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커피진주.
얼마 전 누군가 나에게 너랑 어떤 사이냐고 묻기에, 그게 왜 궁금할까, 잠시 갸우뚱하다가 대답했어. 우린 떼려야 뗄 게 없는 사이라고. 최근 10년간 10번도 못 만났고, 같은 하늘 아래에서 이 시대의 뜨거운 공기를 함께 나누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함께 나누는 것은 전혀 없으니까. 그녀에게서 내 영화의 감상을 들어본 적 없고, 난 그녀가 쓴 책에 대한 감상을 전한 적도 없으니까. 다만, 그녀의 세계관에 매혹되어 그녀가 지닌 에너지 중 일부라도 염사 받기를 희망하는 수많은 신도 중의 하나라서, 그저 그녀를 모모처럼 여기고 내 말을 털어놓고 있을 뿐이니까. 그 사람이 ‘생선자전거’나 ‘돌사과’여도 상관없고, 내 추억담은 상상에 불과한 허구일 수도 있고, 내가 표하는 애정은 문학적 수사로 옮겨진 외로움의 표현일 수도 있으니까. 사람들이 어떻게 우릴 바라보느냐와 실제 우리의 세계는 많이 다를 거라고 대답했어. 때마침 한 여배우와 유명 가수의 숨겨졌던 이야기가 사람들의 술안주가 되고 있어서 그런지, 그 질문과 대답 모두 그 뒷맛이 씁쓸했어. 왜냐면, 어떤 이름이든 갖다 붙이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우리 사이에 허울 좋은 표식을 세워버린다면, 영혼의 대화를 꿈꾸는 우리의 시도가 흔한 흥밋거리로 박제화되어버릴지도 모르니까. 스캔들 기사가 그들 삶의 얕은 표피를 뚫고 어느 깊이까지 훑어내는지 모르겠지만, 나의 관심은 그 중심에 선 여자에게로만 향해졌어. 15살에 지나치게 멋진 사람과 사랑에 빠져버린 소녀가, 그 후 긴 세월 그림자처럼 살아왔을 여정이 안타깝기도 하고,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려는데 과거의 흔적이 쇠사슬처럼 자신을 휘감고 있는 게, 보기에도 힘겨워 보였으니까. 유명인을 생활의 파트너로 욕심낸 순간, 결국 이런 눈총의 시간들은 예견됐던 것이겠지만, 비밀을 지킬 것을 서약했든, 빼앗긴 시간에 대한 억울함을 상징적인 법정 싸움의 승리로 돌려받길 원했든, 둘만의 사연은 세인들의 혀끝에서 제맛 따라 어떻게 요리되더라도 끝내 알 수 없을 테니, 그들의 이야기는 결국 그들만의 이야기로 남아야 하는 게 아닐까 생각해. 하지만, 시간이 결국 모든 걸 잊게 하더라도, 그녀가 누군가에게 큰 상처를 남겼다는 낙인 하나는 벗기 어려울 정황이기에, 난 괜한 노파심으로, 아무도 오해하지 않고 그녀의 삶을 너그러이 이해해 주길 바라는 편파적인 연민을 품게 돼. 그녀가 진정 테스나 카추샤 혹은 헤스터처럼 진심을 품은 여인이라면 말이야.
'남의 죄를 가지고 먹고 사는 목사, 남의 질병을 가지고 먹고 사는 의사, 남의 시빗거리를 가지고 먹고 사는 법관이 되는 건 싫다. 그런 내가 작가 말고 어떤 무엇이 될 수 있겠냐’고 한 작가가 물었었어. 꽤 멋진 말이지? 중학교 시절 ‘큰 바위 얼굴’이 그려진 표지에 너대니엘 호손이라는 작가의 이름이 적힌 영어 소설책이 기억나. 이 너대니얼 호손은 <주홍 글자>를 통해 ‘아무리 행복한 여자라 할지라도, 여자의 인생이 과연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일까?’라는 모든 여성의 운명에 관한 암담한 질문을 던지고 있어. 이런 글이 나올만한 게, 그때가 어떤 시대였느냐면,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도 쓰레기라고 비난받으며 화형식까지 당했던 시대였거든. 이 책은 '창녀의 도서관'이니 '음란한 거간행위'로 욕먹으면서 금서목록에 올랐고, 작가도 비난을 못 이겨 고향을 떠나야 했어. 겨우 이런 금욕적인 얘기로 말이야. 생각해 보면, 합리적 이성을 앞세워 새로운 윤리적 잣대를 가늠 짓던 근현대의 시대상이 이토록 낙후했었다는 게 정말 믿기지 않아. 지금으로선 원시시대를 바라보는 것처럼 그 당시를 놓고 혀를 찰 수밖에 없는데, 실은 작금이 그때로부터 얼마 떨어져 있지 않고, 실은 굉장히 가깝다는 사실을 떠올려보면, 정말 당황스러울 뿐이야.
아직 인류의 삶 곳곳에 남아 있는 비이성적 억압의 형벌을 생각해 보면, 10여 년 전, 폴란드인이 운영하던 파리의 기숙사에서 가끔 봤던 요르단 출신의 한 아랍 여자가 떠올라. 걸핏하면 칼을 들이대고 돈을 강탈하려 협박하던 동네 아랍 남자들 때문에 이 여자에게도 같은 소수 이방인으로서의 연대감을 쉬 갖기 어려웠었어. 하지만, 한 가지 이유가 자꾸만 내 시선을 빼앗아 갔어. 그녀는 부르카를 쓰고 있었거든. 처음에 난 단순하게, 사계절 관계없이 그 검댕 천을 뒤집어쓴 모습이 참 불편해 보였고, 밥 먹을 때 천을 들어 그 밑으로 수저를 집어넣어 음식을 삼키는 걸 보고, 인류가 원숭이로부터 진화해서 어쩌다 옷감을 발견하고 여성에게 이런 두건을 뒤집어씌울 아이디어까지 내게 됐는지 참으로 갸우뚱할 수밖에 없었어. 게다가, 다양성에 대한 인간 DNA의 본능은 부르카, 히잡, 니캅 등 가리는 부위에 따라 여러 디자인까지 갖추었어. 말하자면, 그것이 억압일지라도 예쁜 게 좋다면 취향에 따라 화려하게 장식할 자유는 주어진 거지. 코란에서는 이렇게 쓰여 있어. 무릇 남편 이외의 다른 남성이 성욕을 품지 않게 하기 위해선 여자는 자신의 신체를 가려야 한다고. 그 당시 여자는 남자가 품은 성욕의 대상이었을 뿐인 시대였는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외양을 숨긴 것이 진정 나쁜 성욕을 막아냈었는지는 모르겠어. 대신 난 아라비안나이트 풍의 비사가 있었을 걸로 의심돼. 수없이 많은 연인을 거느리던 절대 군주가 어느 날 다른 신하와 사랑에 빠져 도망친 궁녀를 붙잡고는, 질투에 눈이 멀어 그 나라의 모든 여성들에게 ‘옷의 감옥’이라는 형벌을 내린 거 같은 뒷얘기 말이야. 어쨌든 난, 여성을 남자가 소유하고 독점해야 할 재산의 일부로 취급해온 여성 비하의 역사가 풍기는 이 옷이 지극히 싫었어. 왠지 아프가니스탄에서 간통을 저질렀다는 이유로 돌멩이로 쳐서 죽을 때까지 때리는 풍경이나, 파키스탄에서 여동생의 혼전 연애에 분노한 오빠가 얼굴에 염산을 퍼붓는 풍경이 떠오르거든. 즉, 이것은 이민자, 이교도, 테러리스트라는 불편한 이슬람의 이미지로 오해되는 하이퍼링크인 거야. 하지만, 그녀와 얘기해 봤을 땐, 이게 단지 여성 억압이라는 이유로 그걸 벗겨 내는 것 또한 쉽지 않은 문제란 걸 알게 됐어. 왜냐면, 예상과는 달리 그 여자는 본인 스스로 부르카를 억압의 산물로 생각하지 있지 않았거든. 취직도 어렵고 공동생활도 어려우며 시야를 가려 물리적으로도 너무나 불편한 이 옷은, 일본인들이 무릎 꿇고 앉아 밥 먹는 거나, 제사 때 엎드려 절하는 우리의 우스꽝스러운 자세를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듯, 각자 문명의 독특한 속성처럼, 그들도 이미 생활의 일부로 삼아 자연스럽게 지니고 산다는 거야. 그것을 취하냐 마냐는 개인의 자유이고, 그것에 손가락질하는 것은 종교적 차별이자 또 하나의 억압이라고 주장하는 거지. 이 문화적 자긍심은 여성의 차별에 대해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촉수를 갖고 있지 않다고 보이지만, 어쨌든 그 종교가 약자의 자존감이고 동시에 정체성이라는 중요한 삶의 무기가 되어 있는 현실 앞에서는 복잡한 문제임이 틀림 없어 보였어. 얼마 전 프랑스에선 그런 옷을 입고 다니는 걸 법으로 금지했어. 그렇게 부르카를 거부하는 세계적인 몸짓이 여기저기서 시작되고 있어. 그 기숙사에 살던 그 여자도 이젠 부르카를 벗고다니는지, 혹은 여전히 버티고 있는지, 아니면 그 자유를 거세당한 부당함에 저항하며 프랑스를 뛰쳐나갔는지 알 수 없어. 내가 잊지 못하는 건, 분명히 하등한 존재라고 여자를 구분해주는 낙인의 표식, 즉, 객관적으로 형벌처럼 보이는 그 감옥이 그녀에겐 고통을 견디면 구원이 온다는, 일종의 자신의 신앙을 굳건히 받쳐주는 흔들리지 않는 지조의 봉인이었다는 거야. 주홍 글자의 헤스터의 경우처럼 말이야.
중세 유럽의 마녀사냥에서 이어진 근대 아메리카의 이 주홍 글자 형벌은 청교도의 강박을 실현하고 싶어했던 종교적 야심인데, 그것은 어쩌면 조선시대의 열녀문 같은 것과 맞닿아 있어. 열녀문은 실은 여성이 자신의 욕구를 절제하고 남자를 위해 희생하는 것이 진정한 용기이며 삶의 당위라는 이데올로기의 아이콘이었으니까. 외간 남자의 아이를 낳았거나 혹은 심지어 남편이 죽어 과부가 된 여자들에게 가문의 영광을 위해 자살할 것을 종용하고 그 대가로 열녀문을 세워서 절개라는 거짓 신화의 주역 자리를 제공해 주는 맞교환을 자행했던 거니까. 무릇 도망노비의 얼굴에 노비라고 글자를 새겨 넣는 전통처럼, 두려움을 양산하기 위한 기성 윤리체계의 으름장, 이것은 현대 사회로도 유전되어서, 변혁을 꿈꾸는 특정 사람들에게 빨갱이라는 표식을 붙여 그들을 경계하면서도 그렇게 낙인 찍히는 삶을 두려워하게 하고 있지.
사실 옷의 감옥보다 더 무서운 게 이 마음의 감옥인데, 청교도가 발명한 그 이미지의 형벌이 진정으로 추구하는 것은 후자라고 생각해. 물론 주눅이 들지 않고 버티어 낸 헤스터는 예외적인 여성이긴 해. 왜냐면, 그 손가락질을 끌어내는 주홍 글자의 형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화려한 자수 솜씨를 발휘해 더 두드러지게 가공해서 자신의 일부임을 명백히 밝혔고, 그러면서도 마음은 일체 그곳에 갇히지 않고 오히려 더 자유롭게 살아갔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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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를 범한 곳이 바로 이 땅이니 지상에서의 형벌은 마땅히 여기서 받아야지. 그렇게 되면 날마다 당하는 치욕의 괴로움이 마침내 영혼을 정화해 이미 잃어버린 것과는 또 다른 순결을 빚어낼지도 몰라. 그 순결은 수난의 결과이기 때문에 한층 더 성자다울 거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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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은 진실, 반은 자기기만일 수도 있는 이 이상한 종류의 낙관적인 최면이 어떻게 가능했을지 궁금하긴 한데, 어쨌든 다소 천진해 보이는 그녀의 생각이 나은 결과가 어땠는 줄 알아? 시간이 지나면서 잘못을 용서받았을 뿐 아니라, 그 죄의 표식이 천사의 선행이라는 표식으로 의미가 바뀌어버렸어. 이건 그녀의 의지가 이렇게 예언한 대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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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에게 이것을 떼어낼 자격이 주어진다면, 그건 저절로 떨어지든가 아니면 다른 뜻을 나타내는 어떤 것으로 변하는 방식일 거예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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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낙인 자체라기보다는 그 낙인을 안고 살아가는 방식에 관심이 더 가. 헤스터가 우리에게 긴 세월이 지나도 기억되는 건 바로 그 특별한 삶의 방식 때문인 거 같아. 그게 아니라면 이 심심한 이야기가 미국 근대문학의 특별한 부분을 차지하진 못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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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홍 글자는 여느 여자들이 감히 발을 들여놓을 수 없는 곳을 출입할 수 있는 통행증이었다. 치욕, 절망, 고독! 이것들이 그녀의 스승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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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발을 못 신게 하는 형벌을 받은 사람이 발바닥으로 대지를 느끼며 살아가듯, 그녀는 당대 윤리의 경계선을 넘어서는 바람에, 관습에 갇혀 사는 사람들이 경험할 수 없는 넓고 깊은 생의 순간들을 맞이하는 혜택을 누렸어. 하지만,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은 어땠을까? 아마 지탄받는 도덕성의 무게에 짓눌려 어둠의 세계로 도망쳤을 거 같아. 고통을 대놓고 받아들이는 헤스터의 삶은 낙인을 피해 진실을 숨기고 살던 그녀의 연인 딤즈데일 목사에게 도피 대신 적극적 자유를 꿈꾸게 만들어. 또한, 비난에 깔려 말라 비틀어 죽기보단 전통적 도덕의 굴레가 없는 자유로운 땅에 가서 새로운 삶을 창조하자고 제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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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거짓된 삶을 진실한 삶으로 바꾸세요! 설교를 하세요! 글을 쓰세요! 행동하세요! 가만히 누워서 죽음을 기다리지 말고 무슨 일이라도 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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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미국 특유의 실용적 이상주의는 낙인이 그 자체로 우리를 절망시킬 절대불행의 표식은 아니라고 얘기해줘. 결국, 어떤 낙인을 이마에 찍고 살아가든, 그 삶을 영위하는 태도와 그 고통을 소화해내는 용기 그리고 고통만이 줄 수 있는 삶의 다른 이면들을 흡수해내는 내성에 따라 인생은 달라질 수 있다는 낙관을 심어주는 거야.
맞아. 자세히 보면, 헤스터가 주홍 글자의 고뇌를 인내로 수용했다고 해서, 그 연인과 나눈 불륜의 사랑을 후회하는 거 같진 않아. 그러니까, 자신이 저지른 새로운 사랑을 참회했기 때문에 그 낙인을 수용한 게 아니라, 그 사랑을 철회하지 않고 끝까지 안고 살려고 그 고문을 떠안았다고 봐야 할 거 같아. 즉, 고통을 대가로 자신의 진실을 당당히 인정받는 거지. 다시 스캔들의 그 여배우로 돌아가서, 그녀가 헤스터의 지혜로 나머지 삶을 살아가면 어떨까, 조용히 희망해 봐. 그 옷을 벗든, 입든 말이야.
소설의 마지막 문장인 ‘검은 바탕에 주홍색 글자 A’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어. 소설에선 간음(Adultery)의 의미에서 유능함(able)과 천사(anger)의 의미까지 확장되고 있지만, 더 넓게 저자(Author), 경탄스러운(Admirable), 아모르(Amor, 로마 신화에 나오는 사랑의 신.), 애정(Affection), 예술(Art), 미국(America), 심지어 아마조네스(Amazones ,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여성 무사족)까지도 생각해볼 수 있어. 당시엔, ‘I’라는 근친상간(Incest) 죄도 있었고, ‘D’라는 술주정뱅이(Drunkard)의 형벌도 있었대. 이렇게 저렇게 죄마다 글자를 달고 살자면, 알파벳으로는 다 묘사 못 할 만큼 죄가 많이 있겠지. 우리 일상의 패션도 꽤 달라져야 할 테고.
나는 한 편의 영화를 만들고 나면 이런저런 부류의 감독이라고 단번에 분류가 돼. 그 분류는 금세 바뀌지만, 어쨌든, 특정 부류의 카테고리에 확 묶이고 말지. 그런 획일적인 틀이 싫지만, 그건 세상이 나의 일부분으로 본질적인 나를 유추해내는 방식이니 어쩔 수 없지. 마음에 들든 안 들든, 나의 이마엔 어떤 문자가 새겨져 있어. 난 그걸 안고 살아가고 있고. 어쩌면 우리 모두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남들의 삶에 끊임없이 낙인을 새겨 넣고 있는지도 모르지. 지난주, 네가 쓴 편지를 보고 감동을 했어. 우리가 들여다봐야 할 또 하나의 그림자 삶, 그 외면 받은 채 잊힌 원폭피해자와 그 후손들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해 봤어. 마음이 아파. 왜냐하면, 그들은 ‘원폭 희생 환우’라는 주홍 글자의 낙인을 깊이 새기고 사는 건지도 모르니까. 알 수 없는 검은 질병 위에 A(Atom Bomb)라고 빨갛게 써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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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홍글자>
너대니얼 호손 / 김지원 외 옮김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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