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동쪽별, 오늘 덥지 않았니? 머리 아픈 건 좀 어떤지 궁금해. 넌 유토피아 이야기도 아주 슬프게 썼더구나. 혁명에도 꿈에도 변신에도 상처받은 사람 같아 보여. 어쨌든 난 머리카락을 아주 짧게 잘랐어. 머리통이 알 속으로 다시 들어가려는 병아리 같다고나 할까? 어쨌든 난 이번엔 기쁘게 써보고 싶어. 내가 기쁘면 너도 기뻐할 수 있다는 걸 아이 같은 믿음 하나로.
네 글을 읽고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를 다시 읽으려고 집안을 뒤졌지만 결국 찾지 못했어. 그리곤 피곤하고 허기가 져서 포기하고 떡볶이만 한 냄비 먹었어. 배가 불러서 공벌레처럼 굴러다녀도 기분 좋다. 나는 토머스 모어 하면 헨리 8세가 생각나. 토머스 모어가 천일의 앤으로 유명한 헨리 8세 시절의 사람이니까. 나는 토머스 모어와 헨리 8세가 아직 사이가 좋았을 때 그 둘이 지붕 꼭대기로 올라가 템스강을 바라보았다던 런던의 햄프턴 코트에 갔던 게 기억나. 햄프턴 코트의 정원엔 미로가 있어. 그 정원의 미로에선 누구도 길을 잃지 않고 누구든 금방 출구를 찾고 사랑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다시 만나지. 그러나 현실의 미로에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음에 대해 (현실에선 한 번 길을 잃은 자는 계속 잃을 수도 있음에 대해) 토머스 모어는 알고 있었고 그래서 유토피아를 썼을 거라고 생각하면 역시 오늘 밤 배가 불러서 하는 헛소리에 불과할까? 그래도 좋아. 오늘은 누구든 자신을 위로하는 글을 썼으면 좋겠어. 오늘은 누구든 자신의 유토피아, 이상향은 어떤 모습일까 상상하며 글을 써봤으면 좋겠어. 내가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에서 언제고 즐겁게 회상하는 말은 일하고 일 외의 시간에 각자 흩어져 자신이 좋아하는 어떤 것을 하며 시간을 보낸다는 거야. 그런데 나에겐 이 말은 낮엔 일하고 밤엔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며 보낸다는 걸로 변형되었어. 내겐 그게 유토피아란다. 나는 밤의 시간을 사랑해.
언젠가 밤에 시를 쓰는 할머니들을 인터뷰하고 글을 써본 적이 있어. 할머니들은 낮엔 밭일하고 설거지를 마치고 밤엔 안경을 코에 걸치고 시를 쓰고 그 시를 큰 소리로 읽고 있었어. 여든 살 할머니들이 말이야. 그 밤의 시간은 낮의 시간을 바꿔 놓았어. 할머니들의 표현을 빌자면 시를 쓰기 전에는 그저 ‘그것이 그것이지 뭐’였는데 이젠 ‘왜 그것은 그것인가?’로 바뀐 거지. 무관심이 관심으로 하찮아 보이는 것들이 탄복할 대상으로 바뀌는 순간이 있지. 우리의 관심과 시선은, 우리의 눈과 마음은 그토록 놀라운 거야. 이런 점에서 우리에게 마음이 있다는 건 축복이야. 그 할머니들이 인생이 기쁘다고 할 때 그 기쁨은 밤의 시간에서 출발해. 랑시에르란 철학자는 낮에는 빵을 위해 혹독한 노동을 하고 밤에는 사유와 시에 자신의 또 다른 노동을 바치는 노동자를 침입자라고 불러. 그는 어떤 침입자일까? 생각하고 질문을 던지고 글을 쓰는 일은 많이 배운 자들의 몫이란 상식. 다른 인간이 되려고 노력하는 것은 한낱 치기와 몽상, 철없음에 지나지 않는 것이란 상식, 당장 눈앞에 득이 되지 않는 일은 할 필요가 없다는 지루한 상식을 침입한 것 아니었을까? 플라톤은 국가에서 자신들의 작업 이외에 어떤 것도 할 수 있는 시간이 없는 철의 종족인 장인들의 질서와 공동체에 전념할 수 있는 금의 종족들, 통치하는 사람들의 질서를 구분해. 우리 정도 평등의 열매를 맛본 사람들은 플라톤의 이 말이 얼마나 말이 되지 않는지 금방 알 거야. 침입자들은 이런 분할을 거부해 버리지. 우리는 오로지 화폐로만 교환되는 존재가 아님을 자기 자리에서 증명해내는 것, 그것이 침입이고 내겐 밤의 기쁨이야. 아무도 내게 요구하지 않지만 내가 내게 요구하는 것을 하는 시간이 내겐 밤의 시간이야. 그리고 이렇게 자기 자리에 서서 자기를 증명하는 문제는 슬프게도 관객이 한 명도 없을지라도 엄청나게 중요해. 우리 시대엔 너무나 저속한 구분과 편견에서 비롯되는 숨 막힌 일들이 많기 때문이야. 자갈치 시장 아줌마가 카뮈의 이방인을 읽는다고 하면 동물원의 펭귄이 적도 지방의 앵무새와 노는 걸 보는 것처럼 보지 않을까? 타인이 나에 대해 상상하지 않음이, 뻔한 상식적인 상상만 함이 조금이라도 달리 살아 보려는 순간의 우리를 얼마나 힘 빠지게 하는지 우린 이제 알고 있지 않니? 우리가 타인을 내 편견대로만 본다면 그들도 우리처럼 괴롭고 답답할 거야. 진정한 상상력이란 기발함이나 엉뚱함이 아니야 타인을 깊게 헤아리는 것이야. 우리 시대의 사람들은 끝없이 상상력과 창의력을 발휘하란 요구를 받지. 하지만, 타인의 마음속으로 뛰어들지 못하는 사람에게 진정한 상상력은 나올 수 없다고 나는 믿어.
그런데 맘속에 이상향, (혹은 이상적인 자기 모습)을 갖는다는 것은 아주 바람직하지만, 한가지 조심해야 해. 마치 현실은 아무것도 아니고 내 마음은 저기 어디 딴 데, 다른 별에 있다는 듯, 현실은 과거 어느 때보다도 절망적이란 듯, 이런 마음으로만 현실을 대하다 보면 결국은 피로와 냉소와 무관심, 원통함과 피해 의식, 질투와 과대망상에 빠질 수 있어.
우린 종종 뭔가 대단히 중요하고 위대한 일을 하고 싶기도 하고 역사에 길이 남을 일을 하고 싶기도 하고 완벽하게 행복해지고 싶기도 하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인정과 사랑을 받고 싶어하기도 하지. 그러나 꿈의 사소한 한 조각이라도 시작해 볼 수 있는 곳은 내 마음속이 아니라면 단 한 곳, 지금 여기밖에 없어. 지금 여기서 누군가와 함께. 단 한 명이라 할지라도. 설사 우리가 지구 밖으로 이사 간다고 해도 변함없는 출발점은 여기야.
자신이 생각하는 바람직한 모습을 어떻게 현실과 만나게 할 수 있을까? 이런 대화가 가능한 곳이 작지만 소중한 유토피아 아닐까? 그러니 유토피아의 조각들은 곳곳에 숨어 있는 것 아닐까? 모든 사람은 어떤 별의 조각, 어떤 꿈의 조각이야. 이건 문학적인 비유가 아니라 과학적으로도 별을 만든 그 먼지가 우리도 만들었거든. 우린 전부를 갖지 못한다고 해서 슬퍼하면 안 돼. 유토피아가 아니라 유토피아적인 것이 더 좋아. 이상적인 것이 이상주의자보다 좋은 것처럼 말이야. 낙관적인 것이 낙관주의자보다 좋은 것처럼 말이야.
진짜 몽상가는 오로지 신비로움만 바라보는 사람이야. 그런데 너는 내가 알기로 현실을 보지. 현실을 겪어내지. 현실에 순응하지 않지. 맘껏 괴로워해도 변명하지 않지. 부끄러워해도 오로지 남의 눈에 괜찮은 사람으로 보이려고 기만적인 핑계를 대지 않지. 핑계를 대느니 좌절을 받아들이지. 네 실패 때문에 남에게 김빠지는 충고를 늘어놓지 않지. 진짜로 자주 앓지. 편두통, 허리 통증, 몸살 또 뭐였지? 골다공증이었던가? 하여간 그러니 너는 가련한 몽상가가 아니야. 굳이 말하자면 너는 정직한 현실주의자가 아닐까?
추신 - 그런데 지난주에 말한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는 실은 네게 편질 썼지만, 다시 지웠어. 다음 주에 보낼게. 이유는 간단해. 디스토피아 이야기이기 때문이기도 해. 엄밀히 말하면 디스토피아에 둘러싸인 유토피아. 하지만, 그 이야긴 다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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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
토머스 모어 / 류경희 옮김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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