴 연해서 서로에게 기대면서 견디어 내면서 둘 사이의 고요로만 수수로울 수는 없는 것을, 한 떨림으로 한 세월 버티어 내고 버티어 낸 한 세월이 무장무장 큰 떨림으로 저녁을 부려놓고 갈 때 멀리 집 잃은 개의 짖는 소리조차 마음의 집 뒤란에 머위 잎을 자라게 하거늘

나 또한

애처로운 저 개를 데리고 한 때의 저녁 속으로 당신을 남겨두고 그대, 내 늙음 속으로 슬픈 악수를 청하던 그때를 남겨두고 사라지려 합니다. 청년과 함께 이 저녁 슬금슬금 산책이 오래 아프게 할 저녁

 ; 또 다시 슬금슬금 저녁이 찾아온다. 하루를 마치고 밥을 먹는 것도 저녁이겠지만 추억을 안주삼아 술 한잔 하는 것이 내가 원하는 저녁이리라. 두뺨을 불그스레 물들이는 노을을 핑계삼아 아련한 첫사랑도 떠올려 보고, 길어진 내 그림자에 자신을 뒤돌아 보기도 한다. 만약 비라도 온다면 일부러 우산을 잃어버려 마음껏 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술집은 네온사인을 오늘도 반짝거린다. 더이상 하늘의 별이 보이지 않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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