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속도가 느리지 않은 편이다. 한 달에 열다섯 권 안팎의 책을 읽기 때문에, 그중에 한 권의 추천사를 쓰는 일은 별로 부담스럽지 않게 여겼다. 읽는 시간 자체는 오래 걸리지 않고, 읽은 것을 여과시켜 짧은 몇 문장을 쓰는 쪽은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리지만 크게 무리는 아니다. 내가 보탠 몇 줄의 소개가 좋은 책이 멀리 가는 데 약간의 추진력이라도 된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1년 내내 추천사를 쓰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추천사를 어쩌면 좋을까? 中) - P11
몇 년 동안 마음의 속도 방지턱에 덜컥덜컥하고 걸렸던 부분은, 인터넷 서점에서 하는 투표가 책 사진이 아닌 작가들의 얼굴 사진을 클릭하도록 되어 있을 때가 많다는 것이었다. 얼굴 쪽이 호응도가 높다는 것은 알고 있다. 생명이 없는 물체 위에 눈코입만 그려도 친근감을 느끼도록 우리의 머릿속이 설정되어 있으니까. 그렇지만 본능에서 애써 멀어지는 방향으로, 역시 사람 얼굴보다는 책 표지가 낫지 않을지 이야기를 꺼내 함께 고민해보고 싶다. (책과 얼굴 사이 中) - P40
정렬을 어떻게 할 것인가의 문제는 북디자인 분야에서 드물게 논쟁적인 주제다. 글자 배치를 두고 논쟁까지 하다니 이상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무언가를 정렬한다는 것은 결국 질서를 세우고 그것을 타자에게 강제하는 행위라는 점에서 넓은 의미에서 정치적 성격을 지닌다. 게다가 정렬 방식에 대한 호불호가 출판 노동자들의 직군에 따라 갈리는 경향이 있다면 갈등을 피하기 어렵지 않을까. (취향의 방향을 가늠하기 中) - P96
21세기 한국 북디자인 현장에서 정렬을 둘러싼 논쟁은 정치적, 윤리적 충돌이라기보다는 새로운 미적 선택지를 확보하고자 하는 디자이너의 욕구와 기존 편집 규범이 마찰을 일으키면서 일어나는 실무적 논쟁의 성격이 짙다. 한국에서 왼끝맞춤 디자인은 1980년대에 발행된 잡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단행본 분야에서는 여전히 금기 시 하는 분위기가 남아 있으며 독자에게 편집이 제대로 되지 않은 것으로 받아들여질 때도 있다. (P.97-98) (취향의 방향을 가늠하기 中) - P97
하나의 표지는 작은 공간이지만 그 안에도 이모저모 뜯어볼 수 있는 재미있는 요소들이 많다. 무언가를 좋아하게 되는 과정을 단계로 나눈다면 첫 단계는 차이를 감지하게 되는 순간이 아닐까. 뭔가 달라 보이는 느낌, 다시 돌아보게 만드는 이상함. 어쩌다 눈에 띈 작은 차이는 ‘그것‘을 그것 아닌 모든 것들로부터 떠내어 흐릿하던 세상을 대상과 배경으로 선명하게 구분하여 인식하게 만든다. 취향과 사랑 같은 편향적인 감정은 그렇게 차이가 벌린 틈에서 자라나기 시작한다. (취향의 방향을 가늠하기 中) - P109
(인용) 저명한 남자가 쓴 소설을 비평하려고 손에 펜을 쥐자마자, 천사는 내 뒤로 살그머니 다가와서는 속삭였습니다. "아가씨, 당신은 젊은 여성이에요. 당신은 남자가 쓴 책에 대해 쓰고 있습니다. 호의를 베푸세요. 부드럽게 대하세요. 듣기 좋은 말을 해주세요. 기만하세요. 당신의 성이 가진 모든 기술과 책략을 동원하세요. 당신이 자기 자신만의 세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게 하세요. 무엇보다 순수함을 지키세요." (버니지아 울프, <자기만의 방> 中, 펭귄클래식코리아, 2015, P.162) - P141
디자이너가 늘 수동적인 약자 혹은 피해자라고 보는 것도 타당하지 않을 것이다. 어제까지의 관계가 내일은 달라질 가능성이 완전히 닫혀 있는 것만은 아니고, 때로는 구조에 기꺼이 순응하고 싶은 마음이 들 수도 있다. 사실 진정한 천사는 후자에 가깝다. 누구의 강요도 아닌 그렇게 해야 내 마음이 편하다는 내면의 소리. 눈에 띄지 않기를 원하는 마음. 큰 목소리로 무언가를 말할 때 느껴지는 수치심과 죄책감. 이것의 어디까지가 타고난 성격이고 어디부터가 권력이 내재화된 결과일까.
버지니아 울프는 그래서 천사와의 싸움에서 어떻게 했을까. 목을 졸랐다고 한다. 끊임없이 속삭이는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그 목을. 아마 그래봐야 천사는 다음날 또 살아날 테지만 그때는 다시 목을 조르고, 또 썼을 것이다. (북디자인과 여성 中) - P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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