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커피진주.
나의 편지는 변함없이 이어지는 널 향한 나의 고백이야. 오늘은 오래전부터 들려주고 싶었던 얘기를 할래. 신림동 하숙집에서 벌어졌던 살인의 추억이야. 20 년 전, 너의 자취방에서 백 미터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하숙하고 살 때의 일이야. 어느 날 하굣길에 보니, 주인집 막내 아이가 울고 있고, 집 앞에 경찰들이 수북한 거야. 집이 잠겨 있어 한참 두리번거리던 경찰이 결국 유리창을 깨고 안으로 들어갔어. 문이 열리는데, 세상에! 하숙집 주인아줌마가 피가 흥건한 마루 벽에 기댄 채 죽어 있는 거야. 그게 끝이 아니었어. 자세히 보니, 또 한 명의 시체가 있었어. 침대 위에 목이 졸린 채, 그리고, 온몸이 난자된 채로 뻗어 있는 하숙집 주인아저씨였어. 아이가 비명을 질러댔어. 난 얼어붙어 비명도 못 질렀어. 난생처음 시신을 본 거였거든. 돌이켜보니 아주머니가 그날 아침 방에 들어와 갑자기 그달치 하숙비를 돌려줬었어. 난 잠결에 일주일 먼저 돈을 냈었나 하고 다시 잠들었었지. 유서에 이렇게 적혀 있었어. “아빠의 지긋지긋한 폭력으로부터 아이들 셋을 구해내기 위해 먼저 데려간다…….” 그래, 이 사건은 그 예쁘고 인자했던 아줌마의 계획 살인이었어. 난 서서히 그 범죄를 재구성해냈어. 하숙생 스무 명을 꾸리며 바쁘게 살아가던 아줌마의 사교성. 직업이 없었던 아저씨의 히스테리. 밤마다 들려오던 비명. 단순한 부부싸움 이상의 증거였던 아줌마 얼굴의 멍 자국. 늘 주눅이 들어 있던 아이들. 뒤늦게 돌아보니 아저씨는 알코올 중독에 시도 때도 없이 폭력을 휘두르는 가정폭력의 주범이었어. 애들이 보는 앞에서도 식칼로 아줌마를 위협하곤 했대. 어딜 그렇게 돌아다니느냐, 바람피우는 거 아니냐고 하면서 죽여버리겠다고 말이야. 세 아이를 키우던 그 아줌마, 얼마나 힘들었으면, 잠든 사이에 남편 목을 조르고, 또 칼로 헤집고, 자신은 손목을 긋고, 또 목을 매달았을까. 시간이 흘러 이 무시무시한 목격의 기억도 옅어졌지만, 열등감과 의심에 치를 떨며, 무고한 아줌마를 향해 폭력을 휘두르던 그 아저씨 얼굴의 깊게 패인 주름은 아직도 잊지 못해. 질투에 의해 잠식된 영혼, 이것을 ‘오셀로 증후군’이라고 부른다는 걸 나중에 알게 됐어. 오셀로가 대체 어땠기에?
기독교로 개화한 북아프리카 이슬람계 흑인인 오셀로는 베네치아의 장군이었어. 당시 빅토리아 시대의 분위기로는 쉽지 않은 위치야. 많은 사람들이 오셀로를 칭찬했지만 이런 방식이었어. “피부는 검지만 마음은 더 희다.” 희다는 것은 선한 것, 검다는 것은 열등하다는 베네치아의 무의식적인 인종차별이 횡횡하던 시절이었거든. 물론 400년이 지난 후에 태어난 나조차도, 오슨 웰스든, 앤서니 홉킨스든, 플래시도 도밍고든, 검고 우락부락하게 분장한 오셀로 역의 배우들을 볼 때마다 심각한 부조화의 위압감을 느꼈으니까, 그땐 얼마나 심했겠니. 그는 이런 선입견을 가뿐히 뛰어넘는 훌륭한 장수였을 뿐만 아니라 성품, 언변, 기질 등 모든 면에서 완벽한 평가를 받는 남자였어. 게다가 모름지기 영웅답게 베네치아의 비너스로 칭송되는 데스데모나라는 젊은 백인 여자와 인종, 나이, 신분을 초월한 결혼에 성공해.
이런 사람이 그 불명예스러운 의처증 증후군 타이틀을 얻게 될 거라고 상상하기는 어려워. 그렇지? 하지만, 잔인한 셰익스피어는 바로 그런 완벽하다는 이유로 그에게 냉혹한 운명의 저주를 퍼부어. 어릴 적 뉴스에서 남산의 한 아파트 붕괴 장면을 본 적 있어. 한 번의 폭발로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고층 건물의 허무한 인생과 건물 구조를 알면 핵심적인 라인만 파괴해도 전체를 무너뜨릴 수 있다는 공공연한 비밀을 목격하면서 난 속으로 이렇게 물어봤었어. 사람도 마찬가지일까? 완벽한 도덕적 성곽도 단숨에 무너져 내릴 수 있는 걸까? 셰익스피어 아저씨는 이렇게 대답해. 인간은 언제든 정반대의 세계로 돌변할 수 있다. 선이 악으로, 기독교가 이슬람교로, 인간이 짐승으로. 우리는 이 불확정성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말이야. 물론 거꾸로 보면, 좀도둑에서 궁극의 희생자로 변한 『레 미제라블』의 장발장 같은 존재도 인정하는 것일 테고, 그렇다면 여전히 인간에게 구원의 여지가 있는 것일 테지만.
혹시 오셀로라는 게임 아니? 가로세로 여덟 칸의 판 위에 두 명이 각각 검은색과 흰색 말을 번갈아 놓으면서 진행하는 보드게임이야. 양쪽에 말을 놓아 상대를 가두면 순간 그 상대의 색깔이 내 색깔로 파르르 깔딱 반전돼 버리는 흑백 논리의 최고봉 게임이야. 이 게임의 명명은 오셀로의 그 이분법적 세계관을 빗댄 게 틀림없어. 사랑은 불처럼 타올라야 하고, 배신은 즉각 징벌해야 한다는, 맹렬한 열정이 돌멩이처럼 쉽게 굳어버리는 위험한 마음 말이야.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순식간에 죄를 인정하고, 또 순식간에 자살해 버리는 오셀로의 선택은 그에게 아껴둔 마지막 동정심마저 앗아가 버려. 게다가 “난 증오 때문에 죽인 것이 아니라 오직 명예를 위해서였소.”라니. 못 됐어. 엘리엇의 말처럼, 마지막 순간까지 오셀로는 억울하게 죽은 아내를 다 잊어버리고, 심미적 제스처로 자신을 위로하면서, 실제 자기랑은 딴판인 잘난 영웅 역할을 연기하고 있단 말이지! 그렇게 도덕적 책임을 회피하는 자기중심적인 비열한 인간이라니. 그 사람이 이토록 최고의 약점을 소유한 최악의 현실 도피형 인간일지 누가 알았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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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세계를 돌아다녔지만, 진정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터득한 이는 한 명도 못 보았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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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오셀로가 콤플렉스를 완전히 지우지 못한 영웅이라는 점에서 스스로 몰락의 운명을 자초한 면도 있지만, 여기에는 이아고라는 희대의 사기꾼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해. 뿌리 깊은 악의와 불가사의한 교활함을 갖춘 이아고는 승진에 뒤처진 것에 발끈하지만, 실은 오셀로의 타고난 고결함과 완벽함 자체가 그냥 싫었던 사람이야. 즉, ‘나를 추하게 만드는 상대의 일상적인 아름다움’마저도 시기하는 진정한 질투의 화신이랄까. 이 뼛속 깊은 질투심 덕에 이아고는 치명타를 날리는 귓속말 공격의 달인으로 거듭나. 그러면서도 상대에겐 선량한 친구, 정직한 충고자, 이타적인 중재자로 남는 놀라운 기교를 발휘해. 그중 최고는 음모를 짜내는 순발력이야. 난 타고난 음모론 지지자야. 역사상 거대했던 그 어떤 사건도 불온한 저의를 가진 또 다른 주체의 음모 없인 불가능하다고 믿을 정도로 말이야. 이아고는 이 음모의 기술과 흥분을 즐기는 우리의 예술적 본능을 제대로 자극해. 왜냐면, 이아고 스스로도 그런 ‘즐거운 일을 도모하면 시간이 짧게 느껴진다’는 음모의 오락성에 중독되어 있기 때문이야.
빅토리아 시대의 오셀로는 아무래도 미지의 땅에서 온 신비한 인물이었고, 겉으로만 기독교로 개화된 ‘백인과는 다른’ 사람이었으니까, 이아고는 그에게 시비를 걸고야 말겠다고 심한 충동을 느꼈을 거야. 오바마를 시험대에 올려놓고 그의 밑바닥 본성을 엿보고 싶어하는 일군의 마음처럼 말이야. 이아고처럼 뻔뻔함과 개성의 힘을 추종하는 마키아벨리 유형의 인간은 오셀로나 데스데모나가 섬기는 충성, 신뢰, 유대 같은 봉건적 개념은 견디지 못하거든. 자살 직전의 파우스트를 단숨에 유혹해내는 메피소트펠레스처럼 이아고는 몇 마디의 요설로 오셀로를 지옥에 빠뜨려.
근데 따지고 보면, 이아고가 오셀로한테 한 거짓말 중 진짜 거짓말은 얼마나 될까. 데스데모나가 자신의 욕구를 위해 아버지를 배신했듯, 남편도 배신할 수도 있다는 그의 날카로운 직관은 꽤 설득력 있어. “난 그에게 내 생각을 말했을 뿐, 다른 어떤 것도 말하지 않았어. 그는 스스로 그것들을 그럴듯한 것으로, 또 진실한 것으로 만들어버렸어.” 이런 이아고의 변명은 누군가를 중상하기 위해서 굳이 노골적인 거짓말이 필요 없다는 교훈을 주기도 해. 다들 아는 사실에다가 특별한 시각의 해석 틀을 암시하거나 의심을 증폭시키기에 충분할 정도로 사건을 재구성하면 된다고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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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제가 겪은 위험 때문에 절 사랑했고, 전 그녀가 그 위험을 동정했기 때문에 그녀를 사랑했던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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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고가 이 비극의 전적인 범인이라는 혐의를 벗게 되는 건 바로 이런 오셀로의 말 때문이야. 이 완벽한 연인의 성격 속에 이미 비극의 씨앗이 있으니까. 데스데모나는 용맹한 그의 모험담에 반했고, 그는 그녀의 동정심에 반했어. 즉, 둘의 사랑은 단번에 무너질 수도 있는 허구의 신화 위에 서 있었던 거야. 게다가 셰익스피어의 위대한 사랑은 본질적으로 한계가 없어. 그런 무한한 사랑엔 늘 비극의 가능성이 숨겨져 있는 법. 게다가 데스데모나를 특별하게 만드는 그녀의 동정심에도 한계가 없어. 그녀가 죽는 장면은 정말이지 답답해서 힘들어. 조금만이라도 더 이기적으로 자신을 변호했더라면 어땠을까. 오필리어, 코딜리어도 마찬가지지만, 왜 셰익스피어의 여인들은, 다들 순결하고, 선하고, 우연히 불행과 악에 휩쓸려 버릴까.
데스데모나가 물어. “세상을 준다고 남편을 배신하겠느냐?”
에밀리아가 대답해. “당연히. 수고의 대가로 세상의 주인이 된 다음에 얼른 바로 잡으면 되니까.”
나는 확신해. 많은 사람들이 이아고처럼 살고 있다고. 그리고 그의 아내 에밀리아처럼 현실적이라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데렐라의 언니들’이고, ‘팥쥐의 친척들’이니까, ‘영웅과 그의 완벽한 연인’ 근처에도 못 가는 삶을 사니까. 그래서일까. 우리의 팔이 이아고 쪽으로 굽는 게 자연스러워 보이기도 해. 조금 증거가 부족하지만, 어쩌면 동성애자 이아고가 오셀로에게 반해서 관심이라도 끌어보려고 데스데모나랑 경쟁한 걸지도 모른다고 그를 두둔할 명분을 찾게 되기도 해.
「은밀한 유혹」이라는 영화를 본 적 있니? 멋진 부자 로버트 레드포드가 가난한 데미 무어 부부에게 하룻밤의 거래를 제안해. 백만 달러를 줄 테니 아내를 하룻밤 빌려달라고 하지. 부부의 인생을 바꿀 수 있는 큰 제안이기에 둘은 받아들여. 하지만, 아내는 그 신사에게 반하고, 남편은 극도의 질투에 시달려. 그토록 깊이 사랑한다고 여겼던 부부관계는 엉망진창이 되고 말아. 하룻밤의 질투라는 독약 때문에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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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상상은 그 본질이 독약인데
맛이 고약한 줄 처음엔 거의 모르다가
약간씩 핏속으로 퍼지기 시작하면
유황불처럼 타는 거야. 그렇다고 했잖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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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재밌는 게 있어. 질투 앞에 놓인 인간의 딜레마는 남녀에 따라 조금 다르게 진화했다는 거야. 질투에 치를 떠는 순간, 남자는 아내를 죽이려 하고, 여자는 남편을 유혹한 상대 여자를 죽이려 들어. 죄의 역할 분담에서 여자가 유혹자로 좌표 지어진 전통 때문에 남자보다 여자들이 더 많은 혐의를 뒤집어쓰게 되는 거지. 실제로 많은 나라의 관습법이 간통한 아내를 살해하는 남편의 행위를 놓고, 그게 열정을 못 이겨 저지른 거라면 정당하다고 인정했었어. 반대로 여자가 질투나 버림받을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라이벌을 불구로 만들거나 살해하는 경우는 훨씬 적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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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것을 보고 나쁜 것을 따라 하는 것이 아니라, 나쁜 것을 고칠 수 있는 지혜를 제게 주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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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데스데모나의 말처럼 오히려 자신의 무능을 꾸짖고, 상대를 설득해 관계를 재구축할 수 있다는 희망으로 노력하는 경향이 많아. 물론 심할 경우, 이아손에게 배신당해 잔인하게 복수를 하는 메데이아의 신화처럼, 여자도 남자 못지않게 치명적인 독기를 품어댔지만…….
이 새드 엔딩의 미녀와 야수 버전 말고도 정말 많은 작품이 있지만, 왜 셰익스피어는 뉴턴과 처칠을 뛰어넘는 위대한 영국인으로 칭송받을까, 새삼 궁금해져. 아무한테나 쉽게 호감을 주지 않는 마르크스와 엥겔스 아저씨들까지 반해버린 비결이 뭘까. 화려한 대사의 매력도 있지만, 어쩌면, 인물보다 늦게 도착하는 편지, 잠시 서로 뒤바뀐 쌍둥이, 독과 혼동된 술, 등등, 이 사소함들의 함수를 예술적 경지로 끌어올리는 능력 때문이라고 봐. 오셀로가 불륜을 입증할 수 있는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증거’를 요구하고, 이아고는 손수건을 제시해. 우린 우연히 떨어진 손수건 하나가 자신의 면적과 질량을 넘어 무한대로 초월된 음란함의 상징으로 확장되는 비극적 장관에 가슴을 졸이게 돼. 이 질투의 맹독성에 눈이 먼 한 흑인이 눈의 관찰에 포착된 사실을 진실의 유일한 기준으로 삼은 것에,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데스데모나의 영혼은 진실의 기준이 되지 못하는 것에 탄식하게 돼. 리어왕이 눈 먼 글로스터 백작에게 말했듯, “눈이 없어도 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볼 수 있네. 그대의 귀로 보게.”라고 누군가 오셀로에게 말해줬더라면, 유창한 수사와 표피적인 현상들로 딸의 사랑을 평가했던 리어의 뒤늦은 그 깨달음을 누군가 오셀로에게 선물했더라면, 기만적인 시각의 절대화가 가져온 이 비극은 생겨나지 않았을 텐데. 이런 탄식 속에 우린 ‘생각하는 주체’가 곧 ‘보는 주체’인 당대의 데카르트적 이성한테 날렸던 셰익스피어의 예리한 경고를 읽을 수 있어. 아, 그 아저씨의 매력 이야긴 그만 할래. 하면 할수록 내 눈이 초록색으로 변하니까.
극장 안의 배우 대기실을 ‘그린 룸’이라고 부르는데, 그 이유가 뭔지 아니? 배우들이 워낙 시샘이 많은 탓일 수도 있겠지만, 난 ‘질투에 미친 눈’인 ‘green-eyed monster’라는 관용구로 살아남은 오셀로의 흔적이라고 봐. 이것은 질투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그 유명한 3막 3장의 이아고 대사 때문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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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장군님, 질투심을 경계하십시오. 그것은 초록색 눈을 가진 괴물입니다……. 오, 상대를 사랑하면서도 끊임없이 의심하고, 의심하면서도 열렬히 사랑하는 자는 얼마나 저주스런 시간을 보내야 할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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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투는 그저 심리적 나약함의 문제일까. 결국, 레닌의 말처럼 “신뢰도 좋지만, 통제가 더 좋다.”라는 교훈이 맞는 걸까. “그렇지만, 질투에 빠진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거에요. 그들은 이유가 있어서 질투하는 것이 아니라……. 질투는 저절로 잉태되고 저절로 태어나는 괴물이거든요.” 정답처럼 들리는 이 에밀리아의 대사처럼 과연 질투는 치유될 수 없는 태생적 괴물인 걸까.
진화심리학에선 질투를 적자생존의 메커니즘으로 생각해. 자기 유전자를 퍼트리려는 욕망이 ‘사랑’과 ‘질투’의 본질이라는 거지. 교미 전에 암컷 생식기에서 다른 정자들을 씻어내는 여러 수컷들의 정자 경쟁의 예도 있지만, 인간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거야. 사람의 정자엔 기다란 꼬리를 가진 거랑 돌돌 말린 꼬리를 가진 거, 두 가지가 있대. 기다란 애는 난자랑 수정하고, 말린 애는 자궁 속의 다른 정자를 껴안고 자폭한다는 거야. 재밌지? ‘사랑’이 수정하는 정자의 ‘공격’이라면, ‘질투’는 자살하는 정자의 ‘방어’라는 거야. 실제 통계도 놀라워. 오셀로 증후군 남자 환자들이 질투를 느끼는 대상을 조사해봤는데, 대부분 그들의 아내들이 그 질투의 대상과 관계를 맺고 있었대. 질투를 감지능력이라고 보자면, 나름대로 놀라운 방어 시스템인 셈이잖아!
이 관점에서 보면 질투는 '가치를 부여하는 관계에 대한 위협이 감지됐을 때, 그 대처 행위를 유도하는 상태'라고 정의할 수 있어. 이렇게 보면, 자기가 못 가진 걸 비교하면서 느끼는 시기(envy)는 분명히 다른 감정이야. 질투(jealousy)는 가진 걸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니까. 하지만, 사랑의 이면이라는 질투에 반드시 제3자의 대상이 있어야 하는 걸까? 누군가 그랬지. “사랑은 먼저 가혹한 괴로움이다.”라고 또, “사랑하는 자는 그 누구든 이미 죽어가고 있다.”라고. 플라톤이 『향연』에서 얘기한 것처럼, 너무나 갈망하지만, 절대로 그 대상과 하나가 될 수 없다는 애초의 한계에서 오는 존재론적 질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예를 들어, 널 시기한 적도 질투한 적도 없었지만, 실은 너와 하나가 될 수 없다는 이유로 늘 절망해온 나는 어찌해야 하는 걸까. 다시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를 펼치고 도를 닦아야 하는 걸까. 그저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라고. 아니면 기형도처럼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다가 검붉은 시 한 소절 토해내야 하는 걸까.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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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셀로>
윌리엄 셰익스피어 / 강석주 옮김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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