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앞부분만 쓰다가 그만두는 당신을 위한 어떻게든 글쓰기
곽재식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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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망한 영화에서 영감얻기'


망한영화에서 왜 망했나를 떠올리자. 나는 이렇게 쓰면 안된다라는 것을 느끼자. 내 이야기도 누군가에게는 좆같겠구나 반성하자. 망한영화에서도 괜찮은 아이디어는 있다. 이건 배우자.


2. '바꿔치기 수법'


좋은 이야기는 모방해보자. 소재를 따와서 변형하면 좋은 이야기가 된다. 일단 리어왕이든 뤼팽시리즈든 해리포터든 무엇이든간에 변형해서 써보자.


3. 가장 재미있던 대목을 기록하자.


망한거든 흥한거든 재미있던 대목을 요약해서 아이디어를 얻자. 평론가가 주목했던 내용이라든지 대중들이 재미있던 대목이랑 겹치지 않아도 된다.


4. 나라면 어떻게할 지 상상해보기


예를 들면, 깊은 산속에서 멧돼지를 만났을 때 나라면 어떻게 도망칠지 상상해보자. 반면에 내가 겪은 실화를 바탕으로 글을 쓸때는 얼마나 객관적으로 접근했는지를 고려해야한다. 이야기가 너무 주관적으로 변하면 구질구질해질 수도 있다


5. 배경지식이 없는 것에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


가사없는 음악을 들으며 이야기를 만들거나 배경지식이 없는 그림을 보면서 그림의 이야기를 그려보자. 예컨데 르네상스시대의 그림은 신화적인 배경을 따와서 그리는 경우가 많은데, 모르는 내용이면 내멋대로 이야기를 만들어보는 것이다


6. 메모하기


소재가 떠오르면 즉각 메모할 것. 소재는 신발끈을 묶는 순간에도 떠오른다. 반드시 메모하자.


7. 일상을 상상의 세계로 만들 것


가령 지나치는 청소부, 회사에서 마주치는 직장상사나 후배, 공장에서 일하는 직원의 이야기등을 만들어보자.


8. 죽음(자살), 불륜 등 통속적인 소재가 무조건 들어가야되는 것은 아니다.


초반의 흥미를 끄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이것이 어려워 결국 통속적인 소재를 사용한다. T.S엘리어트의 <황무지>는 434행이나 되어있는데, "4월은 잔인한 달"이라는 첫행으로 강인한 인상을 주었다.


9. 제일 재미있을 것같은 장면부터 써보자.


그 장면은 중간에 끼어넣으면 되니까, 시작장면을 유심히 고려하지 않아도 재미난 장면부터 만들다가 다시 시작지점을 써도 된다. 컴퓨터로 글을 쓰는데 끼어넣기도 어렵지도 않다. 예를들어 일기를 쓸 때도 친구와 싸운부분이 오늘의 핵심인데, 아침에 뭘먹었고 점심은 무엇을 먹었는지를 공들여 쓸필요도 없다. 친구와 싸운 부분부터 쓰고 앞부분을 채워도 그만이다.


10. 이야기속에는 비밀이 있어야한다.


이야기속에서 비밀을 만들고 그 비밀을 이야기 속 인물들이 어떻게 감추려고 하는지, 왜 감추려고 하는지, 어떻게 반응하는지, 비밀은 언제 드러내고, 어떻게 드러내고, 비밀이 드러나면 어떻게 만응하는지 등 이야기를 꾸미는 것이다.


비밀의 형태


1) 주인공도 모르고 독자도 모르는 경우
2) 주인공은 알지만, 독자는 모르는 경우
3) 주인공도 알고, 독자도 아는 겅우
4) 주인공은 모르지만, 독자는 아는 경우


11. 회상장면으로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워낙 뻔하고 뻔한 장면이지만, 이야기의 시작이 답이없으면 써먹어야한다.


12. 독자가 꺼리는 경우에는 이유가 있다 .


지나친 묘사, 짜증나는 결말, 뻔한 구성 등


식당가서 밥을 먹는 장면에서, 지나친 인테리어 설명, 메뉴판 설명, 종업원 묘사가 너무 짜증나게 많으면 독자가 싫어한다.


13. 소재에서 출발한 이야기를 결말로 몰고가는 방법


1)시작부분을 생각하고 나서 시작부터 천천히 내용을 채워가기 - 쓰기 먼저 방법-


쓰면서, 주인공들의 성격 성향 등 채워나가기. 인물에 중점을 두어서 생생하게 감정표현을 하게된다. 하나의 소재를 자연스럽게 이야기하듯이 풀어나가는 사람에게 좋다.


2) 줄거리에서 결말까지 미리 짜두기 -짜기 먼저 방법-


번호를 매겨가며 각 단계별로 한두문장씩 써놓는 것. 뼈대를 만들어놓고 거기에 살을 하나씩 덧붙이면 된다.


둘다 단장점이 있다. '쓰기 먼저 방법'은 이야기를 쓰는데 빨리 착수한다. '짜기 먼저 방법'은 개요만 세우다가 힘이 다 떨어질 수 있다.


둘다 장단점이 있다.


14. 바꾸고 덧붙이고 고쳐쓰자


미리 짜둔 내용에서 생각보다 분량이 안나오면, 이야기를 덧붙일 필요가 있다.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했는지 따져보자. '어떻게'와 '왜'를 중점적으로 살을 덧붙이면 이야기를 살릴 수 있다.


15. 이야기가 막힐 때 비상수단을 쓰자.


1)꿈 장면, 상상 장면, 환상장면을 넣자.
2)극중극, 이야기 속의 이야기를 듣거나 읽는 장면을 넣자.
3)문득 시간을 확 건너뛰자.
4)적당한 핑계를 대고 내가 지금 정말 하고 싶은 일들을 주인공이 하는 장면을 넣자.
5)도대체, 왜, 어떻게 앞뒤의 사건이 생길 수 있는지 고민해보자.
6)어떤 사건이나 상황의 부작용, 범죄에 악용하는 방법을 상상해본다. 그리고 범죄의 악용를 막는 방법도 상상해보자.


16. 아름다운 표현과 그렇지 않은 표현


필사가 중요하지는 않다. 남들이 아름답다고 여기는 아포리즘을 너무 열중해서 적는다고 내 것이 되지는 않는다. 너무 이것에 시간을 소모하지 말자.


17. 자세하게 그려보자.


지나치는 장면이라도 무엇을 생각했고, 무슨 냄새가 났고, 어떤 것을 보았고, 어떤 느낌이 들었는지 써보는 것이다.


지하철에서 집까지 걸어왔더라도 도중에 버스소리가 들렸는지, 지나치는 사람에게서 무슨 향수냄새가 났는지, 차가운 바람이 스쳤는지, 지나치는 분식집의 떡볶이가 맛있어 보였는지 등 아무거나 적어보자.


18. 케케묵은 단어를 바꿔보자.


인터넷 사전을 뒤져서 유의어를 찾아 다른 말로 대체해보자. 주체와 객체를 바꾸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다.


유의어를 바꾼다.
표현의 주체와 객체를 바꾼 표현을 찾아본다.
형용사를 동사로 바꾼다.
동사를 형용사로 바꾼다.
긴 말을 짧고 간단하게 바꾼다.
간단한 말을 길게 바꾼다.
기계적이고 건조한 말을 문학적이고 감상적인 말로 바꾼다.
어려운 말을 더 쉬운 말로 바꾼다.
아예 그 표현을 빼고 앞뒤 설명으로 대체한다.


19. 간단하고 쉽게 쓰기


지나치게 긴 문장은 반감을 줄 수 있다. 읽는 사람을 생각하자.


20. '전업 작가'는 고려해봐야 한다.


21. 마감을 정해두고 글을 써보자.


22. 주기적으로 백업을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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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일리치의 죽음 창비세계문학 7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이강은 옮김 / 창비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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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의 끝은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라는 제목에서도 잘 보여준다. 소설은 이반일리치의 장례식에서 시작되는데,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라는 결과가 이 소설이 전개되어 나가는 과정에 큰 영향을 주지 못한다. 오히려 이반일리치가 병에 걸려서 고통을 느끼며, 죽음을 맞이하기까지의 과정이 이 소설의 중요한 맥락이라고 볼 수 있겠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인간이다.
인간은 죽는다.
고로 카이사르는 죽는다.


이렇듯 인간의 죽음은 확정되어 있다. 이반 일리치도 키제베터 논리학에서 배운 삼단논법을 통해서 인간의 죽음이 무엇보다 확실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반 일리치는 평소에 죽음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이 없다. 병의 초기에 그는 약을 복용하며, 완치되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의 병의 증세가 점점 심해지자, 병의 원인에 대해서 생각한다. 그는 창문 손잡이에 부딪혀서 상처가 난 곳이 심해져서 이렇게 아프게 됐는가 아니면 맹장 혹은 신장에 문제가 생긴 것인가에 대해서 나름의 고민을 해본다. 애꿎은 곳에 화풀이도 해보고, 병이 어디서 왔는가에 대해서 원망한다. 이때까지도 그는 ‘죽음’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병의 증세가 점점 심해지자 이반 일리치는 병의 원인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병의 원인에 대해서 의사들도 확진을 내리지 못하고, 그에게 점점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알게 돼서, 이러한 원인을 밝히는 것도 무의미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 것이다. 이반은 왜 죽어야하는가에 대해서 생각한다. 그는 신을 원망하며 지나온 삶에 대해서 회한을 남기는 동시에 ‘죽음’에 대해서 서서히 생각하기 시작한다.


죽음! 오 죽음! 그러나 남들은 죽음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고 또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들은 결코 나를 동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여유 있게 삶을 즐기고 있을 뿐이다.


하이데거는 ‘죽음’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하이데거는 대중사회 속 안일한 일상에 젖어 자기 자신의 고유성을 잃어버린 사람을 ‘다스 만’(das Man : 일반적인 사람, 일상인)이라고 정의한다. 연예인이 음주운전을 냈다던가, 바람을 피웠다는 등의 소식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자신의 존재에 눈을 돌리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는 ‘죽음’을 아는 듯해도 사실을 잘 모른다. 타인의 죽음을 알아도 그것을 직접 체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연예인이 죽었대.”라며 수다를 떤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죽음이 아니다. 하이데거는 ‘죽음’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1. 자신의 죽음은 누구와도 교환할 수 없다.
2. 고독해진다.
3. 반드시 죽는다.
4.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
5. 마지막에 온다.


하나씩 설명하자면 이렇다.

1. 자신의 죽음만은 아무도 대신하지 못한다. 스스로 받아들일 수 없다. 우리는 누군가의 죽음의 소식을 듣고, 자신의 죽음에서 시선을 피하고 있을지 모른다.
2. 죽음이란 이제 아무와도 만날 수 없는 것이다.
3. 누구는 죽고 누구는 죽지 않는 불확실한 일이 아니다.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
4. 언제 죽는지, 날짜와 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다. 당장 1초 후에 죽을지, 몇 년 후에 죽을지 아무도 알 수 없다.
5. 죽음은 인생의 마지막에 찾아온다. 죽음을 앞서 치르고 살 수 없다. 어김없이 마지막에 올 것이다.


누군가는 “어차피 죽을 건데 왜 살아?”라는 생각을 갖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이데거는 ‘죽음으로 향하는 존재’인 자신을 감추고, 일상성에 파묻혀서 얼버무리며 사람들이 살고 있다고 말한다. 하이데거는 움츠려들지 말고, 감추지도 말며 자신이 ‘죽음을 향하는 존재’임을 직시해야 한다고 한다. 죽음을 받아들일 각오를 함(죽음에 대한 선구적 각오성)으로써 우리는 ‘다스 만’에서 벗어나 본래의 자신(실존)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반 일리치는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자각하며, 죽음에 대해 조금씩 직시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평소에 생각하지 않았던 다른 사람들을 보게 된다. 자신이 거들떠보지도 않던 하인이 성심껏 자신을 수발하는 모습을 보자, 그는 당황한다. 누구도 자신을 동정하며 아픈 상태를 이해하지 못하나, 열심히 자신을 수발하는 하인만이 이를 알고 있다고 느낀 것이다. 동시에 판사인 자신이 지금껏 해왔던 일과 생활 등의 모든 것을 부정당하지 않게 변호해야할 처지에 놓인 것을 깨닫는다.  점점 죽음이 다가오자 이반 일리치는 가족들을 바라본다. 그의 아들이 다가와 울고, 아내가 눈물을 머금고 절망의 표정을 보이자 가족을 원망하던 자신이 잘못됐다는 것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는 죽음을 맞이한다. 


다시 소설의 처음으로 되돌아가면, 이 소설의 백미를 알 수 있다. 이반 일리치의 장례식이 진행되는데, 여기서 하이데거가 말하는 죽음에 대해 얼버무리며 일상성에 파묻혀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동료 판사들이 장례식에 찾아와 추모보다는 젯밥에만 관심을 보이며, 자신의 이해득실만 따지는 모습은 압권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뾰뜨르 이바노비치가 마지못해 문상을 가야 한다는 의무감과 카드놀이를 하러 가고 싶은 마음 사이에 갈등하는 장면은 이러한 모습을 더 부각시킨다. 


이반 일리치가 죽어가는 과정을 보여주기에 앞서 이반 일리치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보여주는데, 이와 같은 서술은 다른 사람의 요람에서 무덤까지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다. 이반 일리치는 집안에서 수재로 불리며 살아왔고, 판사가 되는 것과 결혼생활도 우아하게 상류층의 품위를 지키며 살기위한 증명의 일환이었다. 그는 가정생활이 원활하지 않자 일에 집중했고 부부간의 불화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남들이 보기에 이반 일리치는 행복한 삶을 사는 듯 보이지만, 그렇지 못했다. 그는 가정의 문제에 대해서 해결하기보다는 회피하며, 일의 성공이 가정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결과적으로 자신이 아파오자 아내를 원망하기 시작하고, 가정에 불행이 찾아온다. 관직과 높은 보수만을 추구하면 가정의 행복을 지킬 수 있을 줄 알았지만, 결국 그가 틀린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유진 오닐의 ‘밤으로의 긴 여로’에서도 잘 나타난다. 가정이 불행해지 시작하면 서로가 서로를 탓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되면 가정의 불행을 막을 수 없다. 삶을 어떻게 바라보고 죽음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삶에만 충실하면 죽음을 잘 맞이할 수 있을까? 한 때 웰빙(well-being)열풍이 분 적이 있다. 이러한 삶의 태도를 틀렸다고 지적할 수는 없지만, 죽음을 즉시하지 않으면 우리는 죽음을 대비할 수 없다.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물음과 함께 어떻게 죽을 것인가라는 물음에 대하여 끝없이 성찰하다보면 우리는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죽음에 대비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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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으로의 긴 여로 열린책들 세계문학 111
유진 오닐 지음, 강유나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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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세계에서 생계형 범죄로 잡혔다는 기사, 일가족이 집단으로 자살을 하는 등의 안타까운 가족들의 소식들이 들려온다. 그러한 소식이 담긴 기사의 댓글과 반응들을 바라보면, 동정하는 이들도 있고, 가족구성원으로서 가정을 부양해야한다는 책임과 그에 따른 의무를 다하지 않는다는 비판여론도 존재한다.

하지만 그들이 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사연은 그들밖에 모른다. 냉정하게 바라보면 그들이 한심하게 보일 수도 있다. 내가 그 사람이 되어보지 않는 한, 가족구성원으로서 얼마나 힘들었고, 이 책임에 대해서 회피하고 싶은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이 작품의 가족들을 냉정하게 따지고 보면, 비난을 받아야할 가족일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는지를 살펴보면, 참 가슴이 아프다. 어머니인 메리도 마약중독자가 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어려운 형편에 직접적으로 병을 치료하기보다는 모르핀을 투여한 것이 화근이 되어서 마약에 취하게 된다. 어려서 병에 걸려 죽은 아이에 대한 죄책감과 아들 에드먼드가 폐결핵에 걸려서 시한부인생을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마약투여 없이는 제정신으로 살아갈 수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런 메리의 모습에 아버지인 제임스는 항상 죄책감을 가지고 살아왔다. 자신의 무능력함을 인정하고 싶지 않고, 항상 과거의 영광에 취해서 살고 있다. 그래서 항상 술에 취해서 산다. 아버지의 모습과 어머니의 마약투여 모습을 본 장남인 제임스 타이런 2세는 알콜중독자 및 패륜아가 된다. 안타깝게도 폐결핵에 걸려 시한부인생을 살아가는 에드먼드는 정말 손쓸 도리가 없다. 가족들을 위해서도, 자신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도 참 답이 없는 인생을 살아간다.

이 작품에 대해서 우리가 아는 일반적인 극의 전개를 기대하면 안 된다. 가족이 왜 불행하지에 대해서 서로 탓을 하면서 극이 전개된다. 아버지는 어머니 탓을 하고, 장남은 어머니와 아버지 탓을 하고, 차남은 아픈 자신의 몸을 탓한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모습이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제각각의 불행을 안고 있다’는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가정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각 구성원들이 맡은 바 책임을 다해야한다. 톱니바퀴 하나가 어긋나면 기계가 고장나듯이, 가정이 한번 불행해지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그 불행을 되돌릴 수 없다. 내가 가족의 한구성원으로서 책임을 다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만 거창하게 생각할 것이 아니라, 부모님에게 안부는 잘 전해드리고 있는지, 형제와 친밀하게 지내고 있는지 등 사소한 것들부터 시작해야한다. 가정이 행복해질 수는 없더라도, 불행이 닥치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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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로 박사의 섬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87
허버트 조지 웰즈 지음, 한동훈 옮김 / 문예출판사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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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생체실험을 통해 탄생한 동물인간들로 인하여 벌어지는 비극을 보여준다. 소설은 이방인이라 볼 수 있는 프렌딕의 시선에서 전개된다. 조난되어 모로박사의 섬에 정착하게 된 프렌딕은 처음 괴생명체들을 보았을 때, 인간이 실험을 당하여서 짐승같은 형태로 변한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들은 동물실험에 의하여 탄생된 동물인간들이였다. 이 부분에 대해서 나는 작가가 인간성을 잃고 살아가는 짐승같은 사람들의 모습을 그린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이 들었다.

동물인간들은 모로박사가 규정한 법을 배운다. 규칙은 간단하다. 하지만, 그러한 규칙을 지키지 못하는 동물인간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그들은 벌은 받게 된다. 이 장면들을 보면서, 가장 기본적인 법도 지키지 못하는 한심한 인간들이 떠올랐다. 동물인간들은 점점 인간성을 잃어가게 되고, 동시에 자신들이 가진 본능으로 회귀하게 된다. 그러면서 섬에 비극이 발생한다.

그들이 자신의 본능을 찾는 것이, 본래 자연에 맞는 이치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공적으로 인간성을 얻게 된 동물들이 자신의 본능대로 돌아가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다. 오히려 현대사회에서 나다움을 잃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아가면서, 원하지 않아도 해야 할 일들이 있다. 그러한 일들이 반복되면서, 사람들은 나다움을 잃게 된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누구든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 수 없다. 무엇이 가장 인간에게 어울리는 삶일까? 과거에 산 사람들은 행복했을까? 문명이 발달하기 이전의 원시인들은 현대인들보다 행복했을까? 어떻게 균형을 맞출 수 있을까..? 너무 어렵고 복잡한 일이다. 나는 아직 규정할 수가 없다.

그 괴기스럽고 불가해한 몸짓을 지켜보면서 나는 문득 불쾌감의 근원을 처음으로 똑똑히 깨달았다. 철저히 낯설면서도 기묘하게 낯익은, 앞뒤가 안 맞고 서로 어긋나는 그 인상이 무엇 때문에 비롯되었는지를 알게 된 것이다. 이 불가사의한 의식에 참여한 세 녀석은 사람 형상이었다. - P. 60

“사람이다 법을 배워야 한다.”

“네발로 걷지 않는다. 그게 법이다. 우리는 사람 아닌가?”

“물고기나 고기를 먹지 않는다. 그게 법이다. 우리는 사람 아닌가?”

“나무껍질을 할퀴지 않는다. 그게 법이다. 우리는 사람 아닌가?”

“같은 인간을 뒤쫓지 않는다. 그게 법이다. 우리는 사람 아닌가?” - P.85

“저들은 다 뭐요?”

나는 동물인간들을 가리키며 그들도 들을 수 있도록 목청을 한껏 높여 말을 이었다.

“저들도 사람이었소. 당신 같은 사람이었소. 당신이 짐승 같은 수단으로 저들을 타락시켰소.

당신이 저들을 노예로 만들었고 당신은 아직 저들을 두려워하고 있소.” -P.96

“놈들은 회귀하고 있소. 놈들에게서 내가 손을 떼는 즉시 놈들은 슬금슬금 원상태로 돌아가오. 천성을 도로 드러내기 시작하오.” - P.113

박사는 그들에게 최면을 걸었다. 어떤 일들은 불가능하고 또 어떤 일들은 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다. 이런 금기들을 그들의 마음결에 새겨 불복종이나 반항의 가능성을 잠재운다는 것이다. - P.117

불쌍한 짐승들! 잔인한 모로의 나쁜 면이 보이기 시작했다. 모로의 손을 거친 뒤에도

이 불쌍한 희생물들에게 고통과 불행이 또 찾아갈 거라곤 생각 못 했다. 돌담 안에서 실제 고문이 행해지던 순간에만 나는 몸서리쳤다. 전에 그들은 짐승이었고 환경에 본능을 맞추면서 하나의 생명으로서 나름대로 행복했으리라. 그런데 지금은 인간성이라는 족쇄에 묶여 몸부림친다. 결코 사그라들지 않는 두려움속에 산다.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법 때문에 불안해한다. 고통으로 시작된 그들 가짜 인간으로서의 삶은 하나의 긴 내적 몸부림이자 모로에 대한 기나긴 공포에 다름 아니다. 무엇을 위해? 나는 두서없이 생각하며 흥분했다. - P.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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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거율, 강의와 강연 하이데거 전집 10
마르틴 하이데거 지음, 김재철 옮김 / 파라아카데미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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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때문에(weil)’에 머물고, ‘왜?’를 묻지 말라!” -괴테-

근거율은 다음과 같다. ‘이유 없이는 아무 것도 있지 않다.’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번역한다. ‘근거 없이는 아무것도 있지 않다.’ 라틴어 표현 양식으로 이것은 ‘모든 존재자는 이유를 가진다(omne ens habet rationem)’로 표현된다. 이것은 “각각의 존재는 근거를 가진다.”라는 식으로 표현된다.

하이데거는 우리가 알든 모르든, 그리고 우리가 알게 된 것에 대해 특별히 주목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우리가 체류하는 곳은 언제 어디에서나 세계 안에 있으며, 우리와 마주치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그 근거를 탐구한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우리가 때때로 배후로 들어가 보려고 시도하지만 사유의 심연에 이르기까지 충분하게 그 근거를 들어내는 것은 부족하다고 비판한다. 이에 대한 대답을 근거율이 내포하고 있지만 근거율은 대답을 주지 않는다고 말한다.

데카르트가 모든 것을 의심하고, 명석하고 판명하게 제시되는 것만을 확실한 인식으로 허용함으로써 모든 인간의 지식을 흔들리지 않는 근거위에 두려고 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데카르트의 이러한 방식에 대해 라이프니츠는 그가 주도적인 원리로 여기는 표상작용의 명석함과 판명함이 어느 지점에 있는지에 대한 논의를 포기하였다고 지적한다. 라이프니츠가 데카르트는 그러한 지점에 별로 의심하지 않았다고 하이데거는 말한다. 근거율은 우리에 의해 언제 어디서나 버팀목이자 척도로서 사용되고 추구되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근거율은 그것의 가장 고유한 의미를 숙고하지 않을 때, 우리를 무근거에 빠뜨린다고 한다.

장미는 왜 없이 있다. 그것은 피기 때문에 핀다.

그것은 자기 자신에게 주의하지 않으며,

사람들이 자신을 보는지 안 보는지에 대해서도 묻지 않는다.

                                             -안겔루스 질레지우스-

장미는 장미이다. 그것은 틀림없이 자기 자신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장미는 본래 자신에게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없다. 장미는 자신이 존재하는 방식을 위해서 유달리 자기 자신에 대해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없다. 장미는 피기 때문에 핀다. 장미의 개화와 개화의 근거들 사이에는 근거가 그때마다 비로서 근거로서 존재할 수 있게하는 그런 근거들에 대한 주의가 개입되어 있지 않다.

안겔루스 질레지우스는 장미의 개화가 근거를 가진다는 사실을 부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장미는 피기 때문에 핀다. 이에 반하여 인간은 자기 현존재의 본질적 가능성 속에 존재하기 위해서 자신을 위해 그때마다 규정하는 근거가 무엇인지, 어떻게 근거가 존재하는지에 대하여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라이프니츠의 사유에 따르면 이는 다음을 의미한다. 즉 장미가 피기 위해서 장미는 자신의 개화가 근거하고 있는 근거의 송달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장미는 이유를 보충하는 것, 즉 근거의 송달이 장미-존재에 속하지 않아도 장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미는 결코 근거 없이 있지 않다. 장미와 근거율이 말하는 것과의 연관은 분열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하이데거는 오히려 인간이 ‘왜’없는 장미와 같은 방식으로 존재할 때, 비로소 인간은 가장 숨겨져 있는 본질적 근거 속에 참으로 존재한다고 한다.

『근거율』에서 하이데거는 근대의 표상적 주체에 기초한 라이프니츠의 근거율을 비판하고, 근거의 본질이 탈-근거로서 존재 자체에서 유래하는 것을 밝힌다. 이 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이데거의 이정표는 필수로 읽어야하는 듯하다. 이정표는 하이데거 전집 9권에 수록되어 있다. 주석이 풍부하지 않아서 철학사전에서 용어를 검색하지 않으면 읽기가 버거웠다. 처음부터 출판사와 번역자도 이 책의 독자를 하이데거의 이정표를 이해한 독자로 설정하고 출판한 것 같다.

책을 읽다보면 존재의 시간에 관한 내용도 나오고, 라이프니츠에 대한 근거율을 비판하는 것뿐만 아니라, 칸트와 헤겔의 관점도 나와서 이 둘을 모른다면 이 책은 활자만 본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책에서 존재의 역운 등의 다양한 개념어가 쏟아져 나온다. 솔직히 매우 어렵다. 고대철학의 내용도 나오고, 그리스 비극에 관한 내용도 나온다. 물론 이에 대한 주석은 없다. 앞부분을 이해를 못했더라도, 이 책에 마지막 챕터인 「근거율 강연」에서 하이데거 무엇을 말하고 싶은 지 조금은 알 수 있다.

P317 ~ P318

존재는 근거로서 경험된다. 근거는 ‘라치오’ 즉 해명으로 제시된다. 인간은 계산적으로 고려하는 생명체, 즉 이성적 동물이다. 인간이 이상적 동물이라는 규정이 인간의 본질을 다 드러내고 있는가? ‘존재는 근거를 뜻한다’라는 말이 존재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최종적인 말인가? 그렇다고 한다면 인간의 본질, 존재에 대한 인간의 귀속성, 존재의 본질은 여전히 계속해서 놀라움을 일으킬 만큼 사유할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렇다고 한다면 오로지 계산적으로 고려하는 사유의 질주와 그것의 엄청난 성과를 위해 사유할 가치가 있는 것을 포기해도 되지 않은가? 그렇지 않다면 계산적으로 고려하는 사유에 현혹되어 사유할 가치가 있는 것을 지나치는 대신에 사유가 그것에 응답할 수 있는 길을 찾으려고 우리는 애쓰고 있는가? 물어야 할 것은 바로 이것이다. 그것은 사유가 물어야할 세계물음이다. 이 물음에 대한 대답에서 이 땅과 이 땅위의 현존재에서 무엇이 일어날 것인지가 결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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