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동쪽별.
안녕이라고 하기엔 힘이 좀 부친 한 주였어. 아이고, 겨우 살아났다야. 라고 말하면서 네 등을 치고 싶어. 왜 우리 삶엔 크고 작은 일들이 끝없이 일어나는 걸까? 나에게도 4월은 잔인한 달이었어. 하루하루가 눈물 나게 아까운데도 어서 빨리 5월이 와라 5월 어서 와라 하면서 지냈던 것 같아.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해줄까? 사람이 왜 잠을 잔다고 생각하니? 왜 우리에게 밤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니? 보르헤스가 말하길 모든 일이 하루 동안에 닥쳐온다면 제아무리 대단한 의지와 체력의 소유자라도 감당치 못하니 하룻밤 자고 내일 겪으라고 밤이 있단 거지. 자고 나서 내일 또 무슨 일인가를 겪으라고. 동의해? 난 동의해. 그래도 좀 쓸쓸해. 잠자기도 아까 와서 뛰어다니던 때도 있고 자다가도 깨서 웃을 만한 좋은 일이 있을 때도 있었으니까 말이야.
한밤에 글을 쓸 때 가끔 베란다에 서서 잠든 아파트를 바라보기도 해. 무슨 대단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고 졸리니까. 그때 칼비노의 『보이지 않는 도시 』의 한 구절이 매번 생각나. 이런 내용이야. 들어볼래? 어떤 도시는 반쪽짜리 두 구역으로 나뉘어 있어. 하나는 롤러코스터와 회전목마가 있는 곳이야. 또 다른 하나는 돌과 대리석, 학교와 병원 공공건물이 있는 곳이야. 하나는 영속하는 곳이고 하나는 일시적인 곳이야. 그런데 영속하는 곳이 어느 쪽인 것 같니? 정신없이 오르락내리락하는 롤러코스터가 있는 쪽이야. 돌과 대리석과 학교와 병원들은 늘 옮겨 다니고. 그래서 그 도시의 사람들은 롤러코스터를 타면서 언제나 되어야 완전한 삶을 살게 될까 자꾸만 날짜를 헤아려 본대. 나는 우리 도시의 삶도 이와 비슷하다고 생각해. 추락과 상승을 반복하면서 자꾸만 다른 쪽을 보게 돼. 저기엔 돌과 대리석의 안전한 곳이 있겠지, 나도 언젠간 그곳으로 가겠지 하면서. 하지만 우리가 안전하고 완전하다고 생각하는 그곳은 슬프게도 늘 옮겨 다닌단다.
그래도 너에게 편지를 쓰는 이 밤은 정겹구나. 그러고 보니 4월에 좋은 일이 딱 하나 있었다면 그건 너의 영화 개봉 아니었을까? 나도 곧 볼 예정이야. 지난번 편지에서 어떤 유형의 영화감독으로 규정되고 범주화되는 게 싫다고 했지? 그래 우리가 흔히 하는 말 중에 전형적인 사람이란 표현이 있지. 전형적인 엘리트니 전형적인 속물이니 전형적인 화가 나, 전형적인 에로 감독이니. 그런데 난 살면서 전형적인 것은 없다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어. 우리가 누군가를 전형적인 사람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우리에게 사려 깊음과 상상력이 없어서일 거야. 나는 전형적인 것 같아 보이는 사람들이 보이는 균열. 어긋남에 언제나 마음이 가. 전형성을 깨는 것, 낯설게 하는 것, 어리둥절하게 하는 것, 거기서 매혹이 탄생하는 것 아니겠니? 그런 점에서 나는 네가 어떤 감독인지 모른단다. 오직 네 입으로만 듣겠어. 네가 말하고 싶었으나 하지 못한 언어로 듣겠어. 그게 인어의 언어라도 좋고 바람 소리라도 좋고 개구리 소리라도 좋단다.
내가 오늘 이야기할 제인 에어는 전형적으로 착한 애처럼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할 거야. 하지만 난 반대야. 제인 에어에 대해선 내가 지난주에 한겨레 칼럼을 써버렸기 때문에 잠깐 인용할게.
![](http://blog.aladin.co.kr/fckeditor/editor/Images/quote_start.gif) |
|
|
|
영화 「제인 에어」가 개봉되었다. 이 영화의 원작인 샬럿 브론테의 제인 에어는 내겐 많은 점에서 흥미롭지만 우선 한 가지만 말해보고 싶다. 제인 에어는 가난한 고아로 외삼촌이 돌아가신 외숙모 집에 얹혀산다. 이 어린 식객은 비참할 정도로 구박을 받는다. 그때 그녀 맘 속의 자의식은 ‘내가 설사 똑같이 군식구에다가 친척이 없었다 해도 더 명랑하며 예쁜 장난꾸러기였다면 내 존재가 더 너그러이 받아들여졌을 것이다.’라는 것이다. 그녀의 귀에 울리는 성경 구절은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이다. 아무 생각 없이 가혹한 상처를 입히는 어른들 앞에서, 고작 하는 말이라곤 몰랐다거나 혹은 그런 꼴을 당해도 싸다거나 그럴만해서 그랬다거나 다 네 탓이라고 하는 어른들 앞에서 어린 아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겠는가? 그녀를 맡아 교육할 로우드 기숙학교의 교장은 ‘제인 에어 너는 착한 아이니?’라고 묻는다. 그런데 그녀는 이 질문에 ‘네’하고 대답할 수 없다. 속으론 나름대로 좋고 선량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자신과 관계 맺는 온 세계가 정반대되는 의견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너는 못되고 유별난 아이다는 말을 줄기차게 듣는 어린 아이가 어떻게 선량하고 강하게 살 수 있을까? 이것은 어린 아이만의 문제가 아니다. 회사나 집에서 당신은 불편하고 이상한 사람이다. 짐만 된다는 말을 듣고 사는 사람이 어떻게 힘을 낼 수 있을까? 그저 고요히 눈에 띄지 않기나 바라는 것 말고 뭘 더 꿈꿀 수 있을까?
제인에게 크게 영향을 미친 사람은 기숙학교에서 만난 친구 헬렌이다. 헬렌의 고통에 대한 태도는 이런 것들이다. 나만 느끼면 되는 고통이라면 참고 견디는 편이 훨씬 낫다. 견디도록 운명 지워진 것을 참을 수 없다고 말하는 건 나약하고 어리석은 짓이다. 죄지은 사람과 죄는 명확히 구별 지어야 한다. 죄지은 사람은 용서할 수 있지만 죄는 질색이므로 불의 때문에 자신이 완전히 짓밟히는 법은 없어야 한다.
제인은 그것만으로 충분치 않다고 생각한다. 만약 다른 사람들이 날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렇게 사느니 죽는 게 낫고 외로움과 부당하게 미움받는 것 또한 참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에게도 많은 비슷한 경우가 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신을 위로할 줄 알아야 하겠지만, 그것만으론 충분치 않다. 타인에게서 오는 격려와 신뢰, 다정한 마음이 한 사람이 무사히 뒤틀어지지 않고 살아가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런데 제인 에어의 진정한 관심사는 자기 자신에게 벌어진 일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만큼 세계를 이해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강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기숙학교를 나온 다음에 가정교사로 들어간 손필드의 주인, 자신과 신분을 뛰어넘어 결혼할 예정이었던 로체스터가 다락방에 미친 아내가 있었음을 고백하는 순간 ‘나는 나 자신을 사랑해, 외로우면 외로울수록, 오점이 없으면 없을수록 친구가 없으면 없을수록 나 자신을 사랑해’라고 말하고 떠난다. 자신에겐 오점이 없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 나로선, 힘 없는 자의 내면에서 튀어나오는 도저히 불가능해 보이는 사랑과 용기를 숭배하는 나로선 이 장면부턴 제인 에어에게 답답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
|
|
|
![](http://blog.aladdin.co.kr/fckeditor/editor/Images/quote_end.gif) |
라고 썼어. 그래, 제인 에어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부분은 제인 에어와 로체스터의 사랑 장면이 아니야. 로우드에서 제인 에어가 비참하게 벌을 받아. 아무도 제인 에어에게 말을 걸지 말라는 명령을 학생들이 받았을 때 그녀들은 어떻게 했지?
![](http://blog.aladin.co.kr/fckeditor/editor/Images/quote_start.gif) |
|
|
|
한 여학생이 내 곁을 지나갔다. 지나갈 때 그녀가 눈을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얼마나 묘한 빛이 그 눈 속에 깃들여 있었던가? 새로운 감정이 얼마나 나를 든든하게 받쳐 주었던가! 그것은 마치 순교자나 영웅이 노예나 희생자 곁을 지나가면서 힘을 불어넣어 준 것 같았다. 헬렌 번스가 스미스 선생님에게 바느질에 대해 대수롭지 않은 질문을 하고 중요하지도 않은 질문을 했다며 꾸지람을 들은 다음 자기 자리로 돌아가면서 내게 미소를 보냈다. 얼마나 굉장한 미소였던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 그러나 그 순간 헬렌 번스는 팔에 복장 불량 배지를 달고 있었다. 불과 한 시간 전에 나는 그녀가 연습 문제를 베끼면서 팔을 얼룩지게 만들었다는 이유로 스캐처드 선생님으로부터 다음 날 아침 빵과 물만 먹으라는 벌을 선고받는 소리를 들었다. 인간의 불완전한 본성이란 원래 이런 것이다. 그런 오점들은 가장 깨끗한 별의 표면에도 있는 법이다. 스캐처드 선생님 같은 사람의 눈에는 그런 사소한 결점만 보일 뿐 그 별의 찬란한 빛은 보이지 않는다.” |
|
|
|
![](http://blog.aladdin.co.kr/fckeditor/editor/Images/quote_end.gif) |
한 인간의 작은 우정의 몸짓이 한 인간에게 용기를 주고 수치와 불명예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이 장면이 나는 참 좋단다.
그리고 반대로 제인 에어에서 가장 싫어하는 부분은 로체스터가 자신에게 미친 아내가 있음을 고백할 때 제인 에어가 한 말들이야. ‘나는 나 자신을 사랑해, 외로우면 외로울수록, 오점이 없으면 없을수록 친구가 없으면 없을수록 나 자신을 사랑해.’ 이에 대한 나의 느낌은 칼럼에서 쓴 그대로야. 제인 에어에겐 원칙과 법을 지키는 것이 중요했었어. 그런데 책의 뒷부분에서 또 다른 원칙과 법을 지키려는 세인트 존을 만났을 때 그녀는 결국 그것이 자기의 길이 아님을 알게 되는데다가 어린 시절 자신이 한 인간의 미소 하나로 살아났다는 진실에 대한 배신이나 다름없어. 홀로 강해지려는 사람들이 알아야 할 게 있다고 생각해. 자기가 강해지는 것은 혼자 힘으론 그 누구도 어림없다는 걸. 언제나 사람만이 희망이야.
제인 에어에겐 이 시절 우리에게도 큰 의미가 있는 과제가 적어도 두 가지 정도 있었어. 하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영혼을 지키고 당신이 편견으로 보는 것보단 더 나은 내가 있음을 자기부터 믿고 그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 길을 찾아야 하는 것. 그리고 사랑의 동등성 문제, 그리고 가정교사와 부유한 주인의 사랑이 어떻게 동등성을 확보해나갈 수 있는가? 안타깝게도 그건 로체스터의 실명 그리고 제인 에어가 뜻밖에 거액의 유산 상속자(서인도 제도에서 흘러들어온 돈임을 밝혀)가 되는 방식으로 해결되어 버리고 말았어.
가장 명확하지 않은 부분은 바로 이거야. 로체스터는 제인에게 자신에겐 비밀이 있다고 말하지. 그 비밀은 소설이 끝나도록 그에게 서인도 제도 출신의 미친 부인이 있단 것 말곤 밝혀진 게 없어. 로체스터는 대체 서인도 제도에서 어떻게 살았단 말인가? 그가 진심으로 후회하고 새 사람이 되고 싶게 만든 그 일은 대체 무엇인가? 손필드 저택 3층에 묶여 있는 그 미친 여인의 정체는 무엇이란 말인가? 그녀는 왜 서인도 제도에서 영국 중부의 손필드까지 와서 결국은 황야를 향해 크게 울부짖고 투신자살하고 마는가? 그녀가 무슨 대단한 잘못을 저지른 위험인물이기에 로체스터는 사적으로 그녀를 감금하고 짐승 취급을 하는가? 로체스터는 그녀에게 받은 결혼 지참금 3만 파운드로 세계각지를 유랑하며 여유 있게 살았던 것은 아닌가? 로체스터의 그녀에 대한 잔인함은 어디서 나오는가? 소설에선 그녀는 단지 정신 병력이 있는 가문의 내력대로 미쳐버린 알코올 중독의 탐욕스럽고 음탕한 여자로만 설명되고 말아.
그런데 다락방의 미친 여자에 대해 궁금해하는 또 다른 소설가가 한 세기가 지나고 나서 등장해. 미친 다락방의 여자와도 닮은, 자주 술에 취해 으르렁댔던 서인도제도 출신 소설가 진 리스. 도미니카 출신이었던 그녀는 영국령 서인도 제도에서 벌어진 일들을 알고 있었던 거야. 그녀는 다락방의 미친 여자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란 제목을 달았어. 사르가소 바다가 어디 있는 줄 아니? 바하마 제도 동쪽, 유럽과 서인도 제도를 가르는 바다. 그 바다를 로체스터는 건넜고 그의 첫 번째 아내는 건너지 못한 것인가?
뒷이야기는 다음 주에 할게.
곧 여름이 왔으면 좋겠어.
---------------------------------------------------------------------
제인 에어 세트 - 전3권
샬럿 브론테 지음, 류경희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1년 4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