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안녕 동쪽별!
로저 애버트 아저씨 이야기 진짜 충격이다. 나도 그의 영화 평론집 <위대한 영화>를 읽었어. 그가 카사블랑카와 잉그리드 버그먼에 대해 쓴 글은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하는데 그새 그런 일을 겪었구나. 인간이 목소리를 잃는다는 건 어떤 걸까? 사실 말은 너무나 중요해. 갑자기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런 글이 생각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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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은 이로운 것과 해로운 것, 정의로운 것과 정의롭지 못한 것을 드러내는 데 쓰인다. 왜냐하면, 다른 동물들과 달리 인간만이 유일하게 선과 악, 정의와 불의의 지각 및 기타 도덕적인 감각을 가지며 바로 이러한 것들을 공유함으로써 가정과 도시를 만들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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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저 애버트 아저씨가 현대 과학이 가능하게 만든 최첨단 장비의 도움으로 자신의 의견들을 전달할 수 있게 되어서 천만다행이야. 하지만 다른 생각도 해볼 수 있어. 우리 시대엔 아무도 첨단 장비라고 생각하지 않는 라디오에 관한 이야기야. 남미에서 어떤 라디오는 목소리 없는 자들의 말을 전달하는 일을 했었어. 입이 있어서 말을 해도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 사람들의 상처받은 목소리를 전달하는 일을 라디오가 했단 말이야. 결국, 아무리 사소해 보이는 의견이라도 나눌 방법이 있다는 것은 한 인간이 존엄을 유지하는데 필수적인 일 일거야. 아무도 귀 기울여 주지 않는 사람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알아들으면 나도 어쩜 누군가에겐 최첨단 인간이 될 수 있는 거 아닐까?
그런데 나에게 암만해도 병이 하나 생긴 것 같아. 네가 책 이야길 하면 나도 꼭 그 이야기를 따라 하고 싶거든. 꼭 너만 졸졸 따라다니는 장난꾸러기 메아리가 된 것 같아. 벌써 지난주만 해도 진 리스 이야긴 꺼내지도 못했는데 오늘은 또 타임머신 이야기가 하고 싶다. 이를테면 그렇다면 ‘너는 미래가 뭐라고 생각하니?’ 같은 질문들부터 '칼 세이건의 창백한 푸른 점 표지 사진을 보면 무슨 생각이 나니?' 같은 질문들이 머릿속에서 터져 나와. 게다가 신기한 머피의 법칙도 있어. 네가 읽은 책은 분명히 나도 가지고 있는데 읽으려고 찾으면 사라져버린다는 것. 그로부터 대략 일주일 뒤에 나타난다는 것. 지난번엔 유토피아가 감쪽같이 사라졌는데 이번에는 타임머신이 사라졌어. 지난주엔 떡볶이 먹고 기운 내서 썼는데 오늘은 먹을 거라곤 시든 양배추뿐이구나. 눈물이 난다.
그래도 오늘은 기필코 진 리스 이야길 하고 넘어갈래. 진 리스는 어느 날 제인 에어를 읽고 심기가 불편했어. 그리고 로체스터의 부인 앙투아네트가 어떻게 미쳐 갔는지를 쓰기로 맘먹어. 그러니까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는 제인 에어의 전편에 해당해. 로체스터는 그녀가 미친 것이 집안의 유전이라고 하지만 진 리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대영 제국 식민지 주변부, 불행한 자들의 손실이 영리한 자들의 이익이 되어가는 세상에서, 같은 백인끼리도 서로를 이해관계로만 보는 탐욕과 시기심으로 가득한 땅에서, 백인일지라도 몰락한 백인의 딸이면 흰 바퀴벌레라고 불리는 세상에서 앙투아네트란 소녀는 오로지 단 한 가지만을 원해. 그것은 안정감이었어. 고립과 불안 속에 살던 앙투아네트의 아름다운 어머니는 앙투아네트의 동생을 화재로 잃고 나서 흑인들에게 몇 번이고 겁탈당하고 미쳐서 죽어가지. 앙투아네트는 로체스터와 결혼할 때 이렇게 물어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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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게 마음의 평화를 주시겠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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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체스터는 평화와 행복과 안전을 약속하며 결혼을 했지만, 그의 속마음은 이런 것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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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내게 단지 이방인일 뿐이었다. 나와는 생각도 느낌도 다른 이방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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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체스터가 앙투아네트를 바라보는 시선은 대영 제국이 식민지를 바라보는 시선 그대로였어. 아무 근거 없이 권위적이었고 미신에 가까운 의심에 가득 차 있었던 거야. 로체스터가 제발 나를 사랑해 달라고 말하는 앙투아네트에게 한 말이 무엇이었는지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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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영에 찬 어리석은 인간, 사랑하도록 만들어졌다고? 그렇다고 치자. 그러나 너는 어떤 연인도 갖지 못하게 돼. 나는 너를 원하지 않고 어떤 다른 사람을 만나게 될 기회는 없을 테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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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치의 동정심도 연민도 없는 잔인한 마음이란 바로 이런 것이겠지. 그리곤 앙투아네트를 다락방으로 끌고 오는 거지. 앙투아네트에게도 유토피아는 있었어. 어린 시절 그녀가 살던 그곳. 다락방을 탈출해 가고 싶어 하던 곳이었어. 그렇지만, 그녀의 유토피아는 디스토피아에 둘러싸여 있었어. 그 디스토피아를 뚫고 나가지 못하는 한 결코 이를 수 없는 곳. 그것이 유토피아였어. 그녀는 미치기도 전에 미친 사람 취급당하다가 결국 죽고 말았어. 그녀가 정말로 미쳤는지는 소설 끝 부분까지도 확실치는 않아.
이 글을 읽다가 모비딕의 이런 구절이 자꾸 생각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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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간담 서늘한 바다가 초록의 대지를 둘러싸고 있듯이 사람의 영혼 속에는 타히티 섬이 하나 있다. 평화와 기쁨으로 충만하나 어중간하게밖에 알지 못하는 인생에 대한 공포에 휩싸인…… 신이시여. 이들을 지켜주소서. 저 작은 섬에서 밀어내지 마소서. 결코, 돌아가지 못하나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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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즈의 타임머신에 대해선 한 가지만 이야기하고 싶어. 80만 년 후의 미래에 인류는 꽃같이 예쁘고 인형같이 가냘픈 엘로이 족으로 진화했어. 그런데 그 엘로이 족들은 밤만 되면 벌벌 떨며 두려움에 휩싸여. 이유가 뭘까? 시간 여행자는 곧 무시무시한 비밀 하나를 알게 돼. 밤이 되면 도시 곳곳에 있는 우물에서 또 다른 종족, 흉측하게 생긴 종족인 몰록이 튀어나와 엘로이 족을 공격하고 먹어치우는 거야. 이 몰록은 노동을 하는 종족이고 엘로이 족처럼 인류의 후손이었어. 지상의 아름다운 종족인 엘로이, 지하의 흉측한 종족인 몰록. 낮의 종족인 엘로이, 밤의 종족인 몰록. 노동을 하지 않는 엘로이, 노동을 하는 몰록. 시간 여행자는 이 두 종족을 지켜보며 이렇게 결론을 내려. 엘로이 족이 몰록에게 잡아먹히는 이유는 인간 이기심에 대한 엄벌이다. 인간들이 수고롭게 일하는 다른 인간의 등 위에 올라타 있길 멈추지 않는다면 미래엔 필연적으로 이런 일이 벌어진다. 꽃을 던지고 노는 아름다운 엘로이 족에게 몰록은 행복한 날의 치명적인 한 떨기 불안이었어. 이런 생각을 해봐. 악덕 기업가들에게 티없이 행복한 날은 노동자들이 잠자코 가만히 일이나 하고 있을 때 아닐까? 웰즈가 미래의 모습을 통해 우리에게 던진 질문은 바로 이런 것이었겠지? 당신들, 미래에 밤잠 못 자고 잡아먹히지 않으려면 뭐 바꿔야 할 것 없소? 그 질문은 당시 빅토리아 시대 독자들을 심란하게 했을 테고 그리고 지금 우리 시대에 읽어도 그 심란함은 가시질 않는구나.
너는 나의 미래. 나는 너의 미래가 되기로 다짐하고
너와 함께 미래로 타임머신 타고 갔다가 네가 잡아먹히는 걸 보고 싶진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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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머신>
허버트 조지 웰즈 / 한동훈 옮김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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