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동쪽별.
지난주에는 너무도 깨끗하고 진지해서 마치 어린 아이의 것만 같은 천상의 사랑 이야길 나누다가 이번 주엔 죽음 이야길 나누려니 정신이 없네.
너의 글을 보니 넌 나 몰래 언젠가 죽음의 문턱에 갔다가 돌아온 것 같은데. 음. 도대체 언제였을까? 네 글은 생물학적인 죽음이 아니라 할지라도 사랑의 끝, 꿈의 끝 앞에 서서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본 사람의 글 같아. 죽음에 대한 네 생각은 덜 떨어진 숙맥인 처지에 속마음 깊은 곳에서만은 남부럽지 않은 과감한 쾌락주의자인 네가 썼다기에는 좀 의심스러울 정도로 지나치게 성숙하단 말이지. 아무리 손가락을 빨며 기억을 더듬어 봐도 네가 죽음에 대해 한 말 중 기억나는 것은 이거 하나뿐인데. 오르가슴이야말로 두렵고 유혹적이라고. 오르가슴은 죽음 냄새가 나기 때문이라고. 에로스야말로 죽음의 충동이라고. 너도 미인의 긴 다리에 칭칭 감겨서 그 다리로 목 졸려 죽임을 당하고 싶다고. 그래서 난 속으로 생각했지. 음 너야말로 에로틱한 순교자구나!
하지만, 이번에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두고 네가 쓴 글은 오르가슴이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으로 봐서 넌 최근에 사랑과 죽음을 분리시킨 게 아닐까 궁금하지만 그래도 그럴 리는 없을 거란 생각으로 다시 읽었어. 그리고 네가 사랑과 죽음을 분리시킨다면 나는 난 반대야! 라고 외쳤을 거야.
나도 이반 일리치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몇 가지 있으니 그거부터 말해볼게. 이반 일리치 삶의 소신은 인생이란 즐겁고 고상해야 한다는 거야. 다시 읽어봐도 그에게 인생관이라고 할 만한 것은 인생이란 원래 그래야만 한다고 믿는 편안하고 기분 좋고 늘 즐겁고 고상한 것이란 말만 나오는데 이반 일리치의 고상함은 이런 거야. 그는 검사야. 그래서 그의 고상함의 범주엔 이런 항목들이 들어가. 자신이 파멸시키기로 마음만 먹으면 누가 되었든 그대로 파멸의 구렁텅이로 몰아갈 수 있는 막강한 힘이 자신에게 주어졌다는 권력 의식을 생생하게 느끼는 것. 그런데도 자기처럼 막강한 권력을 가진 사람이 법원에 온 낮은 신분의 사람들을 친구처럼 편하게 대한다는 인상을 주도록 신경을 쓰고 그런 평판을 듣는 걸 즐기는 것. 법정에 들어설 때나 부하 직원들을 만날 때면 분명하게 전해져 오는 자신에 대한 예우를 즐기는 것, 상관이나 부하 직원들을 상대로 성공을 거두는 것. 자신과 격이 맞는 사람들과의 저녁 식사나 파티, 동료들과 나누는 담소, 식사, 카드놀이. 이반 일리치는 결혼도 이런 식으로 해. 아내가 될 여자를 너무도 사랑해서 그녀 안에서 자신의 인생관을 함께 나눌 무엇인가를 발견했기 때문이 아니고 그런 여자를 아내로 얻는 것이 기분 좋은 일이고 자신보다 더 높은 지위의 사람들이 옳다고 여기는 일을 한다는 느낌 때문에.
내가 살면서 만난 품위 있는 사람들은 이반 일리치와 달라. 그들에게 있어 인간의 품위는 어떤 자격, 조건, 혹은 그가 속한 집단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그것들과 아무런 관계없이 자기 삶의 운명을 결정하려 하는 의지와 끝없는 실천에서만 나왔었어. 그래서 이반 일리치의 삶을 보고 있자면 난 좀 신경질이 나서 고상함과 품위가 뭔가 따져보고 싶기도 하고 그리고 톨스토이의 또 다른 작품 <부활>의 한 등장인물이 생각나기도 해.
<부활>에는 자신의 인생을 ‘그것이 아님’으로 설명하는 셀레닌이라는 법무부 관료가 나와. 그는 젊은 시절 너그럽고 총명한 모범생이었어. 그의 젊은 시절의 목표는 다른 사람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었고 그래서 관직에 들어가. 그런데 관직은 그가 생각한 것과 달랐어. 그는 현실이 평소 자기가 바라던 것과 큰 차이가 난다는 것을 알면서도 즉 ‘그것이 아님’을 알면서도 다른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싶지 않아서 그냥 그 생활을 이어나가. 그는 거절하면 상대방 여자가 상처받을까 봐 결혼했고 그러다 보니 서로를 이해하려는 것보다는 다른 사람들의 눈에 그럴싸하게 보이는데 치중하게 돼. 그는 가정생활도 ‘그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어. 그런데 더 큰 ‘그것이 아님’은 다른 곳에 있었어. 그런 생활을 하는 동안에 그는 점차 이렇게 생각하게 되었던 거야. 진실이란 인간 개개인의 지식으로는 알 수 없는 것이고 집단에 의해서만 인식되는 것 아닐까? 그런데 바로 이것이 가장 큰 ‘그것이 아님’이었어. 그렇다면 이것이 왜 가장 큰 ‘그것이 아님’이었을까? 바로 이렇게 생각하는 순간 그는 자신이 허위를 행하고 있다는 자각 없이, 남들도 다 그렇게 한다고 생각하면서, 세상은 원래 그런 거라면서 평온하게 아무런 기쁨과 위안을 주지 않는 직장 생활과 가정생활에 안착할 수 있었던 거지. 이반 일리치는 셀레닌과 닮았어. 내겐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란 소설도 죽음을 앞에 두지 않고선 도저히 눈치챌 수도 없이 깊게 젖어 있는 ‘그것이 아님’을 발견해 가는 글로 읽혀.
이반 일리치는 죽기 전에 아내와 자식, 의사, 법무부 동료들을 보면서 자신이 못 견뎌 하는 그들의 행동이 바로 자신의 삶의 모습, 한 치의 의견 차이도 없었던 자기의 모습이었던 걸 알게 돼. 그들 안에서 바로 자기 자신의 모습과 자신이 삶의 수단으로 삼았던 모든 것들을 보는 거지. 그는 가족과 동료들이 자신을 가엾게 여겨주기를, 그와 함께 울어주기를 간절히 바랬어. 하지만 그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고 동료들도 그렇게 하지 않았지. 그래서 그의 생애 마지막 독, 마지막 거짓은 울고 싶은데 울지 않는 것이었어. 그건 무슨 숭고한 이유 때문이 아니고 남들이 어찌 생각할까 두려워서였던 거지.
소설의 마지막에 고통에 시달리던 이반 일리치가 영혼의 소리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나와. 그 장면을 축약해서 옮겨보면 이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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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바라는 게 뭐지?
-바라는 것? 더 이상 고통을 겪지 않는 것, 그리고 사는 것
-사는 것이라고? 어떻게 사는 것을 말하는데
-그래, 사는 것, 예전에 살던 것처럼 행복하고 기쁘게.
-예전에 어떻게 살았는데? 네가 행복하고 기쁘게 살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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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일리치는 행복했던 지난날의 삶에서 최고로 좋았던 순간들을 떠올리며 마음속에 그려보기 시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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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내가 잘못 산 것은 아닐까? 하지만 당연히 내가 해야 할 일들을 하면서 살았을 뿐인데 어떻게 잘못 살 수가 있었지?
-그럼 지금 네가 바라는 것은 뭔데? 사는 것? 어떻게 사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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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고민은 계속 돼. 그리고 또 결론을 내려. 암만 생각해도 올바르고 품위 있는 삶이었다고. 그렇게 두 주일이 지나자 그는 자기 삶에서 지키고 변호해야 할 것들이 아무 것도 없음을 깨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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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주어진 모든 것들을 나 스스로 망쳐 놓았다는 생각을 가진 채 또 그것을 바로 잡을 기회도 없이 눈을 감아야 하는 것이라면 그땐 정말 어떻게 되는 걸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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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바로 앞에 둔 이반 일리치처럼 우리에게도 이 삶 속에서 무엇을 수단으로 삼고 있으며 무엇을 추구했었던가 피를 토하듯이 묻게 되는 순간이 있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해. 에피쿠로스 학파의 명제 중엔 멜레네 타나토(melete thanatou)란 게 있어. 이 수련은 삶 속에서 죽음을 현재화해 보라는 거야. 그건 죽음을 매일매일 생각한다는 뜻이라기보다는 매일매일을 마지막 날로 간주하는 그런 삶을 상상해보란 거야. 이건 뭐 영성에 가득 찬 교훈적인 격언이 아니야. 처절하게 사유해보란 말이야. 내가 지금 막 죽으려고 할 때처럼 내 행동을 사유해보란 말이야. 동쪽별! 우리는 우리 삶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 하는 걸까? 더 알아야 하겠지? 우리에게는 어떤 ‘그것이 아님’이 있을까? 이 질문은 너무나 중요해. 감히 남의 눈에 내가 꽤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다고 부러움을 사는 것 따위가 내 삶의 의미, 내가 태어난 이유가 될 수 있겠니?
그러므로 사랑이 죽음인 너의 태도를 나는 항상 존중할 수밖에 없어. 다른 덫에 걸려 죽는 것보단 미인의 다리에 목이 감겨 죽는 게 훨씬 좋지. 난 우리가, 인간들이 모두 죽는다는 걸 생각하면 안쓰러우면서도 슬프면서도 경이로워. 그렇게 죽을 것인데도 너무너무 애를 쓰고 아침에 눈을 뜨고 어린아이 머릴 쓰다듬고 수영을 하고 용기와 사랑을 보이고 가치 있는 것을 찾아내잖아. 넌 꼭 사랑하다가 죽었으면 좋겠어. 아니면 죽을 듯이 사랑하며 살았으면 좋겠어. ‘진짜 삶’에서 멀어지지 말자. 진짜인 척 사는 건 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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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일리치의 죽음>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 / 박은정 옮김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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