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씨 451 (리커버 특별판, 양장)
레이 브래드버리 지음, 박상준 옮김 / 황금가지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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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생각하지 않고 고민하지 않고 불안해하지 않아도 되는 (모두가 행복한) 세상에서도 누군가는 하늘을 보고 들판에 핀 꽃을 살피고 계절이 지나가는 것을 느끼며 ‘생각‘을 한다. TV속의 완전한 행복보다 달에 관한 얘기를 할 때 함께 달을 바라봐 줄 사람을 기다리는 이들도 있다. 내가 한 권의 책이 되어 언젠가 그 책이 세상에 나오는 날을, 모두 모여 그 책들을 읽게 될 날을 기다리는 우리가 있다.

체에 걸리지 않는 메마른 모래였던 몬태그는 마침내 진흙이 되었다. 그래서 물 속에 가라앉을 수도 있지만 무언가로 채워져 더이상 체에서 빠져나가지 않는, 무게와 형태를 가진 존재가 된 것이다.

읽기 쉬운 책은 아니었다. 줄거리나 인물관계가 복잡한 건 아닌데 문장의 의미를 내가 미처 따라가지 못한 것일 수도. 다 옮겨적지는 못했지만 밑줄을 그은 문장도, 한참을 들여다 본 문장들도 많다. 다시 읽을 땐 지금보단 많은 것들이 보이겠지. 내 책들은 ‘안전하게‘ 책장 안에 있을테니까 말이다.

무려 5년 만에 꺼내 읽었다. 유명한 책은 오히려 읽히지 않는다는 말을 핑계 삼기에도 너무 긴 시간인 건 맞다. (이런 책들이 많다는 얘기는 굳이 하지 말자)

도시의 지하, 텅 빈 진공 속을 덜커덩거리는 지하철을 타고 통과하면서 몬태그는 어린 시절의 그 냉혹한 논리를 떠올렸다. 메마른 모래로는 절대로 채울 수 없는 체의 논리를. 그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성경이 펼쳐진 채 손에 들려 있었다. (중략) 한 가지 바보 같은 생각이 났다. 이 책을 아주 빨리, 그리고 죄다 읽는다면 어쩌면 체에 모래가 담길지도 모른다. - P144

"자넨 책만 가지면 물위를 걸어다닐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 글쎄, 과연 그럴까. 지금 세상은 책 없이도 모든 걸 잘 해내고 있어. 그것들이 자네를 어디로 몰아넣었는지 잘 보게나. 자네 입술까지 진흙이 차 있어. 이렇게 작은 손가락으로 휘젓기만 해도 자네는 금방 익사할 거라고!" - P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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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불태우는 방법은 한 가지만 있는 게 아니다. 그리고 세상에는 불붙은 성냥개비를 들고 돌아다니는 사람들로 넘쳐난다.
- 마치는 글 中 - - P292

"문을 닫으면 그들은 창문으로 들어오지, 창문을 닫으면 그들은 문으로 들어오지."라고 어느 오래된 노래는 말한다. 매달마다 새롭게 들이닥치는 검열의 칼날이 나의 생활방식을 뜯어고친다. 발런타인 출판사의 좁은 사무실에 처박힌 편집자들이 내 소설에서 75군데나 검열해서 뜯어고친 것을 불과 6주 전에야 알게 되었다. 행여나 청소년들에게 나쁜 영향을 주지는 않을까 하는 구절들을 손봤다면서 나 모르게 조금씩 조금씩 몇 년 동안에 걸쳐 저지른 일이었다.
- 마치는 글 中 - - P293

결론적으로 말해서, 내 작품을 가지고 머리를 베거나 손가락을 부러뜨리거나 허파를 뚫어 버리는 식으로 나를 모욕하지 말아 달라. 나는 흔들거나 끄덕거릴 머리가 있어야 하고, 내젓거나 주먹을 쥘 손도 있어야 하며, 소리 지르거나 속삭이려면 허파도 있어야 한다. 나는 배알도 없이 내 작품들이 책도 뭣도 아닌 꼴로 책장에 가도록 고분고분 있지는 않을 것이다.
- 마치는 글 中 - - P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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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그런 일에 가담하고 직업으로까지 선택을 하게 되셨죠? 아저씨는 다른 방화수들과는 달라요. 저는 다른 방화수도 몇 명 알고 있지만 아저씨 같은 사람은 없어요. 아저씨는 제가 얘기를 할 때면 저를 쳐다보세요. 제가 달 얘기를 하면 달을 쳐다봐요." - P50

"간밤에 나는 지난 10년 동안 내가 불사르느라 뿌렸던 등유를 생각했어. 그리고 불태운 책들에 대해서도. 그리고 처음으로 깨달았지. 불에 타 없어진 하나하나의 책들마다 제각기 한 사람씩의 이야기가 있다는 사실을. 그게 누구든지 한 권의 책을 채우기 위해 그 모든 것들을 생각해 낸 거야. 책 한 쪽 한 쪽을 알맹이 있는 글로 채우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쏟았는지 알 수 없지. 전에는 결코 이런 생각을 해 보지 못했어." - P98

"책이란 옆집에 숨겨 놓은 장전된 권총이야. 태워 버려야 돼. 무기에서 탄환을 빼내야 한다고. 사람들 마음을 파괴하는 거지. 다음엔 누가 박식한 인간으로 낙인찍힐까?" - P119

"유색인들은 <꼬마 검둥이 삼보>를 싫어하지. 태워 버려. 백인들은 <톰 아저씨의 오두막>을 싫어하고. 그것도 태워 버려. 누군가가 담배와 폐암과의 관련에 대한 책을 썼다면? 담배 장사꾼들 분통이 터지겠지? 그럼 태워 버려. 안정과 평화.
몬태그, 자네의 골칫거리들은 죄다 소각로 속에 집어넣는 게 나을걸." - P112

"사람들한테 해석이 필요 없는 정보를 잔뜩 집어넣거나 속이 꽉 찼다고 느끼도록 ‘사실‘들을 주입시켜야 돼. 새로 얻은 정보 때문에 ‘훌륭해‘졌다고 느끼도록 말이야. 그리고나면 사람들은 자기가 생각을 하고 있다고 느끼게 되고, 움직이지 않고도 운동감을 느끼게 될 테지. 그리고 행복해지는 거야. 그렇게 주입된 ‘사실‘들은 절대 변하지 않으니까." - P114

"도대체 불이란 게 뭘까? 수수께끼야. 알아듣기 어려운 말만 써서 마찰이 어떻고 분자가 어떻고 하고 떠드는 과학자들도 사실은 잘 모르고 있다네. 불의 참된 아름다움은 책임과 결과를 없애 버린다는 데 있지. 견디기 힘든 문제가 있으면 화로에다 던져 버리면 돼." - P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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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가
에마뉘엘 카레르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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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여러분은 전부 알게 되었다. 요가는 마음의 요동을 멈추는 것이다.˝ (P.90)

책의 내용은 첫 페이지에 모두 나와있다. ‘요가에 대한 기분 좋으면서도 세련된 책‘을 쓸 예정이었던 ‘나‘의 삶이 어디로 흘러갔는지.

요가에 대한 기분 좋으면서도 세련된 책은 어느새 자신의 삶이 무너졌던 순간의 광기에 관해 이야기 한다. 도무지 끝날 것 같지 않던 어둠과 공포에 대해.

한쪽 극에서 다른 쪽 극으로 흐르는 물결에 휩쓸린다고 한들 어떤가. 허우적거리며 요동치는 광인이 되어보는 경험도 중요하다. 그것 또한 나의 삶, 나의 일부라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 이렇게까지 자신을 가까이에서 관찰하고 기록하는 행위 자체가 명상이고 요가가 아닐까 싶을만큼 솔직한 글이었다.


˝나는 문학에 대해, 그러니까 내가 실행하는 문학에 대해 하나의 확신이, 오직 하나의 확신이 있으니, 이곳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 장소라는 것이다.˝ (P.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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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가
에마뉘엘 카레르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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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어떤 친구가 누구나에게 열려 있는 세미나에 온라인 등록을 한 뒤에 마치 스쿠버 다이빙 일일 코스에 등록하면서 대왕쥐가오리를 목격하기를 기대하듯 그런 체험을 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면, 이 친구를 열린 정신의 한 모범적인 예로 봐야 할 것인가 아니면 순진하게 그런 헛소리를 믿다가 나중에는 실망하는 멍청이로 봐야 할 것인가......? 나는 정말이지 알 수 없었다. - P22

숨을 내쉰다는 것은 결국 마지막 바람을 돌려주는 것, 마지막 숨결을 돌려주는 것, 영혼을 돌려주는 것이다. 내 신경얼기 밑에 깃들어 있는 이 불안감은 죽음의 공포에 다름 아니며, 내 삶의 마지막 시간 동안 해야 할 작업은 바로 이것, 숨을 내쉬는 법을 배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 P86

내 삶의 표면 아래에서 어슬렁대는 그 공포를 명상은 길들일 수 있을까? 명상은 인간의 모든 경험들을 장악할 수 있을까? 아니면 그게 넘어설 수 없는 관문들이 있는 걸까? 자신의 육체와 정신에 배반당한 사람들에게 명상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 P97

음에서 양이 나오고 양에서 음이 나오는데, 한쪽 극과 다른 쪽 극 사이를 흐르는 물결에 조용히 몸을 맡긴다면 그 사람은 현자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광인은 어떻게 알아볼 수 있는가? 누군가가 물결에 몸을 맡기는 대신 그 물결에 휩쓸려 갈 때, 물속에서 허우적거리며 한쪽 극에서 다른 쪽 극으로 요동칠 때, 음과 양이 더 이상 상호 보완적이 아니라 둘 다 그를 죽이려 할 때 우리는 그가 광인임을 아는 것이다. - P225

내게 있어서 현실의 실제는, 나의 본질은, 이 모든 것의 최종 결론은, 와이엇 메이슨이 유쾌하게 말했듯 내 책들이 지향하는 그 침해할 수 없는 기쁨의 공간이 아니라 절대적 공포, 다시 말해서 영원한 암흑 속에서 그 의식이 돌아오는 네 살배기 꼬마 아이의 그 형언할 수 없는 두려움이다. - P242

삶에는 그림자가 있지만, 또 순수한 기쁨도 있으며, 그림자 없는 순수한 기쁨은 불가능 할지 모르지만 그렇다면 이 그림자와 더불어 사는 것도 괜찮다는 것이다. 순수한 기쁨은 그림자만큼이나 진실이라는 사실을 내게 말해 준 것, 이게 바로 에리카의 선물이었다. - P386

명상은 생각의 소용돌이에 휩쓸림 없이 그것을 관찰하는 증인을 자신의 내부에 태어나게 하는 것이다. 명상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명상은 자신의 정체성으로부터 떨어져 나오는 것이다. 명상은 자신 속에서 쉬지않고 <나! 나! 나!>라고 말하는 어떤 것과 자신이 다른 것이라는 사실을 발견하는 것이다. (P.400-401) - P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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