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인에어> 다락방의 미친 여잔  누구지?

  
정혜윤(CBS 라디오 프로듀서) 

 

안녕, 동쪽별.  

안녕이라고 하기엔 힘이 좀 부친 한 주였어. 아이고, 겨우 살아났다야. 라고 말하면서 네 등을 치고 싶어. 왜 우리 삶엔 크고 작은 일들이 끝없이 일어나는 걸까? 나에게도 4월은 잔인한 달이었어. 하루하루가 눈물 나게 아까운데도 어서 빨리 5월이 와라 5월 어서 와라 하면서 지냈던 것 같아.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해줄까? 사람이 왜 잠을 잔다고 생각하니? 왜 우리에게 밤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니? 보르헤스가 말하길 모든 일이 하루 동안에 닥쳐온다면 제아무리 대단한 의지와 체력의 소유자라도 감당치 못하니 하룻밤 자고 내일 겪으라고 밤이 있단 거지. 자고 나서 내일 또 무슨 일인가를 겪으라고. 동의해? 난 동의해. 그래도 좀 쓸쓸해. 잠자기도 아까 와서 뛰어다니던 때도 있고 자다가도 깨서 웃을 만한 좋은 일이 있을 때도 있었으니까 말이야.

 한밤에 글을 쓸 때 가끔 베란다에 서서 잠든 아파트를 바라보기도 해. 무슨 대단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고 졸리니까. 그때 칼비노의 『보이지 않는 도시 』의 한 구절이 매번 생각나. 이런 내용이야. 들어볼래? 어떤 도시는 반쪽짜리 두 구역으로 나뉘어 있어. 하나는 롤러코스터와 회전목마가 있는 곳이야. 또 다른 하나는 돌과 대리석, 학교와 병원 공공건물이 있는 곳이야. 하나는 영속하는 곳이고 하나는 일시적인 곳이야. 그런데 영속하는 곳이 어느 쪽인 것 같니? 정신없이 오르락내리락하는 롤러코스터가 있는 쪽이야. 돌과 대리석과 학교와 병원들은 늘 옮겨 다니고. 그래서 그 도시의 사람들은 롤러코스터를 타면서 언제나 되어야 완전한 삶을 살게 될까 자꾸만 날짜를 헤아려 본대. 나는 우리 도시의 삶도 이와 비슷하다고 생각해. 추락과 상승을 반복하면서 자꾸만 다른 쪽을 보게 돼. 저기엔 돌과 대리석의 안전한 곳이 있겠지, 나도 언젠간 그곳으로 가겠지 하면서. 하지만 우리가 안전하고 완전하다고 생각하는 그곳은 슬프게도 늘 옮겨 다닌단다.

 그래도 너에게 편지를 쓰는 이 밤은 정겹구나. 그러고 보니 4월에 좋은 일이 딱 하나 있었다면 그건 너의 영화 개봉 아니었을까? 나도 곧 볼 예정이야. 지난번 편지에서 어떤 유형의 영화감독으로 규정되고 범주화되는 게 싫다고 했지? 그래 우리가 흔히 하는 말 중에 전형적인 사람이란 표현이 있지. 전형적인 엘리트니 전형적인 속물이니 전형적인 화가 나, 전형적인 에로 감독이니. 그런데 난 살면서 전형적인 것은 없다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어. 우리가 누군가를 전형적인 사람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우리에게 사려 깊음과 상상력이 없어서일 거야. 나는 전형적인 것 같아 보이는 사람들이 보이는 균열. 어긋남에 언제나 마음이 가. 전형성을 깨는 것, 낯설게 하는 것, 어리둥절하게 하는 것, 거기서 매혹이 탄생하는 것 아니겠니? 그런 점에서 나는 네가 어떤 감독인지 모른단다. 오직 네 입으로만 듣겠어. 네가 말하고 싶었으나 하지 못한 언어로 듣겠어. 그게 인어의 언어라도 좋고 바람 소리라도 좋고 개구리 소리라도 좋단다.

 내가 오늘 이야기할 제인 에어는 전형적으로 착한 애처럼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할 거야. 하지만 난 반대야. 제인 에어에 대해선 내가 지난주에 한겨레 칼럼을 써버렸기 때문에 잠깐 인용할게.

   
  영화 「제인 에어」가 개봉되었다. 이 영화의 원작인 샬럿 브론테의 제인 에어는 내겐 많은 점에서 흥미롭지만 우선 한 가지만 말해보고 싶다. 제인 에어는 가난한 고아로 외삼촌이 돌아가신 외숙모 집에 얹혀산다. 이 어린 식객은 비참할 정도로 구박을 받는다. 그때 그녀 맘 속의 자의식은 ‘내가 설사 똑같이 군식구에다가 친척이 없었다 해도 더 명랑하며 예쁜 장난꾸러기였다면 내 존재가 더 너그러이 받아들여졌을 것이다.’라는 것이다. 그녀의 귀에 울리는 성경 구절은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이다. 아무 생각 없이 가혹한 상처를 입히는 어른들 앞에서, 고작 하는 말이라곤 몰랐다거나 혹은 그런 꼴을 당해도 싸다거나 그럴만해서 그랬다거나 다 네 탓이라고 하는 어른들 앞에서 어린 아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겠는가? 그녀를 맡아 교육할 로우드 기숙학교의 교장은 ‘제인 에어 너는 착한 아이니?’라고 묻는다. 그런데 그녀는 이 질문에 ‘네’하고 대답할 수 없다. 속으론 나름대로 좋고 선량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자신과 관계 맺는 온 세계가 정반대되는 의견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너는 못되고 유별난 아이다는 말을 줄기차게 듣는 어린 아이가 어떻게 선량하고 강하게 살 수 있을까? 이것은 어린 아이만의 문제가 아니다. 회사나 집에서 당신은 불편하고 이상한 사람이다. 짐만 된다는 말을 듣고 사는 사람이 어떻게 힘을 낼 수 있을까? 그저 고요히 눈에 띄지 않기나 바라는 것 말고 뭘 더 꿈꿀 수 있을까?

제인에게 크게 영향을 미친 사람은 기숙학교에서 만난 친구 헬렌이다. 헬렌의 고통에 대한 태도는 이런 것들이다. 나만 느끼면 되는 고통이라면 참고 견디는 편이 훨씬 낫다. 견디도록 운명 지워진 것을 참을 수 없다고 말하는 건 나약하고 어리석은 짓이다. 죄지은 사람과 죄는 명확히 구별 지어야 한다. 죄지은 사람은 용서할 수 있지만 죄는 질색이므로 불의 때문에 자신이 완전히 짓밟히는 법은 없어야 한다.
제인은 그것만으로 충분치 않다고 생각한다. 만약 다른 사람들이 날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렇게 사느니 죽는 게 낫고 외로움과 부당하게 미움받는 것 또한 참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에게도 많은 비슷한 경우가 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신을 위로할 줄 알아야 하겠지만, 그것만으론 충분치 않다. 타인에게서 오는 격려와 신뢰, 다정한 마음이 한 사람이 무사히 뒤틀어지지 않고 살아가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런데 제인 에어의 진정한 관심사는 자기 자신에게 벌어진 일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만큼 세계를 이해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강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기숙학교를 나온 다음에 가정교사로 들어간 손필드의 주인, 자신과 신분을 뛰어넘어 결혼할 예정이었던 로체스터가 다락방에 미친 아내가 있었음을 고백하는 순간 ‘나는 나 자신을 사랑해, 외로우면 외로울수록, 오점이 없으면 없을수록 친구가 없으면 없을수록 나 자신을 사랑해’라고 말하고 떠난다. 자신에겐 오점이 없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 나로선, 힘 없는 자의 내면에서 튀어나오는 도저히 불가능해 보이는 사랑과 용기를 숭배하는 나로선 이 장면부턴 제인 에어에게 답답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라고 썼어. 그래, 제인 에어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부분은 제인 에어와 로체스터의 사랑 장면이 아니야. 로우드에서 제인 에어가 비참하게 벌을 받아. 아무도 제인 에어에게 말을 걸지 말라는 명령을 학생들이 받았을 때 그녀들은 어떻게 했지?

   
  한 여학생이 내 곁을 지나갔다. 지나갈 때 그녀가 눈을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얼마나 묘한 빛이 그 눈 속에 깃들여 있었던가? 새로운 감정이 얼마나 나를 든든하게 받쳐 주었던가! 그것은 마치 순교자나 영웅이 노예나 희생자 곁을 지나가면서 힘을 불어넣어 준 것 같았다. 헬렌 번스가 스미스 선생님에게 바느질에 대해 대수롭지 않은 질문을 하고 중요하지도 않은 질문을 했다며 꾸지람을 들은 다음 자기 자리로 돌아가면서 내게 미소를 보냈다. 얼마나 굉장한 미소였던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 그러나 그 순간 헬렌 번스는 팔에 복장 불량 배지를 달고 있었다. 불과 한 시간 전에 나는 그녀가 연습 문제를 베끼면서 팔을 얼룩지게 만들었다는 이유로 스캐처드 선생님으로부터 다음 날 아침 빵과 물만 먹으라는 벌을 선고받는 소리를 들었다. 인간의 불완전한 본성이란 원래 이런 것이다. 그런 오점들은 가장 깨끗한 별의 표면에도 있는 법이다. 스캐처드 선생님 같은 사람의 눈에는 그런 사소한 결점만 보일 뿐 그 별의 찬란한 빛은 보이지 않는다.”  
   

 한 인간의 작은 우정의 몸짓이 한 인간에게 용기를 주고 수치와 불명예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이 장면이 나는 참 좋단다.

 그리고 반대로 제인 에어에서 가장 싫어하는 부분은 로체스터가 자신에게 미친 아내가 있음을 고백할 때 제인 에어가 한 말들이야. ‘나는 나 자신을 사랑해, 외로우면 외로울수록, 오점이 없으면 없을수록 친구가 없으면 없을수록 나 자신을 사랑해.’ 이에 대한 나의 느낌은 칼럼에서 쓴 그대로야. 제인 에어에겐 원칙과 법을 지키는 것이 중요했었어. 그런데 책의 뒷부분에서 또 다른 원칙과 법을 지키려는 세인트 존을 만났을 때 그녀는 결국 그것이 자기의 길이 아님을 알게 되는데다가 어린 시절 자신이 한 인간의 미소 하나로 살아났다는 진실에 대한 배신이나 다름없어. 홀로 강해지려는 사람들이 알아야 할 게 있다고 생각해. 자기가 강해지는 것은 혼자 힘으론 그 누구도 어림없다는 걸. 언제나 사람만이 희망이야.

 제인 에어에겐 이 시절 우리에게도 큰 의미가 있는 과제가 적어도 두 가지 정도 있었어. 하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영혼을 지키고 당신이 편견으로 보는 것보단 더 나은 내가 있음을 자기부터 믿고 그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 길을 찾아야 하는 것. 그리고 사랑의 동등성 문제, 그리고 가정교사와 부유한 주인의 사랑이 어떻게 동등성을 확보해나갈 수 있는가? 안타깝게도 그건 로체스터의 실명 그리고 제인 에어가 뜻밖에 거액의 유산 상속자(서인도 제도에서 흘러들어온 돈임을 밝혀)가 되는 방식으로 해결되어 버리고 말았어. 

 가장 명확하지 않은 부분은 바로 이거야. 로체스터는 제인에게 자신에겐 비밀이 있다고 말하지. 그 비밀은 소설이 끝나도록 그에게 서인도 제도 출신의 미친 부인이 있단 것 말곤 밝혀진 게 없어. 로체스터는 대체 서인도 제도에서 어떻게 살았단 말인가? 그가 진심으로 후회하고 새 사람이 되고 싶게 만든 그 일은 대체 무엇인가? 손필드 저택 3층에 묶여 있는 그 미친 여인의 정체는 무엇이란 말인가? 그녀는 왜 서인도 제도에서 영국 중부의 손필드까지 와서 결국은 황야를 향해 크게 울부짖고 투신자살하고 마는가? 그녀가 무슨 대단한 잘못을 저지른 위험인물이기에 로체스터는 사적으로 그녀를 감금하고 짐승 취급을 하는가? 로체스터는 그녀에게 받은 결혼 지참금 3만 파운드로 세계각지를 유랑하며 여유 있게 살았던 것은 아닌가? 로체스터의 그녀에 대한 잔인함은 어디서 나오는가? 소설에선 그녀는 단지 정신 병력이 있는 가문의 내력대로 미쳐버린 알코올 중독의 탐욕스럽고 음탕한 여자로만 설명되고 말아.

 그런데 다락방의 미친 여자에 대해 궁금해하는 또 다른 소설가가 한 세기가 지나고 나서 등장해. 미친 다락방의 여자와도 닮은, 자주 술에 취해 으르렁댔던 서인도제도 출신 소설가 진 리스. 도미니카 출신이었던 그녀는 영국령 서인도 제도에서 벌어진 일들을 알고 있었던 거야. 그녀는 다락방의 미친 여자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란 제목을 달았어. 사르가소 바다가 어디 있는 줄 아니? 바하마 제도 동쪽, 유럽과 서인도 제도를 가르는 바다. 그 바다를 로체스터는 건넜고 그의 첫 번째 아내는 건너지 못한 것인가?

뒷이야기는 다음 주에 할게.
곧 여름이 왔으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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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인 에어 세트 - 전3권  


샬럿 브론테 지음, 류경희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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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하나 2011-05-12 0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타임머신이 있다면 브론테 자매네 집엘 놀러가서 와인 한 잔 나누고 싶어요. 한 잔이 뭐람. 두 세병은 까야 할 듯. ㅋㅋㅋ
 

 

  부르카를 벗겨줘

  
민규동(영화 감독) 

 

안녕, 커피진주. 

 얼마 전 누군가 나에게 너랑 어떤 사이냐고 묻기에, 그게 왜 궁금할까, 잠시 갸우뚱하다가 대답했어. 우린 떼려야 뗄 게 없는 사이라고. 최근 10년간 10번도 못 만났고, 같은 하늘 아래에서 이 시대의 뜨거운 공기를 함께 나누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함께 나누는 것은 전혀 없으니까. 그녀에게서 내 영화의 감상을 들어본 적 없고, 난 그녀가 쓴 책에 대한 감상을 전한 적도 없으니까. 다만, 그녀의 세계관에 매혹되어 그녀가 지닌 에너지 중 일부라도 염사 받기를 희망하는 수많은 신도 중의 하나라서, 그저 그녀를 모모처럼 여기고 내 말을 털어놓고 있을 뿐이니까. 그 사람이 ‘생선자전거’나 ‘돌사과’여도 상관없고, 내 추억담은 상상에 불과한 허구일 수도 있고, 내가 표하는 애정은 문학적 수사로 옮겨진 외로움의 표현일 수도 있으니까. 사람들이 어떻게 우릴 바라보느냐와 실제 우리의 세계는 많이 다를 거라고 대답했어. 때마침 한 여배우와 유명 가수의 숨겨졌던 이야기가 사람들의 술안주가 되고 있어서 그런지, 그 질문과 대답 모두 그 뒷맛이 씁쓸했어. 왜냐면, 어떤 이름이든 갖다 붙이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우리 사이에 허울 좋은 표식을 세워버린다면, 영혼의 대화를 꿈꾸는 우리의 시도가 흔한 흥밋거리로 박제화되어버릴지도 모르니까. 스캔들 기사가 그들 삶의 얕은 표피를 뚫고 어느 깊이까지 훑어내는지 모르겠지만, 나의 관심은 그 중심에 선 여자에게로만 향해졌어. 15살에 지나치게 멋진 사람과 사랑에 빠져버린 소녀가, 그 후 긴 세월 그림자처럼 살아왔을 여정이 안타깝기도 하고,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려는데 과거의 흔적이 쇠사슬처럼 자신을 휘감고 있는 게, 보기에도 힘겨워 보였으니까. 유명인을 생활의 파트너로 욕심낸 순간, 결국 이런 눈총의 시간들은 예견됐던 것이겠지만, 비밀을 지킬 것을 서약했든, 빼앗긴 시간에 대한 억울함을 상징적인 법정 싸움의 승리로 돌려받길 원했든, 둘만의 사연은 세인들의 혀끝에서 제맛 따라 어떻게 요리되더라도 끝내 알 수 없을 테니, 그들의 이야기는 결국 그들만의 이야기로 남아야 하는 게 아닐까 생각해. 하지만, 시간이 결국 모든 걸 잊게 하더라도, 그녀가 누군가에게 큰 상처를 남겼다는 낙인 하나는 벗기 어려울 정황이기에, 난 괜한 노파심으로, 아무도 오해하지 않고 그녀의 삶을 너그러이 이해해 주길 바라는 편파적인 연민을 품게 돼. 그녀가 진정 테스나 카추샤 혹은 헤스터처럼 진심을 품은 여인이라면 말이야.

 '남의 죄를 가지고 먹고 사는 목사, 남의 질병을 가지고 먹고 사는 의사, 남의 시빗거리를 가지고 먹고 사는 법관이 되는 건 싫다. 그런 내가 작가 말고 어떤 무엇이 될 수 있겠냐’고 한 작가가 물었었어. 꽤 멋진 말이지? 중학교 시절 ‘큰 바위 얼굴’이 그려진 표지에 너대니엘 호손이라는 작가의 이름이 적힌 영어 소설책이 기억나. 이 너대니얼 호손은 <주홍 글자>를 통해 ‘아무리 행복한 여자라 할지라도, 여자의 인생이 과연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일까?’라는 모든 여성의 운명에 관한 암담한 질문을 던지고 있어. 이런 글이 나올만한 게, 그때가 어떤 시대였느냐면,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도 쓰레기라고 비난받으며 화형식까지 당했던 시대였거든. 이 책은 '창녀의 도서관'이니 '음란한 거간행위'로 욕먹으면서 금서목록에 올랐고, 작가도 비난을 못 이겨 고향을 떠나야 했어. 겨우 이런 금욕적인 얘기로 말이야. 생각해 보면, 합리적 이성을 앞세워 새로운 윤리적 잣대를 가늠 짓던 근현대의 시대상이 이토록 낙후했었다는 게 정말 믿기지 않아. 지금으로선 원시시대를 바라보는 것처럼 그 당시를 놓고 혀를 찰 수밖에 없는데, 실은 작금이 그때로부터 얼마 떨어져 있지 않고, 실은 굉장히 가깝다는 사실을 떠올려보면, 정말 당황스러울 뿐이야.

 아직 인류의 삶 곳곳에 남아 있는 비이성적 억압의 형벌을 생각해 보면, 10여 년 전, 폴란드인이 운영하던 파리의 기숙사에서 가끔 봤던 요르단 출신의 한 아랍 여자가 떠올라. 걸핏하면 칼을 들이대고 돈을 강탈하려 협박하던 동네 아랍 남자들 때문에 이 여자에게도 같은 소수 이방인으로서의 연대감을 쉬 갖기 어려웠었어. 하지만, 한 가지 이유가 자꾸만 내 시선을 빼앗아 갔어. 그녀는 부르카를 쓰고 있었거든. 처음에 난 단순하게, 사계절 관계없이 그 검댕 천을 뒤집어쓴 모습이 참 불편해 보였고, 밥 먹을 때 천을 들어 그 밑으로 수저를 집어넣어 음식을 삼키는 걸 보고, 인류가 원숭이로부터 진화해서 어쩌다 옷감을 발견하고 여성에게 이런 두건을 뒤집어씌울 아이디어까지 내게 됐는지 참으로 갸우뚱할 수밖에 없었어. 게다가, 다양성에 대한 인간 DNA의 본능은 부르카, 히잡, 니캅 등 가리는 부위에 따라 여러 디자인까지 갖추었어. 말하자면, 그것이 억압일지라도 예쁜 게 좋다면 취향에 따라 화려하게 장식할 자유는 주어진 거지. 코란에서는 이렇게 쓰여 있어. 무릇 남편 이외의 다른 남성이 성욕을 품지 않게 하기 위해선 여자는 자신의 신체를 가려야 한다고. 그 당시 여자는 남자가 품은 성욕의 대상이었을 뿐인 시대였는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외양을 숨긴 것이 진정 나쁜 성욕을 막아냈었는지는 모르겠어. 대신 난 아라비안나이트 풍의 비사가 있었을 걸로 의심돼. 수없이 많은 연인을 거느리던 절대 군주가 어느 날 다른 신하와 사랑에 빠져 도망친 궁녀를 붙잡고는, 질투에 눈이 멀어 그 나라의 모든 여성들에게 ‘옷의 감옥’이라는 형벌을 내린 거 같은 뒷얘기 말이야. 어쨌든 난, 여성을 남자가 소유하고 독점해야 할 재산의 일부로 취급해온 여성 비하의 역사가 풍기는 이 옷이 지극히 싫었어. 왠지 아프가니스탄에서 간통을 저질렀다는 이유로 돌멩이로 쳐서 죽을 때까지 때리는 풍경이나, 파키스탄에서 여동생의 혼전 연애에 분노한 오빠가 얼굴에 염산을 퍼붓는 풍경이 떠오르거든. 즉, 이것은 이민자, 이교도, 테러리스트라는 불편한 이슬람의 이미지로 오해되는 하이퍼링크인 거야. 하지만, 그녀와 얘기해 봤을 땐, 이게 단지 여성 억압이라는 이유로 그걸 벗겨 내는 것 또한 쉽지 않은 문제란 걸 알게 됐어. 왜냐면, 예상과는 달리 그 여자는 본인 스스로 부르카를 억압의 산물로 생각하지 있지 않았거든. 취직도 어렵고 공동생활도 어려우며 시야를 가려 물리적으로도 너무나 불편한 이 옷은, 일본인들이 무릎 꿇고 앉아 밥 먹는 거나, 제사 때 엎드려 절하는 우리의 우스꽝스러운 자세를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듯, 각자 문명의 독특한 속성처럼, 그들도 이미 생활의 일부로 삼아 자연스럽게 지니고 산다는 거야. 그것을 취하냐 마냐는 개인의 자유이고, 그것에 손가락질하는 것은 종교적 차별이자 또 하나의 억압이라고 주장하는 거지. 이 문화적 자긍심은 여성의 차별에 대해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촉수를 갖고 있지 않다고 보이지만, 어쨌든 그 종교가 약자의 자존감이고 동시에 정체성이라는 중요한 삶의 무기가 되어 있는 현실 앞에서는 복잡한 문제임이 틀림 없어 보였어. 얼마 전 프랑스에선 그런 옷을 입고 다니는 걸 법으로 금지했어. 그렇게 부르카를 거부하는 세계적인 몸짓이 여기저기서 시작되고 있어. 그 기숙사에 살던 그 여자도 이젠 부르카를 벗고다니는지, 혹은 여전히 버티고 있는지, 아니면 그 자유를 거세당한 부당함에 저항하며 프랑스를 뛰쳐나갔는지 알 수 없어. 내가 잊지 못하는 건, 분명히 하등한 존재라고 여자를 구분해주는 낙인의 표식, 즉, 객관적으로 형벌처럼 보이는 그 감옥이 그녀에겐 고통을 견디면 구원이 온다는, 일종의 자신의 신앙을 굳건히 받쳐주는 흔들리지 않는 지조의 봉인이었다는 거야. 주홍 글자의 헤스터의 경우처럼 말이야.

  중세 유럽의 마녀사냥에서 이어진 근대 아메리카의 이 주홍 글자 형벌은 청교도의 강박을 실현하고 싶어했던 종교적 야심인데, 그것은 어쩌면 조선시대의 열녀문 같은 것과 맞닿아 있어. 열녀문은 실은 여성이 자신의 욕구를 절제하고 남자를 위해 희생하는 것이 진정한 용기이며 삶의 당위라는 이데올로기의 아이콘이었으니까. 외간 남자의 아이를 낳았거나 혹은 심지어 남편이 죽어 과부가 된 여자들에게 가문의 영광을 위해 자살할 것을 종용하고 그 대가로 열녀문을 세워서 절개라는 거짓 신화의 주역 자리를 제공해 주는 맞교환을 자행했던 거니까. 무릇 도망노비의 얼굴에 노비라고 글자를 새겨 넣는 전통처럼, 두려움을 양산하기 위한 기성 윤리체계의 으름장, 이것은 현대 사회로도 유전되어서, 변혁을 꿈꾸는 특정 사람들에게 빨갱이라는 표식을 붙여 그들을 경계하면서도 그렇게 낙인 찍히는 삶을 두려워하게 하고 있지.

  사실 옷의 감옥보다 더 무서운 게 이 마음의 감옥인데, 청교도가 발명한 그 이미지의 형벌이 진정으로 추구하는 것은 후자라고 생각해. 물론 주눅이 들지 않고 버티어 낸 헤스터는 예외적인 여성이긴 해. 왜냐면, 그 손가락질을 끌어내는 주홍 글자의 형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화려한 자수 솜씨를 발휘해 더 두드러지게 가공해서 자신의 일부임을 명백히 밝혔고, 그러면서도 마음은 일체 그곳에 갇히지 않고 오히려 더 자유롭게 살아갔으니까.

   
  죄를 범한 곳이 바로 이 땅이니 지상에서의 형벌은 마땅히 여기서 받아야지. 그렇게 되면 날마다 당하는 치욕의 괴로움이 마침내 영혼을 정화해 이미 잃어버린 것과는 또 다른 순결을 빚어낼지도 몰라. 그 순결은 수난의 결과이기 때문에 한층 더 성자다울 거야.  
   

 반은 진실, 반은 자기기만일 수도 있는 이 이상한 종류의 낙관적인 최면이 어떻게 가능했을지 궁금하긴 한데, 어쨌든 다소 천진해 보이는 그녀의 생각이 나은 결과가 어땠는 줄 알아? 시간이 지나면서 잘못을 용서받았을 뿐 아니라, 그 죄의 표식이 천사의 선행이라는 표식으로 의미가 바뀌어버렸어. 이건 그녀의 의지가 이렇게 예언한 대로야.

   
  저에게 이것을 떼어낼 자격이 주어진다면, 그건 저절로 떨어지든가 아니면 다른 뜻을 나타내는 어떤 것으로 변하는 방식일 거예요.  
   

 난 낙인 자체라기보다는 그 낙인을 안고 살아가는 방식에 관심이 더 가. 헤스터가 우리에게 긴 세월이 지나도 기억되는 건 바로 그 특별한 삶의 방식 때문인 거 같아. 그게 아니라면 이 심심한 이야기가 미국 근대문학의 특별한 부분을 차지하진 못했을 거야.

   
  주홍 글자는 여느 여자들이 감히 발을 들여놓을 수 없는 곳을 출입할 수 있는 통행증이었다. 치욕, 절망, 고독! 이것들이 그녀의 스승이었다.  
   

 신발을 못 신게 하는 형벌을 받은 사람이 발바닥으로 대지를 느끼며 살아가듯, 그녀는 당대 윤리의 경계선을 넘어서는 바람에, 관습에 갇혀 사는 사람들이 경험할 수 없는 넓고 깊은 생의 순간들을 맞이하는 혜택을 누렸어. 하지만,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은 어땠을까? 아마 지탄받는 도덕성의 무게에 짓눌려 어둠의 세계로 도망쳤을 거 같아. 고통을 대놓고 받아들이는 헤스터의 삶은 낙인을 피해 진실을 숨기고 살던 그녀의 연인 딤즈데일 목사에게 도피 대신 적극적 자유를 꿈꾸게 만들어. 또한, 비난에 깔려 말라 비틀어 죽기보단 전통적 도덕의 굴레가 없는 자유로운 땅에 가서 새로운 삶을 창조하자고 제안해.

   
  이 거짓된 삶을 진실한 삶으로 바꾸세요! 설교를 하세요! 글을 쓰세요! 행동하세요! 가만히 누워서 죽음을 기다리지 말고 무슨 일이라도 하세요!  
   

 이런 미국 특유의 실용적 이상주의는 낙인이 그 자체로 우리를 절망시킬 절대불행의 표식은 아니라고 얘기해줘. 결국, 어떤 낙인을 이마에 찍고 살아가든, 그 삶을 영위하는 태도와 그 고통을 소화해내는 용기 그리고 고통만이 줄 수 있는 삶의 다른 이면들을 흡수해내는 내성에 따라 인생은 달라질 수 있다는 낙관을 심어주는 거야.

 맞아. 자세히 보면, 헤스터가 주홍 글자의 고뇌를 인내로 수용했다고 해서, 그 연인과 나눈 불륜의 사랑을 후회하는 거 같진 않아. 그러니까, 자신이 저지른 새로운 사랑을 참회했기 때문에 그 낙인을 수용한 게 아니라, 그 사랑을 철회하지 않고 끝까지 안고 살려고 그 고문을 떠안았다고 봐야 할 거 같아. 즉, 고통을 대가로 자신의 진실을 당당히 인정받는 거지. 다시 스캔들의 그 여배우로 돌아가서, 그녀가 헤스터의 지혜로 나머지 삶을 살아가면 어떨까, 조용히 희망해 봐. 그 옷을 벗든, 입든 말이야.

 소설의 마지막 문장인 ‘검은 바탕에 주홍색 글자 A’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어. 소설에선 간음(Adultery)의 의미에서 유능함(able)과 천사(anger)의 의미까지 확장되고 있지만, 더 넓게 저자(Author), 경탄스러운(Admirable), 아모르(Amor, 로마 신화에 나오는 사랑의 신.), 애정(Affection), 예술(Art), 미국(America), 심지어 아마조네스(Amazones ,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여성 무사족)까지도 생각해볼 수 있어. 당시엔, ‘I’라는 근친상간(Incest) 죄도 있었고, ‘D’라는 술주정뱅이(Drunkard)의 형벌도 있었대. 이렇게 저렇게 죄마다 글자를 달고 살자면, 알파벳으로는 다 묘사 못 할 만큼 죄가 많이 있겠지. 우리 일상의 패션도 꽤 달라져야 할 테고.

 나는 한 편의 영화를 만들고 나면 이런저런 부류의 감독이라고 단번에 분류가 돼. 그 분류는 금세 바뀌지만, 어쨌든, 특정 부류의 카테고리에 확 묶이고 말지. 그런 획일적인 틀이 싫지만, 그건 세상이 나의 일부분으로 본질적인 나를 유추해내는 방식이니 어쩔 수 없지. 마음에 들든 안 들든, 나의 이마엔 어떤 문자가 새겨져 있어. 난 그걸 안고 살아가고 있고. 어쩌면 우리 모두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남들의 삶에 끊임없이 낙인을 새겨 넣고 있는지도 모르지. 지난주, 네가 쓴 편지를 보고 감동을 했어. 우리가 들여다봐야 할 또 하나의 그림자 삶, 그 외면 받은 채 잊힌 원폭피해자와 그 후손들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해 봤어. 마음이 아파. 왜냐하면, 그들은 ‘원폭 희생 환우’라는 주홍 글자의 낙인을 깊이 새기고 사는 건지도 모르니까. 알 수 없는 검은 질병 위에 A(Atom Bomb)라고 빨갛게 써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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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홍글자> 

   너대니얼 호손 / 김지원 외 옮김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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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하나 2011-05-03 1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 호주에서 편의점 알바 할 때 저를 고용했던 레바논인 주인과 말다툼 하고선 그만 둔 기억이 나네요. 무조건 무릎 아래로 내려오는 바지를 입으라나 ㅠ- ㅠ 카운터에만 서서 바코드만 찍는데 바지 길이가 무슨 소용. 아직도 생각하면 괜한 짜증이 ㅋㅋㅋ

그나저나 두 분의 편지를 읽으면서 많은 독서만큼이나 많은 경험도 중요하다는 걸 깨닫고 있는 요즘이랍니다. +ㅅ +
 

 

  방사능비 내리는 날, 카프카

  
정혜윤(CBS 라디오 프로듀서) 

 

 안녕! 동쪽별. 영화 개봉했겠네. 영화 개봉을 앞둔 감독의 기분은 어떤 거니? 판결을 앞둔 심정이니? 아니면 개운하니? 오랜만에 편하게 잘 수도 있니? 댓글도 읽고 별점 같은 거에도 신경 쓰니?

 나도 지난 수요일에 다큐멘터리를 하나 만들어 방송했어. 다른 어떤 때보다도 두려움을 갖고 방송을 만들었어. 모든 것은 방사능비에서 출발해. 방사능비가 내리던 날, 너는 어떤 생각을 했니? 어디서 비를 보고 있었니? 나는 이미 예전에 내가 방사능비를 맞아본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어. 방사능비가 내리던 거리를 걸어봤던 것 같은 느낌 말이야. 방사능비의 이 기시감은 어디서 오는 것이었을까? 난 기억을 더듬었고 마침내 떠올렸어. 난 히로시마에 관한 글들을 읽었었던 거야. 그러니까 내 기억 속의 방사능비는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내렸던 비야. 미국의 맨해튼 계획에 따라 개발된 우라늄 핵폭탄 리틀 보이는 8시 15분에 터졌어. 그리고 바람이 불고 불길이 치솟고 검은 비가 내렸어. 그것이 방사능비야. 그 해의 원폭으로 히로시마 나가사키에서 대략 70만 명이 피해를 당했어. 그 중 10%인 7만 명이 한국인이야. 히로시마에 군수 공장이 있었기 때문에 징용으로 끌려간 한국인 가족들이 많았던 거지. 한국인 7만 명 중 4만 명이 죽었어. 살아남은 3만 명 중 2만 5천 명 내지 6천 명이 태풍을 뚫고 한국으로 돌아왔어. 시모노세키에서 배를 타고 부산으로 말이야. 2천 명은 북한으로 갔어. 나머진 남한 어딘가에 정착했어. 그들은 대체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아니 무사히 살아 있기나 한 것일까? 이 궁금증에서 이야긴 시작해. 나는 살아남은 사람들을 찾아갔어. 그렇게 길을 나설 때 내게 있던 궁금증은 무엇이었을까? 방사능비가 무엇인지 궁금했던 것일까? 그것만은 아니었다는 걸 취재하면서 점점 알게 되었어. 전혀 개인적이지 않은 낯설고 잔인한 운명이 자신에게 닥쳤을 때 그것이 어떤 삶과 죽음을 불러오는지 나로선 알 수 없었던 거야. 그날 히로시마에서 방사능비를 맞았던 사람들은 그날 자신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결코 알지 못했어. 그리고 그 일이 평생을 따라다니리란 것은 더구나 절대로 상상할 수 없었어.

 그들 중 60%는 합천에 살고 있었어. 우리가 해인사나 전직 대통령의 고향으로 아는 그 합천 말이야. 그래서 우리가 모르고 있었던 합천의 또 다른 별명은 한국의 히로시마야. 그렇다면 왜 합천일까? 일본강점기 어느 날 합천에 신작로가 깔렸겠지. 그 신작로는 부산까지 뻗었어. 부산엔 시모노세키까지는 가는 배가 있었어. 그런데 합천은 농지가 20%밖에 되질 않아. 그나마 있던 농산물을 수탈로 뺏기고 나면 정말로 굶을 수밖에 없는 땅이었어. 그래서 누구는 징용으로 누구는 먹고살 돈을 벌려고 어느 날 아침 신작로를 따라 히로시마로 떠난 거야. 나는 합천에서 많은 걸 봤어. 그 땅에서 살아온 사람들은 피폭자란 걸 비밀로 하고 가난, 차별, 냉대를 견뎌 냈어. 이런 할머니를 만났어. 1945년 그 할머니는 다섯 살이었어. 8월 6일 그 할머니의 엄마는 장사하러 나가고 언니와 오빠는 학교에 갔어. 집엔 그녀와 외할아버지만이 있었어. 그런데 가족들이 나가자마자 폭탄이 떨어졌어. 그 뒤로 아무리 기다려도 아무도 돌아오질 않았어. 그래서 어린 소녀는 외할아버지랑 둘이서 손잡고 배타고 한국으로 돌아오지만, 외할아버지는 이내 돌아가시고 말아. 혼자 남은 소녀가 어떻게 자라서 지금은 할머니가 되었을까? 그녀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고만 말해. 남의 집 살이도 하고 나물도 뜯어 먹고 살았다고만 하지. 한 할머닌 다섯 살 때 피폭되었는데 입술은 있어도 말은 못해. 그녀가 말 한 마디를 하려면 온몸을 뒤틀어야 해. 너- 무- 힘- 들-어. 그녀는 내게 이렇게 말했지. 역사가 저지른 일은 개인의 몸 위에 그렇게 떨어졌어. 지금 돌아온 사람 중 90%가량은 사망한 것으로 추정돼. 대부분 먹고사느라 자신이 왜 아픈 건지 고통의 원인도 모르는 채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하고 죽어 갔어. 자기가 저지르지 않은 일 때문에 평생 조롱거리가 되는 거야. 난 피폭자들이 어떻게 죽어갔을까? 상상만으로도 비통해. 말테의 수기에서 아이들은 조그만 죽음을, 어른들은 커다란 죽음을 지니고 있었다는 문장이 나와. ‘여인들은 그녀들의 젖가슴에 남자들은 그들의 가슴에 죽음을 안고 있었다. 사람들은 진정 자신의 죽음을 지니고 있었다.’ 이 문장은 이런 상황에선 슬픔만 불러 일으켜. 이 사람들은 진정 자신의 죽음을 지니지 못한 채 죽었어. 죽으면서도 피폭자들은 모든 것이 낯설었을 거야. 삶조차도 죽음조차도. 우리는 우리 고유의 죽음, 마치 내 젖가슴처럼 내 가슴 안에 있는, 내 삶의 정직한 반영인 나만의 죽음을 죽을 수 있을까? 그저 우리도 어느 날 통계 수치의 한 명으로 사라지고 말 수도 있겠지.

 그런데 그들에겐 가난과 질병과 냉대와 차별 수치 이 모든 것 위에 하나의 고통이 더 있었어. 그들이 결사적으로 피폭자임을 숨긴 것은 자녀 또한 불이익을 당할까 두려워서였어.

 피폭자 2세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누구는 건강하고 누구는 아파. 이런 2세 중에 마치 전태일 같은 한 사람이 등장해. 1970년생 김형률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 사람은 처절한 삶을 살았어. 그는 2005년에 죽었어. 나는 죽은 남자의 방, 그가 살아 있었을 때는 결코 알지 못했던 죽은 남자의 방에 들어가 그의 일기장을 봤어. 어쩌면 그가 쓴 뒤로 이 세상에서 내가 처음으로 그 일기장을 읽은 사람일지도 몰라. 거긴 아직 십 대인 그가 나와. 그는 아파. 그런데 왜 아픈지 몰라. 그런데 사랑하는 여자가 생겨. 병약한 그로선 도저히 사랑을 고백할 엄두를 내지 못해. 그녀 눈에 내가, 이렇게 아픈 내가 어떻게 보일까? 그는 불안해해. 그러나 사랑은 간절해. 그녀의 모든 걸 눈여겨봐. 사소한 말 한마디에도 귀를 기울여. 그녀가 자신이 따라주는 한 잔의 술을 마신 것도 일기장에 적어. 그 사랑 때문이었을 수도 있을까? 그는 끝없이 나의 존재는 무엇인가 물어. 나는 평범하게 사랑하고 사랑받고 가족을 이루고 직업을 갖고 살 수 있을까? 너무나 평범하지만, 인간적인 그 꿈을 내가 이룰 수 있을까? 아마 그는 수도 없이 물었을 거야. 그는 2001년에 되어서야 자신의 병이 뭔지 알아. 면역 글로블린 결핍증이란 희귀병이었어. 의사들은 김형률 몰래 그 병에 대한 논문을 써. 그건 그의 병이 모친의 피폭 때문에 생긴 유전적 질환일 확률이 높다는 논문이었어. 그는 그 뒤로 원폭에 대한 모든 자료를 찾아 읽어. 그러면서 고민을 해. 이렇게 병든 몸으로 내가 세상에 태어난 깊은 뜻은 무엇인가? 이렇게 병든 몸으로 내가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이제 그의 정체성은 원폭 2세 환우였어. 그는 거기에 아직도 뛰는 심장 전부를 걸어. 제대로 숨도 쉬지 못하는 그가 지난달의 나처럼 합천을 찾아가. 나와 같은 곳을 걸었어. 그리고 피폭자 집을 집집이 방문해. 그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각종 질병을 앓고 그것을 개인의 불행으로 안고 변변한 직업도 없이 간신히 살아가는 것을 보았어. 그는 정부와 시민 단체를 끝없이 찾아다녀. 방사능으로 아픈 사람들이 우선 생존할 수 있게는 도와주자고. 최소한으로나마 인간답게 살아가게는 도와주자고. 그리고 그때마다 정부의 관료들에게 들었던 말은 "방사능 유전 여부는 의학적으로 아직 입증되지 않았다."였어. 그렇지만, 어떤 개인이 자기가 아픈 원인을 자기 혼자 힘으로 증명해 낼 수 있겠니? 이것이 지금 삼성 반도체 공장에서 일어나는 일 아니니? 수많은 산재 환자에게 벌어지는 일 아니니? 그는 원폭 2세 환우회를 조직하고 실태조사와 의료 지원, 생계 지원 등의 내용을 포함하는 특별법 초안을 만들어서 의원들을 찾아다니지. 이 특별법은 17대 국회 때 발의되어 낮잠만 자다가 폐기되고 말아. 아마 그 사이 또 누군가는 죽었겠지. 그리고 지금 18대 국회 때 다시 발의되었지만, 여전히 2년 넘게 잠들어 있어. 그는 결국 죽고 말아. 그의 좌우명이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였는데 말이야. 그가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 라고 말할 때 그건 누구의 삶이었을까? 결코, 자기 자신만의 삶은 아니었어. 그에겐 자신처럼 앓는 사람에 대한 강한 연민이 있었어. 지금 방사능이 무엇인지 평범한 시민도 시금치와 우유와 생선을 걱정하고 있어. 반찬을 걱정하는 우리 곁을 원인도 모르고 피폭된 사람들이 지치고 보잘것없는 몸을 이끌고 울면서 지나가고 있을지도 몰라.

 난 김형률의 아버지와 이야기하다가 카프카의 성을 생각했어. 카프카의 성은 측량사 k가 성에 들어가고자 하나 결코 들어가지 못하고 마는 이야기야. 다른 많은 것은 젖혀두고 관료주의의 하수인과 옹호자들 때문에 성이 생각났던 거야. (카프카의 성에도 그런 사람은 넘쳐나) 김형률과 아버지는 보건복지가족부 공무원, 의원들을 비롯해 많은 관료를 만났어. 그들은 마치 카프카의 성에 있는 사람들처럼 김형률이 성에 들어가는 것을 도와주지 않았어. 그 과정에 기만적인 약속, 무시, 태만, 속임수, 핑계, 모욕 어떤 일들이 벌어졌었는지, 그것이 김형률과 피해자들을 얼마나 애타고 초조하게 안달 나게 했는지 알 수 없지만, 이런 질문이 남아. 성이 안갯속에, 헛된 희망 속에 있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과연 무엇일까? 이 세상의 끝으로 추방된 원폭 피해자들을 받아주는 성은 있을까? 김형률은 성문 앞에서 지금도 문지기와 씨름하는 것은 아닌가? 그 뒤에 이어지는 끔찍한 상상은 쓰고 싶지도 않아. 다만, 성문이 성난 군중의 고함과 함성 속에 열리는 오래된 이야기 중 하나라도 제대로 떠올리고 싶은 밤이야. 성과 하나의 제국을 건설하는 꿈을 꾸고 싶어.

 p.s 그런데 너의 영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은 어느 중년 부인에게 닥쳐온 죽음에 대한 이야기라고 들었어. 오늘 여주인공인 배종옥 씨의 인터뷰 기사를 읽었어. 나도 곧 볼 참이긴 하지만 그때의 죽음은 고유한 죽음이니? 그녀는 어떻게 죽음을 맞게 했니? 그녀에게 어떤 죽음을 줬단 말인가? 너는. 궁금해. 그리고 <제인 에어>에 대해선 할 말이 좀 있으니까 다음 주에 편지 쓸게. 다만, <제인 에어> 영화를 보러 가는 사람들이 로체스터의 부인, 다락방의 미친 여인이 어떻게 묘사되는지 봤으면 좋겠어. 나는 그녀에게 관심이 있어. 그리고 또 한 명의 작가가 그녀에게 관심이 있었지. 그녀의 이름은 진 리스야. 아마 그녀는 인생의 어느 시점에선가 늙고 미친 이방인 여인이란 말을 들어봤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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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  

     성                

       카프카/ 홍성광 옮김  

        펭귄클래식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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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하나 2011-04-26 0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영화를 보며 다락방의 그 미친 여자를 주시할 참입니다. 진 리스 언니와 함께라면 차암 좋을텐데 +ㅅ +

테레사 2011-05-06 1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 피디는 늘, 삶에 대해 진실함을 지닌 분 같단 생각을 해요. 이 글은, 참 슬프군요. 그냥 슬프다는 말, 그 이외 할 말이 떠오르지 않네요....라디오를 듣지만, 정피디가 만든 프로그램을 들어본 적이 없어요. 시간대가 안 맞아서겠지요? 당신은 친구가 되고 싶은 몇 안되는 분이에요...
 

 

  <제인 에어> 나는 고아다

  
민규동(영화감독) 

 

 안녕, 방사능 빗속에서 길을 잃을 뻔한 나의 상냥한 당신. 고독하고 가련한 그대의 동쪽별이 시름시름 앓으며 그 빛을 잃어가고 있을 때 변함없이 내 어깨에 손을 살짝 얹어주는 달콤한 당신. 그대가 편지를 보내줬기 때문에 난 겨우 버틸 수 있었어. 이번 주엔 허리에 이어 미칠듯한 두통까지 날 덮쳤거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해 들어 가장 복잡한 순간들을 뚫고 나가야 했어. 시사회를 하고, 또 어지럼을 무릅쓰고 겨우 여기저기를 쏘다니는 사이, 널 그리워하던 시간들이 우수수 부서지고 있었어. 문득 고개를 드니 어느새 목련이 피어 있더구나. 요즘은 기후가 변해서 시간이 지나도 꽃잎들이 다 떨어지지 못하고 몇몇 꽃들은 가지에 매달린 채 겨울까지 난다고 해. 저 나무에 피기 시작한 하얀 꽃들은 다들 어떤 운명을 맞이할까, 궁금해져. 어쨌든, 봄이 왔단다. 믿기니? 매번 찾아오는 계절인데도, 매번 새로운 느낌이 드는 거, 게다가 매번 다른 추억을 불러 일으켜주고, 매번 아쉬움을 남기고 떠나가버리는 거, 신기하지 않니? 마치 우리의 사랑처럼, 인생처럼 말이야. 창 밖 목련을 넋 놓고 보고 있자니, 어떤 기억이 떠올랐어. 나랑 참 안 어울리는 군대에 끌려가서, 도무지 알 수 없는 낯선 곳에 물건처럼 던져진 채, ‘이곳의 운명이 너의 운명이다.’라고 선언 받던 그 시절 말이야. 신영복 선생님이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서 자그마한 창틀 사이로 새로 돋은 풀꽃을 찬미했듯, 시선조차 맘대로 허용되지 않는 억압 속에 놓였었지만, 틈만 나면 눈을 돌려 내게 찾아온 봄을 느끼려고 애썼던 기억. 조금이라도 내 운명의 시선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썼던 기억 말이야.

   
  “새로운 예속! 그래, 그런 삶에도 뭔가가 있을 거야.”  
   

 이렇게 제인 에어처럼 스스로를 달래면서 말이야. 제인이 그 악몽 같았던 숙모집을 탈출해 새로 자리를 잡은 곳은 로우드 자선원이야. 이곳은 일종의 고행의 미덕을 가르치는 곳인데, 거기엔 가끔 꿀꿀이죽을 먹는 것조차, 사치와 탐닉에 익숙해지지 않으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인내의 코스라고 우기는 교장이 있어. 마치 ‘옛날엔 나도 소방호스를 입에 물을 들이붓는 것처럼 힘들게 공부했었다.’라고 우기는 어떤 대학총장 같은 사람이야. 어딜 가나 이런 파쇼들을 만날 수 있는데, 문제는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권력을 쥐고 있다는 거지. 고아가 되어 삼촌집에 맡겨졌다가 숙모에게 신데렐라처럼 핍박받았었던 (물론 맞고 조용히 풀죽어 지내지만은 않았지만) 제인은 다행히도 이미 지옥 같은 더부살이의 경험 덕에 자선원의 물리적인 고행 정도는 거뜬히 견디어내. 하지만, 그런 강인한 제인과는 달리, 흐드러지게 핀 목련을 채 보지 못하고 얼마 전 스스로 목숨을 끊은 4명의 카이스트 학생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져. 우리가 결코 이해해주지 못할 고통의 끝에서, 그리고 그 외로움의 끝에 섰을 그들 대신이라도, 저 목련을 더 뚫어지도록 바라보게 돼. 사실 난 그들을 연약하다 비난할 수도, 동정할 수도 없어. 그들은 "자신의 운명을 결코 스스로 만들어 나갈 수 없다’라는 낙담에 대한 마지막 저항으로 자신의 운명을 거두는 주체적 흔적을 남긴 것이니까. 제인에겐 묘한 카리스마를 발휘하며 그 힘겨운 여정에서도 어떻게 버티어나가야 하는지를 가르쳐줬던 헬렌이라는 친구가 있는데, 얼마 전 세상을 등진 그 젊은 영재들 곁에도 그런 친구가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어쩌면 좀 더 버틸 수 있었을 텐데, 떨어지는 목련을 보며 자꾸 그런 생각을 하게 돼.

 “어차피 피할 길이 없다면 참는 게 네 의무일 거야. 어쩔 수 없이 참는 게 네 운명인 일을 ‘난 못 참아.’라고 말한다면 그건 나약하고 어리석은 짓이야.” 헬렌은 힘겨워하는 제인에게 이런 말을 해줬어. “증오심을 가장 잘 이겨내는 건 폭력이 아니야. 그리고 상처를 가장 확실히 치유해 주는 건 복수가 아니야.” 또래의 10대 아이가 어쩜 이렇게 조숙할 수 있었을까. 자신이 곧 죽을 거라는 사실을 예감하고 있었기 때문일까. “내 생각엔 우리 인생은 원한을 키우거나 그릇된 학대 행위를 마음에 새기고 살기엔 너무 짧아.” 이렇게 인생의 깨달음 몇 단계 중 거의 꼭대기에 올라선, 거의 소크라테스의 현현처럼 보이는 헬렌의 메시지들. 특히, ‘고통을 참을 것, 그러면 행복이 따를 것이다.’라는 그 달콤한 종교적 메시지는 제인을 크게 감화시키지만, 실은 제인은 그녀의 온화한 격려를 온전히 받아들이진 않아. 왜냐면, 그녀는 타고난 반골기질의 고아였고, 운명에게 지고는 못 견디는 저항아였단 말이지.

   
  “내가 나 스스로를 보살필 거야. 더 외로울수록, 홀로 남겨질수록, 의지할 이가 없을수록 나는 나 자신을 더 소중하게 여길 거야.”  
   

 이렇게 헬렌의 잠언을 재해석하며 운명을 헤쳐나가는 올리버 트위스트 캔디 제인의 매력적인 세계관은 어디서 탄생했을까. 밀란 쿤데라는 <불멸>에서 이렇게 말해. .

   
  고통이 극에 달할 때 세상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며, 우리 각자는 자기 자신과 홀로 남는다. 고통이야말로 자기 중심주의의 위대한 학교이다.  
   

 제인은 그 홀로 남은 자신의 학교에서 삶이 누려야 할 것이 아니라 견뎌야 할 것이란 걸 배워. 그녀는 총명한 지성을 갖게 되고, 흔들리지 않는 신념을 키웠어. 그녀는 정직함, 다정함, 겸손함을 갖췄고, 동시에 옹고집에 외골수가 돼. 그녀는 자신을 절대 속이지 않고, 내키지 않는 일을 절대 하지 않아. 그리고 다른 누구의 욕구에도 흔들리지 않아. 악전고투에는 강한 의지력으로 맞서고, 감정 억제엔 타고난 자제력을 발휘해. 정신이 물질보다 우월하고, 이성이 감정보다 앞선다고 믿어. 비굴하게 길들여진 순종을 거부하고, 대신 가난과 고난을 용기 있게 받아들여. 유혹 앞에 쉬 체념치 않는 건전한 분별력을 가졌고, 물질에 대한 욕망 때문에 남자의 종속물이 될 만큼 어리석지 않아. 가진 것도 없으면서 동등한 반려자가 아니라면 결혼하지 않겠다고 우기고, 결국 결혼은 필요에 의한 선택이 아니라 자발적인 포용이라고 주장해.

 나는 이토록 스스로 배워 훌륭히 익힌 제인을 보며, 매 순간의 갈등에 극도로 눌려, ‘죽어버린다면 이 고통이 지나가 버릴 텐데…’라고 속삭이게 될 때, 그 유혹을 이겨내는 힘은 결국 자신에 대한 믿음이라고 깨닫게 돼. 어떤 궤적으로 스쳐왔든, 지금 이 순간, 땅에 딛고 선이 우스꽝스러운 모양조차 내가 올바른 신념으로 선택한 인내심의 결과라고 믿음 말이야.

 비극의 영원한 조건이란 게, ‘인간의 삶보다 가치가 월등히 높은 이상이 존재한다’는 거라고 보면, 제인의 이데올로기는 끝없는 비극의 꼬리표를 달고 다닐 수밖에 없는 세계관이기도 해. 채털리 부인의 극단에 서 있다고 할 수 있지. 제인에겐 관능의 체험 같은 건 제 신념의 저 발톱 끝에 묻은 먼지 정도의 위안거리니까.

   
  행복해지겠다는 적절한 대의명분이 있어요. 그러니 분명히 행복해질 거에요.  
   

  붉은 방에 갇혀 ‘Let me out’이라고 외쳐대며 행복한 삶을 향해 ‘Let me in’이라고 아우성을 치던 어린 제인 에어한테서 결국 그렇게 멋진 여자로 성장할 거라는 암시를 받지는 못했어. 하지만, 나태주 시인의 <풀꽃>이라는 시에서처럼, 그녀는 성장할수록, 고난을 겪을수록, 아름다워져.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바로 이 시에 이 소설이 시대가 흘러도 끊임없이 영화로 재탄생 되는 이유가 담겨 있어. 예쁘지도 않고, 사랑스럽지도 않지만, 한 번 반해버린 이상, 이 특별한 소녀를 다시, 또 다시 목격하고 싶어 안달하게 되어 있거든. 생애 첫 사랑을 버리게 되는 상황에서도 자신의 신념을 따르고, 또한 생명의 은인과 함께 한 두 번째 강렬한 사랑을 맞이한 순간에도 자신을 굽히지 않아. 보통 얘기하는 밀고 당기기 수준의 값싼 심리 싸움이 아니라, 남자를 송두리째 흔들어놓고는 결정적인 순간에 설복할 수 없는 정당 명료하고 단호한 이유로 돌아서 버리는 그녀의 팜므 파탈적 행동에 반해버리지 않을 수 없어. 이 예상을 뒤엎는 딜레마 속 선택 때문에 결국 우린 그녀의 지독한 홀로서기에 연민을 느끼고, 그 정직함에 감동하게 돼.

   
  내 자존심과 상황이 그래야 한다고 요구한다면 난 혼자 살 수 있어. 행복을 사기 위해 내 영혼을 팔 필요가 없어. 내겐 타고난 내면의 재물이 있다고. 외부의 모든 낙이 내게 거부되거나 내가 감당할 수 없는 가격으로 제공된다 할지라도, 그 재물이 내가 살아가게 해줄 거야.  
   

  빅토리아 시대를 넘어 지금에서도 예외적이라고 할 수 있는 이 넘치는 개성에도, 결국 망가진 첫 남자를 행복하게 맞이하는 이 소설의 예상치 못한 해피엔딩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도 꽤 될 거야. (결국은 로맨스가 삶의 궁극적인 위안이 된다는 역설이지만, 사실 이 부분에 대해서 그다지 할 얘기가 없어. 내게 더 맞는 스타일은 여동생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의 언해피엔딩이니까.)

  나 또한 로체스터, 이 남자가 그토록 사랑할만한 남자인가, 라고 질투심 실어 물어보고 싶어. 그는 다시 돌아온 제인을 두고 ‘안 돼, 돌아가. 더 멋진 제대로 된 남자를 찾아 떠나.’라고 강력히 밀어내지 않아. 대신 파렴치하게도 “아아, 내 인생도 가치가 있을 수 있다. 아름다움으로 나는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처녀가 내 곁에 있지 않느냐.”라고 기다렸다는 듯 손을 내밀어. 그러니까… 왜? 이 처녀는 거만하고 냉정한데다 망가져 버린 그의 곁에 머물게 될까. 인간성에 실망하고 인생을 조롱하며 낭비했던 허무주의자 곁에 말이야. 혹시 지저스 콤플렉스를 건드린 게 아닐까. 그토록 망가진 한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건 자신밖에 없다고 스스로의 최면에 넘어간 게 아닐까?

  이 소설에서 가장 재밌는 장면을 꼽으라면 두 개가 있어. 로체스터가 떠나려는 제인을 설득하는 장면이야. 또 하나는 신 존이 역시 떠나려는 제인을 설득하는 장면이야. 내가 왜 당신과 결혼해야 하는지, 당신은 왜 나랑 결혼해야 하는지를 웅변하는 장광설 프러포즈 장면 말이야. 킥킥대면서도 멈칫, 이런 생각을 했어. 그 해, 그때, 그곳에서, 네가 나에게 그 기회를 줬더라면, 나의 웅변이 너에게 닿을 수 있도록 조용히 귀를 열어 주기만이라도 했더라면, 지금은 판이하게 다른 삶을 살고 있겠지, 하는 위험한 생각을 말이야. 우리 인생에서 그런 우스꽝스러운 웅변이라도 할 기회가 많지 않다는 걸, 그때 미리 알았더라면, 예언자의 목소리를 흉내 내며 이렇게라도 다그쳤을 텐데…

   
  몇 마디 말로 증명해 보이지. 아가씨가 춥다는 건 아가씨가 외롭기 때문이야. 누구와 접촉해도 아가씨 마음속에 불을 붙여 주지 않아. 아가씨가 아프다는 건 사람에게 주어진 감정 중에서 가장 좋고, 가장 숭고하고, 가장 달콤한 감정이 아가씨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야. 아가씨가 멍청하다는 건 그렇게 고통을 겪고 있으면서도 그 감정이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오도록 손짓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야. 또한, 그 감정이 자기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는데도 아가씬 그걸 마중하기 위해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려고 하지 않아.  
   

  4월 21일은 샬럿 브론테의 생일이고, 19번째로 리메이크된 <제인 에어>의 개봉일이고, 내 영화도 개봉하고, 네가 꼭 본다던 <상실의 시대>도 개봉하고, 여러모로 풍성한 날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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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인 에어> 

   샬럿 브론테 / 류경희 옮김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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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상과 풍경

  
정혜윤(CBS 라디오 프로듀서) 

 

 동쪽별. 너의 마지막 질문은 네가 나를 베아트리체와 이브의 혼합물로 여긴다는 것으로 받아들일게. 베아트리체 대 이브가 어느 정도 비율로 섞여야 황금 비율이 나오는진 알 수 없지만 어떻게 섞든 꽤 맘에 들 것 같아. 온갖 비율로 실험을 해보고 싶은걸. 솟구치는 실험정신을 억누르기 어려워.

  그래, 우리에겐 베아트리체가 있지. 어느 어두운 숲 속을 하염없이 걷던 단테에게 지옥과 연옥 천국을 보여주던, 진실한 사랑의 눈물을 흘리며 언제고 순수함을 일깨워 주던 베아트리체가 있지. 나는 언젠가 단테의 신곡에 대해 꽤 심각하게 고민해 본 적이 있어. 아마 천안함 사건 때였을 거야. 자식의 죽음을 앞두고 한 어미만이 눈물을 흘리지 않는 것을 보았어. 나는 그녀가 왜 울지 않을까 아니면 울지 못하는 것일까 궁금했었어. 나는 그 이유를 곧 알게 되었어. 울지 않는 어미는 "내가 자꾸 울면 우리 아들이 좋은데 갈 수가 없다고 사람들이 하기에 나는 더는 눈물을 보이지 않기로 했어요."라고 말했어. 장례식이 시작되자 많은 사람들이 죽어버린 사람들에게 축원했어. 천국에 가서 이 세상일은 모두 잊으라고. 그곳에서 아무 시름 걱정 없이 행복하게 살라고. 부디 건강히 지내라고. 나도 그 장례식을 보면서 많은 눈물을 흘렸어. 하지만, 천국이 어떤 곳일까, 죽어버린 사람은 천국에서 어느 순간에 우리에게 미소를 지을까도 궁금했어. 베아트리체가 단테에게 보여준 천국은 어떤 모습이었을까를 알려고 난 몇 날 며칠 신곡을 읽었어. 그런데 천국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곳이 아니었어. 천국에 올라간 사람들은 결코 우릴 잊지 않아. 우릴 늘 지켜보고 우릴 늘 생각해. 천국에 있는 사람들이 우리에게 품는 소망은 단 하나야. 우리가 뱃머리를 잘못 돌리면, 올바르지 못한 쪽으로 가면 뱃머리를 돌리길 원하는 거야. 이제까지와는 다른 움직임을 갖길 원하는 거야. 그것이 천국의 소망이었어. 그러니 천국에 누군가를 올려 보낸 우리에겐 지상을 천국의 방향으로 끌고 가는 것이 이 지상의 유일한 소망이어야만 해. 그것이 아직 지상에 있는 우리가 이제 지상에 없는 사람들의 소망을 이뤄주는 길일 거야.

 동쪽별, 나는 오늘은 방사능비가 내리는 거리에 서 있었어. 그 옛날 단테가 길을 잃었던 그 중세의 숲보다 결코 덜 위험하다고 할 수는 없는 곳이 오늘날의 대도시일 거야. 하늘은 무채색이었어. 온 사물들에서 조심스러움이 뿜어져 나왔어. 인적이 드문 거리와 공원은 황량한 느낌마저 들었어. 빗속을 뚫고 알몸으로 뛰어다니며 자유와 솟구치는 희열을 맛봤던 채털리 부인도 오늘은 조심할 것이고 세상 만물에 도전적인 시선을 던질 줄 아는 이 지상의 고혹적인 이브들도 그 방종한 시선을 잠시 거둘 거야. 나는 퇴근하다가 한 아이가 우는 것을 보았어. 방사능 빗속 벤치에 앉지도 못한 채 아파트 사이 가장 어두운 코너에서 우는 아이를 보자 나는 말을 걸고 싶었어. "아이야 왜 울고 있니?" 그 아이는 이렇게 대답하는 듯했어.  


   
 

지금 내가 울고 싶은 것은 울고 싶기 때문이다.  
마지막 벤치에 앉은 아이들이 울듯이
왜냐하면 나는 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한 시인이, 한 이파리가 아니기 때문에.
하지만 나는 다른 쪽 사물들을 헤매고 맴도는 상처받은 하나의 맥박이니까.
                                                  (로르카 -에덴 호수의 2중주 시)

 
   

 
 그래, 익숙한 도시의 불빛, 집으로 돌아가는 자가용들의 헤드라이트, 아이돌 가수들의 노래와 젖은 운동화. 오뎅바의 연기. 우는 아이. 오늘 내겐 이것들이 모두 한 몸 안에 연결된 상처받는 맥박들 같아 보였어. 나는 오늘 어쩐지 한 사람으로서 슬픈 것 같지 않고 뛰는 맥박의 하나로 아프고 슬픈 것 같았어. 정혜윤이기 때문에 슬픈 게 아니고 그냥 인간이기 때문에 슬픈 것 같았어. 이건 어쩌면 내가 최근에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투척된 원자탄에 피폭된 채 아직도 살아 있는 사람들을 인터뷰하고 있어서 일지도 모르겠어. 방사능비는 뻣뻣한 강철 눈물 같이 느껴졌어. 그 강철 눈물은 이미 오래전 누군가의 심장을 찔렀고 이제 또 찌르러 길을 나서는 것 같았어. 그러니 이제 무사히 집으로 돌아간 우리는 빗물을 닦으며 샤워를 하며 감사의 기도를 드리며 우리가 오늘 두려워했던 만큼 관심을 가져야 할 사람들이 있다는 걸 생각하는 밤이었으면 좋겠어. 하지만 방사능 눈물에 대해선 다음번에 더 자세히 이야기할게.

 혹시 로르카의 <인상과 풍경> 읽어봤니? <인상과 풍경>은 서른여덟에 소련 스파이란 누명을 쓰고 총살당한 비운의 스페인 시인 로르카가 그라나다 알바이신 일대를 여행하며 쓴 책이야. 난 그라나다에 갈 때 이 비할 데 없이 아름다운 책을 들고 갔어. 그리고 알함브라 궁전에서, 알바이신 거리에서 줄곧 그 책을 읽었어.

 알함브라 궁전, 결코 그 뜻을 해독할 수 없는 신비로운 문자들과 관능적인 나무 넝쿨을 닮은 시들과 별빛을 닮은 눈동자를 가진 춤추는 소녀들의 발 같은 한숨들과 온갖 전설적이고 슬픈 사랑 이야기로 둘러싸인 그 곳, 사이프러스 나무 아래서 천상의 소리 같은 분수 소릴 들으며 인상과 풍경을 읽을 때 멀리 알바이신 거리엔 뚱뚱한 여인이 빨래를 널고 소녀들은 손을 잡고 오르막길을 오르고 있었어. 지붕들 위로 한 번쯤은 울릴 것 같았던 종들은 결코 울리지 않았고 아직 익지 않은 오렌지 나무들 사이로 그리 시원하지 않은 한 줄기 바람이 불었을 때 나는 로르카의 <인상과 풍경>이 그리는 세계를 본 듯했어. 그것은 도시의 숨겨진 영혼 같은 거였어.

   
 

일단 우리 마음속에서 열정이 분출되기 시작하면 환상은 이 세상에 영혼의 불을 지펴 작은 것들을 크게, 추한 것들을 고결하게 한다. 마치 보름달의 빛이 들판으로 번져나갈 때처럼 말이다. 이처럼 우리 영혼 속에는 지상에 존재하는 것들을 압도하는 무언가가 있다.  

대부분은, 그것은 마음 깊은 곳에 잠들어 있다. 그러나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진 것들이 다시금 떠올라 마음이 어지러워지면 그것은 긴 잠에서 깨어나 마음속에 떠돌던 수많은 풍경을 한데 모으고 우리 삶의 일부로 만든다.

 
   

 
나는 로르카의 <인상과 풍경>을 통해 한 번 본 것을 삶의 일부로 만드는 방법을 배운 것도 같아. <인상과 풍경>에서 로르카가 포착한 것은 도시의 풍경에 맴도는 불안한 기운, 가엾은 사람들의 고뇌가 배여 있는 풍경. 깊이를 알 수 없는 고뇌와 좌절감이지만 로르카가 진정으로 두렵게 느낀 것은 죽음도 삶도 아니었어. 죽어가는 예수 옆에 무관심하게 서 있는 사도들의 표정에서 우리가 잔인함을 느끼듯 로르카 역시 고통과 슬픔을 무심히 봄, 그 뼛속 깊은 무관심에서 잔인함을 맛보고 두려움을 느꼈어. 어떻게 해야 우리가 매일매일 똑같은 표정을 지으며, 온갖 걸 무심히 보아 넘기는 사람이 되지 않을 수 있을까? 난 로르카의 이 말을 잊고 싶지 않아.


   
  항상 우리의 영혼을 세상 사물에 따라 부으면서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어른거리는 영혼의 그림자를 보고 또 마법과도 같은 우리의 감성에 형식을 부여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세상을 이해하게 된다. 예를 들어 우리는 인적이 드문 쓸쓸한 광장에서 그곳을 지나쳐 간 수많은 옛 영혼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사물이 지닌 모든 색조를 느낄 수 있으려면, 유일한 동시에 수많은 존재가 되어야 한다.  
   

 
오늘 내가 방사능비를 보면서 강철 눈물 같다고 느낄 때 나는 어떤 영혼의 눈물을 봤던 것일까? 이 비를 두려워하는 어떤 사람의 영혼을 본 것인가? 내가 인터뷰한 한 할머니는 히로시마에서 피폭되어 합천으로 돌아가 한 남자와 결혼해 아이를 낳았고 지금은 일흔 살인데 심장병, 파킨슨씨병 같은 온갖 질병에 시달리고 있어. 나는 자식들이 건강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할머니가 이렇게 말하는 거야.

   
  자식들은 건강해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손녀가 둘이 있는데 한 손녀가 어려서 고만 백혈병으로 죽어 버렸어요. 그리고 한 손녀는 학교 잘 다니고 있었는데 초등학교 때 고만 걷지를 못하는 거예요. 온갖 수술을 다해도 소용이 없어 낫지 못하고 겨우 대학을 나오긴 했어요. 나는 히로시마 원폭 이야길 가족들에게 입도 뻥긋 안 하고 살아왔어요. 그런데 손녀들이 아프니 맘속에 한 50%는 찝찝한 거예요. 지금 일본 후쿠시마 방사능 문제가 자꾸 나오니까 우리 아들이 이 문제를 어찌 생각할지……."  
   

 
우리는 우리 자신인 동시에 얼마나 수많은 인간이 되어야만 할까? 얼마나 많은 인간이 되어야 이 세상의 모든 슬픔과 불안과 고뇌에 대해 부끄러움 없이 입을 열 수 있을 것 같니? 그런데 다행히 로르카는 이렇게 말했어. 우리 인간에게 없는 능력은 아무런 고뇌와 걱정이 없는 고요한 호수로 이끌리는 것이라고. 그러니 우리 인간에겐 다른 능력은 있을지 몰라. 고뇌와 걱정에 사로잡힌 영혼의 눈물을 닦아주는 능력 같은 것 말이야.

 
우는 아이를 집으로 데려다 주고 돌아와서 나는 다시 로르카의 <인상과 풍경>을 읽어.

   
  '상상 속에 펼쳐진 붉은 길을 따라 산발한 여인들이 지나간다. 그네들은 우리를 향해 미소 짓는다. 검은 입속에서 그녀들은 우리의 영혼이 되고, 우리는 그 영혼을 따라 부으며 언제 깨질지 모르는 꿈속의 평화로움을 만끽하고 미소 짓는다. 그녀들은 우리의 영혼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 뒤 우리는 돌, 꽃, 우리의 생각으로 변할 것이다.'/font>  
   

  빗소리가 아픈 이 밤. 너도 내 영혼이 되어 줘. 언제나 불 밝히고 있는 별. 고철 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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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상과 풍경> 

  페데리코 가르시아로르카 지음 / 엄지영 옮김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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