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쪽별. 너의 마지막 질문은 네가 나를 베아트리체와 이브의 혼합물로 여긴다는 것으로 받아들일게. 베아트리체 대 이브가 어느 정도 비율로 섞여야 황금 비율이 나오는진 알 수 없지만 어떻게 섞든 꽤 맘에 들 것 같아. 온갖 비율로 실험을 해보고 싶은걸. 솟구치는 실험정신을 억누르기 어려워.
그래, 우리에겐 베아트리체가 있지. 어느 어두운 숲 속을 하염없이 걷던 단테에게 지옥과 연옥 천국을 보여주던, 진실한 사랑의 눈물을 흘리며 언제고 순수함을 일깨워 주던 베아트리체가 있지. 나는 언젠가 단테의 신곡에 대해 꽤 심각하게 고민해 본 적이 있어. 아마 천안함 사건 때였을 거야. 자식의 죽음을 앞두고 한 어미만이 눈물을 흘리지 않는 것을 보았어. 나는 그녀가 왜 울지 않을까 아니면 울지 못하는 것일까 궁금했었어. 나는 그 이유를 곧 알게 되었어. 울지 않는 어미는 "내가 자꾸 울면 우리 아들이 좋은데 갈 수가 없다고 사람들이 하기에 나는 더는 눈물을 보이지 않기로 했어요."라고 말했어. 장례식이 시작되자 많은 사람들이 죽어버린 사람들에게 축원했어. 천국에 가서 이 세상일은 모두 잊으라고. 그곳에서 아무 시름 걱정 없이 행복하게 살라고. 부디 건강히 지내라고. 나도 그 장례식을 보면서 많은 눈물을 흘렸어. 하지만, 천국이 어떤 곳일까, 죽어버린 사람은 천국에서 어느 순간에 우리에게 미소를 지을까도 궁금했어. 베아트리체가 단테에게 보여준 천국은 어떤 모습이었을까를 알려고 난 몇 날 며칠 신곡을 읽었어. 그런데 천국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곳이 아니었어. 천국에 올라간 사람들은 결코 우릴 잊지 않아. 우릴 늘 지켜보고 우릴 늘 생각해. 천국에 있는 사람들이 우리에게 품는 소망은 단 하나야. 우리가 뱃머리를 잘못 돌리면, 올바르지 못한 쪽으로 가면 뱃머리를 돌리길 원하는 거야. 이제까지와는 다른 움직임을 갖길 원하는 거야. 그것이 천국의 소망이었어. 그러니 천국에 누군가를 올려 보낸 우리에겐 지상을 천국의 방향으로 끌고 가는 것이 이 지상의 유일한 소망이어야만 해. 그것이 아직 지상에 있는 우리가 이제 지상에 없는 사람들의 소망을 이뤄주는 길일 거야.
동쪽별, 나는 오늘은 방사능비가 내리는 거리에 서 있었어. 그 옛날 단테가 길을 잃었던 그 중세의 숲보다 결코 덜 위험하다고 할 수는 없는 곳이 오늘날의 대도시일 거야. 하늘은 무채색이었어. 온 사물들에서 조심스러움이 뿜어져 나왔어. 인적이 드문 거리와 공원은 황량한 느낌마저 들었어. 빗속을 뚫고 알몸으로 뛰어다니며 자유와 솟구치는 희열을 맛봤던 채털리 부인도 오늘은 조심할 것이고 세상 만물에 도전적인 시선을 던질 줄 아는 이 지상의 고혹적인 이브들도 그 방종한 시선을 잠시 거둘 거야. 나는 퇴근하다가 한 아이가 우는 것을 보았어. 방사능 빗속 벤치에 앉지도 못한 채 아파트 사이 가장 어두운 코너에서 우는 아이를 보자 나는 말을 걸고 싶었어. "아이야 왜 울고 있니?" 그 아이는 이렇게 대답하는 듯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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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내가 울고 싶은 것은 울고 싶기 때문이다.
마지막 벤치에 앉은 아이들이 울듯이
왜냐하면 나는 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한 시인이, 한 이파리가 아니기 때문에.
하지만 나는 다른 쪽 사물들을 헤매고 맴도는 상처받은 하나의 맥박이니까.
(로르카 -에덴 호수의 2중주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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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익숙한 도시의 불빛, 집으로 돌아가는 자가용들의 헤드라이트, 아이돌 가수들의 노래와 젖은 운동화. 오뎅바의 연기. 우는 아이. 오늘 내겐 이것들이 모두 한 몸 안에 연결된 상처받는 맥박들 같아 보였어. 나는 오늘 어쩐지 한 사람으로서 슬픈 것 같지 않고 뛰는 맥박의 하나로 아프고 슬픈 것 같았어. 정혜윤이기 때문에 슬픈 게 아니고 그냥 인간이기 때문에 슬픈 것 같았어. 이건 어쩌면 내가 최근에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투척된 원자탄에 피폭된 채 아직도 살아 있는 사람들을 인터뷰하고 있어서 일지도 모르겠어. 방사능비는 뻣뻣한 강철 눈물 같이 느껴졌어. 그 강철 눈물은 이미 오래전 누군가의 심장을 찔렀고 이제 또 찌르러 길을 나서는 것 같았어. 그러니 이제 무사히 집으로 돌아간 우리는 빗물을 닦으며 샤워를 하며 감사의 기도를 드리며 우리가 오늘 두려워했던 만큼 관심을 가져야 할 사람들이 있다는 걸 생각하는 밤이었으면 좋겠어. 하지만 방사능 눈물에 대해선 다음번에 더 자세히 이야기할게.
혹시 로르카의 <인상과 풍경> 읽어봤니? <인상과 풍경>은 서른여덟에 소련 스파이란 누명을 쓰고 총살당한 비운의 스페인 시인 로르카가 그라나다 알바이신 일대를 여행하며 쓴 책이야. 난 그라나다에 갈 때 이 비할 데 없이 아름다운 책을 들고 갔어. 그리고 알함브라 궁전에서, 알바이신 거리에서 줄곧 그 책을 읽었어.
알함브라 궁전, 결코 그 뜻을 해독할 수 없는 신비로운 문자들과 관능적인 나무 넝쿨을 닮은 시들과 별빛을 닮은 눈동자를 가진 춤추는 소녀들의 발 같은 한숨들과 온갖 전설적이고 슬픈 사랑 이야기로 둘러싸인 그 곳, 사이프러스 나무 아래서 천상의 소리 같은 분수 소릴 들으며 인상과 풍경을 읽을 때 멀리 알바이신 거리엔 뚱뚱한 여인이 빨래를 널고 소녀들은 손을 잡고 오르막길을 오르고 있었어. 지붕들 위로 한 번쯤은 울릴 것 같았던 종들은 결코 울리지 않았고 아직 익지 않은 오렌지 나무들 사이로 그리 시원하지 않은 한 줄기 바람이 불었을 때 나는 로르카의 <인상과 풍경>이 그리는 세계를 본 듯했어. 그것은 도시의 숨겨진 영혼 같은 거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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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우리 마음속에서 열정이 분출되기 시작하면 환상은 이 세상에 영혼의 불을 지펴 작은 것들을 크게, 추한 것들을 고결하게 한다. 마치 보름달의 빛이 들판으로 번져나갈 때처럼 말이다. 이처럼 우리 영혼 속에는 지상에 존재하는 것들을 압도하는 무언가가 있다.
대부분은, 그것은 마음 깊은 곳에 잠들어 있다. 그러나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진 것들이 다시금 떠올라 마음이 어지러워지면 그것은 긴 잠에서 깨어나 마음속에 떠돌던 수많은 풍경을 한데 모으고 우리 삶의 일부로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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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로르카의 <인상과 풍경>을 통해 한 번 본 것을 삶의 일부로 만드는 방법을 배운 것도 같아. <인상과 풍경>에서 로르카가 포착한 것은 도시의 풍경에 맴도는 불안한 기운, 가엾은 사람들의 고뇌가 배여 있는 풍경. 깊이를 알 수 없는 고뇌와 좌절감이지만 로르카가 진정으로 두렵게 느낀 것은 죽음도 삶도 아니었어. 죽어가는 예수 옆에 무관심하게 서 있는 사도들의 표정에서 우리가 잔인함을 느끼듯 로르카 역시 고통과 슬픔을 무심히 봄, 그 뼛속 깊은 무관심에서 잔인함을 맛보고 두려움을 느꼈어. 어떻게 해야 우리가 매일매일 똑같은 표정을 지으며, 온갖 걸 무심히 보아 넘기는 사람이 되지 않을 수 있을까? 난 로르카의 이 말을 잊고 싶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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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우리의 영혼을 세상 사물에 따라 부으면서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어른거리는 영혼의 그림자를 보고 또 마법과도 같은 우리의 감성에 형식을 부여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세상을 이해하게 된다. 예를 들어 우리는 인적이 드문 쓸쓸한 광장에서 그곳을 지나쳐 간 수많은 옛 영혼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사물이 지닌 모든 색조를 느낄 수 있으려면, 유일한 동시에 수많은 존재가 되어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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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내가 방사능비를 보면서 강철 눈물 같다고 느낄 때 나는 어떤 영혼의 눈물을 봤던 것일까? 이 비를 두려워하는 어떤 사람의 영혼을 본 것인가? 내가 인터뷰한 한 할머니는 히로시마에서 피폭되어 합천으로 돌아가 한 남자와 결혼해 아이를 낳았고 지금은 일흔 살인데 심장병, 파킨슨씨병 같은 온갖 질병에 시달리고 있어. 나는 자식들이 건강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할머니가 이렇게 말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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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들은 건강해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손녀가 둘이 있는데 한 손녀가 어려서 고만 백혈병으로 죽어 버렸어요. 그리고 한 손녀는 학교 잘 다니고 있었는데 초등학교 때 고만 걷지를 못하는 거예요. 온갖 수술을 다해도 소용이 없어 낫지 못하고 겨우 대학을 나오긴 했어요. 나는 히로시마 원폭 이야길 가족들에게 입도 뻥긋 안 하고 살아왔어요. 그런데 손녀들이 아프니 맘속에 한 50%는 찝찝한 거예요. 지금 일본 후쿠시마 방사능 문제가 자꾸 나오니까 우리 아들이 이 문제를 어찌 생각할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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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우리 자신인 동시에 얼마나 수많은 인간이 되어야만 할까? 얼마나 많은 인간이 되어야 이 세상의 모든 슬픔과 불안과 고뇌에 대해 부끄러움 없이 입을 열 수 있을 것 같니? 그런데 다행히 로르카는 이렇게 말했어. 우리 인간에게 없는 능력은 아무런 고뇌와 걱정이 없는 고요한 호수로 이끌리는 것이라고. 그러니 우리 인간에겐 다른 능력은 있을지 몰라. 고뇌와 걱정에 사로잡힌 영혼의 눈물을 닦아주는 능력 같은 것 말이야.
우는 아이를 집으로 데려다 주고 돌아와서 나는 다시 로르카의 <인상과 풍경>을 읽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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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 속에 펼쳐진 붉은 길을 따라 산발한 여인들이 지나간다. 그네들은 우리를 향해 미소 짓는다. 검은 입속에서 그녀들은 우리의 영혼이 되고, 우리는 그 영혼을 따라 부으며 언제 깨질지 모르는 꿈속의 평화로움을 만끽하고 미소 짓는다. 그녀들은 우리의 영혼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 뒤 우리는 돌, 꽃, 우리의 생각으로 변할 것이다.'/fon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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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소리가 아픈 이 밤. 너도 내 영혼이 되어 줘. 언제나 불 밝히고 있는 별. 고철 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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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과 풍경>
페데리코 가르시아로르카 지음 / 엄지영 옮김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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