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민규동(영화 감독) 

 

 너의 편지를 받고 내가 달콤한 몽상가에서 우울한 현실주의자로 진화하고 있는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 봤어. 정답을 찾아내는 데는 시간이 좀 걸릴 거라고 봐.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해 보여. 네 말대로 유토피아는 완벽한 시스템의 도래에서 오는 게 아니라 그 마음을 품는 순간부터 시작되는 걸지 모른다는 사실. 그렇게 작은 마음들이 모이고 흩어지고 쌓이고 퇴적되다 보면, 그 지층 속에서 서서히 잉태된 거대한 꿈의 세포가 언젠가 지상 위로 모습을 드러낼 때가 있을 테니까. 그렇게 생각해 보니 나도 얼마 전 하나의 유토피아를 엿본 거 같아. 그 얘기를 해 줄게. 세계적인 영화 평론가로 유명한 로저 이버트라는 미국인이 오랜만에 공개 특강을 했어. 내가 그 사람 특강에 귀 기울일 이유는 없었어. 왜냐면 난 그 사람이 쓴 <위대한 영화>라는 두 권짜리 평론 책을 가지고 있는 게 전부이고, 평소에도 못난 영화 한 편이 잘난 평론 백 편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편이었으니까. 다만,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곤 완전 컴퓨터에 붙어사는지, 쉴 새 없이 영화 관련 글을 올리는 게, 참 신기하구나, 정말 열심히 사는 수다쟁이이구나, 하고 생각하는 정도였어. 막상 그의 특강을 열어 봤을 땐, 깜짝 놀랐어. 그는 먹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사람이었어. 대신 과장되게 웃고 있는 도널드덕의 캐리커처처럼 브이 자로 늘어진 턱을 지녔는데, 마치 하회탈 가면을 쓰고 있는 것 같았어. 뭘까, 하고 자세히 보다가 깜짝 놀랐어. 왜냐면, 놀랍게도 그건 가면이 아니고 그냥 진짜 얼굴이었던 거야. 잠시 후 난, 왜 그 사람이 24시간 컴퓨터 앞에 앉아 블로그나 트위터에다 쉴 새 없는 수다를 털어놓는지 알게 됐어. 로저는 컴퓨터의 목소리로 자신을 소개하더니, 부인과 친구 2명에게 준비한 원고를 읽게 했어. 들어 보니, 그는 갑상선 암에 걸려 심한 병치레를 했고, 그 과정에 경동맥이 3번이나 터져서 몇 번의 죽을 위기를 넘겼대. 그 얘길 하더니 너털웃음을 지으며, 한 가수에게 생명의 은혜를 빚졌다고 감사했어. 왜냐면 큰 병 아닌 줄 알고 퇴원 준비를 하는데, 그 가수 노래만 듣고 가야지 하다가, 노래 끝부분에 동맥이 터져서 바로 수술실로 실려 가는 바람에 기적적으로 살아났기 때문이야. 노래가 짧기라도 했다면 가는 길 차 안에서 죽었을 거라는 거지. 그 후로도 많은 수술 끝에 턱 뼈가 없어졌고, 어깨뼈를 추출해서 이식하는 바람에 제대로 못 걷게 됐어. 긴 투병 시간 후에 남은 건, 다물 수 없게 아래로 처진 입. 즉, 현실적으로는, 말을 할 수 없는 평론가가 되어 버린 거야. 장애인이 되자 사람들이 그를 피했어. 지나치게 배려하기 시작했어. 불쌍한 삶, 끝난 인생이라는 시선이 그를 옭아맸어. 그의 인생이 어떻게 됐을 거 같아? 수없이 많은 인생 역전의 영화를 봐 왔기 때문인지, 그 사람은 쉬이 좌절하지 않았어. 대신 자신만의 목소리를 찾아내기 시작했어. 새로운 시대의 소통 수단인 사이버 세계와 소셜 네트워크가 생겨나기 시작했거든. 어느 날, 애플 사에서 그 사람의 글이 바로 컴퓨터의 목소리로 변환되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줘. 느낌표와 물음표로 끝나는 말투의 뉘앙스 차이까지 반영된 최고의 프로그램을. 문제는 일상의 대화가 요구하는 적절한 스피드, 리액션의 타이밍, 이런 것들은 아무리 빠른 타이핑으로도 해결이 안 됐어. 게다가 그 목소리는 로저 이버트라는 사람의 감정을 담고 있지 않으니까, 아무래도 사람들은 그와의 대화에 곧 지루해 했어. 그러자, 그는 자신의 목소리를 부활시키기로 마음을 바꾸었어. 스코틀랜드의 한 회사가 그가 타이핑하는 글을 그의 목소리(에 가장 가까운 사운드)로 바꿔 주는 프로그램을 개발해. 그가 젊은 시절 출연했던 방송물에서 그 목소리의 파형을 찾아 복원을 시도한 거지. 잡음이 섞인 목소리의 한계에 부딪치자, 나중엔 「시민 케인」과 「카사블랑카」의 DVD에 남겼던 깨끗한 코멘터리 목소리의 원형으로 끝내 로저의 목소리를 재창조해 내. 그 참혹했던 좌절의 순간 그 사람은 자신에게 물어 봤었대. 말을 잃은 삶은 어떤 것일까. 이제 남은 미래는 어떤 것일까. 그의 턱없는 미소는 이제 새로운 언어로 대답해 줘. 자신은 말은 못하지만, 기술의 혁명으로 컴퓨터가 한 몸이 되어, 여전히 세상을 해석하고, 영화를 이해하고, 자신의 생각을 펼쳐 사람들과 공유하는 데는 아무런 장애를 갖고 있지 않다고. 자신의 꿈은 전혀 변하지 않았고, 그의 생이 다할 때까지 얘기하고 또 얘기할 것이라고.

 어쩌면 우리가 얼리 어댑터가 되면서까지 그토록 멋진 기계에 집착하는 건, 그 결과 디스토피아가 기다리고 있더라도 유토피아의 마음먹기를 그만둘 수 없는 그 이유 때문일 거야. 사실 문명의 폐해와 매혹이 늘 동시에 대등하게 맞서고 있어서 그것을 지지해야 할지 아닐지 혼돈스러워. 그래서 자칫 거시적인 세계의 흐름을 바라보면 절망에 젖을 수밖에 없지만, 이버트 아저씨의 경우 같은 미시적인 세계를 들여다보면 이미 펼쳐진 낙원의 작은 희망을 발견하게 되기도 해. 이렇게 내 사소한 유토피아가 평상적인 절망보다 더 큰 고통 속에서 피어나는 거라면, 즉, 나의 희망이나 의지를 온전하게 품은 내 인생의 유려한 흐름이 지나치게 막강한 장애물에 부딪친다면, 그래도 난 끝까지 버티어 봐야지, 그러다 보면 상상도 못했던 어떤 기계가 내게 새 삶을 선물해 줄지도 몰라, 라고 그 혼돈의 매력에 기댄 채 아슬아슬한 꿈을 꿔 보게 돼. 그래서 난, 공상 속에서 예비 자세를 취하고 있는 막연한 미래의 이미지를 현실로 성큼 앞당겨 선보여 주는 스티브 잡스 같은 창의적인 선구자들을 늘 찬양해. 난 그가 사라지면 울 거야. 그의 헐거운 티셔츠와 늘어진 청바지를 나의 신전에 모시고 그를 기억할 거야. 이렇게 내 신전에 모신 사람들이 적지 않아. 그들 대부분은 아름다운 상상력의 소유자들인데, 실은 그들은 미래를 과감히 꿈꿔 왔던 선조들의 전통을 그저 충실히 재현하고 있는 건지도 몰라. 예를 들면, 잠수함이 바다 속을 탐사하고, 인공위성이 지구 주위를 돌고, 사람들이 화면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유전자를 복제하는 것, 이런 게 다 재미를 표방한 소설 속 공상의 일부들이었고, 시간이 한참 흐른 후에야 신뢰를 얻게 된 엉뚱한 예언들이었으니까. 허버트 조지 웰스도 일찍이 세인들 사이에 굴러다니던 욕구들을 모아 타임머신이나 투명 인간 같은 신개념을 만들었어. 그래서 과학과 테크놀로지의 구원이 우리의 세계를 한계를 어디까지 확장시켜 줄 수 있는지, 그것으로 어떤 정화가 가능할지를 열심히 탐구했었어.

 아마 인류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큰 비현실적 열망의 순위를 정하자면, 단연 타임머신이 그 꼭대기 자리를 차지할 거라고 확신해. 그렇다면 우리에게 당장 타임머신이 주어진다면 어떻게 될까? 두 종류의 욕구가 부딪칠 거야. 하나는 미래를 보고 싶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과거를 고치고 싶다는 것. 진화를 비밀을 엿보고 싶은 마음과 역사를 뒤바꾸고 싶은 마음일 텐데, 너는 어때? 어디로 먼저 떠날 거 같아? 웰스가 소개한 우리의 주인공은 기계에 시동을 걸고 당장 미래로 달려가 봤어. 그것도 80만년 너머로. 그곳은 의외로 디스토피아였어. 충분한 시간이 주어졌어도 과학과 철학은 유토피아 건설에 실패했고, 오히려 패망한 인류는 밝은 세상의 유약한 종족과 어두운 세상의 포악한 종족으로 분화돼서 서로 잡아먹고 먹히는 원시적인 삶을 살고 있어. 그는 일주일 정도 머물면서 어찌 세상이 이렇게 됐을까 하고 부지런히 그 신세계를 해석해. 그곳 악몽에서 겨우 탈출해서 현재로 돌아온 웰스가 기다리던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미래는 잿빛 세상이야. 안타깝게도 그가 예언자로서 던진 신탁은 어두운 묵시록이란 말이지. 하지만 영원한 시간대의 어느 순간에는 밝고 아름다운 순간이 있지 않을까? 아마 이런 생각으로 그는 다시 타임머신을 타고 미래로 떠나 버렸고, 끝내 돌아오지 않았어. 어쩌면, 정착하고 싶은 어떤 미래를 찾았는지도 모르지. 다행히도 말이야.

 순간 이동에서 타임 트랩까지, 웰스가 발명한 '시간 여행자'라는 이 매혹적인 콘셉트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부지런한 예술적 진화를 거쳤어. 「백 투 더 퓨처」를 넘어 「메트릭스」 최근 「소스코드」까지 해도 해도 끝나지 않는 새로운 이야기로 다시 태어나고 있어. 나도 한때는 스티븐 호킹의 『시간의 역사』와 칼 세이건의 『창백한 푸른 점』을 펼쳐 놓고 진지하게 이 가능성을 염탐해 본 적이 있어. 왜냐면, 거의 백 년 전 이미, 아인슈타인 아저씨가 엄청난 질량을 가진 물체가 공간을 휘게 하고 시간마저 느리게 흐르도록 한다는 일반 상대성 이론을 발표했고, 곧바로 영국 천문학자 에딩턴이 별빛이 태양의 중력에 의해 진짜로 휘는 것을 관측했었으니까. 상상의 가능태가 100여 년에 걸쳐 과학적 증명을 거듭하고 있고, 공상으로만 치부하기엔 어느새 성큼 다가온 잠재적 근 미래의 의사 체험만큼 짜릿한 게임이 없었거든. 또 어떤 면에선, 감당 못할 정도의 방대한 의미 덩어리인 인간의 일상사도, 죄다 기술할 수도 없는 무한대의 사연이 담긴 인류의 역사도 우주적 관점에서 보면 기껏해야 우주 찌꺼기 먼지가 찰나에 흩날리는 순간만 못한 것이라는 생각이 때론 훌륭한 진통제로 날 달래 줬거든. 말하자면, 마음으로 타임머신에 올라타기만 해도 이 혹독한 하루하루의 삶이 다채로운 몽상의 편린으로 흐트러지는 마법을 경험했었어. 물론 언젠가부터 그런 마약도 효력이 다 해버렸지만…….

 내가 끝내 풀지 못한 건 평행 이론의 역학이야. 간단히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얻지 못했어. 현재 내가 타임머신을 타고 미래로 가. 그럼 나의 실종으로 인해 난리가 나겠지. 그 현실은 예정된 미래와 달리 나의 부재에 바탕을 둔 새로운 미래가 펼쳐 질 거야. 한편, 미래로 날아간 난 부족한 미래 지식으로 인해 온갖 모험을 다 치르겠지. 또한 과거의 비밀들을 들춰냄으로써 많은 파장을 일으키며 그 미래의 현실을 마구 바꿔 놓을 거야. 그렇다면, 내가 사라진 후의 그 미래와 내가 넘어온 이 미래, 이 두 시간대가 과연 같은 모양으로 만나게 될까? 그게 아니라, 현재도 존재하고, 따로 미래도 존재한다면, 시간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 걸까? 현재의 난 나대로 살고 있고, 미래의 난 또 나대로 살고 있다니. 그건, 분해할 수 있는 가장 짧은 시간 단위의 결들이 무한대로 존재한다는 얘기잖아! 그럼, 나도 무한대가 되는 거고.

 어쨌든, 타임머신은 존재 불가능하거나, 혹은 미래 어느 시점에서도 아직 발명되지 못한 게 분명해. 만약 그게 탄생했다면, 누군가는 지금 현재로 돌아와서 마음에 안 드는 미래를 조정하기 위해 뭔가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을 게 뻔하니까. 로봇의 지배에 대항하는 혁명 전사의 탄생 자체를 막기 위해 과거로 터미네이터를 보냈던 그 미래의 못된 시도처럼 말이야. 그래도 난 타임머신은 존재한다고 믿어. 좀 다른 종류이긴 하지만. 왜냐면, 아인슈타인이든 잡스든, 어쩌면 인간 뇌가 허용해 주는 개인용 타임머신으로 비밀리에 휘어진 시공간을 오가며 미지에의 여행을 하는 사람인지도 모르니까. 그 타임머신은 장애물을 뛰어넘으려는 욕구와 인류의 공리 추구가 다수의 행복으로 이어질 거라는 희망의 입자로 구성된 특수 장비일테고. 동양적 표현으로는 점쟁이의 촉수 같은 걸지도 모르고.

 혹시 너도 점을 보니? 여자들은 점보기를 많이 즐기는 거 같던데, 난 한 번도 본 적 없어. 왠지 영화의 엔딩을 알고 극장에 들어서는 기분이 될 거 같아서. 혹은 오이디푸스나 숲 속의 잠자는 공주처럼 불행한 미래를 알고 있기 때문에 미리 피하려고 무진장 애쓰지만, 결국 그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무서운 예언의 역설을 마주하기 싫은 것도 있고. 영화 「마터스」에서는 해탈한 순교자의 눈에서 미래를 엿본 자가 취하는 선택이 자살 밖에 없음을 보여줘. 뭘 봤는지는 알려 주지도 않으면서, 애초에 알려고 하지 말라는 준엄한 경고였는데, 무척 섬뜩했어. 얼마 전 한 아나운서가 죽고 싶다고 뇌까렸어. 며칠 지나 그녀가 정말 죽을 지 아무도 몰랐어. 알았다면 누군가 그녀의 운명에 어떻게든 끼어들었을까. 타임머신이 있었더라도 결국 아무리 위로할 수 없었고, 죽음도 막지 못할 운명이었을까. 이렇게 생각해. 미래를 아는 것과 미래를 꿈꾸는 것, 둘은 다른 이야기라고.

   
  인간만이 사랑을 가진 자이기에
자기가 품었던 꿈이 다른 사람의 손으로
자기가 불렀던 노래가 다른 사람의 입술로
자기가 걸었던 길이 다른 사람의 길로
자기의 사랑마저 다른 사람의 팔로 성취되고
자기가 뿌렸던 씨를 다른 사람들이
따게 하도록 사람들은 죽음까지도 불사한다.
인간만이 내일을 위해 사는 것이다.
 
   

 한 때 초현실주의자였다가 아내의 영향으로 공산주의자가 되었던 루이 아라공은 <미래의 노래>라는 시에서 ‘살고 살리는 것 중에서 인간만이 미래를 생각해 낸다’라고 이야기했어. ‘인간만이 자기의 그림자를 내려다보며 멀리 전방을 내다보는 한 그루의 나무’라고 예찬했어. 그의 말처럼 미래를 생각하면 나는 금세 취해. 미래는 내 술잔이고 내 애인이니까.

 내가 책을 읽고 환상에 젖어 온갖 과학적 시뮬레이션으로 미래가 무슨 뜻인지 헤집어 보다가도 결국 도달하는 결론은 이거야. 네가 바로 나의 미래야. 인류가 꿈꾸는 미래는 너한테서부터 시작해. 새로운 세계는 너에게 담겨 있어. 그래, 난 너를 더 자세히 마주하고 싶어.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여자는 남자의 혼을 장식하는 채색이다
여자는 남자를 활기 있게 해주는 떠들썩하고 우렁찬 소리이다
여자가 없으면 남자는 거칠어 질 뿐
나무 열매나 열매 없는 핵에 불과하다
그 입에서는 거친 들바람이 나오고
그 인생은 엉망으로 헝클어지고 황폐해 져
그것마저 자기의 손을 때려 부셔 버린다.

나는 그대에게 말한다. 남자는 여자를 위해
태어나고 사랑을 위해 태어나는 것이라고
낡은 세계의 모든 것이 바뀔 것이다
처음에는 생이 다음에는 죽음이 바뀔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것이 분배될 것이다
하얀 방도 피투성이의 입맞춤도
그리하여 부부들과 우리들 세상의 봄이
오렌지 꽃처럼 지상에 흩어져 깔릴 것이다
 
   

 ……아, 실은 나도 너의 미래이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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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임머신> 

   허버트 조지 웰즈 지음 / 한동훈 옮김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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