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혐오가 어쨌다구? - 벌거벗은 말들의 세계 우리 시대의 질문 2
윤보라 외 지음 / 현실문화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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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2/43.

     여성이 성적 욕망을 실현하려면 기꺼이 자기 자신이 성적 욕망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이중성은, 여성에 대한 사회의 이중 규범을 통해 여성의 주체적 의지는 지우고 여성의 성적 대상화만 남길 위험에 언제든지 노출시킨다. 또다시 여성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한 후 내린 결론은, 굳이 짧은 치마를 입고 계단에서 가방으로 다리를 가리는 한국 여자들의 이중성에 대한 강도 높은 비아냥이다.

     이토록 오랫동안 여성 혐오 담론을 적재하는 것이 과연 쉬운 일이었을까. 여기서 오는 긴장과 피로함은 없었을까. 여성 혐오 담론의 강박성과 병리성이 가장 잘 드러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유머'와 '드립'이라는 가장 막강하고도 안전한 방패 덕분이다. 여성 혐오 담론에 대한 우려와 조작 자료에 대한 문제 제기는 유머에 대한 과잉 반응으로 차단당한다. 일베 현상에서 사회가 몸살을 앓았던 당시, 많은 사람이 일베의 논리를 '루저들의 배설'로만 치부했다. 그러나 일베가 정확하게 뒤집은 명제가 이것이다. 그들의 가장 강력한 이데올로기는 바로 배설을 통한 유머와 드립이며, 이는 비단 일베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드립이라는 말이 애드리브에서 왔음을 생각해보면, 혐오문화 혹은 배제의 문화는 어릴 때 놀이와 많이 닮아 있다. 어릴 때 내가 주로 어울려 놀던 친구는 나까지 세 명이었다. 우리는 교회에서 만난 동갑내기였는데 같은 동네에 살기도 했고 형제들도 다 같은 또래라 금방 친해졌다. 그 때 했던 놀이들을 생각해보면 주로 얼음땡, 공기놀이, 혹은 이름 짓기도 불가능한 짝짓기류 놀이들이었다.

     규칙은 즉석에서 만들어졌다. 같은 얼음땡이더라도 우리가 모인 장소에 따라서 규칙이 조금씩 바뀌었다. 공터에서 놀 때는 눈 가리고 얼음땡, 학교 운동장에서 놀 때는 정글짐 위에서 내려오면 안 되는 얼음땡, 교회 안에서 할 때는 소리 내면 안 되는 얼음땡이 되었다. 그런 규칙들은 입 밖으로 꺼내지기도 했지만(땅 밟으면 안 됨 퉤퉤퉤! 라는 식으로) 보통은 암묵적으로 정해졌다. 집중하지 않으면 규칙을 어기개 되는 셈이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키가 컸다. 덩치도 컸고 손도 발도 컸다. 햄버거 하나를 혼자 다 못 먹던 내 친구 둘에 비해서 나는 식성도 매우 좋았다. 그런데다가 민첩한 편도 아니었고, 유행에 민감하지도 못했다. 레이스 양말을 갖춰 신는 천상 기지배들 둘 사이에서 나는 굳이 치자면 왈가닥 선머슴아였던 것이다.

     정글짐 위에서 얼음땡을 할 때, 몸이 여리여리하고 작아서 쉽게 구조물 사이를 오갈 수 있었던 그 애들과 나는 달랐다. 그래서 나는 정글짐 위에서 하는 얼음땡이 세상에서 제일 싫었다. 아직도 정말 싫다. 그 놀이를 할 때 나는 영원히 술래일 수밖에 없었고 애들은 그런 나를 놀리며, 내 주변에서 나를 건드리고 도망가고, 도발하며, 낄낄거리며, 좋아했다.


     #107.

     조물주 외에는 누구에게나 억울한 일이 있다. 기존의 언어가 어느 측면에서든 기득권자의 입장에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아닌 이상, 아니 대통령조차도 억울하다. 말은 경합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경합의 현장은 평평한 땅이 아니다. 논쟁은 언제나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벌어진다. 한쪽은 견고한 바닥에서 운동화를 신고 있으며, 한쪽은 흔들리는 땅에서 하이힐을 신고 있다(신을 것을 요구받는다).

     여성들이 흔히 경험하는 바, 익숙하게 들리므로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은데 뭔가 불쾌하고 분한 감정이 드는 말을 들으면 이에 대해 당황하고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자신을 스스로 탓하게 된다. 이것이 정치이며, 이 느낌이 바로 정치의식이다. 물론, 이는 논리나 지식과 같은 개인적인 역량 문제가 아니다. 내가 사회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 따로 공부해야 하는 문제다.


     집단에서 어떤 놀이를 할 때 가장 핵심이 되는 에너지가 바로 이 드립력이 아닐까. '병맛'이면서, 아니 '병맛'이라서 진짜 웃긴 드립들은 그 놀이의 규칙으로, 그리고 집단의 문화로 자리잡기가 쉽다.

     언어는 이미지이기도 하다. 언어는 실제가 아니고 실제하는 것을 지시하는 수단이므로 이미지이다. 그렇기 때문에 언어는 발화되는 순간 그가 지시하지 않은 다른 것들까지도 지시하게 된다. 가령 초음파를 통해 태아의 성별을 식별할 때 의사는 1에서 3밀리미터 정도의 '튀어나온(?)' 부분을 가지고 남성과 비남성을 구별한다고 한다. 이 때 의사는 남성을 지시하면서 비남성을 함께 지시한다. 즉 남성은 비남성을 통해서 정체화되는 것이다.

     혐오나 배제의 문화는 지시되는 것과 지시되지 않는 것이 매우 정치적으로 선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마치 놀이 속의 우연한 속성 탓인 것처럼 위장하면서 짜여진다. '드립'과 '유머'가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 "웃자고 한 말에 죽자고 달려들지 좀 말자?" 하는 표현에서도 확인할 수가 있다.

     이 경우 여성은 남성과의 놀이 속에서 웃잔 말에 죽자고 달려드는 쪽이 된다. 놀이는 그렇게 정색하고서는 할 수 없다. 놀이는 즐겨야 하는 것이고 가벼워야 하는 것이다. 그게 싫으면 애초에 놀이를 할 수가 없다. 왜냐면 놀이가 원래 그런거니까. 놀이는 재밌자고 하는거니까. 혐오와 배제의 문화가 한 번 형성되면 혐오당하고 배제당하는 쪽에는 그 어떤 선택지도 허락되지 않는다. 나를 조롱하고 혐오하고 배제하는 쪽을 향해 분노할 수도, 울어버릴 수도, 웃을 수도 없다. 분노하면 열폭이 되고 울면 찌질해지고 웃으면 속만 쓰리기 때문이다.

  

     #176.

     따라서 아흐메드는 감정의 사회성을 제안하며, 감정이 대상 및 타자와의 접촉을 통해 어떻게 몸의 표면과 경계를 형상하는지를 질문한다. 이 작업을 위해 아흐메드는 감정을 논의하는 질문의 구조 자체를 바꾸는데, "감정이란 무엇인가"가 아니라 "감정은 무엇을 하는가"라고 질문한다. 감정이 몸과 사회에 작용하는 방식, 그리고 감정의 작용을 통해 형상되는 모습을 살피고자 하는 것이 아흐메드의 문제의식이다.


     다시 어릴 때를 생각해 보면, 혐오와 배제의 문화가 우리 사이에서 나름(?) 공평하게 진행되어 왔음을 인정해야만 하겠다. 얼마나 공평했으면 우리는 왕따도 돌아가면서 시켰다. 나를 왕따시키던 친구 둘이 서로 수틀리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둘 중 하나가 내게 와서 나머지를 도마 위에 올렸다. 그러면 나도 못 이기는 척 도마 위에 올라온 생선 토막을 내려다보곤 했다. 다음 순서가 다시 내가 될 수도 있다는 건 생각도 안하고.

     그러나 그건 그 세계에 우리 셋 뿐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생각한다. 혐오와 배제의 문화는 어떻든 일방향적인 것이고, 정희진이 지적하듯이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벌어지는 놀이다. 한 쪽은 견고한 바닥에서 운동화를 신고, 한 쪽은 흔들리는 바닥에서 하이힐을 신고 얼음땡을 한다. 이 불공평한 정치적 관계를 전복시키고자 하는 비남성들은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같이 낄낄거리는 방법이 있을 수 있다. 미러링을 하면서 어느 정도 실천한 것 같기도 하다. 또 웃자고 한 말에 끝까지 죽자고 달려들 수도 있다. 정말 재미 없어. 너넨 이게 웃기니? 하고 분위기를 썰렁하게 만들면서 놀이에 깽판을 놓는 것이다. 나는 그 중에서 뭘 할 수 있을까. 요즘 그런 고민을 정말 많이 한다. 말이 쉽지 이도 저도 하이힐 신은 쪽만 불편하다. 그 불편을 감수하고 한 번 말하고도 같은 일은 능청스럽게 다시 벌어진다. 그러면 또 한 번 더 말하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자꾸만 웃음기 싹 빼고 두 주먹 쥐고 걷게 된다. 아름답지 못하게. 촌스럽게. 더불어 '유머'와 '드립'이 얼마나 탁월한 에너지인지 다시 한 번 실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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