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녀 털에 꽃을 꽂고

  
민규동 (영화감독) 

 

 저번 주엔 허리가 아파서 몸져 누웠었어. 사실 지금도 거의 누워 있단다. 너의 생명력 예찬에 잠시 고무되었었지만, 실은 고백하는데, 젊을 땐 ‘황금허리’였지만, 지금은 ‘ 고철허리’거든. 녹슬고 무거워져 삐걱거리다가 가끔씩 주저앉는 허리. 이 십자가를 안고 골고다를 오르는 하루하루의 힘겨움에 덜커덩 좌절하고 보니, 다시 제자리로 굴러떨어진 바윗돌에 깔린 시시포스가 된 거 같구나. 이렇게 갑자기 육체적으로 불능 상태가 되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처지가 되자 그 사람이 떠올랐어. 미스터 클리퍼드 채털리. 그리고 그의 부인, 미시즈 채털리도 말이야. 

 30여 년 전, 하얀 살결의 쓰나미로 한반도를 역습한 영화 「엠마뉴엘」로 전설적인 이미지가 되어버린 실비아 크리스텔이 「차타레 부인의 사랑」이라는 영화에도 나온다고 알려지자, 이 영화는 제대로 된 감상을 하기도 전에 이미 본격 ‘에로’ 영화로 인증을 받았었어. 덕분에 짐짓 고상한 품위를 이고 사는 사람들은 공식적으로 이 차타레의 도발에 대해 언급할 수가 없었고, 야한 영화를 강아지처럼 쫓아다니는 일군의 사람들에게 살색 향연의 그저 그런 영화로 기억된 채 지나가 버렸지. 훗날 내가 영화를 봤는지 안 봤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 다만, 실비아 크리스텔의 헤어스타일만 기억이 나. 비에 젖어 흐트러진 머리카락. 그 위로 번지던 물방울. 그런 거. 그건 엠마뉴엘 시리즈를 모두 보고 난 후에도 스토리도, 이미지도, 하나도 기억 못하고, 오로지 여배우의 머리 모양만 기억하고 있는 반응과 비슷해.

 내가 소설을 읽게 된 건 그 시절이 한참 지난 후야. 그땐 포르노 잡지를 지니는 게 퇴학을 무릅써야 할 남학생들의 불법적인 행위라면, 삽화 하나도 없이 야한 이야기가 가득하다는 하이틴 로맨스물은 조숙한 여학생들이 들고 다니는 합법적인 유행의 물결을 타는 것이었고, 로렌스 하면 로맨스라는 엉뚱한 통념의 시대였어. 난 ‘여자애 같다’는 말을 듣는 게 너무 큰 스트레스였으므로, 어떻게든 멀리하려고 애썼던 거 같아. 보부아르의 『제2의 성』에 로렌스의 장이 있는데, 그 부분을 보고서야 소설을 읽게 됐었어.

   
  우리 시대는 본질적으로 비극적이어서 우리는 이 시대를 비극적으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소설의 이 첫 문장이 아직 혀끝에서 맴돌아. 그래, 하물며 시대의 비극에도 무감해지는데, 내 개인의 비극 따위를 읊어봐야 누가 공감할 수 있겠느냐만, 한껏 우울해진 탓에 평소와 달리 클리퍼드의 입장으로 급선회해서 이 이야기를 다시 노려봤어. 그는 평상시에 이런 생각을 가진 남자야. ‘섹스는 단지 우연하고 부차적인 일’에 불과하고, ‘볼품없는 자세로 고집스레 지속되고 있는, 이상하고 낡아빠진 신체 기관의 여러 과정 중 하나로, 정말로 필요한 것은 아니다.’ 또, ‘우리가 살아가면서 행하는 이런 사소한 행위와 관계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거 같아. 이런 것들은 지나가 버리고 말아. 그것들이 지금 어디에 있지? 작년에 내린 눈이 어디에 있느냐고? 평생에 걸쳐서 지속되는 것이야말로 중요하지. 익숙해지는 것이 어떤 흥분보다 더 중요한 거 같아.’ 다시 말해서, ‘긴 인생의 필수적인 여러 가지 일에 비하면 성적인 문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부차적인 것’이다. 어때? 너무나 맞는 말 같지 않니? 내가 앞으로 영영 일어서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고 있기 때문에 미리 나의 처지를 옹호하려는 옹색한 주장이 아냐. 조금 헷갈리지만, 어쩌면 난 평생 이렇게 생각하며 살아왔는지도 모르겠어. 누워 뒹굴뒹굴 아무리 생각해 봐도 확실히 육체적 사랑은 품위가 없어 보여. ‘이 어이없는 엉덩이의 율동, 초라하기 짝이 없는 축축하게 젖은 조그마한 페니스가 시들어가는 바로 이 신성한 사랑…… 결국 여기에 경멸감을 느낀 현대인은 옳은 것이다.’라는 웅변에 즉각적으로 감정이입 돼. ‘섹스 그리고 한 잔의 칵테일, 이 둘은 거의 비슷한 시간 동안 지속되고 똑같은 효과를 내며 거의 똑같은 결과에 이를 뿐이다.’라는 냉소에 마구 박수를 날리게 돼. 

 하지만, 육체의 욕구를 경멸해 보는 것, 이것이 왜 아무 위로가 되지 않는 걸까? 실은 나는 오래전부터 마음도 불구가 되어 있던 게 아닐까, 덜컥 겁이 나.

   
  “육체적 삶이란 것은 그저 동물적인 삶에 불과해.”
“하지만 나는 그런 삶이 지성만 발달하고 몸뚱이는 죽은 시체의 삶보다 좋아요.”
 
   

 채털리 부인은 전쟁터에서 하반신 불구가 돼서 돌아와서도 부르주아의 자부심을 가득 안고 기계 문명을 예찬하며 살아가고 있는 남편에게 조금씩 저항하기 시작해. 휠체어에 의존한 채 관념으로 압도해 온 남편이랑 진정으로 ‘접촉하고 있다는 느낌’이 없다는 걸 깨달았거든. 그러니까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것, 다시 말해 생기가 넘치는 실재하는 세상과 접촉을 상실했다’고 느껴.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한 남자의 몸을 살짝 훔쳐보게 돼.

   
  그녀는 볼썽사나운 바지가 깨끗하고 섬세한 하얀 허리 아래로 미끄러지듯 걸쳐져서 약간 드러난 엉치뼈를 보고 고독하다는 느낌, 정말 순수하게 고독해 보이는 한 인간에 대한 생각에 압도되었다. 내면까지 깊이 고독한, 고독하게 홀로 사는 한 인간의 완전하고 고독한 하얀 나체. 그리고 그 너머에 존재하는 순수한 한 인간이 지닌 어떤 아름다움. 아름다운 사물도 아니고, 아름다운 육체도 아닌, 어떤 불꽃의 흔들림. 그것은 우리가 손으로 만져볼 수 있는 형체에 담긴 단 하나의 생명이 스스로 드러내 보여 주는 따스하고 하얀 불꽃이었다. 하나의 육체였다!  
   

 이게 채털리 부인에겐 환상적인 충격이 돼. 그걸 자궁 깊숙이 받아들이고는 ‘피를 뜨겁게 끓어오르게 하고, 인간이라는 존재 전체를 새롭게 해주는 건강한 인간의 관능’ 을 깨닫게 돼. 그 짧은 순간에 어떻게 그런 화학적 전이가 가능했을까. 거대한 짐을 지고도 잘 버티던 낙타가 지푸라기 한 올에 무너질 수도 있듯, 억압의 정점과 무의미한 삶의 극단에 서 있던 탓에, 그 작은 몸짓에도 새 세계로의 접촉이 가능했던 거야. 남자의 몸을 발견하고 돌아온 날, 자신의 몸을 거울에 비춰봐. 인생에는 이런 순간이 한 번은 존재해. 타인의 시선으로 투영된 내 육체가 아니라 내 시선으로 내가 느끼는 나의 몸. 이제 막 눈을 뜬 여자의 설렘에 나도 두근거렸어. 욕망이 소통되자 그들에겐 계급이 사라지고 평등이 찾아와. 이건 영화 「오감도」에서 내가 그렸던 에로스의 관계랑 맞닿아. 이 관능의 세계는 ‘이 세상에 남은 가장 좋은 것’이고, ‘당신 속에 들어갈 수 있으니 당신을 사랑한다’는 건 진리가 돼. 번잡한 그 성행위로부터 ‘우아하고 힘찬 육체의 고요함’을 찾아낼 수 있다면 말이야.

   
  “당신이 똥을 싸고 오줌을 눠도 나는 좋아유. 나는 똥도, 오줌도 쌀 수 없는 여자는 원치 않아유.”  
   

 멜로즈의 말처럼, 몽테뉴도 여자도 방귀를 뀌고 똥을 싼다고 힘주어 역설했어. 이것은 아주 뻔해 보이지만, 보기보다 쉽게 깨달을 수 없는 영역이야. 여자의 생리적 욕구를 공공연히 언급하는 건 예나 지금이나 동서양 모두 엄연하게 터부시됐으니까. 남자가 여자에 대해서 잘 모르기도 하지만, 실은 여자도 스스로에 대해 무지하잖아. 여자도 남자의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도록 교육받으니까. 아주 긴 세월, 우리 몸의 ‘더러운’ 부분을 가리키면서,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목소리를 낮추고, 감추고 부끄러워할 것으로 교육받아 왔으니까. 거울 속의 자기 몸을 돌아보며, 자신에게도 스스로 누릴 수 있는 욕망이 있다는 걸 깨닫기 시작할 때, 그 별것 아닌 순간에 감동이 시작돼. 몽테뉴는 자연스러운 것들을 자꾸 배제하려는 인간들을 꼬집으면서 이렇게 질문했어.

   
  이 세속의 감옥에 사는 동안 우리 인간에게는 순전히 육체적이거나 순전히 영적인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살아 있는 존재를 둘로 가르는 것은 해로운 짓이라고 말하면 모욕적일까?  
   

 이렇게 로렌스는 불륜 치정극을 표방한 문명비판서로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와는 근본적으로 대립되는 우주적 낙천주의를 표방했어. 전쟁과 문명의 추잡함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하나, ‘다정다감한 섹스다!’라고 말야. 핵무기를 몰래 품고 있던 일본의 원전 사고가 세계의 민폐로 퍼지고 있는 이 시점, 하루하루 번지는 이 세상 모든 부조리를 해체시키기 위해 우린 다시 자연인으로 돌아가 따뜻한 섹스의 소통을 추구해야 할 때야. 거기서부터 자연과의 합일을 통해 인간성의 회복이 시작될 거야. 그렇게 믿자. 이렇게 생각해 보니, 도무지 아무런 출구를 찾아볼 수 없는 암흑 같은 현실에 한 줄기 빛이 보이지 않니?

‘말테는 나의 정신적 위기에서 태어난 인물이다.’라는 릴케의 말에서 말테가 릴케의 자화상임을 쉽게 유추할 수 있듯, 이 소설도 ‘로렌스의 수기’라고 볼 수 있어. 로렌스는 애가 셋이나 있는 연상의 유부녀 프리다에게 반했고, 둘은 사랑에 빠져 도피 행각 끝에 2년 만에 결혼에 골인해. 채털리 부인을 뒤흔드는 멜로즈라는 남자는 직업적 배경이나 생김새의 묘사를 볼 때 작가 자신이 지나치게 투영돼 있어. 또, ‘가학 피학성 음란증 놀이, 즉 일반적인 싸움을 초월하는 깊은 무언가를 공유’했다던 로렌스와 부인의 이야기도 이 소설에 노골적으로 반영되어 있지. 그런데, 실제의 삶은 정반대였어. 실제 둘의 성생활은 나이, 민족, 계급, 성격 차를 극복하지 못했고, 결국 엄청난 불화에 시달렸거든. 그의 소망과는 달리, 프리다는 죽어가는 로렌스 옆에 있지도 않았어. 그가 죽자마자 바로 다른 남자랑 결혼해 버리기까지 해. 우습지? 생명의 찬가, 성의 묵시록으로 평가받고 있는 이 얘기도 실은 작가의 패배적 콤플렉스를 반영한 거야. 아마 그가 만족스럽게 살았다면 이런 명작이 탄생하지 못했을 거야. 그렇다면, 내가 겪는 이 육체적 고통도 결국 내 영화로 승화될까? 아, 이것도 위로가 못 돼.

그가 죽고 30년 후, 1960년, 런던의 법정에서 외설 시비의 재판이 열렸어. 피고는 채털리 부인의 연인. 원고 측 증인들은 귀부인과 하인의 사랑이 타락한 거라고 맹공했어. 피고 측은 외설이 아니라 인생에 대한 참다운 성찰이 배어 있다고 맞섰어. 어쨌든 배심원은 무죄 평결을 내려. 19세기의 법이 20세기의 내면 세계를 구속할 수 없다는 게 증명된 거지. 전쟁 영화 속에서 폭격에 사람들이 무수히 죽어가는 풍경보다, 음모에 꽃을 꽂고 킥킥거리는 모습이 훨씬 사회에 위협적이라는 생각들. 그것은 어디서 유래하는 걸까.

   
  “성은 모든 접촉 중에서 가장 밀접한 접촉이오. 그리고 우리가 두려워하고 있는 것도 바로 그 접촉이지요.”  
   

 이건 섹스의 솔직함과 자연스러움 대 얌전 빼는 태도와 성적 무지의 대결사인데, 비슷한 구도를 떠올릴 수 있는 『테레즈 라켕』도 너무 비난을 많이 받아서 에밀 졸라가 서문에다가 작품 해명까지 달아야 했어. 또 『쥐스틴』, 『쥘리에트』의 사드도 감옥 생활을 했고,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 조이스의 『율리시스』, 헨리 밀러의 『북회귀선』도 오랫동안 판금됐어. 뭐, 예를 들자면 끝도 없겠지. 영화도 다를 바 없었어. 「감각의 제국」도 정작 일본에선 개봉 못했어. 여배우는 비난을 너무 받아 다음 해 자살했지.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도 개봉되자마자 시비가 들끓었고, 감독은 감옥에 잡혀 갔지. 지금 보자면 아무것도 아닌 것들인데 그때는 왜 그렇게 난리였을까. 그런데,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이나 로댕의 조각상 「애무」는 왜 애초에 외설이 아니었을까. 100여 년 전엔 동학혁명을 일으킨 농민들이 죽창을 든 채 ‘과부의 재가를 허하라’고 외쳤었어. 한 시대의 혁명적 강령이 지금엔 당연한 진리야. 간통죄라는 구닥다리 법이 아직 한국에선 유효해. 얼마나 갈까. 곧 각종 섹스 경연 프로그램과 섹스 스포츠 산업이 미래의 유망주라고 우기는 사람도 있어. 「섹스 앤 더 시티」나 「위기의 주부들」이 번듯이 오락 영화가 되어버린 이 시대에 걸맞은 음란함의 기준이 뭘까. 왜 음란한 것은 불온한 것일까. 시대는 변하고 옛 도덕에 맞서는 새로운 도덕이 태어나겠지. 결국 우리가 받들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의 윤리들 대부분이 결국 상대적이고 불안정한 미완성의 기준들 아닐까. 그런 것들에 얽매여 움츠려 사는 건 바보 같은 거 아닐까. 변하지 않을 도덕이 있다면 무얼까. 그것을 움켜쥔다면 얼마나 마음이 편할까.

   
  “가장 깊은 것을 생각하는 자는 가장 살아 있는 것을 사랑한다.” _ 에른스트 블로흐  
   

  훗날 「애마 부인」과 「개인교사」류의 시리즈 등에서 끝없이 구현된 성적 불만족에 빠진 안주인과 건장한 하인의 포르노그래피적 클리셰와는 달리 이 이야기는 숲이라는 살아 있는 공간으로 남다른 의미를 획득해. 채털리 부인의 쾌감은 숲과 인간의 교감에서 얻은 자연인으로서의 자각이거든. 그 시절 우리를 휘어 감았던 「블루 라군」이나 「파라다이스」에서처럼, 촉촉한 풀밭을 더듬고 내리쬐는 햇살을 만지며, 물컹물컹한 진흙 위를 뒹굴고, 강물 소리에 신음 소리를 섞고, 빗물에 젖은 숲을 휘감듯 상대의 몸에 접촉할 때, 이 공감각적 심상들 속에서 채털리 부인은 몸을 발견하고, 자연을 발견하고, 삶을 발견해. 로렌스는 그 모든 것에 필수적인 촉각을 설파해. 접촉이 없다면 친밀감도 없고, 친밀감이 없다면 육체적 삶도 없고, 육체적 삶이 없다면 순수한 관능도 없다는 로렌스 교주님의 말씀. 아멘.

그 숲엔 이런 꽃들이 있어. 물망초, 참매발톱꽃, 패랭이꽃, 선갈퀴, 인동덩굴, 블루벨, 패랭이꽃, 좀가지풀, 선갈퀴아재비꽃, 히아신스…… 다들 뭔지 아니? 그래, 이 소설의 백미는 광산보다 꽃을 택했던 두 사람의 놀이에 있어. 이 꽃들을 몸에 난 여기저기의 털에다 꿰고, 성기에 감고, 배꼽에 붙이고, 몸의 모든 구멍에 꽂아놓고 놀아. 궁극적인 적나라함을 나누며, 은밀한 곳 중에서도 제일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가장 오래된 수치심, 죄 의식, 마지막 불안감까지 모두 불태워 버리는 관능을 체험함으로써, 사생활에서 영원한 미성년자일 뻔했던 채털리는 드디어 어른이 돼. 수없이 많은 이야기가 에로스를 다루고 있지만, 이토록 특별한 이미지는 어디에도 없었어. 커피진주, 너와 다음 생애에 다시 만난다면, 우리도 한번 꽃놀이를 해보자꾸나.

아, 너의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봤어. 멜로즈가 자신의 부인에 대해 얘기할 때, 미쳐 날뛰는 욕망처럼 그녀의 부리로 찢어발기고 물어뜯고 쪼아대는 바람에 자신의 성기가 너무 아프다고 했던 거, 여자가 아프면 아팠지 어떻게 남자가 아플 수 있느냐고 물었었지. 남자도 마찬가지야. 마음 없는 행위에 의미 없는 사력을 다할 경우, 남는 건 통증과 허탈감뿐이라는 거. 성행위가 의사소통 행위라는 로렌스의 말에 (모두가 동의하진 않겠지만 난) 동의해. 정서와 호감이 전제된다면 날씨나 잡다한 것에 대한 수다를 나누듯 그저 육체적 대화를 하는 것. 만약 말이 통하지 않는다면, 그 행위는 당연히 고통뿐이라고 봐.

참, 너에게 육체를 가르쳐준 그 남자는 누구니? 성모 마리아와 베아트리체 같은 너에게서 이브와 키르케의 모습을 찾아낸 그 남자 말이야. 궁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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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털리 부인의 연인> 

   D. H. 로렌스  / 최희섭 옮김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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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하나 2011-04-10 14: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두 분 도대체 무슨 사이신ㄱㅓ에요 ㅋㅋㅋ 몹시 막역하신듯 ㅋㅋㅋㅋ
 

 

  씨앗을 기억할 때

  
정혜윤(CBS 라디오 프로듀서) 

 

 동쪽별. 춥구나. 퇴근할 때 눈비 맞고 뛰어오는데 총각네 야채 가게 총각들이 우산을 빌려줘서 다행히 덜 젖었어. 봄은 언제 올까? 따뜻했으면 좋겠어.

 신림동 황금 허리. 그거라면 기억나는 일이 하나 있어. 너는 모르고 나만 아는 일이야. 그날 우리는 엠티를 갔어. 방에 앉아서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아. 2층 방에 모여 있는데 누군가 소리쳤어. 규동이가 춤춘다! 그래서 다들 우르르 뛰어나갔어. 나도 덩달아 뛰어나가다가 2층 계단 코너를 막 돌려는 찰나, 그만 보고만 거야. 일층 강당 앞 무대에서 춤을 추는 너 말이야. 너는 움직이고 있는데 시간은 정지되더구나. 군무인데도 유독 너만 보였어. 네 허리 놀림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어. 누군가 하늘과 땅에서 널 잡고 돌리는 것 같았어. 누군가 하늘과 땅에서 널 잡고 물기를 짜내는 것 같았어. 너는 춤추는 빨래, 춤추는 파란 샤먼이자 애송이. 춤추는 수줍음, 춤추는 눈물방울이었어. 그 춤을 보는 순간 설명할 수는 없는 이유로 아주 부끄러워졌어. 노트르담의 꼽추에서 에스메랄다의 춤을 보던 파리 사람들의 기분이 그날의 내 기분과 비슷했을지도 몰라.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저 여인은 위험하다.’ 같은 감정을 나도 느낀 거야. 뛰어 내려가던 나는 2층 계단에서 우뚝 멈춰 섰어. 그리고는 잠시 후 휙 돌아서 문을 열고 나가 버렸어. 그때 내가 평소에 알던 너와 달라서 당황했을 거라고 생각하니? 틀렸어. 난 당황한 게 아니야. 평소에 알던 네가 그렇게 춤을 춰서 눈부시게 아름다웠던 거야. 나는 창백하고 침착하고 조심스러운 남자의 현란한 춤. 그 모순과 긴장과 생명력에서 아름다움과 슬픔을 느꼈어. 넌 그날 우리 모두를 오르페우스로 만들었어. 모두들 경고를 무시하고 뒤돌아 봐야만 했어. 오로지 나만이 거기 휩쓸리지 않고 앙상한 나무 사이를 걸어 다녔던 거야. 나만이 너의 매혹에 저항했던 거야. 그날의 너, 네가 살았던 수많은 나날 중 하필이면 그날의 네가 화석으로 남는다면 미래 사람들은 거기서 춤추는 남자의 무엇을 볼 수 있을까? 한 남자의 춤 추는 하루에서 무엇을 볼 수 있을까? 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 그건 생명력일 거야. 살아있고 움직이고 있음의 희열일 거야. 수만 년이 흘러도 누구라도 읽어낼 수 있을 거야. 어쨌든 너의 지킬과 하이드 잘 읽었어. 그 글을 읽으니 네가 무척 고독하고 순수한 상태에서 썼다는 게 느껴지고 그게 어쩐 일인지 가슴이 아파. 뭔가 좋고 아까운 걸 두고 길을 나서며 뒤돌아보는 사람이 가슴을 치며 쓴 것 같아. ‘너 요새 무슨 일 있어?’ 이렇게 물어놓고 금세 후회되네. 너라면 ‘무슨 일이 있지 않은 적이 있니?’라고 대답하겠지.
  그렇다면 전략을 바꿔서 이번엔 나 장난쳐도 되니? 윤동주의 서시 말이야.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그 시가 어디에 제일 많이 걸려 있을 것 같아? 바로 감옥이야. 어때? 지금 당장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있어지고 싶지? 난 그랬는데. 웃기지 않았다면 정말 미안해. 누군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길 소망하지 않았겠니.

  그럼 이 이야긴 어때? 내가 어려서 솜사탕 막대기 수집가였단 이야기 너에게 했었니? 다들 뭔가 수집하잖아. 우표도 있고 구슬도 있고 흔들면 여자 옷이 벗겨지는 볼펜도 있고 미니 자동차도 있고 공깃돌도 있고 딱지도 있고 초콜릿 통도 있고. 내 동생은 죽은 새 깃털 수집가였는데 그건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랬던 것처럼 날고 싶은 꿈을 가졌기 때문이야. 내 동생이 지붕에서 그 날개들을 다 날고 뛰어내리는데 그 날개가 사방팔방으로 뿔뿔이 흩어지고 내 동생은 벌거숭이가 되는 상상을 하면서 악몽에 시달렸던 걸 보면 내가 내 동생보단 여러모로 현실 타협적인 인간이었던 것 같긴 해. 나중에 그 털들은 어떻게 되었느냐면 내 동생이 닭털까지 모으니 냄새가 나서 나의 사주로 엄마가 동생 몰래 버렸어. 그리곤 날고 싶은 소원을 가진 도둑이 들었다고 했던 것 같아. 같은 소원을 가진 사람끼리 이해하고 살아야 한다고 악어의 눈물을 흘리며 동생을 위로했지. 어쨌든 나는 오로지 솜사탕 막대기만 모았어. 하나의 중심축이 있고 거기에 뭔가 구름 같은 것, 불분명한 것, 축이 없다면 흩어져 버리고 말 것들이 모여드는 그 이미지에 사로잡혔던 것 같아. 나는 그래서 막대기로 방안에 먼지를 모으는 실험까지 감행하기도 했었어. 내 이론에 의하면 그 솜사탕은 무지개색으로 나왔어야 했어. 낮잠을 자고 일어나면 눈앞에 먼지는 언제나 형형색색이었거든. 그리고 또 이런 생각도 했어. 그렇다면 우리 영혼에도 척추가 있어서 그 뼈 중심으로 온갖 것들이 모여드는 게 아닐까. 거기엔 좋은 것 좋지 않은 것 순수한 것 불순한 것 선한 것 악한 것. 인정받고 싶은 것, 자유롭고 싶은 것. 때리고 싶은 것, 차라리 얻어맞고 싶은 것. 사랑받고 싶은 것, 그런 것들이 다 모여서 그렇게 아슬아슬하게 형태를 유지하는 것 아닌가 하고. 그래서 난 나중에 솜사탕 막대기를 내 손으로 버릴 때 내 영혼의 축에 대해 생각해 봤어. 영혼에도 등뼈란 게 있다면 언젠간 그런 것을 갖고 싶다고 빌고 싶었었어.
  난 언제부턴가 선악을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것에는 큰 의미를 두지 않게 된 것 같아. 선의 가면을 쓴 악, 착한 척하는 사람들의 악. 그런 것이라면 관심을 멈출 수가 없어. 그리고 결국엔 선을 부르고야 말 악이 존재함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어. 사람이 자신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것은 어떤 한 극단에 닿아서가 아니라 동시에 두 극단에 닿을 때란 파스칼의 이 말은 나에겐 언제나 이런 식으로 다가와. 깊은 사랑 때문에 깊게 미워하고 깊은 사랑 때문에 깊게 경멸한다고, 큰 악 때문에 큰 선을 꿈꾼다고.
  난 성악설이나 성선설보다 성악설이란 걸 생각해. 그런 학설이 있는지는 모르겠어. 하지만, 인간은 누구나 약하다는 것. 그 약한 인간이 선과 악의 아슬아슬한 균형추를 잡아가며 사는 게 삶이라고 생각해.

  내가 진짜로 약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아니? 세상은 원래 그렇다는 핑계를 대고 선한 면을 팽개치고 악해지는 사람이야. 내가 진짜로 용기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 아니? 타락하고 악해질 수많은 이유가 있는데도 악해지지 않은 사람들이야. 내가 진짜로 겸손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아니? 자기 자신을 포함해서 인간은 어찌 될지 모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야. 자기 자신을 포함해서 모든 다른 인간에게 악이 선으로 될 가능성을 보려는 사람들이야. 내가 진짜로 지루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아니? 자기는 착하다고 믿고 자기의 모습에 만족하며 남에게 훈계하고 별것 아닌 일에도 깜짝 놀라는 척하는 사람들이야.

 그런데 너와 이야기를 하다 보니 릴케의 『말테의 수기』가 생각나. 말테의 수기는 낯선 곳에 도착한 사람의 시선으로 쓰인 책이야. 그래 집 떠난 젊은이의 눈앞에 펼쳐진 세계의 낯섦. 그것이 말테의 수기일 거야. 그리고 이런 시선은 너무나 소중해. 바로 이런 이유에서.

   
 

우리는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옆으로 치워버렸다.  
먼저 처리해야 할 일이 많다거나 아니면 삶이 바쁘다거나
그것들을 우리 곁에 두면 안전하지 않을 것 같다는 이유로 말이다.
그러는 가운데 시간은 흘렀고 우리는 사소한 것들에 길이 들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것을 알아보지 못하고 우리가 가진 것의 어마어마함에 놀랐다.

 
   

  
 
그래서 그렇게 되길 원치 않는 사람들은 탕자가 되어서 길을 떠나는 거야. 그런 길을 떠난 말테는 보는 법을 새로 배울 수밖에 없어. 보는 법을 새로 배우면서 말테에게는 전에 없던 내면이 생겨나. 내면이 생겨난다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도 너무 중요할 거야.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외부에만 의존하고 말겠지. 말테의 수기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이웃에 대한 이야기, 연극배우의 무대와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지만, 언젠가 그 이야기도 할 기회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오늘은 다른 이야길 들려줄게. 오늘 말테의 수기가 생각난 이유는 따로 있거든. 덴마크 귀족의 후손이지만 이젠 파리의 가난하고 고독한 이방인일 뿐인 말테는 어느 날 이렇게 해.  

   
  무심코 접시에 손을 가져가 사과를 하나 집어서 앞쪽 책상에 놓는다. 나의 생은 이 과일을 어떻게 싸고 있을까? 인생에서 이루어낸 것 주위엔 아직 이루어내지 못한 것들이 있어 이것들은 빠르게 자란다.  
   

  
 
나는 이 부분을 읽으며 사과의 씨앗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어(그리고 내 어린 날의 솜사탕 막대를 생각했어). 열매가 씨앗을 기억한다고 할 때 내 선과 악이, 내 슬픔과 기쁨이 씨앗을 기억한다고 할 때 우리는 어떤 씨앗일까? 어떤 씨앗에서 내 과일은 자라났을까? 오늘 네 슬픔의 과일은 어떤 씨앗에서 자랐을까? 나는 지금은 오로지 강함만을 생각해. 악해질 많은 기회가 있어도 난 그 길을 가고 싶지 않아. 진리에 관심 있는 자라면 어디서라도 진리를 찾아내고 선에 관심 있는 자라면 어디서라도 선을 찾아내고 악에 관심 있는 자라면 어디서라도 악을 찾아내고 말 거야. 나는 어디서든 강함을 찾아내고 싶어. 지상의 선과 악을 다 받아들이되 그것을 도덕적으로만 받아들이고 싶진 않아. 중요한 것은 생명력이야. 그날 네가 춤추는 너한테서 한 번 본 것. 그리고 끝까지 새겨두기 위해, 영원히 타오르게 하기 위해 눈을 감아버린 그것. 영원히 기억하기 위해 문밖으로 걸어나가게 한 그것. 그것은 바로 너의 생명력이었어. 꺼트리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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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테의 수기> 

   라이너 마리아 릴케 / 김재혁 옮김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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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안그림자 2011-03-28 19: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편지란 놈은 읽는 이로 하여금 마음을 울리게 만들어 주는 묘약이 아닐까 생각을 해 봅니다.그의 말들이 생각들이 편지로 읽히니 더 알알이 마음 속으로 박혀 들어 옵니다. 형이상학이 어떻고, 관념주의가 어떻고, 이데아 사상의 궁극적인 목표란 것이 무엇인지, 그 사상의 대가들로는 누가 누가 있었더라.... 80년대 90년대를 지나온 세대들한테는 진부하고 지루하고 재미없고 남의 나라 이론 같은 이론 사상을 왜? 점수 받기 위해서 알아야 했고 암기해야만 했던 철학적 관념들을 시간은 직선이 아니고 순환 코스를 향해서 달려 나가는 것인지, 그 때 그 시절의 의미들이 인생의 법칙 속에서 살아서 숨쉬고 있는 것 같습니다. 릴케의 관념들도 살아서 숨쉬고 있고요. 중세는 그들을 가리켜 궤변론자니, 악마의 소리를 듣는다고 하여 이단자들로 몰아 세우고도 했었는데 그런 그들의 이념들이 왜 현대문명도 거부를 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그들이 만약 지금, 우리들과 함께 숨을 쉬고 호흡을 한다면 우리들한테 어떤 말들로 조언을 해 주었을까요!그들은 철학자들이 분명한 것 같습니다. 그들의 관념들은 탁상공론도 책 속의 장신구가 아닐테니까요!그들은 어느 소설가의 글 귀속에 등장하는 타임워프를 타고서미래를 이동할 만큼 미래를 내다 보았겟지요^^ 릴케의 깊이를 참 몰랐던 시절, 20대란 것이 꿈으로만 통했던 시절, 그의 은유는 사랑의 발라드가 되어 주었고, 그의 글은 배부른 이의 노래말로 들려 왔었지요.그의 말테 수기는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는가? 처럼 세상에 대한 그의 고뇌를 알게 해 주는 비문이 되어 주겠지요^^ 한번 세상에 와서 세상을 읊었다면, 죽어서도 세상을 기억하고 픈 그의 마음이 그곳에 알알이 박혀 있겠지요
 

 

  넌 지킬, 난 하이드

  
민규동(영화 감독) 

 

 안녕, 커피진주.  

일본의 지진 소식 때문에 어떤 다른 생각이 끼어들 틈도 없는 시간이야. 이 현실이 잘 믿기지 않는데, 그건 내가 세상을 그저 그럴듯하게 예측대로 잘 굴러가고 있다고 온정적으로 바라보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어. 조금씩 예외가 있지만 그래도 늘 나아지고 있다고 최면을 걸며 살아왔지만, 이젠 도무지 자신이 없어지는구나. 크게 보면 어쩔 수 없이 재난 영화에 출연한 단역들로서 이 불확정성의 시대에 걸맞은 우리의 눈높이는 어떤 걸까 고민하게 돼. 이런 와중에, 트위터에는 이웃에 덮친 재앙을 애도하는 수많은 사람들 뒤로 놀라운 멘션들이 넘쳐나고 있어. ‘우상 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이다.’ ‘한반도를 안전하게 해준 하느님께 감사한다.’ ‘한류 열풍에 타격이다.’ ‘한국 기업에 반사 이익이다.’ 어처구니가 없지? 인류 공영과 사랑의 전도를 외치는 예의 바른 한민족의 얼굴 뒤로 이런 배타적이고 매몰찬 이기심이 숨어 있다는 게 놀랍기도 하지만, 그걸 드러내놓고 표출해내는 지독한 뻔뻔함이 더 놀라워. 오랫동안 우릴 괴롭혀온 우월한 경쟁자로 일본을 보고 있기에, 틈만 나면 위치의 전복을 꿈꾸는 극우주의자들, 또 상대적으로 선교사의 희생이 심했고 그 때문에 서구 종교가 차지한 자리가 비좁은 일본에 대해 개신교도들이 가진 열등감, 질투심이 발현된 거야. 마오쩌둥이 ‘역사는 증상이고 인간이 질병’이라고 했었지, 아마. 이들이 보여주는 집단적 이중성이 실제 재앙보다 더 몸서리치게 무섭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

   
 

어떤 아침에는, 이 세계가  
치유할 수 없이 깊이 병들어 있다는 생각
또 어떤 아침에는, 내가 이 세계와
화해할 수 없을 만큼 깊이 병들어 있다는 생각

 
   

 오늘 아침에는 최승자 시인의 <어떤 아침에는>이라는 시를 펼쳐봤어. 병든 나와 병든 세계와의 이 미묘한 관계는 결국 둘 사이에 어떤 새로운 윤활유의 존재를 필요하게 돼. 많은 영화들이 이 중간 존재를 다뤄왔어. <헐크>, <사이코>, <드레스 투 킬>, <엔젤 하트>, <프라이멀 피어>, <카인의 두 얼굴>, <마스크>, <아이덴티티>, <파이트클럽> <솔라리스> 등등, 이 익숙한 영화들의 공통점이 뭐게? 바로 도플갱어나 야누스 또는 해리성 정체성 장애인 다중 인격을 다룬 영화들이야. 이 영화들의 주요 테마가 <지킬 박사와 하이드>에서 탄생한 것이라면 믿을 수 있겠니?

 내가 얘기하려는 작품은 ‘괴혈병’이나 ‘럼주’라는 단어를 가르쳐줬던 <보물섬>의 작가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이 쓴 <지킬 박사와 하이드>야. 낮에는 자선사업가 지킬, 밤엔 살인범 하이드. 말하자면, 겉 다르고 속 다른 인간. 성추행범 목사, 밀수꾼 경찰, 아동학대범 유치원교사등등. 그래 이런 간단한 이미지로 정리할 수 있지만, 나 또한 어려서부터 많은 버전의 영화를 봤고, 패러디를 보았기에 문득 진짜 줄거리는 헷갈리기도 해. 그래서 저번 주엔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를 다시 한 번 찾아봤어. 동성애자처럼 그려진 소설과는 달리, 지킬은 성녀를, 하이드는 창녀를 사랑하고 있는 뮤지컬의 설정이 상당히 설득력 있어 보였어. 이 얘기가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의 틀에 갇힌 좁은 상징이 아니라, 욕망의 억압과 폭력적 분출이라는 당대 관습과 제도에 대한 냉소적 비판으로 확장돼 보였거든. 이 소설이 이렇게 영화로, 뮤지컬로 끝없이 각색되는 이유가 뭘까. 메리 셜리의 <프랑켄슈타인>이나 브람 스토커의 <드라큘라>처럼 그가 찾아낸 ‘이중인격’이라는 개념이 순식간에 집단 무의식의 상징으로 자리를 잡은 이유가 뭘까. 사람은 행동보다는 의식의 영역이 훨씬 넓고 깊고, 또 거기엔 정상보단 비정상적인 요소가 훨씬 더 많이 내포돼 있어. 결국, 거시적으로 인간의 심리를 투시할 때 보이는 그 복잡한 비극적 양상, 즉, 인류가 받은 저주인 ‘선과 악’이라는 쌍둥이의 극과 극의 갈등을 최초로 그려냈기 때문 아닐까.

 이런 갈등에 눌린 채 어떻게 탈출할까, 질문을 던지고 또 던졌던 지킬은 어느 날 ‘두 본성을 분리하는 기적’에 도전해.

   
  만약 각각의 본성을 별개의 개체에 담을 수 있다면, 참을 수 없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게 사는 일이 가능해지지 않을까? 부조리한 존재는 그의 고결한 쌍둥이의 열망과 자책으로부터 해방되어 그만의 길을 가고, 정의로운 존재는 흔들림 없이 확고하게 높은 곳을 향한 그의 길을 가면 될 것이다.  
   

 이 무서운 획책은 자신의 악이 완벽한 명분을 얻고 양심의 가책 없이 마음껏 펼쳐지기를 원하는 마음이야. 약물 한 병이면 죄책감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된다! 이토록 편리한 면죄부가 있을까? 

 넌 내가 죽도록 사랑하며 살라고 했지. 그래 어쩌면 너라도 마음껏 욕망하고 싶구나. 하지만 밤새지킬의 어린 시절 고백처럼 마음껏 쾌락을 탐닉하고, 다음날 아침 카다피에게 학살당한 리비아의 시민을 애도하는 점프컷을 그린다면, 이 비약에서 오는 균열감 때문에 나는 온전히 스스로 쾌락을 추구할 수도, 당연한 인류애를 맘껏 펼칠 수도 없는 딜레마에 빠질 거야. 네 말대로 겉으로는 쑥맥이고 속으로는 쾌락주의자인 내가 약품 하나로 또 다른 아바타를 만들어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니. 하이드로 태어난 난 거침없이 달려가 불길처럼 널 휘감을텐데. 지킬 그대로 고귀하게 남은 난 사심 없이 지구의 평화를 목놓아 기원할텐데. 이런 뻔뻔한 면책의 욕구로부터 자유로울 자가 있을까?

 하덕규의 노랫말처럼, 대부분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서’ 다들 어떤 게 나인지 모른 채 번민에 휩싸여 살고 있을 거라 믿어. `권태'와 `광기'의 충돌 가운데 끝없이 절망하고 허무의 나락에 빠졌던 전혜린도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에서 이런 편지를 남겼어.

   
  피라도 흐르고 그런 강렬한 자극이 얻고 싶다. 비정상적인 일을 하고 싶어 죽겠다. 무엇에든지 편집증적 강박을 일순이라도 가져보고 싶다. 후회의 극치까지를 행위로 구명해보고 싶다. 지킬 박사는 하이드씨일 수밖에 없었어. 적어도 때때로는......  
   

 이렇게 질문해 볼까? 마음속에 또 다른 내가 있고 그 마음이 몸을 갖고 태어난다면 누가 진짜 나일까? 둘 중 나의 본질적인 모습은 어떤 걸까? 루 메리노프는 <철학으로 마음의 병을 치료한다>에서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를 ‘다른 사람이 나에 대해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로 고쳐 말해. 결국, 어떻게 보여지고 평가받느냐가 존재의 본질일 수도 있다는 얘기지.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느끼고 인식하는 내 본질은 겉모습과 속 모습 중 어느 것일까? 

 내 대학시절 별명이 ‘신림동 황금 허리’였다는 걸 알 거야. 내가 허리를 튕기면 근방 200미터 내의 여인들이 모두 쓰러졌던 전설도 알 거야. 항상 맨 뒤 창가를 선호하고, 나서는 걸 싫어하며, 구석과 그림자에 집착하며 말이 없던 내가 어느 날 수백, 수천의 대중들을 휘어잡는 춤꾼으로 거듭날 거라고 누가 생각했겠니? 내 안에 그런 광대로서의 유전자가 있는지는 나도 몰랐던 일이니까. 사실 사람들이 알고 있는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 그리고 내 인생의 궤적들과 현재의 지표는 상당한 차이가 있어. 그렇다면, 결국 진짜 나는 누구일까.

 오늘 외신을 보면서는 이렇게 질문할 수도 있어. 저 카다피가 그 카다피인가. 미국의 야욕이 아랍을 비극에 빠뜨렸기에 외세에 결탁해 부패한 자본가들을 내몰고 정의를 위해 자신들은 광신도가 됐다고 일갈한 그 카다피가 지금 저 학살자인가. 지금과 과거 중 누가 지킬이고 누가 하이드인가.

   
  내 의식 속에는 서로 갈등하고 있는 두 개의 본성이 있으며, 비록 내가 그 중 어느 한 쪽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다 하더라도, 그것은 근본적으로 내가 양쪽 모두이기 때문이다.  
   

  지킬은 자기 몸에 실험을 감행하며, 이렇게 대답해. 인간은 결국 어느 한 쪽으로의 구분이 의미 없을 정도로 이중적이다고 말이야.

   
 

어리석음, 잘못, 죄악, 탐욕이  
우리 정신을 차지하고 육신을 괴롭히며,
또한 거지들이 몸에 이와 벼룩을 기르듯이,
우리의 알뜰한 회한을 키우도다.

 
   

  보들레르도 <악의 꽃>에서 선이 없으면 악도 존재할 수 없다고 얘기해. 흙탕물에서 피어나는 연꽃처럼, 언어학에서 유사성과 차이를 동일 개념으로 보는 것처럼. 이렇게 그 대립을 두 인격 혹은 선악이라는 단순한 이분법을 넘어선 여러 분할된 욕망의 대립이라고 보자면, 도스토옙스키의 <이중인격>, 스탕달의 <적과 흑>, 헤세의 <지와 사랑>에서부터 <플래툰>의 번즈 중사와 일리어드 상사까지 이 주제는 우리의 역사와 일상 속에서 무한히 반복 재현되고 있어.

  스티븐슨이 연구했던 이 ‘도덕적 정신이상’이 어느새 보편적 삶이 되어버린 세상. 이 기이한 이야기에서 가장 당황스러운 것은 이것이 전혀 기이하지 않다는 거야. 현대 사회는 말 그대로 하이드가 지킬을 구원하고 있는 세상이니까. 이번 주 故 장자연 리스트의 인물들은 한숨을 놓았어. 편지가 친필인지 조작인지의 소동이 결국 재수사를 하지 않는 결론에 도착했으니까. 하지만 자필 유서에서 호소했던 진실은 여전히 유효하잖아? 돈과 권력으로 젊은 사람의 꿈을 짓밟았던 그 위선자들은 자신의 부조리를 감내하기 위해 또 다른 자아를 만들어놓고 편하게 악행을 저지르기를 꿈꿀 거야.

   
  죄를 지은 것은 어쨌든 하이드였고, 하이드 홀로이지 않은가.  
   

 이렇게 위로하면서 말이야. 한편 그들은 가족에겐 소중한 가장, 친구들에겐 명망 있는 지인일 테지.

 사실 영화나 소설 속 하이드는 대부분 폭력적인 악당으로 그려져. 정신질환 탓에 극단적인 범죄를 저지른다는 이 고정관념은 그들을 격리의 대상으로 몰아세우는 왜곡된 시선을 은연중에 퍼뜨리지. 하지만 우리 안의 하이드, 그것은 꼭 흉악한 범죄자의 욕망을 일컫는 것만은 아냐. 언젠가 휠체어를 탄 장애인이 기다려주지 않고 올라가 버린 엘리베이터를 향해 돌진해서 결국 떨어져 죽은 사건에서처럼, 긴 세월 쌓아온 차별에의 울분. 버스 정류장에서 한참 줄 서서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끼어드는 새치기가 불러오는 살의. 소녀를 성폭행하고도 멀쩡하게 살아가는 가해자를 보고 그 부모가 시스템에 느끼는 울분과 복수심. 이렇듯, 평범하고 선량한 마음 뒤편에 법과 질서가 구원해주지 못하는 욕구와 본능들 또한 또 다른 하이드의 세포라고 생각해.

   
  나는 이원적이라는 말을 했다. 현재 나 자신의 지식수준으로는 그 이상을 규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똑같은 문제에서 혹자는 내 입장을 따를 것이며, 또 다른 사람들은 나를 능가하겠지. 그래서 감히 추측건대, 인간은 잡다하고 서로 모순되는 개별적 거주자들의 집합체라는 사실이 결국 드러나지 않을까 한다.  
   

  그가 약품으로 또 다른 인격의 출아를 상상한 지 200년이 지나기 전에 사실상 복제가 가능해진 시대가 와버렸어. 본성의 분리는 불가능하더라도, 육체의 재현은 가능한 시대 말이야. 게다가 언제든 생성 가능한 복수의 디지털 자아는 다중적인 아이디와 아이콘을 지닌 채 인터넷을 떠돌 수 있는 지위를 얻었고, 우리는 그 익명의 틈에 숨어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네티즌이라는 하이드의 초상을 얻었지. 즉, 이중인격을 넘어선 다중인격의 개념이 자연스러운 세상이 됐어. 우리는 컴퓨터 앞에만 앉아 아바타를 실행시키기만 하면 언제든 지킬과 하이드로 살아나갈 수 있게 된 거야. 물론 여기엔 중독과 혼동이라는 부작용이 따르고 있지.

  어린 시절 외할머니와 어머니에게 성폭행을 당해서 24개의 인격체를 갖게 되는 바람에 자신을 스스로 치료하기 위해 처절한 사투를 벌인 캐머론 웨스턴이라는 한 남자의 기록, <다중인격>이라는 책엔 이런 글이 있어.

   
  전 늘 나 자신이 한 조각의 인간에 불과한 듯한 느낌이 듭니다. 낡은 카펫에 흩어진 깨진 유리 조각들 중 한 개 말입니다. 내가 다른 유리 조각들을 바라보고, 그 유리 조각들 중 일부는 나를 쳐다보지만 일부는 보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한 카펫 위에 흩어져 있는 유리 조각들일 뿐입니다. 그러면 나는 나 자신에게 말합니다. 우리가 더 가까워져야 하는 거 아니냐? 우리가 한데 모이면 화병 모양에 훨씬 가까워질 텐데… … 우리가 조각들을 연결해서 붙이면 말이지. 그런 상태로 있으면 누가 우리를 빗자루로 쓸어서 쓰레기더미에 버리진 않을 거야.  
   

  니체의 말처럼, 내 안에 존재하는 외부 세계의 대변자인 초자아가 양심의 가책 탓에 자기 학대에 찌든 모습으로 허덕이며 스스로를 쭈그러뜨리고 초라하게 만드는 사이에, 우리의 하이드가 하나둘씩 잉태되고 있는 거지. 그래도, 윤리와 양심의 굴레에 벗어날 수 없지만, 그 너머의 세계에서 '나쁘긴 하지만' 욕망의 자유를 마음껏 누리려는 이 두 번째 자아 역시, 심약한 인간의 일부라고 이해해주는 게 '인간적인' 인간으로 사는 걸까? 아무튼 그는 인격체의 수와 인격체 간의 나이 차를 줄여가고 있대. 지금은 24개에서 어디까지 줄였을까?

 “사랑? 사랑이란 무엇일까? 한 개의 육체와 영혼이 분열하여 탄소, 수소, 질소, 산소, 염, 기타의 각 원소로 환원하려고 할 때 그것을 막는 것이 사랑이다.” 어느 자살자의 수기에 나온 글이야. 한 인간이 여러 개의 인격체로 분열되며 각각의 욕망으로 환원하려고 할 때 그것을 막는 것은 무엇일까. 법? 도덕? 관습? 이성? 사랑? 대답해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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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킬 박사와 하이드>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 박찬원 옮김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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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성치 2011-03-19 2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에 책 사러 들어올 때마다 읽어요. 일상에서 그냥 지나쳐 왔던 것들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네요. ^^
 

 

  진짜 삶

  
정혜윤(CBS 라디오 프로듀서) 

 

안녕 동쪽별.  

지난주에는 너무도 깨끗하고 진지해서 마치 어린 아이의 것만 같은 천상의 사랑 이야길 나누다가 이번 주엔 죽음 이야길 나누려니 정신이 없네.

 너의 글을 보니 넌 나 몰래 언젠가 죽음의 문턱에 갔다가 돌아온 것 같은데. 음. 도대체 언제였을까? 네 글은 생물학적인 죽음이 아니라 할지라도 사랑의 끝, 꿈의 끝 앞에 서서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본 사람의 글 같아. 죽음에 대한 네 생각은 덜 떨어진 숙맥인 처지에 속마음 깊은 곳에서만은 남부럽지 않은 과감한 쾌락주의자인 네가 썼다기에는 좀 의심스러울 정도로 지나치게 성숙하단 말이지. 아무리 손가락을 빨며 기억을 더듬어 봐도 네가 죽음에 대해 한 말 중 기억나는 것은 이거 하나뿐인데. 오르가슴이야말로 두렵고 유혹적이라고. 오르가슴은 죽음 냄새가 나기 때문이라고. 에로스야말로 죽음의 충동이라고. 너도 미인의 긴 다리에 칭칭 감겨서 그 다리로 목 졸려 죽임을 당하고 싶다고. 그래서 난 속으로 생각했지. 음 너야말로 에로틱한 순교자구나!

 하지만, 이번에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두고 네가 쓴 글은 오르가슴이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으로 봐서 넌 최근에 사랑과 죽음을 분리시킨 게 아닐까 궁금하지만 그래도 그럴 리는 없을 거란 생각으로 다시 읽었어. 그리고 네가 사랑과 죽음을 분리시킨다면 나는 난 반대야! 라고 외쳤을 거야.

 나도 이반 일리치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몇 가지 있으니 그거부터 말해볼게. 이반 일리치 삶의 소신은 인생이란 즐겁고 고상해야 한다는 거야. 다시 읽어봐도 그에게 인생관이라고 할 만한 것은 인생이란 원래 그래야만 한다고 믿는 편안하고 기분 좋고 늘 즐겁고 고상한 것이란 말만 나오는데 이반 일리치의 고상함은 이런 거야. 그는 검사야. 그래서 그의 고상함의 범주엔 이런 항목들이 들어가. 자신이 파멸시키기로 마음만 먹으면 누가 되었든 그대로 파멸의 구렁텅이로 몰아갈 수 있는 막강한 힘이 자신에게 주어졌다는 권력 의식을 생생하게 느끼는 것. 그런데도 자기처럼 막강한 권력을 가진 사람이 법원에 온 낮은 신분의 사람들을 친구처럼 편하게 대한다는 인상을 주도록 신경을 쓰고 그런 평판을 듣는 걸 즐기는 것. 법정에 들어설 때나 부하 직원들을 만날 때면 분명하게 전해져 오는 자신에 대한 예우를 즐기는 것, 상관이나 부하 직원들을 상대로 성공을 거두는 것. 자신과 격이 맞는 사람들과의 저녁 식사나 파티, 동료들과 나누는 담소, 식사, 카드놀이. 이반 일리치는 결혼도 이런 식으로 해. 아내가 될 여자를 너무도 사랑해서 그녀 안에서 자신의 인생관을 함께 나눌 무엇인가를 발견했기 때문이 아니고 그런 여자를 아내로 얻는 것이 기분 좋은 일이고 자신보다 더 높은 지위의 사람들이 옳다고 여기는 일을 한다는 느낌 때문에.

 내가 살면서 만난 품위 있는 사람들은 이반 일리치와 달라. 그들에게 있어 인간의 품위는 어떤 자격, 조건, 혹은 그가 속한 집단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그것들과 아무런 관계없이 자기 삶의 운명을 결정하려 하는 의지와 끝없는 실천에서만 나왔었어. 그래서 이반 일리치의 삶을 보고 있자면 난 좀 신경질이 나서 고상함과 품위가 뭔가 따져보고 싶기도 하고 그리고 톨스토이의 또 다른 작품 <부활>의 한 등장인물이 생각나기도 해.

 <부활>에는 자신의 인생을 ‘그것이 아님’으로 설명하는 셀레닌이라는 법무부 관료가 나와. 그는 젊은 시절 너그럽고 총명한 모범생이었어. 그의 젊은 시절의 목표는 다른 사람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었고 그래서 관직에 들어가. 그런데 관직은 그가 생각한 것과 달랐어. 그는 현실이 평소 자기가 바라던 것과 큰 차이가 난다는 것을 알면서도 즉 ‘그것이 아님’을 알면서도 다른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싶지 않아서 그냥 그 생활을 이어나가. 그는 거절하면 상대방 여자가 상처받을까 봐 결혼했고 그러다 보니 서로를 이해하려는 것보다는 다른 사람들의 눈에 그럴싸하게 보이는데 치중하게 돼. 그는 가정생활도 ‘그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어. 그런데 더 큰 ‘그것이 아님’은 다른 곳에 있었어. 그런 생활을 하는 동안에 그는 점차 이렇게 생각하게 되었던 거야. 진실이란 인간 개개인의 지식으로는 알 수 없는 것이고 집단에 의해서만 인식되는 것 아닐까? 그런데 바로 이것이 가장 큰 ‘그것이 아님’이었어. 그렇다면 이것이 왜 가장 큰 ‘그것이 아님’이었을까? 바로 이렇게 생각하는 순간 그는 자신이 허위를 행하고 있다는 자각 없이, 남들도 다 그렇게 한다고 생각하면서, 세상은 원래 그런 거라면서 평온하게 아무런 기쁨과 위안을 주지 않는 직장 생활과 가정생활에 안착할 수 있었던 거지. 이반 일리치는 셀레닌과 닮았어. 내겐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란 소설도 죽음을 앞에 두지 않고선 도저히 눈치챌 수도 없이 깊게 젖어 있는 ‘그것이 아님’을 발견해 가는 글로 읽혀.

 이반 일리치는 죽기 전에 아내와 자식, 의사, 법무부 동료들을 보면서 자신이 못 견뎌 하는 그들의 행동이 바로 자신의 삶의 모습, 한 치의 의견 차이도 없었던 자기의 모습이었던 걸 알게 돼. 그들 안에서 바로 자기 자신의 모습과 자신이 삶의 수단으로 삼았던 모든 것들을 보는 거지. 그는 가족과 동료들이 자신을 가엾게 여겨주기를, 그와 함께 울어주기를 간절히 바랬어. 하지만 그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고 동료들도 그렇게 하지 않았지. 그래서 그의 생애 마지막 독, 마지막 거짓은 울고 싶은데 울지 않는 것이었어. 그건 무슨 숭고한 이유 때문이 아니고 남들이 어찌 생각할까 두려워서였던 거지.

 소설의 마지막에 고통에 시달리던 이반 일리치가 영혼의 소리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나와. 그 장면을 축약해서 옮겨보면 이래.

   
 

-네가 바라는 게 뭐지?  

-바라는 것? 더 이상 고통을 겪지 않는 것, 그리고 사는 것
  
-사는 것이라고? 어떻게 사는 것을 말하는데  

-그래, 사는 것, 예전에 살던 것처럼 행복하고 기쁘게.

-예전에 어떻게 살았는데? 네가 행복하고 기쁘게 살았다고?

 
   

 이반 일리치는 행복했던 지난날의 삶에서 최고로 좋았던 순간들을 떠올리며 마음속에 그려보기 시작해.

   
 

-혹시 내가 잘못 산 것은 아닐까? 하지만 당연히 내가 해야 할 일들을 하면서 살았을 뿐인데 어떻게 잘못 살 수가 있었지?  

-그럼 지금 네가 바라는 것은 뭔데? 사는 것? 어떻게 사는 것?

 
   

 그의 고민은 계속 돼. 그리고 또 결론을 내려. 암만 생각해도 올바르고 품위 있는 삶이었다고. 그렇게 두 주일이 지나자 그는 자기 삶에서 지키고 변호해야 할 것들이 아무 것도 없음을 깨달아.

   
  나에게 주어진 모든 것들을 나 스스로 망쳐 놓았다는 생각을 가진 채 또 그것을 바로 잡을 기회도 없이 눈을 감아야 하는 것이라면 그땐 정말 어떻게 되는 걸까?  
   

 죽음을 바로 앞에 둔 이반 일리치처럼 우리에게도 이 삶 속에서 무엇을 수단으로 삼고 있으며 무엇을 추구했었던가 피를 토하듯이 묻게 되는 순간이 있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해. 에피쿠로스 학파의 명제 중엔 멜레네 타나토(melete thanatou)란 게 있어. 이 수련은 삶 속에서 죽음을 현재화해 보라는 거야. 그건 죽음을 매일매일 생각한다는 뜻이라기보다는 매일매일을 마지막 날로 간주하는 그런 삶을 상상해보란 거야. 이건 뭐 영성에 가득 찬 교훈적인 격언이 아니야. 처절하게 사유해보란 말이야. 내가 지금 막 죽으려고 할 때처럼 내 행동을 사유해보란 말이야. 동쪽별! 우리는 우리 삶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 하는 걸까? 더 알아야 하겠지? 우리에게는 어떤 ‘그것이 아님’이 있을까? 이 질문은 너무나 중요해. 감히 남의 눈에 내가 꽤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다고 부러움을 사는 것 따위가 내 삶의 의미, 내가 태어난 이유가 될 수 있겠니?

  그러므로 사랑이 죽음인 너의 태도를 나는 항상 존중할 수밖에 없어. 다른 덫에 걸려 죽는 것보단 미인의 다리에 목이 감겨 죽는 게 훨씬 좋지. 난 우리가, 인간들이 모두 죽는다는 걸 생각하면 안쓰러우면서도 슬프면서도 경이로워. 그렇게 죽을 것인데도 너무너무 애를 쓰고 아침에 눈을 뜨고 어린아이 머릴 쓰다듬고 수영을 하고 용기와 사랑을 보이고 가치 있는 것을 찾아내잖아. 넌 꼭 사랑하다가 죽었으면 좋겠어. 아니면 죽을 듯이 사랑하며 살았으면 좋겠어. ‘진짜 삶’에서 멀어지지 말자. 진짜인 척 사는 건 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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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반 일리치의 죽음>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 / 박은정 옮김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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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멘토 모리

  
민규동 (영화 감독)

 

 안녕, 커피진주.  

너의 감기 소식만으로도 덜컹하는 한 주야. 이반 일리치는 옆구리의 작은 타박상 때문에 3개월 시한부의 삶을 살게 됐으니까. 걱정돼. 빨리 나았다는 소식 전해주길 바라. 시한부 하니까 슬픈 이야기 하나가 생각나. 작년 여름, 췌장암을 앓던 한 대학 때 친구가 세상을 떴어. 6개월 시한부 투병 소식을 뒤늦게 듣고 놀라 전화를 했을 때, 이렇게 담담히 얘기하더라. “바쁘잖아. 신경 쓰지 마.” 그 말을 듣고서야 눈물이 뚝 떨어졌어. 죽음이 임박한 사람이 살아남을 자를 우선 감싸주다니. 순간 돋보인 내 무심함에 스스로 치를 떨었었어. 병문안을 가끔 갔을 때마다, 각종 연예인 가십을 풀어놓으며 농담을 구사하는 게, 곧 죽는다는 게 믿기지 않았어. 프로 야구와 시트콤 「지붕 뚫고 하이킥」 덕에 버틴다고 명랑하게 웃었지만, 실은 병이 그 낙천적인 성격까지도 갉아먹고 있었을 거야. 점점 자신의 모습이 혐오스러워졌는지, 방문객도 더 이상 반기지 않게 됐어. 모든 걸 놓아버린 친구의 참혹한 얼굴을 떠올리다 못해, 난 하이킥에 나오는 한 여배우에게 부탁했어. 그냥 개인 팬 미팅이라고 생각하고 병문안을 함께 가자고. 죽어가는 낯선 친구에게 선물해달라고. 천사 같은 그 배우는 기쁘게 동행을 허락했어. 내 얼굴도 잘 못 알아보던 친구가 그 배우는 단번에 알아보더라. 방문 인증이라며 배우의 손수건과 거울도 빼앗고 장난치며 놀더니, 끝내는 (10년 뒤에 있을지 모를) “결혼식장에 갈게요. 그때 봐요”라며 갑자기 마지막 삶의 의지를 불태우는 거야. 깜짝 놀랐었어. 어떤 위로가 그를 방긋 웃게 한 걸까. 죽음을 며칠 앞두고 풀죽은 그에게 무엇이 그토록 희망이었을까.

 그때 난, 중학교 때 백혈병에 걸려 돌아가신 외삼촌과의 마지막 조우를 떠올렸어. 그날, 어른들은 잘 설명해 주지 않았지만, 직감으로 마지막 인사라고 느끼고 있었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우물쭈물하다가 그때 내가 건넨 말은, 처참하게도, “곧 나으실 거예요. 걱정 마세요”였어. 이반 일리치가 증오해 마지않던 그 가짜 위로였던 거야! 자신이 죽는다는 걸 인정하고, 죽어가는 사람으로 대우해 주길 바라던 일리치는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이 사람들한테 공공연히 부인되는 것 때문에 고통스러워해. 돌멩이가 하늘에 떠 있다면 뉴스거리가 되지. 하지만, 달이 떠 있는 건 뉴스가 안 되잖아? 죽음도 마찬가지로 너무나 뻔하고 당연한 일이 되어버린 탓에, 직접 죽음을 맞이하는 개인은 아무것도 아닌 일상적 이벤트의 주인공이 되고 말아. 내 말은 전혀 위로가 안 됐을 거야. 결국 타인의 죽음을 목도하면서 건네는 헛된 위로는 실은 “난 이런 일을 겪을 리도 없고, 또 나한테 일어날 리도 없어”라는 추한 안도감일 뿐일 테니까.

 그렇게 ‘다행히도 난 죽음을 연기하는 주연 배우가 아니라 관객이야’라고 자신을 다독여도, 우리 대부분도 결국 일리치처럼 죽음을 맞이하게 돼. 잘 봐봐. 그 과정은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가 말한 '죽음의 5단계'를 거쳐. 첫째, 부정의 단계야.

   
  “그는 키제베터의 논리학에서 배운 ‘줄리우스 카이사르는 인간이다. 인간은 죽는다. 고로 카이사르도 죽는다.’라는 유명한 삼단논법의 일례가 카이사르에게나 해당하는 진리였지, 자신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말이라고 믿으며 살아왔다. (…) 자기 자신은 카이사르가 아닐뿐더러 일반적인 인간도 아니었다. 이반 일리치에게 자기 자신은 언제나 아주 특별한, 일반적인 인간과는 전혀 다른 그런 존재였다. (…) 수많은 감정과 생각을 지닌 바로 나에게는 죽음이란 전혀 다른 문제였다.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내가 죽는다는 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너무도 끔찍한 일이었다.”  
   

 누구라도, 처음엔 자신이 곧 죽게 된다는 현실을 부정할 수밖에 없을 거야. 
 


 그리고는 바로 둘째, 분노의 단계로 접어들어. 왜 하필이면 자신한테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그 이해할 수 없는 분노를 가족, 의사, 신에게까지 뻗치면서 주위를 힘들게 해.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 거지?
“죽음! 오, 죽음! 그러나 남들은 죽음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또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들은 결코 나를 동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여유 있게 삶을 즐기고 있을 뿐이다.”
 
   

 말하자면, “결국 죽음을 향해 열심히 달려온 것이나 마찬가지인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순간, 사람들이 자신이 바라는 만큼 그를 위해 마음 아파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모욕을 느끼는 거지.  



 그리고는 셋째, 협상의 단계로 들어서. 자, 이젠 어떻게든 죽음을 미루려고 해. 착하게 돌변하거나, 특별한 헌신을 맹세하거나, 등등 처절하게 발악하는 거지.

   
  “신이여, 당신은 어째서 이런 일을 하신단 말입니까? 어째서 나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셨습니까? 나를 이렇게도 괴롭게 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이렇게 파고들면서 “나에게 주어진 모든 것들을 나 스스로 망쳐 놓았다는 생각을 하며, 또 그것을 바로잡을 기회도 없이 눈을 감아야 하는 거라면 그땐 정말 어떻게 되는 걸까?”라고 돌아오지 않을 대답을 향해 절박하게 매달리게 돼. 
 


 하지만, 결국 넷째, 우울의 단계로 접어들고, 더는 자신의 죽음을 부인하지 못하게 돼.

   
   
  “난 내가 조금씩 산에서 내려오는 것도 모르고 산 정상을 향해 나아간다고 믿고 있었던 거야. 정말 그랬어. 세상 사람들이 보기엔 산을 오르는 것이었지만, 실은 정확히 그만큼씩 내 발밑에서 진짜 삶은 멀어져 가고 있었던 거야.”  
   

 무서운 깨달음이야. 그토록 절박했던 인생의 자취들이, “죽음의 정반대 편에 서서 죽음을 향해 점점 거리를 좁혀왔던 거”에 불과하다니, 극도의 상실감과 우울증은 당연한 도착점이겠지.  



 마지막으로, 수용의 단계로 들어서게 되는데, 이런 깨달음의 순간에는, 주변 사람의 동정 어린 시선마저도 이렇게 진실을 들려줘.

   
  “전에는 전혀 있을 수 없다고 생각되던 일, 즉 자기는 지금까지 잘못 살아왔다고 하는 것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문득 떠올랐다. 사회에서 최고의 지위를 차지한 사람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 대해, 그가 반대하려고 했던 극히 희미한 마음의 움직임, 그가 항상 곧 몰아내자, 몰아내자고 했던 극히 희미한 마음의 움직임, 오직 그것만이 진짜이며 나머지 것은 모두 가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마음에 싹트기 시작했다. 직무도, 생활도, 가정도, 사교나 업무의 흥미도, 모두가 가짜일지도 모른다! 그는 이러한 모든 것들을 자신을 위해 변호하려고 했다. 그러나 갑자기 자신이 변호하고 있는 것이 너무나 취약하다는 것을 감지했다. 변호해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 그는 그런 것들 중에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자신의 생활을 형성하고 있는 모든 것들을 보았다. 그것들은 모두 가짜이며, 삶도 죽음도 덮어 가리고 있는 무섭고 또 거대한 기만이란 것을 똑똑히 알 수 있었다.”  
   

  『생각의 탄생』에 이런 말이 있어. “가장 완벽한 이해는 우리가 ‘자신’이 아니고 ‘자신이 이해하고 싶은 것’이 될 때”이다. 그래, 맞아. 죽음의 롤러코스터를 탄 일리치도 자신을 포기하면서 스스로 죽음 자체를 이해하게 됐을 때야 비로소, ‘헛되게 살아온 삶을 유의미했다고 애써 정당화하려는 노력이 오히려 삶을 옥죄는 것이었다’라는 통렬한 깨달음을 얻게 돼. 그걸 본 우리는 죽음만이 줄 수 있는 이 선물에 응당 고개를 끄덕이게 돼. 그런데 여기서 하나, 묻게 되는 게 있어. 절대 경험할 수 없는 단 한 가지, ‘죽음’이라는 통과 제의의 심경에 우리가 유독 쉽게 본능적인 직관을 발휘하며 감정이입 되는 비결이 뭘까? 친구의 모습, 외삼촌의 모습, 일리치의 모습 모두가, 그저 잠시 유예된 우리 미래의 한 단면이란 걸 알고 있기 때문 아닐까? 그 누구도 받아들이지도 이해할 수도 없는 그 사실. ‘나는 죽는다’라는 냉정한 비밀 말이야.

  『좁은 문』도 『첫사랑』과 마찬가지로 결국 이 죽음의 문턱에서야 깨닫는 사랑의 진리를 헤집고 있잖아. 그래서인지 난 『좁은 문』을 읽으면서는 다른 뭣보다 죽음을 놓고 나누는 두 남녀의 사랑 맹세가 인상 깊게 남아. 제롬이 알리사에게 ‘우릴 갈라놓을 수 있는 건 죽음뿐’이라고 하자, 알리사는 반대로 ‘오히려 죽음이 살아 있는 동안 떨어져 있던 둘을 더 가깝게 만들어 줄 것’이라고 해. 죽음을 바라보는 두 가지 다른 시선이 보이지? 너는 어느 쪽이니? 궁금해. 넌 알리사 같은 금욕주의자는 딱 질색일 거 같아. 왜냐면, 알리사가 빠진 사랑의 환상은 기독교의 신이 배타적으로 요구하는 형이상학적 목적을 완성하려는 데 있으니까. 죽음마저도 ‘사랑보다 더 소중한 무엇’인가를 향한 자기희생의 당연한 과정이라고 생각하다니. 이런 자학형 행복추구자에게 말론 브랜도는 삐딱하게 한 마디 던지겠지. “인간은 죽을 때까지 고독한 존재야. 낭만적이기 짝이 없는 말이지만.” 굉장히 바보 같아 보이지만, 그래도 알리사의 일기 마지막 문장은 가슴을 사무치게 해.

   
  지금, 빨리, 내가 혼자라는 사실을 또 한 번 깨닫기 전에 죽고 싶다.  
   

 똑같은 고독 속에 죽어갔지만, 일리치는 정반대의 영역에 있었어. 관습의 규율에 크게 어긋남 없이 세속의 모든 욕구를 지당하게 쫓아오다가 느닷없이 죽음을 맞이하면서, 이렇게 소리쳤거든.

   
  무엇 때문에 제게 이런 시련을 주시는 겁니까? 도대체 왜 저를 이런 상황까지 오게 하셨습니까? 무엇 때문에, 도대체 무엇 때문에 저를 이다지도 고통스럽게 하시는 겁니까?”  
   

 톨스토이가 인생의 절반밖에 살지 않았던 40대 초에 죽음에 대한 극심한 공포에 시달렸었던 거 알지? 그때 쇼펜하우어에 경도됐었다고 해. <인생이란 무엇인가>라는 그의 대작에도 쇼펜하우어가 끊임없이 인용되는 이유를 유추할 수 있어. 어찌나 염세적인지, 행복한 사람도 슬프게, 또 슬픈 사람이라면 자살 충동을 느끼게 한다는 쇼펜하우어의 독설 가득한 행복론은 생의 유한성을 막 깨닫고 그 앞에서 벌벌 떠는 사람들에겐 치명적인 영향력을 발휘했을 거야. 쇼펜하우어는 겁에 질린 사람에게 태연히 이렇게 묻거든.

   
  우리가 죽음으로 무엇을 잃었단 말인가.  
   

 인간이 태어나기 전의 상태는 죽음이라고 부르지 않아. 태어난 후에야 죽음이 존재할 수 있지. 즉, 죽음은 삶의 꽁무니에 태어난 이면일 뿐이고, 결국 원래 아무것도 없던 상태로 돌아가는 회귀일 뿐이라는 거야. 삶이 어차피 고통밖에 없고, 또한 불가능한 만족을 위한 무의미한 노력의 연장일 뿐이라면, 죽음은 환영해야 할 해방으로 반겨야 한다는 거지. 그의 말에 수긍한다면, 생명과 죽음이 맞닿은 형상은 빛과 그림자의 원리와 비슷한 거라고 생각해. 우리 몸에 빛을 비추면 그림자가 생겨. 빛을 거두면 그림자도 상실돼. 하지만, 정말 그림자가 생겼다, 사라진 걸까? 자세히 들여다보면, 빛이 닿는 순간, 몸이 빛을 막고 그림자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들이 보이는 것일 뿐. 그림자는 애초에 없고, 빛이 사라지면 주변에 생성됐던 존재들이 사라지면서, 모두 애초의 ‘무’에 해당하는 그림자가 되어버리는 것이잖아.

 그래, 이렇듯, 죽음은 모든 철학과 예술을 전통적인 소재면서도, 실은 우리가 마주치는 가벼운 일상적인 주제고, 동시에 먹이사슬이라는 생태계의 균형요건이고, 보험 업계부터 화환업체까지 수많은 기업의 생명줄이고, 각종 영화의 오락거리이기도 해. 나도 최근 ‘김인희의 죽음’이라고 부를 수 있는 신파 영화를 찍었어. 이런 죽음을 다룬 많고 많은 작품 중에 하필이면 이 작품을 놓고,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명쾌히 해답을 건넬 수 있는 훌륭한 작품이라고 평한 보르헤스. 그는 도대체 무엇을 읽었던 걸까. 내가 보기엔 톨스토이는 ‘잘못 산 인생이 편안한 죽음에 장애가 된다’라는 묘한 교훈을 깊게 던져주고 있는데, 그렇다고 이 소설이 삶의 노선을 재정비하자는 단순한 계몽극이라고 볼 수는 없어. 그건 어차피 비현실적인 계도일 테니까. 음, 이런 거 아니었을까? ‘메멘토 모리’ (프랑스 수도원의 수도사들 사이에서 한 때 인사로 쓰였던 말인데, 내 데뷔작의 영문 제목이기도 해.) ‘죽음을 기억하라’라는 뜻인 이 라틴어를 암송하다 보면, 즉,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떠올리다 보면, 우린 모두 한없이 겸손해질 수밖에 없으니까. 이 소설은 이 ‘생의 유한성을 인식하는 것’, 그 거창하고도 소박한 철학적 소망을 전하고 있는 게 아닐까. 내일로 삶을 유예하는 것, 그것은, ‘인생이 무한하다고 믿는 오만함’이거나 혹은 ‘지금 조건으로 다시 한 번 더 인생을 살 수 있다는 무시무시한 착각’이라고 속삭여주는 게 아닐까.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난 이 소설에서 다뤄진 죽음의 정의를 ‘마지막 성장=죽음에서 삶으로 돌아오는 길’로 내리고 싶어. 영화 「버킷리스트」의 이 대사처럼 말이야.

   
  숨을 거두는 순간 두 눈은 감겼지만, 가슴은 열린 것이다.  
   

  그런데, 커피진주, 너도 언젠가 결국 죽는 거니? 상상할 수가 없구나. 100년 전 시골 기차역에서 맞이한 톨스토이의 허망한 죽음은 그가 평생 상상하지 못한 이미지였을 거야. 내가 죽을 땐, 어떤 모습일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힘겨워져. 그게 무엇이든, 그 상상하는 방식만 아닌 그 어떤 것일 거라는 불온한 본능 때문일까? 죽은 후 내 자취가 결국 모두에게서 사라지고 말 것이라는 허망함, 그 총체적 망각이라는 두 번째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까. 무서워. 불안해져. 피가 혼탁해져. 내털리 포트먼 주연의 「블랙 스완」을 보면 알게 돼. 불안이 어떻게 영혼을 잠식하는지. 잠식당한 영혼이 예술혼으로 피어나기도 하지만, 어떤 이에겐 가속화된 육체의 파괴까지 남겨주지. 지난주 자살로 삶을 마감한 배우 故 이은주의 6주기 추모 모임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오늘의 사망자수’를 가르쳐주는 전광판을 봤어. 0명이라는 통계에 한숨이 놓여. 하지만, 통계의 엄격함이 무서워. 하루에 몇 명이 죽는다는 통계상 평균을 맞추려면, 오늘의 0명 탓에 내일은 평균 두 배의 사망자수가 필요하다는 걸 뜻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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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반 일리치의 죽음>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박은정 옮김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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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onkim80 2011-04-03 16: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용의 단계에 이르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해야하는 경우들이 더 많죠..
죽음에 대해 예상치못한 단계, 부인이나 분노의 단계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죽음으로 인한 슬픔이란 것은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결국 부적절한 시기에서 오는 걸까요,
부적절한 해석에서 오는 걸까요.. 죽음에 대한 해석이라는 건 '해석'이라는 말이 주는
이성적인 성질과는 거리가 있어뵈기는 합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