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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도시를 디자인하다 1
정재영 지음 / 풀빛 / 2008년 11월
평점 :
‘철학’ 그러면 왠지 고상하며 무언가 생각하고 사고하는 능력이 남다른 사람들의 학문으로 여겨졌던 적이 있었다. 마침, 고교시절 존경했던 선생님이 철학을 전공했던 분이었는데, 왠지 모르게 그 선생님이 더 멋져 보이고, 무엇인가 더 깊이 있는 ‘그 무엇’인가를 전달해 줄 수 있는 듯 보였다. 그래서 한 번은 철학의 결론이 무엇이냐고 물어 본 적이 있었다. 그 때의 대답은 나의 ‘철학’에 대한 선입견을 구성하는 막대한 영향력을 끼쳤었다.
“철학의 결론은 모르겠다. 라는 것이 결론이다.”라고 답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때부터인가, ‘철학’은 너무나도 멀고 먼 단어가 되었고, 그저 막연한 동경의 대상이 되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이 책이 서평 대상 목록에 제시되었을 때, 왠지 한 번 도전해 보고 싶었다.
왜냐하면, 제목에 ‘철학’이란 단어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철학, 도시를 디자인하다>(정재영)는 딱딱한 철학 수업보다는 잔잔한 이야기처럼 다가와서 그런대로 편하게 읽을 수 있었다. 물론 철학 이야기이다 보니, 어쩔 수 없는 철학적 ‘정의’와 그 설명들 특히 무슨 무슨 주의(-ism)는 보통의 나와 같은 사람에게는 먼 나라 이야기처럼 여겨지는 부분들도 없지 않았지만, ‘철학’이란 단어를 첫 장에서 보았음에도, 이 책을 들었다면, 그 정도의 도식적인 나열은 참고 머리에 집어넣어도 될듯하다.
이 책은 유럽의 여러 도시들을 여행하면서, 그 도시들을 도시로써 존재 가치의 맛과 향기를 발산하게 했던, 시대의 철학사조들을 자연스럽게 버무려 주는 책이라 하겠다.
첫 번째 도시는 비엔나에서 출발한다.
비엔나라는 도시에서 유래된 비엔나 커피와 비엔나 쏘시지에 대한 설명에 작은 미소를 머금게 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만큼 여러 가지가 섞일 수 있는 지리적 위치에서의 비엔나의 특수성을 통해서 나타날 수 있는 철학에 대해서 설명한다. 비엔나라는 도시는, ‘비엔나 서클’이라는 모임을 통해서 ‘논리경험주의’가 발화된 도시다. 저자는 비엔나라는 도시에서 논리경험주의 또는 논리 실증주의라고 불리는 철학사조가 어떻게 시작되고 구성되었고 발전하게 되었는지 조근 조근 설명한다. 또한 저자는 비엔나 서클의 구성원들의 이름, 그들의 철학적 영향력 등을 비교적 상세히 설명한다. 마치 알려지지 않은 그들을 감추어진 보석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은 사람처럼...
물론 저자는 비엔나 서클의 과학적 세계관이 환원주의의 전형이라며 “모든 철학은 상식에서 출발할 때 생명력을 갖지만, 그 상식을 절대화할 때 생명을 잃는다. 비엔나 서클의 철학도 그 덫에 빠졌다. 과학을 절대화하고, 경험을 절대화하고, 환원을 절대화하면서 상식과 멀어졌다....과학이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만능은 아니다. 모든 것을 과학으로 만들 수도 없다. 또 과학이 절대화된 지식을 꿈꾸는 학문도 아니다. 하나의 틀 안에 가둘 수 도 없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철학은 더 열려 있어야 하고, 더 소통해야 한다고 충고하면서 비엔나에 대한 결어를 마무리하고 있다.
두 번째 도시는 파리 근교에 잇는 낭테르 대학에서 시작한다. 현대 사회의 흐름을 바꾼 68운동의 진원지가 바로 낭테르 대학이기 때문이란다. 사실 나는 ‘68 운동’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이다. 그런데 바로 이 책을 통해서, ‘68 운동’이란 이름을 들어 보았고, ‘68 운동’의 시작과 과정, 의미 그리고 파급 효과 등을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다.
저자는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불리는 새 시대의 징후가 68 운동을 계기로 포착되었다고 보았다. 그리고 저자는 자연스럽게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서 잘근잘근 설명한다.
3장에서는 하나의 도시를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관점, 어떤 시각으로 보느냐에 따라 이해되고 인식하는 실재가 전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오스트레일리아가 세계의 중심이 되어 있는 지도를 실재적인 예로 제시한다. 그러면서 저자 자신이 지지하는 철학적 입장을 밝힌다.
“나는... 객관적 진리를 옹호라는 객관주의 입장에 서 있다. 여기서 ‘객관적’이라는 말은 진리의 절대성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시각과 문화의 상대성에 대칭적인 의미로 사용하는 것도 아니다. 리얼리즘에서 지지하는 ‘객관적 실재’의 개념처럼 주관적 인식과는 독립적이라는 뜻이다. 나는 시각과 문화의 상대성을 지지한다. 그러나 시각과 문화의 상대성이 진리의 개념을 무너뜨린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시 말해, 시각과 문화의 생대성이 진리를 국지화하고 상대화한다고 믿지 않는다. 따라서 보편주의자들처럼 어렵고 힘들게 파편화된 진리의 조각을 맞추어 나가기를 원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자신의 철학적 사고를 바탕으로 저자는 “버려야 할 것은 과학을 절대화하고, 진리를 절대화하고, 이성을 절대화한 ‘절대주의’다.”라고 주장하며 ‘절대주의’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저자는 절대주의와 상대주의(저자는 상대주의에 대해서도 비판한다)의 모순을 해결하려는 제3의 세계관을 ‘철학적 리얼리즘’이라고 제시하고 있다.
세 번째 도시 피렌체
저자는 피렌체의 우피치 미술관에서 미술 작품을 소개하면서, 르네상스 시대의 철학 사조를 설명한다. 저자는 르네상스의 진정한 기초는 ‘선 원근법’이라고 주장한다. 신의 시각에서 인간의 시각으로 이동한 것이야말로 르네상스의 진정한 의미라면, 르네상스의 대표적인 화가인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바로 선 원근법을 통해서 르네상스의 이념을 진정으로 실현했다고 설명한다(물론 미켈란젤로에 대해서는 다른 설명을 한다).
저자는 자연스럽게 르네상스 시대가 완성될 수 있었던 이유 중에 하나로 메디치 가문의 수훈을 든다. 메디치 가문이 종교, 철학, 예술 등등의 많은 분야에서 끼친 영향력은 그야말로 대단했었나 보다, 어쨌든 메디치 가문은 ‘르네상스의 대부’라고 불리고 있다고 한다.
이런! 책에 대한 서평이 책의 요약이 될 판이다. 요약이 아닌 간단한 평으로 전환해야겠다.
암스테르담의 근대 합리주의 철학, 에든버러의 근대 경험주의 철학이 제 1권에서 다루어진 도시와 철학의 이야기라면, 제 2권에서는 쾨니히스베르크를 처음으로 다루고 있다. 특히 쾨니히스베르크는 얼마 전에 읽은 <세상을 삼킨 책>에서 칸트의 도시로 알려지면서 왠지 다른 어느 도시보다 친근함이 배어있는 듯 했다.
그리고 베를린은 탈근대를 준비한 헤겔 철학의 도시로, 런던은 자본주의의 출발점에서 준비된 마르크스주의의 출현으로, 바젤은 니체 철학의 도시로 설명되어 지고 있다.
그리고 아테네는 철학의 기초와 출발로써, 로마는 서양의 사고의 틀을 만든 중세 철학의 도시로 설명하고 있다. 대략 그 도시의 특징적인 철학이 여러 가지로 설명되어 지고 있다.
이 책의 특징은 철학과 역사와 기행의 절묘한 조화라고 하겠다.
물론 철학 자체의 무거운 주제만 책에 등장한다면, 특정한 연구자들만의 책이 되었을 것이지만, 그 무거움을 도시의 역사와 현재의 모습으로 적절히 조합함으로, 특정한 사람들만의 책으로 취급될 수 있는 위험을 모면한 것 같다.
저자는 독자들에게 철학의 무거움을 완전히 벗겨주지는 못했지만(아마도 어떤 철학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렇다고 그 무거움을 독자의 어깨 위에 떡하니 올려놓고, 나 몰라라 하지 않고, 어떻게든, 독자와 함께 지고 싶어 한 듯 하다. 그래서 책을 읽는 동안, 완전하게 도시와 철학의 관계를 이해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아, 이 도시에는 이런 역사와 내용들이 있었구나...”하고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책이 된 것 같다.
‘서울’ 그러면, 어떤 철학의 도시로 불릴 수 있을까, 문득 이러한 생각이 들면서, 우리나라에는 어떤 철학이 주류를 이루고 있을까, 철학적인 기초가 있기는 한 것일까, 깊이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