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지음, 박은정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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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7.

     나는 위대한 사상에 필요한 건 작은 사람이지, 결코 큰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념에 큰 사람은 쓸모없고 불편한 존재라는 것을. 큰 사람은 완성되는 데 손이 많이 간다. 나는 바로 그런 사람을 찾는다. 작으면서도 큰 사람. 그는 멸시당하고 짓밟히고 학대당했지만, 스탈린 수용소와 배반의 아픔을 겪었지만, 결국은 승리를 거뒀다. 그는 기적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사람들은 전쟁의 역사를 승리의 역사로 몰래 바꿔치기해버렸다. 작으면서 큰 사람, 그가 직접 그 사실을 말해줄 것이다...


     내가 나를 여자라고 느낄 때 나는 그 감각을 신뢰할 수 있을까. 여성주의 스터디를 시작하고부터 내내 머릿속에 맴돌던 질문이었다. 기분이 꿀꿀한 날 손톱에 매니큐어를 칠하면서 스트레스를 푸는 것, 짧은 치마와 스틸레토 힐이 예쁘다고 느끼는 것, 새로 나온 섀도우에 관심을 갖는 것을 가지고 '나는 여자야'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것이 학습받은 젠더가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 알지?

     한껏 차려입고 지하철을 타면 나를 아래위로 훑는 응큼한 아저씨 꼭 한 명은 만나게 된다. 그럴 때 그 눈초리가 정말 기분이 나쁘면서도 내가 한껏 차려입은 이유가 타인의 시선을 즐기기 위한 것도 있다는 사실을 새삼 인정하게 된다. 그럴 때 나는 이중적인 감정 속에서 혼란스럽다. 나는 지금 기분이 나쁜가, 아니면 좋은가? 내가 여자인 것은 나에게 만족을 주는가 아니면 타인에게 만족을 주는가? 하고.


     # 290.

     소녀병사들 시신을 많이 봤거든요. 진흙탕 속이고 물웅덩이 속이고 죽어 누워 있는데, 글쎄 뭐랄까, 정말이지 그렇게는 죽고 싶지 않더라고요. 그걸 보고 난 다음부터는 '어떡하면 죽지 않을까' 하고 몸을 피하는 게 아니라 얼굴부터 피하고 보는 거예요. 팔부터 숨기고. 모르긴 몰라도 다른 소녀병사들도 아마 다 나랑 비슷했을걸요. 남사병사들은 그런 우리를 보고 웃었어요. 남자들이 보기엔 우스웠던 거죠. 살아남을 걱정은 안 하고 쓸데없는 일에 신경쓴다며 핀잔을 줬어요. 어리석은 여자들 걱정거리라고.


     전쟁중에 여자와 남자가 있었을까. 전쟁 중에는 산 사람과 한때는 살아 있었던 정물 덩어리가 있었다. 탱크가 아이들의 행렬을 그대로 밟고 지나가면 요즘 말로는 '로드 킬'이라고 하는 일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벌어졌다. 적군 포로는 사지를 찢어 죽였고 그 과정에서 눈알이 튀어나왔다. 여자 포로는 강간당한 뒤 가슴이 도려져 살육당했다. 전쟁은 전선에서만 벌어지는 게 아니었다. 민가에서도 벌어졌고, 최후방에서도 벌어졌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는 2차대전 후 소련의 여자 병사들을 찾아다니며 전쟁의 이야기들을 들어보는 방식으로 구성된 책이다. 허구가 전혀 가미되지 않은 논픽션이지만 이 책이 여타 소설보다도 더 소설다운 이유는 '진실'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여자 병사들이 들려주는 전쟁의 기억은 남자 병사들이 들려주는 전쟁의 기억과 많이 다르다. 훨씬 입체적이다. 가령 전투에 참여하던 날 하늘이 어땠는지, 공기중의 냄새가 어땠는지, 누구와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 무엇을 만졌는지를 전부 이야기해주는 식이다.


     # 373.

     만남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가끔, 고통은 고독이라는 생각을 한다. 완전한 고립. 한편으로 고통은 앎의 특별한 형태는 아닐까라는 생각도 든다. 인간의 삶에는, 특히나 우리네 삶에는 고통 외의 다른 방법으로는 도저히 전달할 수도 지켜낼 수도 없는 뭔가가 있다. 그건 이 세상이 그렇게 생겨먹었고, 또 우리가 그렇게 생겨먹었기 때문이다.


     남자에게 전쟁이 공적 영역의 연장이었다면 여자에게는 전쟁은 사적 영역에서의 공적 영역으로의 사회 진출이었다. 남자가 전쟁 임무를 수용하고 실행하는 일에 익숙했다면 여자에게는 전쟁 임무 하나하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남자가 받아들이는 전쟁이 평면적인 것일 때 여자가 받아들이는 전쟁이 입체적일 수 밖에 없는 이유도 거기에 있지 않을까.

     전쟁 상황에서 여자 병사들은 수를 놓았고 배낭으로 치마를 만들어 입었다. 남자들의 셔츠를 이용해서 속옷을 만들고 빨간 스카프를 장식처럼 둘러매고 다녔다. 빨간 스카프 때문에 적에게 노출되어 죽임을 당할지언정. 전쟁에서의 죽음은 삶을 훼손하는, 삶을 존중하지 않는 방식으로 겪어야 했지만 그 와중에도 여자 병사들은 살아있음을 확인해야 했다. 죽음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남자들이었고, 구석구석에서 삶을 발견하고 건져올리는 것은 여자들이었던 것이다.


     전쟁과 죽음을 대하는 서로 다른 두 태도에 대하여, 한쪽을 '사소하다'고 부를 수도 있을지 모른다. 그런데 그 전에 이렇게 질문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사소하고 중요한 것은 누가 결정하는가? 하고.


     # 521.

     베를린에 입성하고, 한번은 길을 가는데 갑자기 맞은편에서 남자애 하나가 튀어나오더라고. 손에 기관단총을 들고서. 어린 독일시민군이었어. 이미 전쟁도 끝나가는 판인데. 그때가 전쟁 막바지였거든. 나는 손이 이미 기관단총에 가 있었어. 여차하면 발사할 준비가 돼 있었지. 아이가 나를 보고는 눈을 끔벅끔벅하더니 '앙'하고 울음을 터뜨렸어. 그러자 글쎄, 웃기지도 않게 나도 눈물이 나는 거 있지. 빌어먹을 기관단총을 들고 서 있는 그 아이가 어찌나 짠하던지. 나는 재빨리 아이를 무너진 건물의 개구멍으로 밀어 넣었어. 아이를 숨겨주고 싶었거든. 하지만 아이는 내가 자기를 죽이려는 줄 알고 기겁을 했어. 그때 내가 모자를 쓰고 있어서 내가 여자인지 몰랐을 텐데도 내 손을 덥썩 잡더라니까. 아, 그러고는 엉엉 흐느껴 우는데! 나도 모르게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어. 아이가 너무 놀라 말을 못하더군. 어쨌든 전쟁은 전쟁이었으니까.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알까? 내가 어떤 여자인지.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치마를 좋아하는 여자와 바지를 좋아하는 여자 중에서 나는 어떤 여자인지. 그리고 그 각각의 색깔들이 '여자인' 나의 색깔인지 아닌지를.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를 읽으면서 그런 의문이 더욱 깊어졌다. 전쟁 중에 여자 병사들이 보여준 모습이 사회적으로 학습된 젠더의 발현이라면 우리 여자들은 죽음 앞에서까지 진짜 나를 발견하지 못한 샘이 아닐까? 그렇다면 아무에게도 학습되지 않은 나 그 자체는 어디서 어떻게 발견해야 하는 걸까?

     어찌 보면 여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고민일 수 있겠다. 무심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색의 립스틱을 고르면서도 이게 진짜 내가 좋아하는 게 맞나? 학습된 거면 어쩌지? 하고 의심하게 되는 것은. 내가 느끼는 나에 대해서 의심할 수밖에 없는 것은. 남자라면 그런 고민의 상황에 놓일 일 자체가 없을 수도 있겠다. 남자의 남자다움은 고무되고 숭배되기 때문이다. 남자는 스스로를 남자답게 꾸민 날 지하철에서 기분이 좋으면서 나쁜 이중적 감정 상태에 놓이지는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나는 좀 더 나 자신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더 깊이 더 오래. 그리고 결국 나는 나 스스로에 대해서 말하게 될 것이다. 매우 입체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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