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투는 나의 힘

  
민규동(영화 감독) 

 

 안녕, 커피진주.  

 나의 편지는 변함없이 이어지는 널 향한 나의 고백이야. 오늘은 오래전부터 들려주고 싶었던 얘기를 할래. 신림동 하숙집에서 벌어졌던 살인의 추억이야. 20 년 전, 너의 자취방에서 백 미터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하숙하고 살 때의 일이야. 어느 날 하굣길에 보니, 주인집 막내 아이가 울고 있고, 집 앞에 경찰들이 수북한 거야. 집이 잠겨 있어 한참 두리번거리던 경찰이 결국 유리창을 깨고 안으로 들어갔어. 문이 열리는데, 세상에! 하숙집 주인아줌마가 피가 흥건한 마루 벽에 기댄 채 죽어 있는 거야. 그게 끝이 아니었어. 자세히 보니, 또 한 명의 시체가 있었어. 침대 위에 목이 졸린 채, 그리고, 온몸이 난자된 채로 뻗어 있는 하숙집 주인아저씨였어. 아이가 비명을 질러댔어. 난 얼어붙어 비명도 못 질렀어. 난생처음 시신을 본 거였거든. 돌이켜보니 아주머니가 그날 아침 방에 들어와 갑자기 그달치 하숙비를 돌려줬었어. 난 잠결에 일주일 먼저 돈을 냈었나 하고 다시 잠들었었지. 유서에 이렇게 적혀 있었어. “아빠의 지긋지긋한 폭력으로부터 아이들 셋을 구해내기 위해 먼저 데려간다…….” 그래, 이 사건은 그 예쁘고 인자했던 아줌마의 계획 살인이었어. 난 서서히 그 범죄를 재구성해냈어. 하숙생 스무 명을 꾸리며 바쁘게 살아가던 아줌마의 사교성. 직업이 없었던 아저씨의 히스테리. 밤마다 들려오던 비명. 단순한 부부싸움 이상의 증거였던 아줌마 얼굴의 멍 자국. 늘 주눅이 들어 있던 아이들. 뒤늦게 돌아보니 아저씨는 알코올 중독에 시도 때도 없이 폭력을 휘두르는 가정폭력의 주범이었어. 애들이 보는 앞에서도 식칼로 아줌마를 위협하곤 했대. 어딜 그렇게 돌아다니느냐, 바람피우는 거 아니냐고 하면서 죽여버리겠다고 말이야. 세 아이를 키우던 그 아줌마, 얼마나 힘들었으면, 잠든 사이에 남편 목을 조르고, 또 칼로 헤집고, 자신은 손목을 긋고, 또 목을 매달았을까. 시간이 흘러 이 무시무시한 목격의 기억도 옅어졌지만, 열등감과 의심에 치를 떨며, 무고한 아줌마를 향해 폭력을 휘두르던 그 아저씨 얼굴의 깊게 패인 주름은 아직도 잊지 못해. 질투에 의해 잠식된 영혼, 이것을 ‘오셀로 증후군’이라고 부른다는 걸 나중에 알게 됐어. 오셀로가 대체 어땠기에?

 기독교로 개화한 북아프리카 이슬람계 흑인인 오셀로는 베네치아의 장군이었어. 당시 빅토리아 시대의 분위기로는 쉽지 않은 위치야. 많은 사람들이 오셀로를 칭찬했지만 이런 방식이었어. “피부는 검지만 마음은 더 희다.” 희다는 것은 선한 것, 검다는 것은 열등하다는 베네치아의 무의식적인 인종차별이 횡횡하던 시절이었거든. 물론 400년이 지난 후에 태어난 나조차도, 오슨 웰스든, 앤서니 홉킨스든, 플래시도 도밍고든, 검고 우락부락하게 분장한 오셀로 역의 배우들을 볼 때마다 심각한 부조화의 위압감을 느꼈으니까, 그땐 얼마나 심했겠니. 그는 이런 선입견을 가뿐히 뛰어넘는 훌륭한 장수였을 뿐만 아니라 성품, 언변, 기질 등 모든 면에서 완벽한 평가를 받는 남자였어. 게다가 모름지기 영웅답게 베네치아의 비너스로 칭송되는 데스데모나라는 젊은 백인 여자와 인종, 나이, 신분을 초월한 결혼에 성공해.

 이런 사람이 그 불명예스러운 의처증 증후군 타이틀을 얻게 될 거라고 상상하기는 어려워. 그렇지? 하지만, 잔인한 셰익스피어는 바로 그런 완벽하다는 이유로 그에게 냉혹한 운명의 저주를 퍼부어. 어릴 적 뉴스에서 남산의 한 아파트 붕괴 장면을 본 적 있어. 한 번의 폭발로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고층 건물의 허무한 인생과 건물 구조를 알면 핵심적인 라인만 파괴해도 전체를 무너뜨릴 수 있다는 공공연한 비밀을 목격하면서 난 속으로 이렇게 물어봤었어. 사람도 마찬가지일까? 완벽한 도덕적 성곽도 단숨에 무너져 내릴 수 있는 걸까? 셰익스피어 아저씨는 이렇게 대답해. 인간은 언제든 정반대의 세계로 돌변할 수 있다. 선이 악으로, 기독교가 이슬람교로, 인간이 짐승으로. 우리는 이 불확정성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말이야. 물론 거꾸로 보면, 좀도둑에서 궁극의 희생자로 변한 『레 미제라블』의 장발장 같은 존재도 인정하는 것일 테고, 그렇다면 여전히 인간에게 구원의 여지가 있는 것일 테지만.

 혹시 오셀로라는 게임 아니? 가로세로 여덟 칸의 판 위에 두 명이 각각 검은색과 흰색 말을 번갈아 놓으면서 진행하는 보드게임이야. 양쪽에 말을 놓아 상대를 가두면 순간 그 상대의 색깔이 내 색깔로 파르르 깔딱 반전돼 버리는 흑백 논리의 최고봉 게임이야. 이 게임의 명명은 오셀로의 그 이분법적 세계관을 빗댄 게 틀림없어. 사랑은 불처럼 타올라야 하고, 배신은 즉각 징벌해야 한다는, 맹렬한 열정이 돌멩이처럼 쉽게 굳어버리는 위험한 마음 말이야.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순식간에 죄를 인정하고, 또 순식간에 자살해 버리는 오셀로의 선택은 그에게 아껴둔 마지막 동정심마저 앗아가 버려. 게다가 “난 증오 때문에 죽인 것이 아니라 오직 명예를 위해서였소.”라니. 못 됐어. 엘리엇의 말처럼, 마지막 순간까지 오셀로는 억울하게 죽은 아내를 다 잊어버리고, 심미적 제스처로 자신을 위로하면서, 실제 자기랑은 딴판인 잘난 영웅 역할을 연기하고 있단 말이지! 그렇게 도덕적 책임을 회피하는 자기중심적인 비열한 인간이라니. 그 사람이 이토록 최고의 약점을 소유한 최악의 현실 도피형 인간일지 누가 알았겠니.

   
  온 세계를 돌아다녔지만, 진정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터득한 이는 한 명도 못 보았네.  
   

 물론 오셀로가 콤플렉스를 완전히 지우지 못한 영웅이라는 점에서 스스로 몰락의 운명을 자초한 면도 있지만, 여기에는 이아고라는 희대의 사기꾼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해. 뿌리 깊은 악의와 불가사의한 교활함을 갖춘 이아고는 승진에 뒤처진 것에 발끈하지만, 실은 오셀로의 타고난 고결함과 완벽함 자체가 그냥 싫었던 사람이야. 즉, ‘나를 추하게 만드는 상대의 일상적인 아름다움’마저도 시기하는 진정한 질투의 화신이랄까. 이 뼛속 깊은 질투심 덕에 이아고는 치명타를 날리는 귓속말 공격의 달인으로 거듭나. 그러면서도 상대에겐 선량한 친구, 정직한 충고자, 이타적인 중재자로 남는 놀라운 기교를 발휘해. 그중 최고는 음모를 짜내는 순발력이야. 난 타고난 음모론 지지자야. 역사상 거대했던 그 어떤 사건도 불온한 저의를 가진 또 다른 주체의 음모 없인 불가능하다고 믿을 정도로 말이야. 이아고는 이 음모의 기술과 흥분을 즐기는 우리의 예술적 본능을 제대로 자극해. 왜냐면, 이아고 스스로도 그런 ‘즐거운 일을 도모하면 시간이 짧게 느껴진다’는 음모의 오락성에 중독되어 있기 때문이야.

 빅토리아 시대의 오셀로는 아무래도 미지의 땅에서 온 신비한 인물이었고, 겉으로만 기독교로 개화된 ‘백인과는 다른’ 사람이었으니까, 이아고는 그에게 시비를 걸고야 말겠다고 심한 충동을 느꼈을 거야. 오바마를 시험대에 올려놓고 그의 밑바닥 본성을 엿보고 싶어하는 일군의 마음처럼 말이야. 이아고처럼 뻔뻔함과 개성의 힘을 추종하는 마키아벨리 유형의 인간은 오셀로나 데스데모나가 섬기는 충성, 신뢰, 유대 같은 봉건적 개념은 견디지 못하거든. 자살 직전의 파우스트를 단숨에 유혹해내는 메피소트펠레스처럼 이아고는 몇 마디의 요설로 오셀로를 지옥에 빠뜨려.

 근데 따지고 보면, 이아고가 오셀로한테 한 거짓말 중 진짜 거짓말은 얼마나 될까. 데스데모나가 자신의 욕구를 위해 아버지를 배신했듯, 남편도 배신할 수도 있다는 그의 날카로운 직관은 꽤 설득력 있어. “난 그에게 내 생각을 말했을 뿐, 다른 어떤 것도 말하지 않았어. 그는 스스로 그것들을 그럴듯한 것으로, 또 진실한 것으로 만들어버렸어.” 이런 이아고의 변명은 누군가를 중상하기 위해서 굳이 노골적인 거짓말이 필요 없다는 교훈을 주기도 해. 다들 아는 사실에다가 특별한 시각의 해석 틀을 암시하거나 의심을 증폭시키기에 충분할 정도로 사건을 재구성하면 된다고 말이야.

   
  그녀는 제가 겪은 위험 때문에 절 사랑했고, 전 그녀가 그 위험을 동정했기 때문에 그녀를 사랑했던 것입니다.  
   

 이아고가 이 비극의 전적인 범인이라는 혐의를 벗게 되는 건 바로 이런 오셀로의 말 때문이야. 이 완벽한 연인의 성격 속에 이미 비극의 씨앗이 있으니까. 데스데모나는 용맹한 그의 모험담에 반했고, 그는 그녀의 동정심에 반했어. 즉, 둘의 사랑은 단번에 무너질 수도 있는 허구의 신화 위에 서 있었던 거야. 게다가 셰익스피어의 위대한 사랑은 본질적으로 한계가 없어. 그런 무한한 사랑엔 늘 비극의 가능성이 숨겨져 있는 법. 게다가 데스데모나를 특별하게 만드는 그녀의 동정심에도 한계가 없어. 그녀가 죽는 장면은 정말이지 답답해서 힘들어. 조금만이라도 더 이기적으로 자신을 변호했더라면 어땠을까. 오필리어, 코딜리어도 마찬가지지만, 왜 셰익스피어의 여인들은, 다들 순결하고, 선하고, 우연히 불행과 악에 휩쓸려 버릴까.

 데스데모나가 물어. “세상을 준다고 남편을 배신하겠느냐?”
 에밀리아가 대답해. “당연히. 수고의 대가로 세상의 주인이 된 다음에 얼른 바로 잡으면 되니까.”

 나는 확신해. 많은 사람들이 이아고처럼 살고 있다고. 그리고 그의 아내 에밀리아처럼 현실적이라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데렐라의 언니들’이고, ‘팥쥐의 친척들’이니까, ‘영웅과 그의 완벽한 연인’ 근처에도 못 가는 삶을 사니까. 그래서일까. 우리의 팔이 이아고 쪽으로 굽는 게 자연스러워 보이기도 해. 조금 증거가 부족하지만, 어쩌면 동성애자 이아고가 오셀로에게 반해서 관심이라도 끌어보려고 데스데모나랑 경쟁한 걸지도 모른다고 그를 두둔할 명분을 찾게 되기도 해.

 「은밀한 유혹」이라는 영화를 본 적 있니? 멋진 부자 로버트 레드포드가 가난한 데미 무어 부부에게 하룻밤의 거래를 제안해. 백만 달러를 줄 테니 아내를 하룻밤 빌려달라고 하지. 부부의 인생을 바꿀 수 있는 큰 제안이기에 둘은 받아들여. 하지만, 아내는 그 신사에게 반하고, 남편은 극도의 질투에 시달려. 그토록 깊이 사랑한다고 여겼던 부부관계는 엉망진창이 되고 말아. 하룻밤의 질투라는 독약 때문에 말이야.

   
  “위험한 상상은 그 본질이 독약인데
맛이 고약한 줄 처음엔 거의 모르다가
약간씩 핏속으로 퍼지기 시작하면
유황불처럼 타는 거야. 그렇다고 했잖아.”
 
   

 여기, 재밌는 게 있어. 질투 앞에 놓인 인간의 딜레마는 남녀에 따라 조금 다르게 진화했다는 거야. 질투에 치를 떠는 순간, 남자는 아내를 죽이려 하고, 여자는 남편을 유혹한 상대 여자를 죽이려 들어. 죄의 역할 분담에서 여자가 유혹자로 좌표 지어진 전통 때문에 남자보다 여자들이 더 많은 혐의를 뒤집어쓰게 되는 거지. 실제로 많은 나라의 관습법이 간통한 아내를 살해하는 남편의 행위를 놓고, 그게 열정을 못 이겨 저지른 거라면 정당하다고 인정했었어. 반대로 여자가 질투나 버림받을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라이벌을 불구로 만들거나 살해하는 경우는 훨씬 적었어.

   
  나쁜 것을 보고 나쁜 것을 따라 하는 것이 아니라, 나쁜 것을 고칠 수 있는 지혜를 제게 주소서!  
   

  이 데스데모나의 말처럼 오히려 자신의 무능을 꾸짖고, 상대를 설득해 관계를 재구축할 수 있다는 희망으로 노력하는 경향이 많아. 물론 심할 경우, 이아손에게 배신당해 잔인하게 복수를 하는 메데이아의 신화처럼, 여자도 남자 못지않게 치명적인 독기를 품어댔지만…….

 이 새드 엔딩의 미녀와 야수 버전 말고도 정말 많은 작품이 있지만, 왜 셰익스피어는 뉴턴과 처칠을 뛰어넘는 위대한 영국인으로 칭송받을까, 새삼 궁금해져. 아무한테나 쉽게 호감을 주지 않는 마르크스와 엥겔스 아저씨들까지 반해버린 비결이 뭘까. 화려한 대사의 매력도 있지만, 어쩌면, 인물보다 늦게 도착하는 편지, 잠시 서로 뒤바뀐 쌍둥이, 독과 혼동된 술, 등등, 이 사소함들의 함수를 예술적 경지로 끌어올리는 능력 때문이라고 봐. 오셀로가 불륜을 입증할 수 있는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증거’를 요구하고, 이아고는 손수건을 제시해. 우린 우연히 떨어진 손수건 하나가 자신의 면적과 질량을 넘어 무한대로 초월된 음란함의 상징으로 확장되는 비극적 장관에 가슴을 졸이게 돼. 이 질투의 맹독성에 눈이 먼 한 흑인이 눈의 관찰에 포착된 사실을 진실의 유일한 기준으로 삼은 것에,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데스데모나의 영혼은 진실의 기준이 되지 못하는 것에 탄식하게 돼. 리어왕이 눈 먼 글로스터 백작에게 말했듯, “눈이 없어도 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볼 수 있네. 그대의 귀로 보게.”라고 누군가 오셀로에게 말해줬더라면, 유창한 수사와 표피적인 현상들로 딸의 사랑을 평가했던 리어의 뒤늦은 그 깨달음을 누군가 오셀로에게 선물했더라면, 기만적인 시각의 절대화가 가져온 이 비극은 생겨나지 않았을 텐데. 이런 탄식 속에 우린 ‘생각하는 주체’가 곧 ‘보는 주체’인 당대의 데카르트적 이성한테 날렸던 셰익스피어의 예리한 경고를 읽을 수 있어. 아, 그 아저씨의 매력 이야긴 그만 할래. 하면 할수록 내 눈이 초록색으로 변하니까.

  극장 안의 배우 대기실을 ‘그린 룸’이라고 부르는데, 그 이유가 뭔지 아니? 배우들이 워낙 시샘이 많은 탓일 수도 있겠지만, 난 ‘질투에 미친 눈’인 ‘green-eyed monster’라는 관용구로 살아남은 오셀로의 흔적이라고 봐. 이것은 질투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그 유명한 3막 3장의 이아고 대사 때문이야.

   
  오, 장군님, 질투심을 경계하십시오. 그것은 초록색 눈을 가진 괴물입니다……. 오, 상대를 사랑하면서도 끊임없이 의심하고, 의심하면서도 열렬히 사랑하는 자는 얼마나 저주스런 시간을 보내야 할까요!  
   

  질투는 그저 심리적 나약함의 문제일까. 결국, 레닌의 말처럼 “신뢰도 좋지만, 통제가 더 좋다.”라는 교훈이 맞는 걸까. “그렇지만, 질투에 빠진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거에요. 그들은 이유가 있어서 질투하는 것이 아니라……. 질투는 저절로 잉태되고 저절로 태어나는 괴물이거든요.” 정답처럼 들리는 이 에밀리아의 대사처럼 과연 질투는 치유될 수 없는 태생적 괴물인 걸까.

  진화심리학에선 질투를 적자생존의 메커니즘으로 생각해. 자기 유전자를 퍼트리려는 욕망이 ‘사랑’과 ‘질투’의 본질이라는 거지. 교미 전에 암컷 생식기에서 다른 정자들을 씻어내는 여러 수컷들의 정자 경쟁의 예도 있지만, 인간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거야. 사람의 정자엔 기다란 꼬리를 가진 거랑 돌돌 말린 꼬리를 가진 거, 두 가지가 있대. 기다란 애는 난자랑 수정하고, 말린 애는 자궁 속의 다른 정자를 껴안고 자폭한다는 거야. 재밌지? ‘사랑’이 수정하는 정자의 ‘공격’이라면, ‘질투’는 자살하는 정자의 ‘방어’라는 거야. 실제 통계도 놀라워. 오셀로 증후군 남자 환자들이 질투를 느끼는 대상을 조사해봤는데, 대부분 그들의 아내들이 그 질투의 대상과 관계를 맺고 있었대. 질투를 감지능력이라고 보자면, 나름대로 놀라운 방어 시스템인 셈이잖아! 

 이 관점에서 보면 질투는 '가치를 부여하는 관계에 대한 위협이 감지됐을 때, 그 대처 행위를 유도하는 상태'라고 정의할 수 있어. 이렇게 보면, 자기가 못 가진 걸 비교하면서 느끼는 시기(envy)는 분명히 다른 감정이야. 질투(jealousy)는 가진 걸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니까. 하지만, 사랑의 이면이라는 질투에 반드시 제3자의 대상이 있어야 하는 걸까? 누군가 그랬지. “사랑은 먼저 가혹한 괴로움이다.”라고 또, “사랑하는 자는 그 누구든 이미 죽어가고 있다.”라고. 플라톤이 『향연』에서 얘기한 것처럼, 너무나 갈망하지만, 절대로 그 대상과 하나가 될 수 없다는 애초의 한계에서 오는 존재론적 질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예를 들어, 널 시기한 적도 질투한 적도 없었지만, 실은 너와 하나가 될 수 없다는 이유로 늘 절망해온 나는 어찌해야 하는 걸까. 다시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를 펼치고 도를 닦아야 하는 걸까. 그저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라고. 아니면 기형도처럼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다가 검붉은 시 한 소절 토해내야 하는 걸까.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라고.

 ---------------------------------------------------------------------

 

   

  <오셀로>

   윌리엄 셰익스피어 / 강석주 옮김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9년 12월


댓글(3)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삽하나 2011-06-15 1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아. 질투란. 요새 노랫말로 정말 '들었다 놨다' 하는 묘한 기술이 있는 녀석인 것만은 확실합니다. ㅠ- ㅠ

황지혜 2011-06-16 0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정말 재미있게 읽었어요 'ㅁ'* 저도 오셀로보면서 복잡하고 이상한 생각을 많이 했는데 말이죠 ㅋ

앨리스 2011-10-07 1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영문과학생입니당. 과제하다가... 아 너무 재밌게 읽었습니다....^^
 

 

  나는 네가 잡아먹히는 걸 보고 싶지 않아.

  
정혜윤(CBS 라디오 프로듀서) 

 

 안녕 안녕 동쪽별!  

로저 애버트 아저씨 이야기 진짜 충격이다. 나도 그의 영화 평론집 <위대한 영화>를 읽었어. 그가 카사블랑카와 잉그리드 버그먼에 대해 쓴 글은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하는데 그새 그런 일을 겪었구나. 인간이 목소리를 잃는다는 건 어떤 걸까? 사실 말은 너무나 중요해. 갑자기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런 글이 생각나.

   
  말은 이로운 것과 해로운 것, 정의로운 것과 정의롭지 못한 것을 드러내는 데 쓰인다. 왜냐하면, 다른 동물들과 달리 인간만이 유일하게 선과 악, 정의와 불의의 지각 및 기타 도덕적인 감각을 가지며 바로 이러한 것들을 공유함으로써 가정과 도시를 만들기 때문이다.  
   

 로저 애버트 아저씨가 현대 과학이 가능하게 만든 최첨단 장비의 도움으로 자신의 의견들을 전달할 수 있게 되어서 천만다행이야. 하지만 다른 생각도 해볼 수 있어. 우리 시대엔 아무도 첨단 장비라고 생각하지 않는 라디오에 관한 이야기야. 남미에서 어떤 라디오는 목소리 없는 자들의 말을 전달하는 일을 했었어. 입이 있어서 말을 해도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 사람들의 상처받은 목소리를 전달하는 일을 라디오가 했단 말이야. 결국, 아무리 사소해 보이는 의견이라도 나눌 방법이 있다는 것은 한 인간이 존엄을 유지하는데 필수적인 일 일거야. 아무도 귀 기울여 주지 않는 사람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알아들으면 나도 어쩜 누군가에겐 최첨단 인간이 될 수 있는 거 아닐까?

 그런데 나에게 암만해도 병이 하나 생긴 것 같아. 네가 책 이야길 하면 나도 꼭 그 이야기를 따라 하고 싶거든. 꼭 너만 졸졸 따라다니는 장난꾸러기 메아리가 된 것 같아. 벌써 지난주만 해도 진 리스 이야긴 꺼내지도 못했는데 오늘은 또 타임머신 이야기가 하고 싶다. 이를테면 그렇다면 ‘너는 미래가 뭐라고 생각하니?’ 같은 질문들부터 '칼 세이건의 창백한 푸른 점 표지 사진을 보면 무슨 생각이 나니?' 같은 질문들이 머릿속에서 터져 나와. 게다가 신기한 머피의 법칙도 있어. 네가 읽은 책은 분명히 나도 가지고 있는데 읽으려고 찾으면 사라져버린다는 것. 그로부터 대략 일주일 뒤에 나타난다는 것. 지난번엔 유토피아가 감쪽같이 사라졌는데 이번에는 타임머신이 사라졌어. 지난주엔 떡볶이 먹고 기운 내서 썼는데 오늘은 먹을 거라곤 시든 양배추뿐이구나. 눈물이 난다.

 그래도 오늘은 기필코 진 리스 이야길 하고 넘어갈래. 진 리스는 어느 날 제인 에어를 읽고 심기가 불편했어. 그리고 로체스터의 부인 앙투아네트가 어떻게 미쳐 갔는지를 쓰기로 맘먹어. 그러니까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는 제인 에어의 전편에 해당해. 로체스터는 그녀가 미친 것이 집안의 유전이라고 하지만 진 리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대영 제국 식민지 주변부, 불행한 자들의 손실이 영리한 자들의 이익이 되어가는 세상에서, 같은 백인끼리도 서로를 이해관계로만 보는 탐욕과 시기심으로 가득한 땅에서, 백인일지라도 몰락한 백인의 딸이면 흰 바퀴벌레라고 불리는 세상에서 앙투아네트란 소녀는 오로지 단 한 가지만을 원해. 그것은 안정감이었어. 고립과 불안 속에 살던 앙투아네트의 아름다운 어머니는 앙투아네트의 동생을 화재로 잃고 나서 흑인들에게 몇 번이고 겁탈당하고 미쳐서 죽어가지. 앙투아네트는 로체스터와 결혼할 때 이렇게 물어봐.

   
  제게 마음의 평화를 주시겠어요?  
   

  로체스터는 평화와 행복과 안전을 약속하며 결혼을 했지만, 그의 속마음은 이런 것이었어.

   
  그녀는 내게 단지 이방인일 뿐이었다. 나와는 생각도 느낌도 다른 이방인.  
   

  로체스터가 앙투아네트를 바라보는 시선은 대영 제국이 식민지를 바라보는 시선 그대로였어. 아무 근거 없이 권위적이었고 미신에 가까운 의심에 가득 차 있었던 거야. 로체스터가 제발 나를 사랑해 달라고 말하는 앙투아네트에게 한 말이 무엇이었는지 아니?

   
  허영에 찬 어리석은 인간, 사랑하도록 만들어졌다고? 그렇다고 치자. 그러나 너는 어떤 연인도 갖지 못하게 돼. 나는 너를 원하지 않고 어떤 다른 사람을 만나게 될 기회는 없을 테니까.  
   

 한 치의 동정심도 연민도 없는 잔인한 마음이란 바로 이런 것이겠지. 그리곤 앙투아네트를 다락방으로 끌고 오는 거지. 앙투아네트에게도 유토피아는 있었어. 어린 시절 그녀가 살던 그곳. 다락방을 탈출해 가고 싶어 하던 곳이었어. 그렇지만, 그녀의 유토피아는 디스토피아에 둘러싸여 있었어. 그 디스토피아를 뚫고 나가지 못하는 한 결코 이를 수 없는 곳. 그것이 유토피아였어. 그녀는 미치기도 전에 미친 사람 취급당하다가 결국 죽고 말았어. 그녀가 정말로 미쳤는지는 소설 끝 부분까지도 확실치는 않아.

 이 글을 읽다가 모비딕의 이런 구절이 자꾸 생각났어.

   
  이 간담 서늘한 바다가 초록의 대지를 둘러싸고 있듯이 사람의 영혼 속에는 타히티 섬이 하나 있다. 평화와 기쁨으로 충만하나 어중간하게밖에 알지 못하는 인생에 대한 공포에 휩싸인…… 신이시여. 이들을 지켜주소서. 저 작은 섬에서 밀어내지 마소서. 결코, 돌아가지 못하나이다.  
   

  

  웰즈의 타임머신에 대해선 한 가지만 이야기하고 싶어. 80만 년 후의 미래에 인류는 꽃같이 예쁘고 인형같이 가냘픈 엘로이 족으로 진화했어. 그런데 그 엘로이 족들은 밤만 되면 벌벌 떨며 두려움에 휩싸여. 이유가 뭘까? 시간 여행자는 곧 무시무시한 비밀 하나를 알게 돼. 밤이 되면 도시 곳곳에 있는 우물에서 또 다른 종족, 흉측하게 생긴 종족인 몰록이 튀어나와 엘로이 족을 공격하고 먹어치우는 거야. 이 몰록은 노동을 하는 종족이고 엘로이 족처럼 인류의 후손이었어. 지상의 아름다운 종족인 엘로이, 지하의 흉측한 종족인 몰록. 낮의 종족인 엘로이, 밤의 종족인 몰록. 노동을 하지 않는 엘로이, 노동을 하는 몰록. 시간 여행자는 이 두 종족을 지켜보며 이렇게 결론을 내려. 엘로이 족이 몰록에게 잡아먹히는 이유는 인간 이기심에 대한 엄벌이다. 인간들이 수고롭게 일하는 다른 인간의 등 위에 올라타 있길 멈추지 않는다면 미래엔 필연적으로 이런 일이 벌어진다. 꽃을 던지고 노는 아름다운 엘로이 족에게 몰록은 행복한 날의 치명적인 한 떨기 불안이었어. 이런 생각을 해봐. 악덕 기업가들에게 티없이 행복한 날은 노동자들이 잠자코 가만히 일이나 하고 있을 때 아닐까? 웰즈가 미래의 모습을 통해 우리에게 던진 질문은 바로 이런 것이었겠지? 당신들, 미래에 밤잠 못 자고 잡아먹히지 않으려면 뭐 바꿔야 할 것 없소? 그 질문은 당시 빅토리아 시대 독자들을 심란하게 했을 테고 그리고 지금 우리 시대에 읽어도 그 심란함은 가시질 않는구나.

 너는 나의 미래. 나는 너의 미래가 되기로 다짐하고
 너와 함께 미래로 타임머신 타고 갔다가 네가 잡아먹히는 걸 보고 싶진 않아.

 ------------------------------------------------------------------------  

 

  <타임머신> 

   허버트 조지 웰즈 / 한동훈 옮김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1년 2월


댓글(1)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삽하나 2011-06-15 1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제목 부터 빵. 터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센스가 넘치셔요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민규동(영화 감독) 

 

 너의 편지를 받고 내가 달콤한 몽상가에서 우울한 현실주의자로 진화하고 있는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 봤어. 정답을 찾아내는 데는 시간이 좀 걸릴 거라고 봐.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해 보여. 네 말대로 유토피아는 완벽한 시스템의 도래에서 오는 게 아니라 그 마음을 품는 순간부터 시작되는 걸지 모른다는 사실. 그렇게 작은 마음들이 모이고 흩어지고 쌓이고 퇴적되다 보면, 그 지층 속에서 서서히 잉태된 거대한 꿈의 세포가 언젠가 지상 위로 모습을 드러낼 때가 있을 테니까. 그렇게 생각해 보니 나도 얼마 전 하나의 유토피아를 엿본 거 같아. 그 얘기를 해 줄게. 세계적인 영화 평론가로 유명한 로저 이버트라는 미국인이 오랜만에 공개 특강을 했어. 내가 그 사람 특강에 귀 기울일 이유는 없었어. 왜냐면 난 그 사람이 쓴 <위대한 영화>라는 두 권짜리 평론 책을 가지고 있는 게 전부이고, 평소에도 못난 영화 한 편이 잘난 평론 백 편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편이었으니까. 다만,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곤 완전 컴퓨터에 붙어사는지, 쉴 새 없이 영화 관련 글을 올리는 게, 참 신기하구나, 정말 열심히 사는 수다쟁이이구나, 하고 생각하는 정도였어. 막상 그의 특강을 열어 봤을 땐, 깜짝 놀랐어. 그는 먹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사람이었어. 대신 과장되게 웃고 있는 도널드덕의 캐리커처처럼 브이 자로 늘어진 턱을 지녔는데, 마치 하회탈 가면을 쓰고 있는 것 같았어. 뭘까, 하고 자세히 보다가 깜짝 놀랐어. 왜냐면, 놀랍게도 그건 가면이 아니고 그냥 진짜 얼굴이었던 거야. 잠시 후 난, 왜 그 사람이 24시간 컴퓨터 앞에 앉아 블로그나 트위터에다 쉴 새 없는 수다를 털어놓는지 알게 됐어. 로저는 컴퓨터의 목소리로 자신을 소개하더니, 부인과 친구 2명에게 준비한 원고를 읽게 했어. 들어 보니, 그는 갑상선 암에 걸려 심한 병치레를 했고, 그 과정에 경동맥이 3번이나 터져서 몇 번의 죽을 위기를 넘겼대. 그 얘길 하더니 너털웃음을 지으며, 한 가수에게 생명의 은혜를 빚졌다고 감사했어. 왜냐면 큰 병 아닌 줄 알고 퇴원 준비를 하는데, 그 가수 노래만 듣고 가야지 하다가, 노래 끝부분에 동맥이 터져서 바로 수술실로 실려 가는 바람에 기적적으로 살아났기 때문이야. 노래가 짧기라도 했다면 가는 길 차 안에서 죽었을 거라는 거지. 그 후로도 많은 수술 끝에 턱 뼈가 없어졌고, 어깨뼈를 추출해서 이식하는 바람에 제대로 못 걷게 됐어. 긴 투병 시간 후에 남은 건, 다물 수 없게 아래로 처진 입. 즉, 현실적으로는, 말을 할 수 없는 평론가가 되어 버린 거야. 장애인이 되자 사람들이 그를 피했어. 지나치게 배려하기 시작했어. 불쌍한 삶, 끝난 인생이라는 시선이 그를 옭아맸어. 그의 인생이 어떻게 됐을 거 같아? 수없이 많은 인생 역전의 영화를 봐 왔기 때문인지, 그 사람은 쉬이 좌절하지 않았어. 대신 자신만의 목소리를 찾아내기 시작했어. 새로운 시대의 소통 수단인 사이버 세계와 소셜 네트워크가 생겨나기 시작했거든. 어느 날, 애플 사에서 그 사람의 글이 바로 컴퓨터의 목소리로 변환되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줘. 느낌표와 물음표로 끝나는 말투의 뉘앙스 차이까지 반영된 최고의 프로그램을. 문제는 일상의 대화가 요구하는 적절한 스피드, 리액션의 타이밍, 이런 것들은 아무리 빠른 타이핑으로도 해결이 안 됐어. 게다가 그 목소리는 로저 이버트라는 사람의 감정을 담고 있지 않으니까, 아무래도 사람들은 그와의 대화에 곧 지루해 했어. 그러자, 그는 자신의 목소리를 부활시키기로 마음을 바꾸었어. 스코틀랜드의 한 회사가 그가 타이핑하는 글을 그의 목소리(에 가장 가까운 사운드)로 바꿔 주는 프로그램을 개발해. 그가 젊은 시절 출연했던 방송물에서 그 목소리의 파형을 찾아 복원을 시도한 거지. 잡음이 섞인 목소리의 한계에 부딪치자, 나중엔 「시민 케인」과 「카사블랑카」의 DVD에 남겼던 깨끗한 코멘터리 목소리의 원형으로 끝내 로저의 목소리를 재창조해 내. 그 참혹했던 좌절의 순간 그 사람은 자신에게 물어 봤었대. 말을 잃은 삶은 어떤 것일까. 이제 남은 미래는 어떤 것일까. 그의 턱없는 미소는 이제 새로운 언어로 대답해 줘. 자신은 말은 못하지만, 기술의 혁명으로 컴퓨터가 한 몸이 되어, 여전히 세상을 해석하고, 영화를 이해하고, 자신의 생각을 펼쳐 사람들과 공유하는 데는 아무런 장애를 갖고 있지 않다고. 자신의 꿈은 전혀 변하지 않았고, 그의 생이 다할 때까지 얘기하고 또 얘기할 것이라고.

 어쩌면 우리가 얼리 어댑터가 되면서까지 그토록 멋진 기계에 집착하는 건, 그 결과 디스토피아가 기다리고 있더라도 유토피아의 마음먹기를 그만둘 수 없는 그 이유 때문일 거야. 사실 문명의 폐해와 매혹이 늘 동시에 대등하게 맞서고 있어서 그것을 지지해야 할지 아닐지 혼돈스러워. 그래서 자칫 거시적인 세계의 흐름을 바라보면 절망에 젖을 수밖에 없지만, 이버트 아저씨의 경우 같은 미시적인 세계를 들여다보면 이미 펼쳐진 낙원의 작은 희망을 발견하게 되기도 해. 이렇게 내 사소한 유토피아가 평상적인 절망보다 더 큰 고통 속에서 피어나는 거라면, 즉, 나의 희망이나 의지를 온전하게 품은 내 인생의 유려한 흐름이 지나치게 막강한 장애물에 부딪친다면, 그래도 난 끝까지 버티어 봐야지, 그러다 보면 상상도 못했던 어떤 기계가 내게 새 삶을 선물해 줄지도 몰라, 라고 그 혼돈의 매력에 기댄 채 아슬아슬한 꿈을 꿔 보게 돼. 그래서 난, 공상 속에서 예비 자세를 취하고 있는 막연한 미래의 이미지를 현실로 성큼 앞당겨 선보여 주는 스티브 잡스 같은 창의적인 선구자들을 늘 찬양해. 난 그가 사라지면 울 거야. 그의 헐거운 티셔츠와 늘어진 청바지를 나의 신전에 모시고 그를 기억할 거야. 이렇게 내 신전에 모신 사람들이 적지 않아. 그들 대부분은 아름다운 상상력의 소유자들인데, 실은 그들은 미래를 과감히 꿈꿔 왔던 선조들의 전통을 그저 충실히 재현하고 있는 건지도 몰라. 예를 들면, 잠수함이 바다 속을 탐사하고, 인공위성이 지구 주위를 돌고, 사람들이 화면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유전자를 복제하는 것, 이런 게 다 재미를 표방한 소설 속 공상의 일부들이었고, 시간이 한참 흐른 후에야 신뢰를 얻게 된 엉뚱한 예언들이었으니까. 허버트 조지 웰스도 일찍이 세인들 사이에 굴러다니던 욕구들을 모아 타임머신이나 투명 인간 같은 신개념을 만들었어. 그래서 과학과 테크놀로지의 구원이 우리의 세계를 한계를 어디까지 확장시켜 줄 수 있는지, 그것으로 어떤 정화가 가능할지를 열심히 탐구했었어.

 아마 인류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큰 비현실적 열망의 순위를 정하자면, 단연 타임머신이 그 꼭대기 자리를 차지할 거라고 확신해. 그렇다면 우리에게 당장 타임머신이 주어진다면 어떻게 될까? 두 종류의 욕구가 부딪칠 거야. 하나는 미래를 보고 싶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과거를 고치고 싶다는 것. 진화를 비밀을 엿보고 싶은 마음과 역사를 뒤바꾸고 싶은 마음일 텐데, 너는 어때? 어디로 먼저 떠날 거 같아? 웰스가 소개한 우리의 주인공은 기계에 시동을 걸고 당장 미래로 달려가 봤어. 그것도 80만년 너머로. 그곳은 의외로 디스토피아였어. 충분한 시간이 주어졌어도 과학과 철학은 유토피아 건설에 실패했고, 오히려 패망한 인류는 밝은 세상의 유약한 종족과 어두운 세상의 포악한 종족으로 분화돼서 서로 잡아먹고 먹히는 원시적인 삶을 살고 있어. 그는 일주일 정도 머물면서 어찌 세상이 이렇게 됐을까 하고 부지런히 그 신세계를 해석해. 그곳 악몽에서 겨우 탈출해서 현재로 돌아온 웰스가 기다리던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미래는 잿빛 세상이야. 안타깝게도 그가 예언자로서 던진 신탁은 어두운 묵시록이란 말이지. 하지만 영원한 시간대의 어느 순간에는 밝고 아름다운 순간이 있지 않을까? 아마 이런 생각으로 그는 다시 타임머신을 타고 미래로 떠나 버렸고, 끝내 돌아오지 않았어. 어쩌면, 정착하고 싶은 어떤 미래를 찾았는지도 모르지. 다행히도 말이야.

 순간 이동에서 타임 트랩까지, 웰스가 발명한 '시간 여행자'라는 이 매혹적인 콘셉트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부지런한 예술적 진화를 거쳤어. 「백 투 더 퓨처」를 넘어 「메트릭스」 최근 「소스코드」까지 해도 해도 끝나지 않는 새로운 이야기로 다시 태어나고 있어. 나도 한때는 스티븐 호킹의 『시간의 역사』와 칼 세이건의 『창백한 푸른 점』을 펼쳐 놓고 진지하게 이 가능성을 염탐해 본 적이 있어. 왜냐면, 거의 백 년 전 이미, 아인슈타인 아저씨가 엄청난 질량을 가진 물체가 공간을 휘게 하고 시간마저 느리게 흐르도록 한다는 일반 상대성 이론을 발표했고, 곧바로 영국 천문학자 에딩턴이 별빛이 태양의 중력에 의해 진짜로 휘는 것을 관측했었으니까. 상상의 가능태가 100여 년에 걸쳐 과학적 증명을 거듭하고 있고, 공상으로만 치부하기엔 어느새 성큼 다가온 잠재적 근 미래의 의사 체험만큼 짜릿한 게임이 없었거든. 또 어떤 면에선, 감당 못할 정도의 방대한 의미 덩어리인 인간의 일상사도, 죄다 기술할 수도 없는 무한대의 사연이 담긴 인류의 역사도 우주적 관점에서 보면 기껏해야 우주 찌꺼기 먼지가 찰나에 흩날리는 순간만 못한 것이라는 생각이 때론 훌륭한 진통제로 날 달래 줬거든. 말하자면, 마음으로 타임머신에 올라타기만 해도 이 혹독한 하루하루의 삶이 다채로운 몽상의 편린으로 흐트러지는 마법을 경험했었어. 물론 언젠가부터 그런 마약도 효력이 다 해버렸지만…….

 내가 끝내 풀지 못한 건 평행 이론의 역학이야. 간단히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얻지 못했어. 현재 내가 타임머신을 타고 미래로 가. 그럼 나의 실종으로 인해 난리가 나겠지. 그 현실은 예정된 미래와 달리 나의 부재에 바탕을 둔 새로운 미래가 펼쳐 질 거야. 한편, 미래로 날아간 난 부족한 미래 지식으로 인해 온갖 모험을 다 치르겠지. 또한 과거의 비밀들을 들춰냄으로써 많은 파장을 일으키며 그 미래의 현실을 마구 바꿔 놓을 거야. 그렇다면, 내가 사라진 후의 그 미래와 내가 넘어온 이 미래, 이 두 시간대가 과연 같은 모양으로 만나게 될까? 그게 아니라, 현재도 존재하고, 따로 미래도 존재한다면, 시간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 걸까? 현재의 난 나대로 살고 있고, 미래의 난 또 나대로 살고 있다니. 그건, 분해할 수 있는 가장 짧은 시간 단위의 결들이 무한대로 존재한다는 얘기잖아! 그럼, 나도 무한대가 되는 거고.

 어쨌든, 타임머신은 존재 불가능하거나, 혹은 미래 어느 시점에서도 아직 발명되지 못한 게 분명해. 만약 그게 탄생했다면, 누군가는 지금 현재로 돌아와서 마음에 안 드는 미래를 조정하기 위해 뭔가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을 게 뻔하니까. 로봇의 지배에 대항하는 혁명 전사의 탄생 자체를 막기 위해 과거로 터미네이터를 보냈던 그 미래의 못된 시도처럼 말이야. 그래도 난 타임머신은 존재한다고 믿어. 좀 다른 종류이긴 하지만. 왜냐면, 아인슈타인이든 잡스든, 어쩌면 인간 뇌가 허용해 주는 개인용 타임머신으로 비밀리에 휘어진 시공간을 오가며 미지에의 여행을 하는 사람인지도 모르니까. 그 타임머신은 장애물을 뛰어넘으려는 욕구와 인류의 공리 추구가 다수의 행복으로 이어질 거라는 희망의 입자로 구성된 특수 장비일테고. 동양적 표현으로는 점쟁이의 촉수 같은 걸지도 모르고.

 혹시 너도 점을 보니? 여자들은 점보기를 많이 즐기는 거 같던데, 난 한 번도 본 적 없어. 왠지 영화의 엔딩을 알고 극장에 들어서는 기분이 될 거 같아서. 혹은 오이디푸스나 숲 속의 잠자는 공주처럼 불행한 미래를 알고 있기 때문에 미리 피하려고 무진장 애쓰지만, 결국 그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무서운 예언의 역설을 마주하기 싫은 것도 있고. 영화 「마터스」에서는 해탈한 순교자의 눈에서 미래를 엿본 자가 취하는 선택이 자살 밖에 없음을 보여줘. 뭘 봤는지는 알려 주지도 않으면서, 애초에 알려고 하지 말라는 준엄한 경고였는데, 무척 섬뜩했어. 얼마 전 한 아나운서가 죽고 싶다고 뇌까렸어. 며칠 지나 그녀가 정말 죽을 지 아무도 몰랐어. 알았다면 누군가 그녀의 운명에 어떻게든 끼어들었을까. 타임머신이 있었더라도 결국 아무리 위로할 수 없었고, 죽음도 막지 못할 운명이었을까. 이렇게 생각해. 미래를 아는 것과 미래를 꿈꾸는 것, 둘은 다른 이야기라고.

   
  인간만이 사랑을 가진 자이기에
자기가 품었던 꿈이 다른 사람의 손으로
자기가 불렀던 노래가 다른 사람의 입술로
자기가 걸었던 길이 다른 사람의 길로
자기의 사랑마저 다른 사람의 팔로 성취되고
자기가 뿌렸던 씨를 다른 사람들이
따게 하도록 사람들은 죽음까지도 불사한다.
인간만이 내일을 위해 사는 것이다.
 
   

 한 때 초현실주의자였다가 아내의 영향으로 공산주의자가 되었던 루이 아라공은 <미래의 노래>라는 시에서 ‘살고 살리는 것 중에서 인간만이 미래를 생각해 낸다’라고 이야기했어. ‘인간만이 자기의 그림자를 내려다보며 멀리 전방을 내다보는 한 그루의 나무’라고 예찬했어. 그의 말처럼 미래를 생각하면 나는 금세 취해. 미래는 내 술잔이고 내 애인이니까.

 내가 책을 읽고 환상에 젖어 온갖 과학적 시뮬레이션으로 미래가 무슨 뜻인지 헤집어 보다가도 결국 도달하는 결론은 이거야. 네가 바로 나의 미래야. 인류가 꿈꾸는 미래는 너한테서부터 시작해. 새로운 세계는 너에게 담겨 있어. 그래, 난 너를 더 자세히 마주하고 싶어.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여자는 남자의 혼을 장식하는 채색이다
여자는 남자를 활기 있게 해주는 떠들썩하고 우렁찬 소리이다
여자가 없으면 남자는 거칠어 질 뿐
나무 열매나 열매 없는 핵에 불과하다
그 입에서는 거친 들바람이 나오고
그 인생은 엉망으로 헝클어지고 황폐해 져
그것마저 자기의 손을 때려 부셔 버린다.

나는 그대에게 말한다. 남자는 여자를 위해
태어나고 사랑을 위해 태어나는 것이라고
낡은 세계의 모든 것이 바뀔 것이다
처음에는 생이 다음에는 죽음이 바뀔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것이 분배될 것이다
하얀 방도 피투성이의 입맞춤도
그리하여 부부들과 우리들 세상의 봄이
오렌지 꽃처럼 지상에 흩어져 깔릴 것이다
 
   

 ……아, 실은 나도 너의 미래이고 싶어.

 ------------------------------------------------------------------------  

 

                    

 

   <타임머신> 

   허버트 조지 웰즈 지음 / 한동훈 옮김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1년 2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린 모든 것을 갖지 못했다고 슬퍼하면 안 돼

  
정혜윤(CBS 라디오 프로듀서) 

 

 안녕 동쪽별, 오늘 덥지 않았니? 머리 아픈 건 좀 어떤지 궁금해. 넌 유토피아 이야기도 아주 슬프게 썼더구나. 혁명에도 꿈에도 변신에도 상처받은 사람 같아 보여. 어쨌든 난 머리카락을 아주 짧게 잘랐어. 머리통이 알 속으로 다시 들어가려는 병아리 같다고나 할까? 어쨌든 난 이번엔 기쁘게 써보고 싶어. 내가 기쁘면 너도 기뻐할 수 있다는 걸 아이 같은 믿음 하나로.

 네 글을 읽고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를 다시 읽으려고 집안을 뒤졌지만 결국 찾지 못했어. 그리곤 피곤하고 허기가 져서 포기하고 떡볶이만 한 냄비 먹었어. 배가 불러서 공벌레처럼 굴러다녀도 기분 좋다. 나는 토머스 모어 하면 헨리 8세가 생각나. 토머스 모어가 천일의 앤으로 유명한 헨리 8세 시절의 사람이니까. 나는 토머스 모어와 헨리 8세가 아직 사이가 좋았을 때 그 둘이 지붕 꼭대기로 올라가 템스강을 바라보았다던 런던의 햄프턴 코트에 갔던 게 기억나. 햄프턴 코트의 정원엔 미로가 있어. 그 정원의 미로에선 누구도 길을 잃지 않고 누구든 금방 출구를 찾고 사랑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다시 만나지. 그러나 현실의 미로에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음에 대해 (현실에선 한 번 길을 잃은 자는 계속 잃을 수도 있음에 대해) 토머스 모어는 알고 있었고 그래서 유토피아를 썼을 거라고 생각하면 역시 오늘 밤 배가 불러서 하는 헛소리에 불과할까? 그래도 좋아. 오늘은 누구든 자신을 위로하는 글을 썼으면 좋겠어. 오늘은 누구든 자신의 유토피아, 이상향은 어떤 모습일까 상상하며 글을 써봤으면 좋겠어. 내가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에서 언제고 즐겁게 회상하는 말은 일하고 일 외의 시간에 각자 흩어져 자신이 좋아하는 어떤 것을 하며 시간을 보낸다는 거야. 그런데 나에겐 이 말은 낮엔 일하고 밤엔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며 보낸다는 걸로 변형되었어. 내겐 그게 유토피아란다. 나는 밤의 시간을 사랑해.

 언젠가 밤에 시를 쓰는 할머니들을 인터뷰하고 글을 써본 적이 있어. 할머니들은 낮엔 밭일하고 설거지를 마치고 밤엔 안경을 코에 걸치고 시를 쓰고 그 시를 큰 소리로 읽고 있었어. 여든 살 할머니들이 말이야. 그 밤의 시간은 낮의 시간을 바꿔 놓았어. 할머니들의 표현을 빌자면 시를 쓰기 전에는 그저 ‘그것이 그것이지 뭐’였는데 이젠 ‘왜 그것은 그것인가?’로 바뀐 거지. 무관심이 관심으로 하찮아 보이는 것들이 탄복할 대상으로 바뀌는 순간이 있지. 우리의 관심과 시선은, 우리의 눈과 마음은 그토록 놀라운 거야. 이런 점에서 우리에게 마음이 있다는 건 축복이야. 그 할머니들이 인생이 기쁘다고 할 때 그 기쁨은 밤의 시간에서 출발해. 랑시에르란 철학자는 낮에는 빵을 위해 혹독한 노동을 하고 밤에는 사유와 시에 자신의 또 다른 노동을 바치는 노동자를 침입자라고 불러. 그는 어떤 침입자일까? 생각하고 질문을 던지고 글을 쓰는 일은 많이 배운 자들의 몫이란 상식. 다른 인간이 되려고 노력하는 것은 한낱 치기와 몽상, 철없음에 지나지 않는 것이란 상식, 당장 눈앞에 득이 되지 않는 일은 할 필요가 없다는 지루한 상식을 침입한 것 아니었을까? 플라톤은 국가에서 자신들의 작업 이외에 어떤 것도 할 수 있는 시간이 없는 철의 종족인 장인들의 질서와 공동체에 전념할 수 있는 금의 종족들, 통치하는 사람들의 질서를 구분해. 우리 정도 평등의 열매를 맛본 사람들은 플라톤의 이 말이 얼마나 말이 되지 않는지 금방 알 거야. 침입자들은 이런 분할을 거부해 버리지. 우리는 오로지 화폐로만 교환되는 존재가 아님을 자기 자리에서 증명해내는 것, 그것이 침입이고 내겐 밤의 기쁨이야. 아무도 내게 요구하지 않지만 내가 내게 요구하는 것을 하는 시간이 내겐 밤의 시간이야. 그리고 이렇게 자기 자리에 서서 자기를 증명하는 문제는 슬프게도 관객이 한 명도 없을지라도 엄청나게 중요해. 우리 시대엔 너무나 저속한 구분과 편견에서 비롯되는 숨 막힌 일들이 많기 때문이야. 자갈치 시장 아줌마가 카뮈의 이방인을 읽는다고 하면 동물원의 펭귄이 적도 지방의 앵무새와 노는 걸 보는 것처럼 보지 않을까? 타인이 나에 대해 상상하지 않음이, 뻔한 상식적인 상상만 함이 조금이라도 달리 살아 보려는 순간의 우리를 얼마나 힘 빠지게 하는지 우린 이제 알고 있지 않니? 우리가 타인을 내 편견대로만 본다면 그들도 우리처럼 괴롭고 답답할 거야. 진정한 상상력이란 기발함이나 엉뚱함이 아니야 타인을 깊게 헤아리는 것이야. 우리 시대의 사람들은 끝없이 상상력과 창의력을 발휘하란 요구를 받지. 하지만, 타인의 마음속으로 뛰어들지 못하는 사람에게 진정한 상상력은 나올 수 없다고 나는 믿어.

 그런데 맘속에 이상향, (혹은 이상적인 자기 모습)을 갖는다는 것은 아주 바람직하지만, 한가지 조심해야 해. 마치 현실은 아무것도 아니고 내 마음은 저기 어디 딴 데, 다른 별에 있다는 듯, 현실은 과거 어느 때보다도 절망적이란 듯, 이런 마음으로만 현실을 대하다 보면 결국은 피로와 냉소와 무관심, 원통함과 피해 의식, 질투와 과대망상에 빠질 수 있어.

 우린 종종 뭔가 대단히 중요하고 위대한 일을 하고 싶기도 하고 역사에 길이 남을 일을 하고 싶기도 하고 완벽하게 행복해지고 싶기도 하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인정과 사랑을 받고 싶어하기도 하지. 그러나 꿈의 사소한 한 조각이라도 시작해 볼 수 있는 곳은 내 마음속이 아니라면 단 한 곳, 지금 여기밖에 없어. 지금 여기서 누군가와 함께. 단 한 명이라 할지라도. 설사 우리가 지구 밖으로 이사 간다고 해도 변함없는 출발점은 여기야.

 자신이 생각하는 바람직한 모습을 어떻게 현실과 만나게 할 수 있을까? 이런 대화가 가능한 곳이 작지만 소중한 유토피아 아닐까? 그러니 유토피아의 조각들은 곳곳에 숨어 있는 것 아닐까? 모든 사람은 어떤 별의 조각, 어떤 꿈의 조각이야. 이건 문학적인 비유가 아니라 과학적으로도 별을 만든 그 먼지가 우리도 만들었거든. 우린 전부를 갖지 못한다고 해서 슬퍼하면 안 돼. 유토피아가 아니라 유토피아적인 것이 더 좋아. 이상적인 것이 이상주의자보다 좋은 것처럼 말이야. 낙관적인 것이 낙관주의자보다 좋은 것처럼 말이야.

 진짜 몽상가는 오로지 신비로움만 바라보는 사람이야. 그런데 너는 내가 알기로 현실을 보지. 현실을 겪어내지. 현실에 순응하지 않지. 맘껏 괴로워해도 변명하지 않지. 부끄러워해도 오로지 남의 눈에 괜찮은 사람으로 보이려고 기만적인 핑계를 대지 않지. 핑계를 대느니 좌절을 받아들이지. 네 실패 때문에 남에게 김빠지는 충고를 늘어놓지 않지. 진짜로 자주 앓지. 편두통, 허리 통증, 몸살 또 뭐였지? 골다공증이었던가? 하여간 그러니 너는 가련한 몽상가가 아니야. 굳이 말하자면 너는 정직한 현실주의자가 아닐까?

 추신 - 그런데 지난주에 말한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는 실은 네게 편질 썼지만, 다시 지웠어. 다음 주에 보낼게. 이유는 간단해. 디스토피아 이야기이기 때문이기도 해. 엄밀히 말하면 디스토피아에 둘러싸인 유토피아. 하지만, 그 이야긴 다음에.

 ------------------------------------------------------------------------  

 

  <유토피아> 

   토머스 모어 / 류경희 옮김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8년 10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낭만파 몽상가들의 꿈

  
민규동(영화감독) 

 

 안녕, 커피진주.

   그토록 바라던 봄이 찾아왔건만, 암울한 현실에 빼앗긴 마음의 들판에는 봄이 안 오는 법인지, 우울함이 가시질 않네. 지구촌의 풍경은 진화의 여러 국면 중 여전히 겨울로 느껴지거든.

   요즘, 영국의 그래피티 작가인 뱅크시의 팬 사이트에서는 한국 사회의 기이한 어느 현상에 대해 마구 질문들이 쏟아지고 있어. 얼마 전, 애국이라는 자신의 신념에 일치의 흔들림도 없는 한 검사가 G20 홍보 포스터에 쥐를 그렸다가 잡힌 사람에게 ‘우리 국민과 아이들로부터 청사초롱과 번영의 꿈을 빼앗고 강탈한 죄’로 징역 10개월을 구형했거든. 낙서의 죄에 그 정도 형벌이 합당하다면, 나머지 무수한 파렴치한 죄들에겐 대체 어느 정도의 형벌을 줘야 하는 걸까. 그런 글로벌한 개그콘서트를 연출함으로써 국제적 망신과 함께 국격에 큰 허물을 입힌 그 검사에게는 어떤 형벌이 적당한 걸까. 그런데 검사에게 꾸지람을 들은 이 예술가의 최후진술이 뭔지 알아? “…전 이제 아무것도 안 하겠습니다.” 이 냉소와 두려움과 저항과 전향이 동시에 느껴지는 묘한 말 속에는 공포를 통해 전체주의의 천국을 꿈꾸는 한 국가와 당신들의 천국과는 다른 신세계를 꿈꾼다고 대항하는 한 예술가의 집요한 전투가 엿보였어. 이 꿈의 차이는 인류가 사회를 형성한 이후 벌여온 끝없는 이데올로기 전쟁의 전형적인 양상이야. 그 예술가가 변함없이 건재하길 기원하지만, 그 마지막 씁쓸한 탄식 속엔, 올곧게 품은 개인의 이상 따윈 안중에 없는 무서운 현실의 패악이 뼈저리게 느껴져. 맞아. 우리가 어떤 세상에 살고 있니! 허무의 극치로 우리를 몰아대는 정치인들의 배신과 비열한 폭력의 퍼포먼스들. 수십억, 수백억, 끝없는 돈의 비리들. 어버이날 목매 자살하는 부모들. 두 아이와 함께 베란다 너머로, 다리 너머로, 지하철 철로로 뛰어드는 가난한 엄마들. 부모를 패고, 불사르고, 파묻는 자식들. 입시에 짓눌린 학생들의 자살. 암 발생률, 자살률, 교통사고율, 성폭행률, …율,…율, 불행지수의 세계 정상을 달리는 이 암울한 통계의 나라. 이 잿빛 세상을 뭐라 부를 수 있을까, 이렇듯 영화를 압도하는 현실, 그야말로 천국의 대극점에 존재하는 세계, 지옥이 아닐까?

   너도 알겠지만, 최근에 묘한 대비가 되는 판결이 있었어. 여중생을 성폭행하고 죽여 물탱크에 숨겨놨던 잔혹한 범죄자에게 무기징역이라는 합법적 판단이 내려졌고, 저 멀리 파키스탄에선 테러리스트의 수장이라고 불리던 은둔자가 실시간 동영상 감상의 전쟁 게임 속에 초법적으로 처형됐어. 어떤 게 맞는 판결일까. 왜 뻔한 선과 악의 대립, 그리고 오답일 수도 있는 주관적인 징벌이 변함없이 반복되는 걸까. 인간에게 법이란 무엇일까. 무엇이 최선의 행복이고, 어떤 게 다수를 위한 공리일까. 과연 인간을 위한 절대적인 시스템이란 게 존재하는 걸까, 오랜만에 명상에 잠겨 질문해 봤어. 아예 이런 고민 자체가 불필요한 세상은 없을까? 아, 그런 세상 있다면, 그날이 오면… 그렇게 혁명을 꿈꾸며 낭만파 몽상가로 살았던 20대 시절의 꿈을 되짚어 봤어. 그래, 그땐 우리, 정말 아름다운 꿈을 꾸었었는데.

   플라톤이 2500년 전에 <국가론>를 통해 훌륭한 철학자가 지배하는 새 세상의 비전을 꿈꿨듯이, 16세기 영국인 토머스 모어도 어느 날 명상에 잠겨 나처럼 질문했을 거야. 이 지옥 같은 현실의 저 반대 대극점에 있는 세계는 어떤 곳일까, 하고 말이야.

   모어는 당시 매일 좀도둑들을 수십 명씩 처형하는 상황을 비판했어. 부자들은 도둑질을 없애려면 도둑들을 죄다 잡아 죽여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모어는 굶어 죽으나 도둑질하다 잡혀 죽으나 마찬가지라면 더더욱 도둑들이 많아질 수밖에 없지 않으냐고 되묻고, 왜 보통 사람들이 도둑이 될 수밖에 없는지를 따졌어. 인구의 상위 1%가 전 국토의 99%를 소유하는 빈부격차의 현황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었어. 모어는 소수가 엄청난 재산을 소유하는 현실이 있는 한, 도둑은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어. 그러면서 사유재산이 없는 세계를 상상한 거지. 누구나 똑같이 일하고, 필요한 물건은 언제나 공동창고에서 필요한 만큼 가져다 쓰는 곳. 도둑질도 사기도 살인도 일어날 턱이 없는 곳 말이야.

   그렇게 모어는 불멸의 아이콘을 만들어냈어. 이른바 “유토피아”를 찾아낸 거야. 그가 꿈꿔본 세상은 이런 곳이야.

   평일 하루에 총 6시간을 일해. 오전에 3시간, 점심 먹고 2시간 휴식, 오후에 3시간 더 일하고 저녁 먹고, 8시에 잠들고 8시간 잠자. 나머지 시간은 자유로운 여가 활동 시간이야. 하지만, 전국민이 일하기 때문에 생필품은 늘 넘쳐 부족한 게 없어. 그래서 재산을 축적하려 애쓰지 않아. 살아있는 어떤 생명체든 결핍에 대한 두려움이 없으면 결코 탐욕을 부리지 않는 법이니까. 병원은 늘 열려 있고 탁아소가 완벽해. 빈손으로도 어디든 여행할 수 있어. 모든 게 평등하게 분배돼서 부자와 거지가 없어. 인생을 즐기는 일, 즉, 쾌락이 최고의 목표이고, 거꾸로 건강한 것 자체가 최고의 쾌락인 곳이야. 안락사도 허용되고 평생교육도 보장돼. 부당하게 취한 재산을 안전하게 지키려고, 또 값싸게 노동력을 착취하려고 온갖 속임수와 편법을 생각해내는 집단이 존재하지 않아. 원하는 건 뭐든 사람들과 교환할 수 있으니까, 열등감과 박탈감이 없고, 결국 가난이라는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아. 호화로운 옷차림도 없고, 다들 똑같은 옷을 입는 것에 불만이 없어. 보석으로 화려하게 꾸민 장식들은 노예나 범죄자들에게 채워지는 수치스러운 상징이니까. 재산이나 지위에 매달리지 않고 욕망의 수레바퀴에 깔려 허덕이지 않아. 이름하여 돈이 없는 곳이야. 명랑함, 마음의 평화, 근심 걱정으로부터의 자유보다 더 큰 재산은 없다는 확신에 찬 곳. 돈이 사라졌기 때문에, 일상적인 징벌로는 막을 수 없는 온갖 유형의 범죄가 사라진 곳. 두려움, 긴장감, 과도한 업무, 불면의 밤에 대해서도 작별 인사를 한 곳.

   그래, 이곳이 바로 유토피아야. 그리스어의 ‘없는(ou-)’이랑 ‘장소(toppos)’를 결합해서 만든 말. 곧, ‘그 어디에도 없는 곳’이니까 비현실적이고 실현 불가능하다는 뜻이고, 어떻게 보면, 인간의 가장 고귀한 꿈이 실현돼서 행복을 방해하는 모든 게 제거되고, 욕망과 그 성취 사이에 그 어떤 긴장과 대립도 존재하지 않는 이상적인 곳이란 뜻이야.

   사실 인류는 늘 현실 너머의 피안을 꿈꿔왔어. 꿀과 포도주가 흐르고 성과 노동에서 해방된 무한 쾌락의 환락 향인 코카인부터, 거기에 도덕적 절제가 첨가된 아르카디아, 중국의 3황5제 시대 같은 목가적인 자연 상태의 황금시대, 에덴동산 같은 지상낙원, 요한계시록에서 언급한 예수 재림 후 지상에서 펼쳐지는 천년왕국 밀레니엄, 도교의 무릉도원, 불교의 극락정토, 네버랜드, 환타지아, 신세계, 파라다이스, 율도국, 과학기술로 세운 기독교 나라인 베이컨의 <새 아틀란티스>,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에서 소로우의 <월든>의 모험까지. 모어는 우리가 끊임없이 욕망해온 바람직한 사회상을 ‘유토피아’라는 멋진 단어 하나로 통합해버리는 솜씨를 발휘했는데, 베이컨의 주장처럼 어떻게 하면 그런 사회를 만들 수 있는지는 얘기하지 못했어. 사실 우리의 관심사는 ‘무엇을’보다 ‘어떻게’이잖아?

   진보에 대한 모어의 이 낙관주의는 ‘공산주의’라는 인류 최고의 영감을 후대에 진하게 남겼고, ‘어떻게’를 깊이 사유하던 프랑스 사회주의자들은 이것을 실천에 옮겨봤어. ‘코뮌’이라는 공동체 건설의 실험은 실패로 끝났었지만, 이것은 마르크스와 엥겔스 아저씨에게도 큰 영감을 주었고, 레닌이나 모택동, 카스트로는 목숨을 걸고 인류 최초의 유토피아를 향한 집단 모험극에 도전했었어. 이상 실현을 향한 그 프로메테우스적 모험의 결과가 유토피아에 가까우냐면, 거기엔 누구도 동의할 수 없을 거야. 하지만, 나라 곳곳이 어떤 체제를 취했든, 우리가 앞으로 진전 중이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어. 왜냐면, 현실 속에 남아 있는 부조리와 불평등은 언제든 새로운 메시아적 열망을 부활시킬 거니까.  

 마르크스의 생각처럼 공평한 조건에 인간을 놓아두면 사리분별에 맞게 살아갈 거라는 순박한 전제는 실패했어. 그렇다면, 인간의 자율성이 과연 신뢰할 만한 것이 못 될까? 유토피아가 정녕 몽상에 불과하단 것일까. 그래서, 혹시 인간을 완벽하게 통제 해버리면 유토피아가 가능하지 않을까 라고 더 큰 꿈을 꾼 사람들도 있어.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 제5막에서 미란다가 외쳐.

   
  아아,얼마나 신기한가! 여긴 정말 훌륭한 사람들이 많이 있군요! 오,인간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런 사람들이 모여 사는 멋진 신세계여!  
   

 
이 말에 영감을 받은 영국 소설가 올더스 헉슬리는 25세기를 그려냈어. 완벽하게 자발적인 디스토피아, <멋진 신세계>에선 실험실에서 배양되고, 개성을 말살하는 ‘소마’라는 반인격 약을 먹고 사회에 효율적으로 봉사하는 인간을 그려. 호화사치품이 넘쳐나고 부족한 물질이 없는데다가, 각종 오락과 무제한적 섹스를 누릴 수 있고, 조금이라도 슬퍼 보이면 바로 다양한 기쁨이 제공돼. 하지만, 누군가 또 질문해. 아픔과 고독뿐이라 할지라도, 정신적 고통 역시 나의 일부니까, 거기서 벗어나는 건 행복을 위한 거지만, 동시에 나를 버리는 것 아닐까, 하고 말이야. 빅 브라더의 대답은 무서워.

   
  자네는 불행해질 권리만 찾고 있군그래. 늙고 추악해지고 성불구가 되는 권리는 말할 것도 없이, 매독과 암에 걸리는 권리를, 내일은 어떻게 될까 하고 끊임없이 걱정하는 권리를, 이루 말할 수 없는 수많은 고통으로 괴로움을 받는 권리를.  
   

    그는 오랜 침묵 후에 이렇게 대답해.

   
    나는 이러한 모든 것을 요구합니다. 저는 불행해지는 권리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전체의 완벽한 행복과 안정을 위해 개별성을 포기하는 삶. 그것은 또 다른 불행의 결말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교훈이야. 오웰도 <1984>에서 유토피아로부터 한 치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간다면 바로 도달하게 되는 디스토피아의 단면들을 예언했었잖아. 나치, 일제, 파시스트들 등, 개인의 희생을 감수하면서 그 사회 자체를 최고의 지위로 끌어올리겠다는 빅 브라더들의 지나친 의지의 결과들. 그것은 현대인이 더 잘살게 되었는데, 왜 더 불행해졌는지. 그 진보의 역설에 대한 대답일 수도 있을 거 같아. 그렇다면, 나는 대체 어떤 세상을 꿈꾸고 있느냐고?

   
   문학은 나의 유토피아다.
                                                                            -헬렌 켈러-
 
   

 
난 이렇게 단순하게 대답하지 못하겠어. 역사를 들여다보면, 계급의 모순은 영원할 것이고, 인간의 자율성은 신뢰할만하지 못하고, 완벽한 시스템은 비인간적이다는 건데, 그렇다면, 인류에게 유토피아의 가능성이 없다는 말인지도 모르잖아. 물론 너도 알듯이 나의 20대는 이렇게 비관적이진 않았어. 그러니, 커피진주, 나의 오랜 유토피아여, 제발 날 달래줘. 무정부의자이며 무종교주의자로서 평화와 이상향을 꿈꿨던 존 레넌의 노래가 허망한 게 아니라고. 진정…….

   
 

Imagine there's no heaven,
It's easy if you try,
No hell below us,
Above us only sky,
Imagine all the people
living for today.
천국도 없고
우리 아래 지옥도 없고
오직 위에 하늘만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노력해보면 어려운 일이 아니에요
오늘 하루에 충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상상해 봐요.  


Imagine there's no countries,
It isn't hard to do,
Nothing to kill or die for,
No religion too,
Imagine all the people
living life in peace...

국가라는 구분이 없다고
생각해 보세요
어렵지 않아요
죽이지도 않고, 죽을 일도 없고,
종교도 없고
평화롭게 살아가는 삶을 상상해 보세요.
 

You may say I'm a dreamer,
but I'm not the only one,
I hope some day you'll join us,
And the world will live as one

날 몽상가라고 부를지도 몰라요
하지만 나만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에요
언젠가 당신도 우리와 같은
생각을 하게 될 거예요.
 

Imagine no possessions,
I wonder if you can,
No need for greed or hunger,
A brotherhood of man,
imagine all the people Sharing all the world.

소유물이 없는 세상을 상상해봐요
당신이 상상할 수 있을까요
탐욕을 부릴 필요도 없고
굶주릴 필요도 없고, 인류애가 넘쳐나요
세상을 함께 공유하는
사람들을 상상해 봐요.

 
   

 

 ---------------------------------------------------------------------

 

  <유토피아> 

   토머스 모어 / 유경희 옮김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8년 10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