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름에 대한 찬양 - 개정판
버트란드 러셀 지음, 송은경 옮김 / 사회평론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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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2.

     '유용한' 지식이 '대단히' 쓸모 있다는 데 대해선 의심할 여지가 없다. 현대 세계를 만든 건 바로 그 '유용한' 지식이니까. 그것이 없었더라면 우리에겐 기계도, 자동차도, 철도도, 비행기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없었다면 현대의 광고나 선전도 없었을 거란 사실도 덧붙여야 마땅하다.


     버트런드 러셀의 [게으름에 대한 찬양]을 올 초 반디앤루니스 잠실 제2롯데월드점에서 일하던 중 사다 놓고서는 '게을러서' 읽지 않고 있다가 얼마 전에서야 펼쳐 보게 되었다. 본문 발췌를 끝내고 책을 책꽂이에 꽂으려는데 같은 책이 한 권 더 있는 것을 발견했다. 2003년 3월 도장이 찍혀 있었다. 고등학생이었던 내가 무슨 생각으로 이 책을 샀던걸까?

     수학 시간에 책상 밑에서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을 읽고 있다가 선생님한테 걸리고 말았다. 딱 한 페이지를 남겨놓은 상태였다. 가지고 나오라는 선생님의 호통에 나는 무슨 '깡'이었는지 마저 다 읽고 나가겠다고 했다. 그 일로 나는 수학 선생님에게 된통 욕을 얻어먹었고 책은 압수를 당하고 말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선생님께 불려 가게 되었는데, 이유인즉슨 내 책 [오만과 편견]을 잃어버렸다는 거였다.

     얼마나 재밌으면 마지막 장까지 다 읽고 내겠다고 배짱을 부렸을까 싶어 압수한 책을 출퇴근 시간에 읽으시다가 그만 책을 잃어버리고 말았단다. 선생님은 미안하다며 잃어버린 책 대신 버트런드 러셀의 [게으름에 대한 찬양]을 사다가 내게 주셨다. 당시에는 책 잃어버린 사실에 분개하느라고 새로 받은 책은 읽어볼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책꽂이 한 구석에 처박아두었던 모양이다. 결국 내 손으로 다시 같은 책을 살 줄은 모르고서.


     # 97.

     현대의 인간은 불행이 공격해 오면 스스로를 통계상 총계 속의 한 단위로 의식한다. 사소한 패배들의 서글픈 행렬 속에 과거와 미래가 그의 앞에 펼쳐진다. 인간 자체가 무한한 침묵 중간중간 짧은 막간을 이용해 고함치고 법석을 떨며 활보하는 우스꽝스런 동물로 보인다.

     "머물 곳이 없는 인간은 가엾게 벌거벗겨진 채 포크에 찍힌 동물에 다름아니다."고 말한 리어 왕의 생각은 그 당시 익숙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를 광기 쪽으로 내몰았다. 그러나 현대의 우리에겐 익숙하고 평범한 생각일 뿐이다.


    버트런드 러셀은 우리의 역사가 부지런함과 유용함을 숭배하는 쪽으로 편집되어 왔음을 지적한다. 유용한 지식을 발견한 과학자의 부지런한 삶이 위인전으로 편찬되고 그 공부법을 정리한 책이 다시 베스트셀러가 된다. 하루 네시간 수면법, 아침형 인간 되기, 여섯시간 공부법, 1만시간 법칙 등등 습관 훈련의 필요성을 담은 책들이 큰 인기몰이를 한다는 뜻이다. 이런 세상에서는 나 같은 사람은 참 한심해지기 쉽다. 누가 깨우지만 않으면 이틀도 거뜬히 잘 수 있는 나는 하루 네시간 수면은 물론이거니와 아침형 인간도 못 되고 여섯시간을 주구장창 앉아서 공부만 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부지런함을 강조하는 것이 왜 문제인가. 부지런한 것이 좋은 거라는 건 너무나 당연한데, 그것을 선전하고 장려하는 것이 왜 문제가 되는가. 버트런드 러셀이 역설하는 바는 위의 제시문에서 강렬히 드러난다. 현대 인간은 불행이 공격해 오면 스스로를 통계상 층계 속의 한 단위로 인식한다. 자살률 OECD 국가 1위, 하루 40명 가까이 자살하는 나라, 청년 실업률이 껑충 뛰고 고령화 사회가 빠르게 진행된 나라. 정년퇴직한 노인이 생계유지를 할 길이 없어 자살하고, 서울의 쟁쟁한 대학을 졸업한 청년들이 취직을 하지 못해 자살하는 나라. 그리고 그 수치상의 나.

     부지런함이 장려되고 숭배되는 사회 안에서 한 개인은 노력하기를 멈출 수가 없다. 부지런하지 않음이 죄악이 되기 때문이 아니다. 부지런한 자아의 상실은 나라는 존재의 부정이 되기 때문이다. 부지런하지 않은 나는 사소한 패배들의 행렬에 나란히 서 있을 뿐 나로서 인정되지 않는다.


     # 231. 

     죽음에 대해 계속 생각하는 것 역시 해로운 방법이다. 어느 한 주제를 너무 배타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며, 특히 행동이 뒤따르지 않을 땐 더욱 그렇다. 물론, 자신의 죽음을 늦추기 위한 조치는 가능하며 정상인이라면 누구나 적당한 선에서 그렇게들 행동한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죽음을 막을 순 없다. 그러므로 죽음이란 것은 무익한 명상 주제다. 게다가 그렇게 한 생각에만 빠져 있다 보면 다른 사람들 및 주변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기 쉽다. 사실, 정신 건강을 유지하는 길은 객관적 관심사에 달려 있다.


     건강한 한 개인의 영혼은 어떤 색깔일까.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있다. 나는 어떤 색깔일까. 우리는 어떤 사회에서 또 어떤 가정에서 성장하느냐에 따라서 건강한 개인에 대한 이상형을 갖게 된다. 부지런함에 대한 찬양과 숭배가 지나치면 되려 건강치 못하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부지런함을 추구하느라 게으름을 죄악의 편에 놓게 된다면 태양 뜨는 곳에 응당 있어야 할 그늘 자리를 배제하는 셈이 되고 그것은 입체적인 인간을 평면화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물론 버트런드 러셀이 이야기하는 '부지런함'과 '게으름'에 대한 정의가 우리가 언뜻 생각하는 '부지런함'과 '게으름'은 아니다. 그가 생각한 '부지런함'은 내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채 마이크로 단위로 쪼개져 사회의 부품으로 쳇바퀴를 도는 것을 말한다. 노동하는 노동자의 열정을 임금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 다음 노동력을 재생산할 비용을 미리 받는 형태의 임금제도에 순응하는 것을 말한다.

     반면 '게으름'은 그 컨베이어벨트에서 내려와 재빠르게 회전하는 시간의 강가에 비켜 서서 사색하는 것을 뜻할 것이다. 먹고사는 문제뿐 아니라 좀 더 다양한 방면에 대해서 고민하는 것. 손가락 다섯 개가 고루 자라는 것처럼 아무의 방해도 받지 않고 느긋하게 철학하는 것.


     자아는 타자를 정의함으로서 정의된다. 때문에 부지런함에 대한 찬양은 게으름에 대한 정죄함으로서 시작된다. 러셀이 원하는 것은 타자로 정의된 인간의 본성 중 하나를 자꾸만 자꾸만 자아 쪽으로 흡수시키려는 실천이지 않을까. 그렇게 점점 더 바깥, 그보다 더 바깥까지도 자아로 인정되기를 바라는 마음이지 않을까. 물론 그는 깨우지 않으면 이틀도 잘 수 있는 나의 '게으름 실천'에 대해서는 달가워하지 않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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