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걸 다 잃는 일이 너무나 쉽게 일어난다는 걸 펄롱은 알았다. - P22

두 사람은 계속 걸었고 펄롱이 알거나 모르는 사람들을 더 마주쳤다. 문득 서로 돕지 않는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나날을, 수십 년을, 평생을 단 한번도 세상에 맞설 용기를 내보지 않고도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부르고 거울 앞에서 자기 모습을 마주할 수 있나? - P119

펄롱은 미시즈 윌슨을, 그분이 날마다 보여준 친절을, 어떻게 펄롱을 가르치고 격려했는지를, 말이나 행동으로 하거나 하지 않은 사소한 것들을, 무얼 알았을지를 생각했다. 그것들이 한데 합해져서 하나의 삶을 이루었다. 미시즈 윌슨이 아니었다면 어머니는 결국 그곳에 가고 말았을 것이다. 더 옛날이었다면, 펄롱이 구하고 있는 이가 자기 어머니였을 수도 있었다. 이걸 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면. - P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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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 머릿속으로 이런 문장을 암송하여 내 마음을 안정시킨다. 내 콤플렉스는 얼굴로 드러나지 않는다. 내가 보는 나는 다른 사람들이 보는 바와 다르다. 모든 것이 잘되고 있다. 나는 내 자리에 있다. - P66

나는 내 남편을 안다. 그의 안목이 예리하다는 것을 안다. 그에게 통찰력이 있고 그의 연상에 상당한 일리가 있다는 것을 안다. 그가 어떤 사람을 한두 마디 말로 쉽게 크로키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도 안다. 그러니까 나는 다음과 같은 점을 분명한 사실로 받아들여야 한다. 나와 결혼해서 10년 넘게 살고 있는 남자는 내가 한낱 귤이라고 생각한다. - P85

누군가를 열렬히 사랑하면 그 사람을 초조하게 기다리기 마련인가? 불안한 마음으로 기다린다는 것은 그에게 의존한다는 것이고 그를 열렬히 사랑한다는 뜻일까? 다른 여자와 결혼했기 때문에 하루 중 일정한 시간이 지나고 나면 절대로 전화를 받지 않는 남자, 성탄 전야나 여름 휴가 중에는 연락할 필요가 없는 유부남, 뜨거운 사랑은 그런 사람과 하는 것일까?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열렬한 사랑은 전화기 앞의 수동적인 기다림에서 생겨나고, 그가 침대 위에서 어떤지 아는 사람에 대한 질투나 다음에 언제 만날 수 있을지 모르는 처지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혼외정사를 하는 연인들이건, 멀리 떨어진 채로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이건, 이제는 사랑받지 못하게 된 사람들이건, 나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사랑은 불안의 문제도 아니었고 기다림의 문제도 아니었다고, 규칙성과 상호성은 사랑의 강도를 전혀 변화시키지 않는다고. 그들에게 이런 말도 하고 싶다. 열렬한 사랑은 한 가정의 안정성 속에서 성장할 수도 있고, 귀가 시간의 정확성과 애착의 확실성과 일상의 반복성 속에서 자라날 수도 있다고. 또 나는 이런 말도 들려주고 싶다. 심장은 시간을 정해 놓고 사는 규칙적인 삶 속에서 빠르게 뛸 수도 있다고 말이다. (P. 116-117) - P115

만약 내가 페드르에게 말할 수 있다면, 나는 이런 말을 하고 싶다. 이미 소유하고 있는 남자를 사랑하는 게 훨씬 더 고통스럽다고. 나는 슬플 이유가 전혀 없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내가 왜 우는지를 설명해야 한다면, 무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내 남편이 나를 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내 마음이 황폐하다고? 내 남편이 라사냐를 시켰기 때문에 내 가슴이 무너진다고? 내 남편이 거액의 팁을 주고 왔기 때문에 내가 눈물짓는다고? 따지고 보면 내 눈물에는 존재할 이유가 전혀 없다. - P127

역설적이게도, 나는 우리가 막 만나기 시작했던 그 때에 더 마음이 편했다. 당시에 나를 향한 그의 사랑은 더 순수했다. 왜냐하면 그 무엇도 그를 내 곁에 붙들어두지 않았으니까. 자금 나는 이곳저곳에서 주위 사람들에게 외치고 싶다. 결혼을 사랑의 궁극적인 증거로 여기며 기다리는 모든 여자에게 말하고 싶다. 결혼은 아무것도 보장하지 않는다고, 만약 당신 남편이 어느 여자 동료와 몰래 바람을 피우고도 당신에게 고백하지 않는 것은 그저 잃을 게 너무 많기 때문이라고. - P331

이제 끝장이다. 내 결혼이 무너진다. 이건 실패이다(이별이란 언제나 실패가 아니던가). 그렇다고 해서 사랑하는 여자의 삶을 선택한 것이 잘못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왜냐하면 누구나 어느 순간에는 내려야 하는 결정을 한 것이니까 말이다. 누구나 마찬가지다. 때가 되면 사랑하느냐와 사랑받느냐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사랑을 서로 대등하게 주고받는 부부는 세상에 없다. 서로에게 사랑을 대등하게 준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러니 어떤 사랑의 삶을 영위하고자 하는지 결정해야 한다. 받는 사람이 될 것인지 아니면 주는 사람이 될 것인지. - P334

만약 내가 사랑하는 쪽보다 사랑받는 쪽을 선택했다면, 아마도 나는 훌륭한 어머니가 되었을 것이고, 마음을 크고 넓게 쓰면서 아름다운 우정을 가꾸고 경력에 대해 진정한 야심을 품는 사람이 되기도 했으리라. - P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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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속도가 느리지 않은 편이다. 한 달에 열다섯 권 안팎의 책을 읽기 때문에, 그중에 한 권의 추천사를 쓰는 일은 별로 부담스럽지 않게 여겼다. 읽는 시간 자체는 오래 걸리지 않고, 읽은 것을 여과시켜 짧은 몇 문장을 쓰는 쪽은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리지만 크게 무리는 아니다. 내가 보탠 몇 줄의 소개가 좋은 책이 멀리 가는 데 약간의 추진력이라도 된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1년 내내 추천사를 쓰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추천사를 어쩌면 좋을까? 中) - P11

몇 년 동안 마음의 속도 방지턱에 덜컥덜컥하고 걸렸던 부분은, 인터넷 서점에서 하는 투표가 책 사진이 아닌 작가들의 얼굴 사진을 클릭하도록 되어 있을 때가 많다는 것이었다. 얼굴 쪽이 호응도가 높다는 것은 알고 있다. 생명이 없는 물체 위에 눈코입만 그려도 친근감을 느끼도록 우리의 머릿속이 설정되어 있으니까.
그렇지만 본능에서 애써 멀어지는 방향으로, 역시 사람 얼굴보다는 책 표지가 낫지 않을지 이야기를 꺼내 함께 고민해보고 싶다.
(책과 얼굴 사이 中) - P40

정렬을 어떻게 할 것인가의 문제는 북디자인 분야에서 드물게 논쟁적인 주제다. 글자 배치를 두고 논쟁까지 하다니 이상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무언가를 정렬한다는 것은 결국 질서를 세우고 그것을 타자에게 강제하는 행위라는 점에서 넓은 의미에서 정치적 성격을 지닌다. 게다가 정렬 방식에 대한 호불호가 출판 노동자들의 직군에 따라 갈리는 경향이 있다면 갈등을 피하기 어렵지 않을까.
(취향의 방향을 가늠하기 中) - P96

21세기 한국 북디자인 현장에서 정렬을 둘러싼 논쟁은 정치적, 윤리적 충돌이라기보다는 새로운 미적 선택지를 확보하고자 하는 디자이너의 욕구와 기존 편집 규범이 마찰을 일으키면서 일어나는 실무적 논쟁의 성격이 짙다. 한국에서 왼끝맞춤 디자인은 1980년대에 발행된 잡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단행본 분야에서는 여전히 금기 시 하는 분위기가 남아 있으며 독자에게 편집이 제대로 되지 않은 것으로 받아들여질 때도 있다. (P.97-98)
(취향의 방향을 가늠하기 中) - P97

하나의 표지는 작은 공간이지만 그 안에도 이모저모 뜯어볼 수 있는 재미있는 요소들이 많다. 무언가를 좋아하게 되는 과정을 단계로 나눈다면 첫 단계는 차이를 감지하게 되는 순간이 아닐까. 뭔가 달라 보이는 느낌, 다시 돌아보게 만드는 이상함. 어쩌다 눈에 띈 작은 차이는 ‘그것‘을 그것 아닌 모든 것들로부터 떠내어 흐릿하던 세상을 대상과 배경으로 선명하게 구분하여 인식하게 만든다. 취향과 사랑 같은 편향적인 감정은 그렇게 차이가 벌린 틈에서 자라나기 시작한다.
(취향의 방향을 가늠하기 中) - P109

(인용)
저명한 남자가 쓴 소설을 비평하려고 손에 펜을 쥐자마자, 천사는 내 뒤로 살그머니 다가와서는 속삭였습니다. "아가씨, 당신은 젊은 여성이에요. 당신은 남자가 쓴 책에 대해 쓰고 있습니다. 호의를 베푸세요. 부드럽게 대하세요. 듣기 좋은 말을 해주세요. 기만하세요. 당신의 성이 가진 모든 기술과 책략을 동원하세요. 당신이 자기 자신만의 세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게 하세요. 무엇보다 순수함을 지키세요."
(버니지아 울프, <자기만의 방> 中, 펭귄클래식코리아, 2015, P.162) - P141

디자이너가 늘 수동적인 약자 혹은 피해자라고 보는 것도 타당하지 않을 것이다. 어제까지의 관계가 내일은 달라질 가능성이 완전히 닫혀 있는 것만은 아니고, 때로는 구조에 기꺼이 순응하고 싶은 마음이 들 수도 있다. 사실 진정한 천사는 후자에 가깝다. 누구의 강요도 아닌 그렇게 해야 내 마음이 편하다는 내면의 소리. 눈에 띄지 않기를 원하는 마음. 큰 목소리로 무언가를 말할 때 느껴지는 수치심과 죄책감. 이것의 어디까지가 타고난 성격이고 어디부터가 권력이 내재화된 결과일까.

버지니아 울프는 그래서 천사와의 싸움에서 어떻게 했을까. 목을 졸랐다고 한다. 끊임없이 속삭이는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그 목을. 아마 그래봐야 천사는 다음날 또 살아날 테지만 그때는 다시 목을 조르고, 또 썼을 것이다.
(북디자인과 여성 中) - P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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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 개정증보판 줄리언 반스 베스트 컬렉션 : 기억의 파노라마
줄리언 반스 지음, 크빈트 부흐홀츠 그림, 최세희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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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우리 모두가 이러저러하게 상처받게 마련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완전무결한 부모와 오누이와 이웃과 동료로 이루어진 세상을 사는 것도 아닌데, 상처를 피할 도리가 있을까. 그렇다면 문제는, 수많은 것들이 걸린 그런 문제로 인한 손실에 어떻게 대처할까이다. 상처를 인정할 것인가, 아니면 억누를 것인가. 상처를 받아들여 중압감을 덜어보려는 사람도 있을 테고, 상처받은 이들을 돕는 데 한평생을 바치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더 이상 상처받지 않는 것을 주된 목표로 삼는 사람도 있다. 이들이야말로 피도 눈물도 없는 부류이자, 가장 조심해야 할 부류다. - P79

어쩌면 이것이 젊은 사람과 나이 든 사람의 차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젊은 시절에는 자신의 미래를 꾸며내고, 나이가 들면 다른 사람들의 과거를 꾸며내는 것. - P138

그러나 시간이란...... 처음에는 멍석을 깔아줬다가 다음 순간 우리의 무릎을 꺽는다. 자신이 성숙했다고 생각했을 때 우리는 그저 무탈했을 뿐이었다. 자신이 책임감 있다고 느꼈을 때 우리는 다만 비겁했을 뿐이었다. 우리가 현실주의라 칭한 것은 결국 삶에 맞서기보다는 회피하는 법에 지나지 않았다. 시간이란...... 우리에게 넉넉한 시간이 주어지면, 결국 최대한의 든든한 지원을 받았던 우리의 결정은 갈피를 못 잡게 되고, 확실했던 것들은 종잡을 수 없어지고 만다. - P158

우리는 살면서 우리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얼마나 자주 할까. 그러면서 얼마나 가감하고, 윤색하고, 교묘히 가치를 쳐내는 걸까. 그러나 살아온 날이 길어질수록, 우리의 이야기에 제동을 걸고, 우리의 삶이 실제 우리가 산 삶과는 다르며, 다만 이제까지 우리 스스로에게 들려준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우리에게 반기를 드는 사람도 적어진다. 타인에게 얘기했다 해도, 결국은 주로 우리 자신에게 얘기한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 P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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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들 펭귄클래식 109
조르주 페렉 지음, 김명숙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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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지만 대화체가 하나도 없는, 작가가 주인공인 제롬과 실비를 관찰하며 쓴 관찰일기 같기도 한 독특한 작품이었다. 그 관찰이라는 것이 적잖이 객관적이어서 가끔 뼈를 맞은 듯한 경험을 하기도 했다. (내 얘기인가) 예를들면 ‘시간이 그들은 대신해 선택해 주었다.‘ (P. 31) 같은...
나 조르주 페렉 좋아하네.

임시방편인 상태가 현재를 완전히 지배했다. 기적만 바랄 뿐이었다. 건축가, 인테리어업자, 미장공, 배관공, 카펫업자, 페이트공을 부른 다름 자신들은 유람선 여행을 떠날 수도 있을 것이다. 돌아와서는 완전히 새롭게 정돈되고 변신한 아파트, 믿을 수 없을 만큼 넓어져 이상적으로 변신한 아파트, 꼼꼼하게 신경 쓴 구석구석, 접이식 칸막이, 미닫이문, 눈에 띄지 않게 제작된 효율 좋은 난방 기구, 감쪽같이 감춰진 전기 시설, 고급스러운 가구들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상하리만치 달콤하게 빠져드는 부푼 몽상과 달리 실제로, 그들은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 사이에 객관적 필요와 재정 상태의 절충을 꾀한 어떤 이성적 계획도 끼어들지 못했다. 무한한 욕망만이 그들을 압도했다. (P. 26-27) - P26

대부분의 동료들처럼 제롬과 실비도 선택이 아닌 필요에 의해 사회심리 조사원이 되었다. 제멋대로 흐르게 놔둔 시큰둥한 성향이 어디로 자신들을 이끌지 알지 못했다. 시간이 그들을 대신해 선택해 주었다. 물론, 그들도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무엇인가에 온전히 자신을 바치고 싶었을 것이다. 흔히 사람들이 천직이라 부르는 내부의 강력한 이끌림을 느끼며, 그들을 뒤흔들 만한 야망, 충만케 해줄 열정을 느끼며 자신을 쏟아붓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쩌란 말인가, 그들은 단 하나만을 알았다. 더 잘살고 싶다, 이 욕망이 그들을 소진했다. (P. 31-32) - P31

하나둘씩 차례로 거의 모든 친구들이 항복해 갔다. 정착하지 못하고 부유하던 삶에서 안정을 찾아 떠났다. ‘우리 이제 더 이상 이렇게 못 살겠어.‘ 라고 말했다. ‘이렇게‘ 라는 말은 모호한 동시에 계획성 없는 삶, 너무 짧은 밤, 얼간이, 낡아빠진 재킷, 지겨운 일, 지하철과 같은 말들을 담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 P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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