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영국인 아편 중독자의 고백

  
정혜윤(CBS 라디오 프로듀서) 

 

  동쪽별. 장마철에도 제자리를 지키며 빛나고 있었지? 어디 가버린 것 아니지? 난 지난 일주일 동안 지방 취재를 네 건이나 해서 녹초가 되었어. 높은 산에 가로막혀 이제 그만 쉬면서 이 고장에 비를 뿌릴까 말까 망설이는 검은 구름도 보았고 천문대 지붕에 떨어지던 빗소리도 들었단다. 계곡물이 퉁퉁 불어서 젖이 분 여자처럼 우는소리를 내는 것도 들었고 구름을 뚫고 배부른 반달이 나오는 것도 보았어. 낯익은 것이 놀라운 것으로 다가오고, 그 놀라운 것들은 다시 돌아보니 낯익은 것이 되곤 했어. 동쪽별. 난 왜 그리운 것들을 제대로 설명해 내지 못하는 걸까? 난 구름에 달에 빗방울에 대고 마치 너에게 묻듯 그렇게 물어봤단다. 그리운 것들을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것들을 볼 때 가끔 가슴이 아리게 아픈 걸까? 스티븐슨이 여름밤은 살아 움직이는 책 같다고 했을 때 아마 그는 내가 본 그런 여름밤들을 떠올렸을 거야. 그래, 지난 일주일 동안 모든 것이 살아 있었단다. 내가 읽어주길 기다리는 상형문자로.

  내가 본 가장 아름다운 여름 풍경 하나 말해줄까? 나는 오래전 일본 규슈의 어느 숲으로 반딧불이 투어를 갔단다. 평생을 그 지방에 산 일본 아저씨가 손전등을 들고 앞장서 걷고 호텔 투숙객 몇 명이 그 뒤를 따랐지. 반딧불이는 작은 보석 같았어. 계곡 물소리가 시원했던 것도 기억나. 그런데 그 아저씨가 갑자기 보름달을 가리키는 거야. 정말 큰 보름달이었어. 우리더러 보름달을 보란 뜻이겠지. 무슨 일이라도 좋으니 제발 벌어지길 바라던 우리는 아저씨의 지시를 따랐지. 그런데 어느 순간 아저씨가 손전등을 들어 달을 비췄어. 그러자 뭐가 나타났는지 아니? 커다란 부엉이 한 마리가 보름달을 배경으로 날아가는 게 보이는 것 아니겠니? 정말로 우아하고 아름다운 동작이었어. 그런데 어떻게 그 아저씨는 부엉이가 보름달 한중간을 날아가는 순간을 포착했지?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인데 말이야. 상상해봐. 노란 보름달, 그리고 커다란 날개를 펄럭이던 까만 부엉이. 마치 영화 E.T에서 소년들이 자전거를 타고 날아가는 그 장면 같았어. 난 그 순간 아저씨를 숭배했어.

  “실례합니다만. 어떻게 아셨어요? 그러니까 부엉이가 하필이면 그때 거기 보름달 앞을 날아갈 거란 걸요?”

  아저씨가 레비스트로스라면 ‘이것이야말로 야생의 사고입니다.’라고 대답했겠지만 그는 이렇게 말했어.

  “평생 그리던 장면. 언제나 상상하던 장면. 꿈속에서 만나고 싶던 장면이었으니까요”

  음, 그분은 그러니까 초능력자였던 것일까? 하지만 어떤 장면을 반복해 생각하다 보면, 꿈꾸게 되고 보게 되고 나중엔 남들에게 보여줄 수도 있게 된다는 것을, 나는 그 뒤부터 조금씩 믿기 시작했던 것 같아. 너도 꿈속에서라도 좋으니 반복적으로 보고 싶은 장면이 있니?

  좀 다른 이야기지만 이만큼 멋진 다른 이야기도 들려주고 싶어. 제주도 앞에 있는 우도엔 사빈 백사란 해변이 있어. 백사. 그러니까 하얀 모래 해변이란 뜻인데 그저 모래가 고운 게 아니라 말 그대로 색깔이 ‘white’야. 눈처럼 하얀 모래들인데 도대체 그 모래는 어디서 온 것인지 참을 수 없이 궁금해진 나는 또 그 고장 아저씨에게 물어봤지.
  “아저씨 태어날 때부터 저렇게 모래가 하얀색이었어요?”
  너도 이 대답을 들으면 나처럼 그 어부 아저씨를 숭배하게 될 거야. 
  “그럼요. 나 갓난아기 때부터 하얗지요. 날이 맑으면 우리는 너무나 눈이 부셔서 눈을 뜨지도 못하고 다녔어요. 우리는 모래를 감히 똑바로 볼 수 없었어요.”  
생각해 봐. 너무나 눈부셔서 제대로 볼 수도 없는데 그게 다이아몬드가 아니라 모래라니.

  번쩍번쩍 빛나는 모래 해안 이야기는 천일 야화에서도 보질 못했어. 난 다음엔 기필코 그 해변에서 새벽을 맞을 거야. 텐트치고 자면서 다이아몬드급 모래가 내는 소리를 들을 거야. 그리고 아침엔 눈을 비비며 이것은 꿈인가? 라고 말하고 말 거야. 눈부신 모래에 대해 말을 하고 다니는 사람은 눈부신 모래에 대한 꿈을 꿀 수 있고 보름달 위를 날아가던 부엉이에 대해 말을 하고 다니는 사람은 부엉이에 대해 꿈을 꿀 수 있어. (그리고 그 꿈들은 언젠가 현실이 될 거야. 만약 현실이 되지 못한다면 그건 아래처럼 너무나 아름답고 슬픈 이야기일 거야.)

  토마스 드 퀸시는 <어느 영국인 아편 중독자의 고백>이란 책에서 아편을 하던 밤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던 꿈을 소개해. 드 퀸시가 이 자품에서 궁극적으로 드러내고 싶었던 것은 아편의 효용이나 부작용, 아편이 불러일으키는 환각작용, 아편 중독 탈출법이 아니라 인간의 잠재성 안에 들어 있는 꿈의 광휘였어. 드 퀸시는 이렇게 말했어.

   
  인간의 생활조건이란 사고를 고양하는 일과는 양립할 수 없는 일상 경험으로 대다수 사람들을 옥죄고 있어서 마음이 장엄한 이미지들로 흘러넘치는 사람들조차 꿈으로 재생할 때에는 그 장엄함의 색조가 퇴색된다……. 일상성으로 고통받는 인간의 능력 가운데 꿈꾸는 능력보다 더 고통받는 것은 없다. 누구도 이 점을 가볍게 여겨선 안 된다. 꿈꾸는 능력은 어둠의 신비와 손을 잡고 인간이 심연과 교류하는 통로를 열어 준다. 꿈꾸는 기관은 심장, 눈, 귀와 연결되어 인간 두뇌의 방들 속에 무한대의 감각을 집어넣어 주어 생명의 심연에 존재하는 영원성에서 어두운 영상들을 끌어내, 그 신비한 어둠 상자 거울인 인간의 마음에 멋지게 비춰준다.  
   

  (물론 그다음엔 꿈꾸는 데 아편이 도움된다는 말이 나오겠지.) 이 부분을 읽다 보니 밤의 꿈, 그 꿈마저 얼마나 초라해졌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좀 서글퍼졌어. 부장님께 혼나거나 방송 사고를 내서 경위서를 쓰는 것, 건널목을 건너다 교통사고를 당하는 것, 고양이 얼굴을 할퀸 것, 곰에게 쫓겨 다닌 것 말고 내가 무슨 꿈을 꿨는지 아스라해. 한 편의 꿈을 꾸기엔 우리에겐 사랑도 미움도 부족한 걸까? 우린 자기 전에 낮 동안의 사랑과 미움을 쫓아낼 수 있을 만큼만 사랑하고 미워하며 사는 걸까?

  드 퀸시의 꿈에는 가엾은 매춘부 소녀 앤이 자주 나와. 어느 날 드 퀸시가 아직 아편을 하기 전, 어렸을 때 드 퀸시와 매춘부 앤은 (그즈음 드 퀸시가 돈 한 푼 없이 런던거리를 떠돌게 된 사연은 그가 학교를 탈출했기 때문이야.) 옥스퍼드 거리를 천천히 걷고 있었어. 드 퀸시는 잘 먹지 못해서 힘이 없었어. 그들은 어느 집 현관에 주저앉았어. 그런데 그곳에 앉았을 때 드 퀸시는 갑자기 아프기 시작했어. 그래서 그녀에게 기댔는데 그만 계단 아래로 굴러 떨어지고 말았어. 그때 이 세상에서 앤만이 그의 고통을 느꼈어. 앤은 공포에 질려 소리를 지르며 옥스퍼드 거리 쪽으로 달려가 포도주 한잔과 과자 몇 조각을 들고 왔어. 그 착한 소녀는 그녀가 가지고 있던 몇 푼의 돈을 그를 위해 다 써버린 거야. 그 일 뒤로 드 퀸시는 이런 생각을 해. 런던 사창가의 중심부까지 쫓아가 가능하다면 무덤까지라도 쫓아가 그녀를 위해 축복과 평화와 용서, 화해의 말을 할 수 있길 난 얼마나 원했던가? 꿈속 같은 가로등 불빛 아래 옥스퍼드 거릴 걸으며 그와 앤에게 위안이 되었던 손풍금 연주를 들으며 드 퀸시를 눈물을 흘리며 그녀를 그리워해. 왜냐하면, 그들은 곧 영영 헤어지고 말았으니까. 드 퀸시는 돈을 구하려 길을 떠나. 앤에겐 이렇게 말해. 길어야 일주일 안에 돌아올 것이라고. 그러니 지금부터 5일 후부터 매일 밤 여섯 시에 그레이트 티치필드가 맨 끝에서 나를 기다려 달라고. 그런데 헤어지는 순간 드 퀸시는 평생 후회할 실수를 저지르고 말아. 한 번도 그녀의 성을 물어보지 않았던 거야. 당시 앤은 발작성 기침 때문에 고생하고 있었기 때문에 약을 꼭 챙겨 먹으란 당부를 하느라 이름을 묻는 걸 잊었던 거야. 그 여행길 뒤에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그 뒤 드 퀸시는 런던을 떠나 대학에 진학했어. 앤은 어떻게 되었을까? 약속한 대로 드 퀸시는 매일매일 그곳을 찾았지만, 결코 그녀를 만날 수 없었어. 드 퀸시는 생각해. 만약 그녀가 죽지 않고 살아있다면 그녀도 미로 같은 런던 거리를 헤매며 자신을 절망적으로 찾고 있을 것이라고. 몇 년 동안이나 드 퀸시는 런던에 갈 때마다 수많은 여자의 얼굴을 살펴보지만, 눈길만 스쳐도 금세 알아볼 수 있는 그 다정한 얼굴을 다신 보지 못했어. 아편을 복용하기 시작한 뒤로 드 퀸시의 꿈에는 버림받은 가여운 소녀들의 이미지가 나타나.

  그런데 드 퀸시의 이 꿈은 꼭 워즈워스의 시 <루시>를 연상시켜. 워즈워스는 사랑하는 누군가의 죽음을 차마 받아들이지 못하고 입 밖으로 낼 수가 없어서 그녀는 지구와 함께 돌고 있다고 생각해.

   
  잠이 나의 영혼을 봉인하여
내겐 인간의 두려움이 없었지.
그녀는 지상의 세월의 흔적을
느끼지 못하는 존재 같았네!

그녀는 이제 멈추었고, 아무 힘도 없다네.
그녀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다네
지구의 자전 주기를 따라
바위와 돌과 나무와 함께 돌며…….
 
   

  드 퀸시의 소녀도 차마 그의 곁을 떠나지 못해 꿈속에 나오는 걸까? 한 편의 아름답고 슬픈 꿈을 꾸기 전에, 이미 오래전에 우리는 사랑하고 고통받고 그리워하는 것인가 봐.

  아편은 아니지만, 아편 같은 어떤 것--시, 펼쳐진 책, 꽃, 밤하늘, 사랑, 인간--에 취해, 아편 중독자처럼 꿈꾸고 싶은 지금은 한밤! 나의 영혼은 사랑하고 고통받았던 많은 것을 있는 힘껏 그리워하기 시작하는구나! 꿈속에서 만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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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영국인 아편 중독자의 고백> 

   토머스 드 퀸시 / 김명복 옮김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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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하나 2011-07-22 14: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도서 제목만으로도 어두운 과거가 찔리는구만요 ㅋㅋㅋ

얄리 2011-07-22 18: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글 좋네요. 문학은 스포가 있을까봐 안 읽은 작품 리뷰는 잘 읽지 않는데 이 작품은 제가 읽고 있는 거라서 개의치 않고 읽어봤는데 좀 더 일찍 읽어볼걸 그랬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렸을 때에 비해 어떤 꿈을 꿨는지도 기억이 나질 않고 그 꿈마저 지극히 일상적이라 심심했는데, 아편의 힘 말고 아편같은 맛을 가진 책을 읽고선 정말 멋지고 이상하고 독특한 꿈을 꿔 보고 싶어요.

마리벨 2011-07-22 19: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어떤 고백일지 궁굼해요.....
아편은 아니지만 ㅡ 아편같은 그 어느 것?
나에겐? ㅡ 뮤직, 커피 그리고 책~ 펭.클~ ^^;

모기 2011-07-22 2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마지막 문장이 마음에 와 닿네요 ^^ 꼭 한 번 읽어보고 싶네요~

까꿍메롱 2011-07-23 05: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늦은 밤에 읽는 글이 이렇게 달콤할수가 없네요. 인용구절까지도 달콤하고 애절하고 씁쓸하기까지한. 어울릴지는 모르겠지만 귀에서 '중독된 사랑'이라는 노래가 울리는 듯합니다. 헤헷-

starover 2011-07-23 1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퀸시가 앤을 만났으면 좋겠는데.... 정말 아쉽네요.
 

 

  살인의 추억(2)

  
민규동(영화 감독) 

 

안녕, 커피진주   

편지를 읽고는 그대가 본능적으로 퀴즈의 정답을 맞힌 게 아닐까, 생각이 들었어. 『무도회가 끝난 후』라는 멋진 소설. 「가장자리에서 불 비추기」라는 멋진 시. 마치 모든 게 내 퀴즈의 전후 배경으로 귀결되는 멋진 텔레파시의 화답. 역시 넌 대단해.

 사랑하는 여인의 아버지가 몹시 나쁜 사람이란 걸 발견했을 때, 나라면 어떤 선택을 하겠느냐고 물었지. 난 이내 사랑이 식었다고 이야기하는 그 남자랑은 다를 거 같아. 그 아버지는 그녀의 일부이지만, 전부는 아니니까. 난 그저 우리 사랑의 드라마가 좀 더 강해진 거라 믿을 거 같아. 우연도 환경도 날 지배하지 못할 거라고 우길 거 같아. 하지만, 내 의지와 상관없이, 그 여자가 나의 일시적 갈등을 눈치 채거나, 그래서 부친을 부끄러워하며 스스로 떠나간다면, 그때 난 이렇게 대답할 거 같아.

 “3   *4*2   *45.” 
 
“*1***   *2.”

 뭐냐고? 자, 답을 알려줄 시간이구나. 나의 퀴즈 속 숫자는 1부터 5까지 있어. 문자 중 5개의 요소를 갖춘 건 영어의 모음. 즉, 각각의 숫자는 a, e, i, o, u에 해당해. 그러므로 첫째 문장은 'I  *o*e  *ou.' 이고, 둘째 문장은 '*a***  *e'야. 둘의 관계로 미뤄볼 때, 첫 번째 문장은 연인이 불편해하는 걸 알고 냉정하게 먼저 떠나가는 여자에게 털어놓는 남자의 매우 급한 사랑 고백이야. 즉, “I love you.”라는 문장이야. 둘째 문장을 볼까? 조금 어려워 보이지만, 아냐. 쉬워. *e의 자리에 모든 알파벳 자음을 넣어봐. 존재하는 단어는 me밖에 없어. 그렇다면, 앞의 단어는 뭘까? Catch? 정황을 볼 때 ‘날 잡아줘!’라는 여자의 메시지야. 뭐,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아버지라는 장애물과 정면으로 부딪치는 걸 각오한 남자는 본능적으로 던진 마지막 카드라면, 그건 그토록 미뤘던 프러포즈라고 볼 수 있어. “Marry me.” 라고 말이야.

 물론, 홈즈가 왓슨을 놀라게 하며 늘 보였던 이런 패턴의 결론에는 너도 불만이 있을 거야. 시시하다고 포기하지 말고, 내 퀴즈에 존재하는 빈틈을 들여다보듯, 홈즈에게도 훨씬 엄격하게 그 수사법의 빈틈들을 따지고 들어서, 끝내 우릴 만족하게 할 어떤 냉정한 ‘추리 비평’을 시도해보는 건 어떨까. 예를 들자면, 소포클래스의 『오이디푸스 왕』의 라이오스 살해에 대한 전통적 버전에 의혹을 품는 것처럼 말이야. 라이오스 살인의 유일한 증인인 시종은 왕이 여러 사람에게 살해당했다고 단언했어. 그런데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유죄를 털어놓자, 다른 증인은 아무도 호출되지 않았어. 이 모순되는 증언과 판결을 놓고, 우린 이렇게 얘기할 수 있잖아. 오이디푸스는 자기 아버지를 죽이지 않았을 수도 있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 상처가 날 수도 있겠지만, 저 너머의 진실이 무고하게 희생된 자를 구해낼 수도 있다고 보면, 가치 있는 문제제기 아닐까 싶어. 또, 셰익스피어의 『햄릿』도 따져볼 수 있어. 햄릿은 숙부 클로디어스가 살인자임을 확신하고 배우들을 시켜서 왕의 귀에 독을 넣는 살인 장면을 연기시켜. 벌컥 화를 내고 나가버리는 숙부의 반응을 보고 유죄를 단정하지. 하지만, 셰익스피어 시대에는 본 공연 앞에 반드시 무언극 하이라이트를 먼저 공연했대. 즉, 이 장면은 본 공연 직전에 이미 클로디어스에게 보였다는 거지. 왜 처음 공연엔 가만있다가 두 번째 공연에 화를 냈을까. 작품의 지문에서 밝혀져 있듯, 그저 햄릿이 내는 시끄러운 소리에 짜증이 났기 때문 아닐까.

 이렇듯, 문학이 품은 불완전한 세계는 사실 한 번도 완전했던 적이 없었어. 그래서 우린 즐겁게 그 구멍 난 세계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다고 봐. 가상과 실제 사이에 존재하는 이 중간지대는 텍스트 속 인물을 실재와 혼동하며 자신의 삶과 묘한 접점을 찾으려는 독자들의 공간으로 볼 수 있어. 도일은 바로 이 중간지대 영역의 확장 가능한 최대치를 선보이며 독자들을 현혹했던 거고.

 하지만, 역시 재밌는 건, 도일은 홈즈를 중간지대에 풀어놓음으로써 모든 걸 이뤘지만, 갈수록 불행하다고 느꼈다는 사실이야. 어째서 그는 원치 않는 성공의 욕구 속에서 가장 큰 성공을 이뤄냈을까. 거기에 혹시 예술가의 삶의 비밀이 있는 걸까. 난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으로도 계승된 이 거대한 성공의 아이러니인 『바스커빌 가문의 개』를 놓고는, 왠지 삐딱한 질투의 뱀 눈을 뜨고 홈즈의 빈틈들을 찾아보고 싶어졌어. 즉, 그의 날카로운 추리력을 그대로 반사시켜 겨눠보고 싶어진 거지. 그러다가, 피에르 바야르의 『셜록 홈즈가 틀렸다』라는 책을 읽고 만 거야. 그제야 난 뭔가 숨통이 트이고 말았어. 살펴보니 역시 이 소설의 동기는 순수하지 않았더구나. 기실, 도일은 시간이 갈수록 홈즈에 대해 뼛속 깊은 증오, 경멸, 혐오를 지니게 됐어. "내가 홈즈를 안 죽이면, 홈즈가 날 죽일 거야!”라는 절박한 심정 말이야. 그래서 어느 날 홈즈를 죽였지만, 결과는 오히려 홈즈를 더욱 큰 인물로 만들어 버렸어. 좌절한 그는 질투심과 앙심을 품고 홈즈의 명성에 치명타를 입히려고 쓸개를 씹어. 하지만, 결국 대중의 욕망에 굴복하고 『바스커빌 가문의 개』를 쓰고 말아. 하지만, 여기엔 도일을 모욕한 홈즈를 향한 치명적인 복수의 칼날이 담겨 있어. 그러니까, 아주 독특한 방식으로 홈즈의 우상화 작업에 사망 선고를 내린 거야. 즉, 홈즈가 얼마나 어리석고, 멍청하며, 오류와 자기 독선에 빠진 인간인지를 낱낱이 밝힌 거지. 물론 아는 사람만 알 수 있게 말이야.

 원제 『The Hound of the Baskervilles』에서 ‘Basker’는 가운데 철자 ‘s’가 빠진 Baker로 생각할 수 있어. ‘Villes’이 마을을 뜻하니까, 바스커빌은 즉, 베이커 마을, 즉, 베이커 거리로 볼 수 있는 거야. 즉, 홈즈의 사무실이 있는 곳이지. 결국, 이 소설 제목에 숨겨진 암호는 홈즈가 사는 ‘베이커 가의 사냥개’가 되는 거야. 그러니까, 도일은 대영제국의 슈퍼히어로 홈즈를 사냥개로 깎아내린 거지. 사실 셜록 홈즈는 여러 차례에 걸쳐서 탐정을 사냥개에 비유했어. 『주홍색 연구』에서도 왓슨이 홈즈의 첫인상을 이렇게 묘사하니까.

   
  감탄과 중얼거림, 휘파람, 격려와 희망을 외치는 소리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그는 혈통 좋고 잘 훈련된 개를 생각나게 했다. 수풀을 가로질러 오른쪽으로 달려갔다가 다시 왼쪽으로 달리고, 흔적을 찾으면 흥분해서 줄곧 끙끙대는 개 말이다.  
   

 물론 탐정과 개의 동일시는 근거 없는 비방만은 아냐. 뭔가 단서를 캐내는 수그린 자세, 그리고 ‘늑대 사냥꾼들의 나팔 소리를 듣고 달려가는 늙은 개처럼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는 그 활동들에 대한 암묵적인 메타포로 볼 수 있어. 재밌는 건, 소설 속 바스커빌 가문의 개는 전설 속에 전해지는 지옥 불에서 온 무시무시한 살인견이라는 거야. 즉, 홈즈의 정체성이 악의 상징으로 비유되면서 도일에게 상징적 살해를 당하는 거야.

 도일이 돌려주는 모욕은 여기서 그치지 않아. 홈즈는 이 사건의 핵심을 ‘개를 살인 도구로 쓴 자’의 소행으로 보고, 곤충학자 잭 스테이플턴을 범인으로 지목해. 그 사람은 마지막에 도망치다가 안개 자욱한 늪에 빠져 죽어. 그 후, 홈즈가 최종 정리하는 사건의 개요를 들어보면, 앞뒤로 너무나 말끔해서, 우리가 그의 추리에 문제를 제기하는 게 불가능해 보여. 근데, 잘 살펴보면, 홈즈는 여기서 엄청난 실수를 했어. 왜냐면, 범죄자는 사건의 결과로 가장 큰 이득을 보는 사람인데, 잭 스테이플턴은 얻은 게 아무것도 없거든. 게다가 처음 살인의 동기부터도 너무 허술해. 유산을 노렸으면서도 범행 대상 근처로 이사와 살고 있다는 건 너무 속 보이는 처사인데다가, 개를 이용해 상속자를 놀라게 해 죽이겠다는 건데, 그 커다란 개를 데리고 돌아다니는 부주의함도 그렇지만, 개가 상속자를 만났을 때 놀라게 할지, 물지, 그냥 도망갈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고, 또 놀랐다고 심장마비에 걸릴지도 알 수 없는 일이지. 또 그런 식으로 살인을 저질렀다 쳐도, 굳이 런던으로 여행 와서 새로운 상속자를 미행해서 홈즈가 알아차리게 하고 굳이 수사에 뛰어들게 할 이유가 있을까. 최종 결론이 난 후에도, 도무지 실익이 없는, 즉 동기가 성립되지 않는 그 서툰 인물에게 살인을 뒤집어씌운 찝찝함에 대해 홈즈 스스로도 갸우뚱하면서 얼렁뚱땅 넘어가는 바람에, 어쩌면 한 세기 넘게 문학 역사상 가장 지독한 살인자가 이 텍스트 속에 멀쩡히 은둔하고 있는지도 몰라. 어쩌면 홈즈가 그 진짜 살인자에게 거꾸로 이용당한 건 아닐까, 질문해 볼 수 있어. 홈즈 자신도, 세상의 모든 셜로키언도 모르는 사이에, 홈즈의 권위를 빌어 엉뚱한 자를 공식적인 살인자로 몰아놓고 자신의 완전범죄를 완성한 그 희대의 살인마, 그는 누구일까.

 난 공식적인 살인자인 스테이플턴의 아내, 베릴이라는 여자를 용의자로 지목해. 거대 재산의 상속자인 헨리 바스커빌은 늘씬하고 우아하고 아름다운 베릴에게 한눈에 반해버려. 당연히 결혼을 꿈꾸지. 사실 소설의 끝을 지나 결국 시간이 지나면 실질적인 상속자는 이 여자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어. 게다가 베릴이 황무지에서 왓슨을 처음 만나는 순간, 이렇게 털어놔.

 “그는 바스커빌 저택의 주인으로 꼭 살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돌이켜보면 남편의 살해 동기를 시작부터 고백한 거야. 왜냐고. 완전 범죄를 저지르고 그걸 남편에게 뒤집어 씌울 생각이었으니까. 코스타리카의 미인대회 출신이기까지 한 아내를 그저 평범한 삶 속에 가뒀다는 게 남편 살해의 욕망을 크게 자극했을 거야. 물론 홈즈가 무의식적으로 여러 차례 그 진실에 근접하긴 해. 베릴을 구해줬을 때, 남편 욕을 쏟아내면서 여자나 밝히는 추잡한 인간이라고 비방하는 걸 보고, 홈즈가 본능적으로 물어. “부인은 남편이 잘되길 전혀 바라지 않으시는군요!”

 맞아. 이 연쇄 살인으로 최대 이익을 보는 사람은 바로 베릴이야. 왜냐면 그토록 증오하던 남편은 죽었고, 거부와의 행복한 결혼 생활이 기다리기 있으니까. 모든 걸 조작한 건 그 여자야. 유일한 목격자인 마부에게 들킨 인상착의도 비슷하고, 끊임없이 남편이 범인이라고 흘렸고, 상속자를 멋지게 유혹했어. 게다가 어이없게도 홈즈를 사건 현장으로 끌어들였어. 그 유명한 해결사를. 왜? 홈즈가 개입돼야만 자신의 범죄를 완성할 수 있기 때문이지! 세헤라자데가 재밌는 얘기로 목숨을 지켰다면, 베릴도 비슷한 방법을 쓴 거야. 칼도 총도 위협도 없이, 뛰어난 상상력과 적절한 언변으로, 엉뚱한 희생자가 만인의 환호 속에 응징당하는 완벽한 살인을 저지른 거지. 근데, 홈즈는 그 사실을 놓쳤고, 대신 무고한 자를 죽이고 악당의 승리를 내버려뒀어. 경쟁심에 눈이 멀고 증오심에 사로잡힌 도일은 이렇게 홈즈의 치명적 실수를 노출해서 2번의 상징적 살해를 한 거야. 자신에게 창조 당한 피조물 주제에 창조주를 초월해 버린 놈을 제거함으로써 스스로 만든 홈즈 콤플렉스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친 거지.

 따지고 보면, 도일은 홈즈를 단순히 글쓰기의 방해자가 아니라, 일종의 위협적인 분신으로 여겼던 거야. 모파상의 ‘오를라’처럼 정신을 엄습해버리는 분신으로 말이야. 엄청난 성공을 가능하게 해준 누군가를 이렇게까지 증오하는 게 가능할까. 자신의 성공이 캐릭터 덕이었다는 게 그토록 기분 나빴던 걸까. 물론 ‘우리에게 좋은 일을 한 사람을 우리는 왜 원망할까?’라는 인간의 양가성은 오랜 정신분석학의 단골 메뉴야. 우리가 잘 되기를 바라는 사람은 겉으로는 유익하지만, 실은 우리를 약점과 격렬히 대면시켜. 그래서 남한테 진 이 막대한 빚은 성인이 된 다음에도 유년기의 근본적인 무능력을 끊임없이 잔인하게 상기시키는 거대한 부모의 얼굴처럼 꼿꼿이 우리 앞에 존재하는 거야.

 자, 결론적으로 나의 제멋대로의 추리비평을 통해, 이 소설을 한때는 사랑했지만 보잘것없는 남자에게 배신당하고 열정이 점점 증오로 변해간 한 유부녀의 범죄. 이렇게 정리할 수 있지만, 우리가 내릴 결론은 한 단계 더 나아가야 할 거 같아. “완벽한 육체와 우아한 드레스 덕분에 그녀는 인적이 드문 황무지에서 마치 기묘한 환영처럼 보였다.” 이렇듯, 베리를 귀신처럼 묘사한 부분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홈즈를 속인 그녀는 훨씬 예전에 휴고 바스커빌에게 납치당했다가 탈출했지만 추격당하고 결국 벼랑에 떨어져 비참하게 죽은 처녀의 자리를 차지한 걸 수도 있다고 봐. 그 오랜 비극의 길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 (어쩌면 빙의된 채) 그 여자의 원혼에 화답한 거라고 말이야. 휴고는 여자를 쫓다가 스스로도 개에 쫓겨 죽었는데, 그의 후손은 개를 구하려 애쓰다가 여자의 손에 죽었으니까, 이 소설의 결말에 숨겨진 속죄의식의 전모를 잘 살펴본다면, 반드시 씁쓸하지만은 않아. 왠지 명탐정의 실수라는 훌륭한 우연의 도움으로 완성된 필연적인 정당한 복수 같단 말이지.

 살펴보면, 대공황 때마다 멋진 탐정이 등장했어. 필립 말로, 메그레 경감, 내 사랑하는 괴도 뤼팽까지. 아마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공황 상태일 땐, 더 많은 사람이 범죄에 빠져들기 때문이겠지. 덕분에 홈즈는 그 시절 민중들이 꿈꾼 탈출구의 가이드가 되었고. 탐정의 숫자를 압도하는 범죄의 시대, 예전과 별반 다를 것 없는 혼동의 우리 시대, 그 원인제공자들의 칙칙한 음모들을 파헤쳐 줄 영웅이 나타날만한 타이밍이기도 한데 말이야. 여긴 누구 없을까. 만약이 시대에도 홈즈가 살아 있다면, 화성 연쇄 살인 사건을 다룬 영화「살인의 추억」의 엔딩은 그처럼 미제로 열리지 않고 끝장을 봤을 수도 있을 텐데. 거대 반도체 회사가 수년 후에야 겨우 산재를 일부 인정했지만, 애초에 잘못된 역학 조사 때문에 제대로 밝힌 것도 아닐진대, 그때 사건이 발생하자마자, 홈즈를 투입시켰다면 어땠을까. 쉰 살이 넘은 여자 혼자 왜 반년이 넘게 저 높은 크레인 위에서 버티고 있는지, 파헤쳐지는 강산의 외양이 결국 무엇의 증거인지, 이 신경쇠약 직전의 한반도를 해결해줄 시국탐정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거 아니? 도일이 실제로 작가에서 실제 현실세계의 탐정으로 진화했다는 거. 그는 많은 독자한테 범죄를 해결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불의를 못 참고 전선으로 나섰었어. 요즘 트위터 세계에서 박애주의적 열정의 화신이 된 어느 배우처럼, 누명 쓴 자들을 위한 구명운동에 나서고, 독재자들의 범죄를 고발했어. 그래서인지, 도일의 묘비명은 참 독특하게 남아 있어. “기사, 애국자, 의사, 작가. 강철처럼 진실하고 칼날처럼 곧았다.” 그의 정체성 중 작가가 네 번째에 불과하다니. 놀랍지 않니?

 이 순간, 다시, 콜롬보가 생각나. 그는 전혀 시공간이 관련 없는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에 형사 콜롬보로 등장해. 허구와 실재가 묘하게 겹쳐지는 그 중간 지대에서 말이야. 그 사람은 알고 보면 천사였어. 묘한 능력을 갖춘. 스치기만 해도 그 사람들 마음속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능력 말이야. 그는 인간의 속물적인 삶을 욕망하는 바람에 천사의 능력을 버리고 한낱 형사로 살아가지만, 그래도 우리가 추구하는 탐정의 본질은 ‘남의 마음속 목소리를 들을 줄 아는 능력’이 아닐까, 라고 속삭여 줘.

 퀴즈의 여담인데, 한참 후, 그 둘이 다시 만났을 땐 여자는 이미 결혼 후였고,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 있었어. 남자도 마찬가지. 하지만, 남자의 마음속엔 질문이 하나 남아 있었어. 그 여자가 자신의 메시지를 해독했던 걸까. 그러고도 거부했던 걸까. 혹은 전혀 읽어내지 못했던 걸까. 그 어긋난 우연의 결과가 결국 어떤 필연으로 재등장할까. 그래, 사실 그 남자는 여자의 마음속 목소리가 너무 궁금해, 미칠 거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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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셜록 홈즈 : 바스커빌 가문의 개>  
   아서 코난 도일 / 남명성 옮김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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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하나 2011-07-08 1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퀴즈 정답 덕에 오늘도 분위기 므흣합니다아 ㅋㅋㅋ

JH 2011-07-08 1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역시 분위기가 점점 무르익어 묘~해지는군요 :) 훗

펭귄 날다 2011-07-08 14: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퀴즈의 답은 그것이었다. 무엇보다 난 추리소설을 다시 볼 수 있어서 기뻤다.

마리벨 2011-07-08 2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 남의 목소리를 읽을 줄 아는 능력~ "
너무 너무 갖고 픈 능력~~~
홈즈에게 물어봐야 할까? ^^

tupique 2011-07-09 04: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멋진 글 잘 보았습니다! 전에 형사나 과학수사대에 관하여 "죽은자를 위해 하는 현대판
굿을 하는 사람들"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이야기와 더불어 여기서는 작가가
그토록 증오하기 까지한, 독자적으로 생명력을 갖추었다고 해도 무방할 소설 속 인물의
에너지를 느낄 수 있었어요! 특히 작가가 홈즈를 번견으로까지 깎아내리려 했던 것도
흥미로웠습니다~ 이야기란, 말씀하신대로 여기저기 헛점이 보여도 우리를 놀라우리만큼
빠져들게 하는 것 같아요~ 그런 이야기의 힘에 대하여 다시 생각해보는 좋은 시간
이었습니다~!

수이 2011-07-11 0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이런 게 바로 추리소설의 마력이로군요. 드디어 미루고 미루던 숙제를 시작해야 할까봐요.
 

 

  무도회가 끝난 뒤

  
정혜윤(CBS 라디오 프로듀서) 

 

 잔인한 동쪽별! 나에게 퀴즈를 내다니. 그것도 부족해서 쉽게 풀 수 있을 거라고 하다니. 너, 살면서 내가 정답을 맞히는 걸 본 일이 있니? 내 눈엔 네 퀴즈가 난수표 암호처럼 보이고 식욕을 잃었어. 내가 세계 평화를 원한다 해도 난 암호 해독을 못 해서 첩보원이 될 수 없을 거야. 내가 정의를 위해 탐정이 된다 해도 나는 곧 해고되고 굶주리고 쓸쓸하게 죽어갈 거야.

 사실 난 정답인 줄 알았던 것이 오류고 오류인 줄 알았던 것이 참인 세상에 매력을 느껴. 나쁜 놈인 줄 알았던 놈이 알고 보니 착한 놈인 이야기는 흥미진진하고 착한 놈인 줄 알았던 놈이 알고 보니 나쁜 놈인 이야긴 진짜 무서워.

 이에는 이, 눈에는 눈. 나도 퀴즈를 하나 낼까 해. 내 문제는 이거야. 너는 우연이 모든 걸 좌우한다고 생각하니? 아니면 환경이 모든 걸 좌우한다고 생각하니?

 이런 이야기가 있어.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해.

   
  지금 여러분은 인간은 자기 스스로는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분별하지 못한다고 말씀하시는군요. 모든 게 환경에 달렸고 환경이 인간을 해칠 수 있다고 말이지요. 하지만, 저는 우연이 모든 걸 좌우한다고 생각합니다. 우연한 사건이 제 인생을 어떻게 바꿔놓았는지 들려 드릴까요. (……) 제 인생은 전혀 환경의 지배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게 아니라 전혀 다른 뭔가에 지배당했지요.  
   

 이렇게 말한 사람은 이반 바시리예비치야.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그에게 이야기를 더 하길 권했겠지. 그 자리가 있기 수십 년 전인 1840년대에 그는 B라는 이름의 여자를 사랑했어. 아주 뜨겁게 사랑했어. 그녀의 용모는 뭐라 말할 수 없이 아름다웠어. 훤칠하고 늘씬하고 어느 여왕 못지않게 기품 있었어. 온몸에서 매력과 젊음이 뿜어져 나왔어. 당시 그는 활발하고 재치 있는 대학생이었어. 돈도 많았고. 그는 저녁 파티와 무도회를 좋아했어. 어느 무도회 밤 B는 장밋빛 허리띠를 맨 하얀 드레스를 입고 새끼 염소 가죽으로 만든 흰 장갑을 끼고 이반을 사로잡아버렸어. 둘은 그날 밤 지치지도 않고 함께 춤을 추었어. 이반은 더 이상 자기 자신이 아닌 것 같았어. 다른 존재가 된 것 같았어. 천상에라도 있는 것처럼 행복했고 죄악 따위는 모르고 오직 선한 일만 할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혔어. 그 무도회장에는 B의 아버지도 있었어. 아주 잘생기고 훤칠한 노인이었어. 빛나는 미소는 딸과 꼭 빼닮았고 가슴은 군인답게 앞으로 도드라져 나와 있었어. 노인과 딸은 춤을 추기 시작했는데 무도회장의 모든 사람이 숨죽이고 지켜볼 정도로 우아했어. 이반은 뭉클한 감동에 사로잡혔어. 춤이 끝나자 B의 아버지인 대령은 이반에게 B를 데려다 주었어. 이반은 너무나 행복해서 뜻하지 않은 불길한 일이 그 행복을 깨트릴까 두려울 지경이 되었어. 무도회가 끝나고 나서 이반은 집에 돌아왔지만 잠을 잘 수가 없었어. 아버지와 춤추던 B의 모습이 너무나 생생했던 거야. 이반은 밖으로 나와 B의 집 쪽으로 산책을 갔어. 그런데 새벽빛 속에서 뭔가 시커먼 것이 움직이는 것이 보이고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들려왔어. 이반이 가까이 가서 보니 시커먼 것은 검은 군복을 입은 병사들이었어. 그들은 도망가려는 타타르인을 매질하는 중이었어. 허리춤까지 벌거벗겨진 어떤 남자가 묶여 있었고 그 옆에는 어쩐지 낯익은 키 큰 군인이 있었어. 타타르 남자는 양쪽에서 쏟아지는 매질에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형제들 자비를 베푸세요, 형제를 자비를 베푸세요.’하고 흐느꼈는데 그때마다 쏟아지는 곤봉세례만 받았어. 타타르인의 몸은 살이 터지고 얼룩덜룩 끈적끈적해졌어. 그런데 그 옆에 있던 키 큰 군인은 시종일관 단호한 걸음걸이로 걷기만 하다가 한마디 했어.  

“대신 네놈을 손봐줄까? 계속 그런 식으로 할 텐가?”

그리고는 가죽 장갑을 낀 손으로 병사의 얼굴을 가격 했어. 그 병사가 타타르 남자의 새빨간 등을 곤봉으로 충분히 세게 내려치지 않았다는 이유로. 키 큰 군인은 고개를 돌리다가 이반과 눈이 마주쳤어. 그런데 키 큰 군인이 누구였을 것 같니? 바로 B의 아버지인 대령이었던 거야.

 이반은 생각했어. '그들은 내가 모르는 뭔가를 알고 있었던 게 분명해.' 하지만, 아무리 해도 자신은 모르고 군인들은 아는 게 뭔지 알 수가 없었어. 결국, 그는 군대에 들어가지 않았고 그뿐만 아니라 세상 어디서도 자릴 찾지 못했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고 자기 입으로 말하게 돼버렸어. 그러면 사랑은 어떻게 됐나요?” 사람들이 물었겠지.

   
  사랑은 그날부터 시들해지기 시작했어요. 그녀가 평소처럼 웃음 띤 얼굴로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으면 나는 곧바로 들판에서의 대령이 떠올랐고 그러면 어쩐지 마음이 불편해지면서 기분이 안 좋았어요. 그녀에 대한 사랑은 그렇게 식어갔습니다. 자, 이제 살다 보면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일들이 우연히 일어나고 또 그 때문에 한 인생이 송두리째 변해 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아셨겠지요. 그런데도 당신들은 말하기를…….”  
   

 이렇게 이 이야기는 끝나. 톨스토이의 『무도회가 끝난 뒤』라는 작품이야. 어때, 네 생각은 어떠니? 인간을 지배하는 게 우연이니? 환경이니?

 나는 네 대답이 아니라 네 행동을 짐작할 수는 있어. 아마도 그런 일이 너에게도 일어났었다면 네 사랑 역시 식고 말았겠지. 그리고 먼 훗날 나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인간이 되어 버렸어요, 란 말을 후회도 비탄도 없이 말하게 되었겠지. 이 작품은 폭력에 대한 저항 이야기인 동시에 우리가 어떻게 사랑을 잃어버리는가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겠지. 우리가 뜨겁게 사랑했던 사람을 잃어버리게 만드는, 그런 기막힌 우연은 정말 우연이기만 한 것일까? 동쪽별. 우리가 우연이라고 말할 때 그 순간 우리는 그 우연이 발생하게 된 필연성을 미처 알지 못했다고 고백하는 것 아닐까? 우리가 우연을 말할 때 우리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다고 고백을 하는 것 아닐까? 난 현실이 되어버린 우연은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해. 셜록 홈즈라면 내 생각에 동의할 거야. 그의 추리 세계에 우연은 없으니까.

 가끔 이런 생각도 들어. 필연이란 게 눈앞에 난 필연적이야! 라고 말하며 등장한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하고? 수만 개의 우연이 모여서 필연이 되지. 우연이 필연이 되는 과정이 바로 우리 삶 아닐까? 그러니 필연은 먼 훗날 돌이켜 다시 생각할 때 여전히 떠오르는 우연이 옷을 바꿔 입은 것에 불과한 것 아닐까? 그러니 우리의 자유, 우리의 존재, 우리의 우리됨, 우리의 인간됨, 이것들은 항상 떨고 흔들리며 불완전하게 좁은 길을, 그냥 좁은 게 아니라 몹시 좁은 길을 뚫고 나가며 만들어지는 것 아닐까?

 나는 오늘 밤 무더위 속에서 내가 사랑했으나 잃어버렸던 것들을 헤아려보고 싶다. 윤동주의 서시처럼. 난 오늘 밤 너무 조심스럽구나. 난 오늘 밤 바람 한 줄기가 너무 그립구나. (퀴즈는 그립지 않고)

 나는 이 작품을 읽으면서 보들레르의 에세이 한편이 떠올랐어. 그 이야긴 다음 주에 해줄게. 이 글을 쓰는 지금 너무 더우니. 그리고 이 무더운 여름밤에 너에게 시를 읽어주고 싶으니 우선 이번 주는 시로 내 대답을…….

   
 

너무나 그들을 사랑하고 싶었지만
사랑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했던 이유 몇 가지가 여기 있어요.
한 사람은 긴 속눈썹을 광대뼈 쪽으로 떨구는 수법을 잘 썼죠.
아주 뛰어난 가리개를 만들어 그녀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척했어요.
다른 사람은 여름에 두 팔로 원을 만들어 더운데도
망가진 울타리 양쪽으로 떨어지는
야생 살구를 주우려고 했어요. 하지만 그녀는 한쪽에서만
주울 수 있었어요.
한 사람은 야심이 많아, 얼굴이 상기되곤 했었죠.
빗장뼈까지 말이에요. 몸매가 좋은 겁쟁이였어요.
한 사람은 운모 조각처럼 날카롭고 반짝거렸죠
도톰한 입술을 가졌지만, 속은 텅 비었었죠.
한 사람은 위험을 즐기는 사람이었는데
다른 사람들이 무방비 상태였을 때 이미 도망갈 길을 마련해 놓았다가
사라져 버렸답니다.
한 사람은 몽유병에 걸려 순수함에 대한 꿈을 꾸면서
물 마른 협곡에 담배를 던져버리고
특권이라는 버팀 다리 위를 걷곤 했죠. 
                                 참 순수한 행위였죠. 
 

                                      -『가장자리에서 불 비추기』 에이드리언 리치-

 
   

 에이드리언 리치는 ‘어둠의 아름다움은 그것이 너로 하여금 보게 한다는 데 있다’고 다른 시에서 말하고 있어. ‘어둠의 아름다움은 너로 하여금 보게 한다.’ 나는 사랑하고 싶었지만 결국 사랑할 수 없게 되었던 사람들을 생각하며, 그리고 어둠 속에서만 보였던, 아니 차라리 어둠 속에서 더욱 두드러졌던 진실들을 생각하며, 사랑하게 될 줄 상상도 못했으나 나중에 사랑하게 되었던 사람들을 생각하며 계속 이 시를 떠올려. 사랑을 하는 동안에 누구보다도 사랑을 잘했던 사람들을 생각하며 계속 이 시를 떠올려.

 ------------------------------------------------------------------------  

 

  <무도회가 끝난 뒤>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 박은정 옮김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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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하나 2011-07-05 0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래 머리챌 휘어잡고 흔들어대는 우연의 장난 때문에 괴로운 1인ㅠ- ㅠ

JH 2011-07-06 0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문득문득 내가 살고있는 삶이,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에 의해서, 내가 힘써볼 틈도 없이
어떤일이 일어나고 그 일에 반응하는, 그런 삶을 살고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때가 있어요.
우연과 환경. 뭐라 딱 꼬집어 말할 수 없는 묘한 문제네요 :)

펭귄맘 2011-07-06 0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어흑, 시 읽다가 눈물을 훔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식지 않는 사랑이란 건 존재하지 않는걸까요. 흑흑흑.

마음껏 2011-07-06 1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사랑한다는 일은 나이가들수록 너무 많은 생각을 만들어내는 것 같아요.
어릴 적엔 그 사랑을 둘러싼 환경을 탓하기도 했었고
우연한 만남으로 시작된 사랑을 탓하기도 했었다가...
지금은 머릿속 뒤죽박죽. 모르겠다만 남아버렸네요. 아이쿠...
 

 

  <셜록 홈즈> 살인의 추억 (1)

  
민규동(영화 감독) 

 

 안녕, 커피진주.

 저번 너의 편지에 담긴 희망 버스 이야기에 감동하면서, 문득 그 버스에 ‘희망’이라는 단어를 붙인 사람이 누구일까, 궁금해졌어. 가만히 앉아 있는 나의 부끄러움조차도 부드럽게 달래주는 그 낯익고도 참 따뜻한 단어. 그 단어는 모험심에 불타던 청년 아서 코난 도일이 북극을 향해 올라탔던 커다란 배의 이름을 떠오르게 했어. ‘희망호’. 그래서 난 이번엔 대뜸 도일의 책들을 읽었단다. 그 에너지에 힘입어 퀴즈를 하나 내어볼게.
 
 이게 무슨 상황 같니? 20년 전 내가 목격했던 장면이야.
 잘 관찰하고, 추리해 봐.

 여름 어느 카페였어. 한 여자와 한 남자가 오랫동안 서로 마주하고 있었어. 서로 특별한 사이임이 틀림없었지만, 왠지 마치 그 만남이 마지막인 것처럼 비장한 기운이 흐르고 있었어. 그 남자가 침묵을 깨고 여자에게 무슨 말인가를 하려고 했어. 여자가 ‘그만…’ 하는 동작으로 손을 올려 남자의 입을 막아버렸어. 남자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아꼈어. 그래도 아쉬운지 남자는 냅킨 위에 뭔가를 쓰기 시작했어. 이렇게 말이야.

3 *4*2 *45.  

여자는 초조하게 시계를 들여다보다가 힐끗 종이를 내려다봤지만 무슨 말인지 단번에 알아볼 수 없었어. 남자는 한 문장을 덧붙였어.

*1*** *2.  

여자는 순간 움찔하는 눈빛을 보였지만, 이내 표정을 감추고, 가야겠다고 일어섰어. 남자는 냅킨을 접어 여자의 핸드백에 구겨 넣었어. 여자는 빠른 걸음으로 사라졌고, 남자는 아쉬운 듯 그 뒷모습을 지켜봤어.

 홈즈라면, 여자의 향수, 짙은 화장, 굽이 닳은 힐, 두툼한 핸드백, 포크를 쥔 초조한 손가락, 먹다 남긴 음식, 자주 꼬는 다리, 남자의 굵은 시계, 깨끗하게 비워진 접시, 흙 묻은 운동화, 엷은 파마까지, 특별할 것 없는 이 상황에 숨겨진 다양한 기호들을 관찰해내고, 보통 사람들이 생각해낼 수 없는 묘한 결론을 추론해 냈을 거야.

 잘 알다시피, 도일은 ‘셜록 홈즈’라는 희대의 즐길만한 인물을 창조해내서 ‘증거는 진실을 남긴다’라는 CSI의 전통적인 사훈을 대중들에게 확고하게 다져준 선구자야. 그 사람 소설 중에, 아주 어릴 적부터 날 셜로키언으로 만들어 버린 잊지 못할 장면이 하나 있어. 어느 날, 홈즈가 신고를 받고 파트너 왓슨과 함께 사건 현장에 도착했어. 그런데 한참을 살피던 홈즈가 이렇게 속삭이는 거야. “범인은 아직 이 현장에 있어.” 우와, 나는 서스펜스가 폭발하던 그 장면을 잊을 수가 없어. 그때 범인은 미처 도망 못 가고 창가 커튼 뒤에 숨어 있었거든. 그때 이후로 어떤 범죄 영화를 보더라도, 혹시 범인이 그 자리에 아직 남아 있지 않을까, 하는 이상한 추리 습관이 생겨 버렸어. 하지만, 이번에 그의 전기를 읽어보니까, 홈즈의 매력보다 더 흥미로운 사람이 있는데, 그건 바로 그를 탄생시킨 아서 코난 도일이더구나.

 도일은 에드거 앨런 포, 애거서 크리스티, 엘러리 퀸과 어깨를 겨누는 최고의 탐정소설가야. 하지만, 그런 운명이 예정돼 있던 사람은 아니었어. 여느 불운했던 청년과 다를 바 없었지만, 그래도 당대의 가장 유망 직종이었던 의사의 길을 걷고 있었던 사람이었고, 작가라는 직업은 희망 리스트에 아예 없었으니까.

   
  난 그 다양성과 모험에서 내가 생각할 수 있는 한 누구도 따라잡지 못할 인생을 살았다.  
   

 스스로 자서전 서문에 이렇게 썼을 정도야. 정 많은 엄마, 알코올중독자 아빠랑 살았고, 찢어지게 가난했다가, 큰 부자가 됐다가 또 거지가 되기도 했고, 일반 개업의, 군의관, 특파원, 국회의원 후보, 크리켓 선수, 가정적인 남자, 부인 이외의 연인을 가진 남자, 이혼법 입법엔 강렬한 여권신장의 지지자로 동시에 여성 참정권론자들에겐 광적인 증오를 퍼붓고, 반카톨릭주의자면서 신자들의 권리를 위해 싸우고, 지독한 애국자면서 반역죄의 사형수를 지지하고, 과학자면서 심령술을 믿었어. 정말이지 복잡하고, 순진하면서, 단순하고, 역설적이며, 지독히 독단적인 사람이었어. 그의 인생만큼 그의 소설도 복잡 다난한 역사를 거쳐.

 도일은 워낙 가난했던 탓에, 흥미가 없는데도 궁여지책으로 에든버러의 의과대학을 다녔어. 하지만 거기서 홈즈의 모델이 된 은사, 조셉 벨을 만나게 돼. 그가 기억하기엔, ‘음악가처럼 길고 예민한 손가락을 지닌 마른 남자, 날카로운 회색 눈, 빗질하지 않은 검은 머리에 고음의 목소리’의 소유자야. 그 교수는 강의 중에 낯선 환자를 세워놓고 연역적으로 정체 맞추기 시범을 자주 보여. 예를 들면, 굉장히 예의 바르면서도 모자를 벗지 않는 환자, 그는 갓 제대한 군인이다. 신발에 흙은 묻혀 온 여자 환자는 도로가 아니라 특별한 길로 돌아온 것이고, 오른손의 피부염은 리놀륨 공장 노동자라는 증거. 팔뚝 근육은 발달했는데 손이 나긋나긋하다면 직업이 세탁부다. 이런 식이었어. 벨의 관찰과 추론에 내내 감탄했던 도일은, 훗날 그를 홈즈의 모델로 삼게 돼.

 얼마 후, 도일은 정형외과 의사 자격증을 따. 하지만, 당시 병원을 개업해도 돈벌이가 쉽지 않았기에 잔머리를 굴려. 그래서 반드시 아파야만 환자가 오는 안과를 열어. 물론 불법으로 말이야. 그랬더니, 손님이 올 리가 만무하지. 그래서 심심한 차에 글을 쓰기 시작하는데, 그 파리 날리던 6개월의 한가로움이 도일을 작가로 초대하게 된 계기가 돼. 물론 도일은 애초에 뛰어난 상상력의 소유자이긴 했어. 「혈액 속의 생사」라는 논문에서 사람을 현미경 크기로 줄여서 혈액 속의 여행하고 세포를 살펴보는 구상을 했었는데, 수십 년 뒤엔 그 아이디어를 살린 「환상여행」이라는 오스카상 수상 영화가 태어났으니까. 웃긴 건, 도일 병원 근처의 포목상 주인이 도일의 환자였는데, 그때 점원이었던 H. G. 웰스가 도일의 수다를 엿듣고는 훗날 SF 소설의 신기원을 이뤘다는 거야. 생활 반경 속 주변 인물이 정말 중요하다는 진리?

 물론 멀리 떨어져 있던 한 선배도 도일이 작가로 점프하는 데는 훌륭한 본보기가 됐어. 어느 날, 최초의 추리작가 애드거 앨런 포의 단편을 읽고 반한 거야. 당시 막 만들어진 ‘탐정’이라는 단어를 ‘오귀스트 뒤팽’이라는 캐릭터로 재현시켰던 「황금 벌레」였는데, 연이어 「모르그 가의 살인사건」을 읽고는 포의 추리 소설 기법에 완전히 반하게 돼. 도일이 말년에 심령술에 빠진 것도 어쩌면 포의 초현실적인 분위기 때문이었는지도 몰라. 그렇게 멘토 벨의 이미지와 레퍼런스 포의 스타일이 합쳐져 『주홍색 연구』라는 작품 속에 처음으로 홈즈가 등장하게 돼. “범인의 어리석음이 아니라 자기 실력으로 사건을 해결하는 과학적인 탐정을 만들겠다”는 포부가 실현되는 순간이었어. 물론 포의 기법을 지나치게 반영한 게 찔렸는지, 『주홍색 연구』에선 홈즈가 포를 아예 무시하는 장면이 나와. 왓슨이 홈즈에게 “자넨 에드거 앨런 포의 뒤팽 탐정을 연상시키는군”라고 찌르니까, 홈즈가 무뚝뚝한 어조로 “뒤팽은 아주 형편없는 친구야!”라고 하며 이렇게 받아쳐.

   
  훈련된 눈에는 트리초폴리의 검은 재와 새 눈의 보푸라기 같은 흰 솜털 사이의 차이가 마치 양배추와 토마토 사이의 차이만큼 확연히 드러나지.  
   

 홈즈는 매사에 이런 식인데도, 왓슨은  그를 냉정하고 정확하면서도, 놀랄 만큼 균형 잡힌 정신을 가졌고,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추리 기계로 묘사하지. 집요한 관찰력과 놀라운 추리력과 해박한 지식, 3박자를 완벽히 갖춘 홈즈는 140종의 담배를 구별할 줄 알아. 수십 종의 향수도 구분해. 놀라서 갸우뚱하는 왓슨한테 홈즈는 늘 이렇게 충고해. “자네는 보기만 하지 관찰을 안 해.”

 잘난 척과 있는 척의 대마왕, 결론을 꼭 숨겼다가 막판에 서프라이즈로 터뜨리길 즐기는 미혼의 홈즈는 늘 이렇게 개똥철학을 늘어놓아. “사랑은 감정적인 문제라네. 감정적인 건 뭐든, 내가 무엇보다 중요시하는 냉정한 이성에 반하는 것이지. 난 판단력을 잃어버릴 위험이 있기 때문에 결혼 같은 건 하지 않을 생각일세.” 그리고 홈즈는 석탄 통에 시가 보관하기, 페르시아제 슬리퍼 발 넣는 부분에 담배 넣어두기, 잭나이프로 답장하지 않은 편지를 벽난로에 꽂아놓기 등, 게다가 당시 탁월한 국부마취제라고 알려진 ‘기적의 신약’ 코카인 중독까지, 성격과 취향에서 어디 하나 모나지 않은 데가 없는데, 이 홈즈의 독특한 기벽을 훗날 많은 작가들이 모방해. ‘젓지 말고 흔들어 섞은’ 드라이 마티니와 벤틀리 자동차, 발터 PPK 자동권총을 애용하는 007을 창조한 이언 플레밍까지 말이야.

 도일은 이렇게 멋진 남자를 창조해 내면서 에르큘 포와르에서 미스 마플을 넘어, 제임스 본드까지 이어지는 탐정 시리즈의 선구자로 발을 내디뎠지만, 그 과정이 그렇게 쉽진 않았어. 실상 원고는 여기저기 다 거절당하고 결국 ‘싸구려 선정적인 문학’으로 명성이 난 출판사에 인세도 못 받고 헐값에 넘겨졌거든.

 훗날, 자기 역시 ‘대기실에서 기다리던 사람이었다.’라고 애써 농담처럼 얘기하지만, 몇 달 내내 손님이 한 명도 없었던 가짜 안과 의사 시절, 엄청난 분량을 쏟아내면서 과연 성공할까, 내심 심각히 불안해했어. 하지만, 그때 막 철도여행 시대가 와서 도시 통근자가 급증했고, 여행자들의 읽을거리가 필요했던 때라, 결국 그를 독점 공급하겠다는 잡지 「스트랜드」와의 운명적인 만남이 성사돼.

 첫 단편 「보헤미아 왕국 스캔들」은 자고 일어났더니 성공한 경우야. 사람들이 홈즈를 보려고 가판대 앞에 줄을 서기 시작했거든. 독자들은 이어지는 시리즈 속에 왓슨은 의심하는 자, 홈즈는 추론하는 자, 경찰은 과신하는 자의 역할 분담을 서서히 즐기기 시작해. 돈을 벌게 된 도일은 어느새 의사 일도 때려치우고 전업 작가가 돼. 하지만, 도일에겐 원치 않는 일이 벌어져. 정작 홈즈가 엄청난 인물이 될 거라곤 전혀 생각 못 한 도일은 죽을 때까지 자기 작품 중에 역사소설이 제일 낫다고 언제나 자평했어. 실은 셰익스피어 같은 대문호가 되고 싶었던 거야. 그래서인지 틈나는 대로 역사 소설을 썼어. 어떻게 됐을 거 같아? 맞아, 그건 전혀 흥행 못하고 평가도 별로였어. 대신 홈즈가 갈수록 유명해졌어. 게다가 사람들은 셜록 홈즈랑 코난 도일을 헷갈리기 시작했어. 왓슨은 서기일 뿐, 진짜 작가는 홈즈이고, 도일은 출판 대리인에 불과하다고 믿었어. 작가를 맨 밑으로 본 거지. 그저 장사치로. 그래서 어느 날 도일이 엄마한테 고민을 털어놔. “엄마, 저 홈즈를 죽일까 해요. 그걸로 영원히 끝내버리는 거죠. 홈즈가 없다면 좀 더 나은 일을 할 수도 있으니까요.” 놀란 엄마는 “아들아, 절대 안 돼!”라고 극구 만류했어. 사실 도일은 홈즈에게 평생 휘둘리며 살 거 같은 불안에 치이기 시작했어. 자기가 만들었는데도 맘대로 죽일 수도 없는 채로 말이야.

 그러는 사이, 문제는 더 커졌어. 리얼리티의 환상이 누적된 결과, 사람들이 홈즈를 실존 인물로 믿기 시작해버린 거야. 도일은 당혹할 수밖에 없었어. 정말 얻고 싶었던 건 역사소설가로서의 명성이었는데, 역사소설은 망하고, 대신 기껏해야 싸구려 소설 나부랭이라고 빈정거리며 ‘경찰소설’ 따위로 분류했던, 즉 돈벌이용으로 쓴 조잡한 작품이 대성공을 거뒀으니까. 도일의 고백처럼, “자칫하면 억지로 글을 써야 하고, 나 자신이 하급문학으로 여겼던 것과 나 자신을 완전히 동일시해야 할 위험”에 처했던 거야. 자신의 최고 장점이 스릴러라고 믿었지만, 외적 상황 때문에 늘 무시했던 코미디 영화만을 만들어야 했던, 그래서 코미디 영화의 대가가 되었던 어느 외국 감독의 비애처럼 말이야. “하지만 내 창조물의 버릇없는 허영을 내게 뒤집어씌운다는 것은 자칫 어리석은 짓이 되지 않겠소?”라고 애써 반문했지만, 그의 열등감은 갈수록 커졌고, 그것이 준 영광의 아이러니는 끝내 폭발하고 말아. 어느 날 전 세계 신문 기사에 “특종! 셜록 홈즈 사망!!!”의 기사가 타전됐거든. 『마지막 사건』이라는 소설에서 ‘범죄의 나폴레옹이며 천재 철학자, 심오한 사상가’인 맞수 모리아티가 논개처럼 홈즈를 껴안고 라이벤바흐 폭포 아래로 사라져. 그 후, 도일은 엄청난 후폭풍을 맞이해. 패닉에 빠진 2만 명이 정기구독을 취소했고, 욕설과 협박과 회유와 간청이 쏟아져. 독자들은 검은 리본을 달고 다녔고 그 충격에 자살하는 사람들도 속출했어.

   
  난 그동안 셜록 홈즈라는 이름을 너무 많이 써먹어서, 흡사 푸아그라 요리를 대할 때와 비슷한 심정인데, 언젠가 그 요리를 너무 많이 먹는 바람에 난 아직도 푸아그라라는 말을 듣기만 해도 토할 거 같다.  
   

 하지만, 홈즈를 죽였다고 행복해졌느냐, 그렇진 않아. 도일도 결국 오래 버티지 못해. 8년 뒤에, 들개에 대한 영국 민담으로부터 영감을 받아서 『바커스빌 가문의 개』라는 소설에 다시 홈즈를 등장시키게 돼. 결과는 상전벽계 같은 대성공이었어. 게다가 도일의 최고작이라는 평가를 얻고, 샬럿과 에밀리 브론테 자매의 고딕풍 스릴러물과 히스가 우거진 도시의 황무지를 무대로 한 토머스 하디의 암울한 소설의 맥을 잇는 탁월한 계승자라는 명예를 얻게 돼. 도일은 ‘홈즈의 부활’이 아니라 ‘죽기 전 사건의 한 기록일 뿐’이라고 선을 긋지. 하지만 엄청난 성원과 치솟는 계약금의 유혹은 결국 셜록 홈즈의 완전 부활을 이끌어내. 『빈집의 모험』에서 홈즈는 완전히 되살아나 독자들 앞에 다시 나타나게 돼. 사실 그를 살린 건 도일이 아니라 독자들이라고 봐야겠지.

 며칠 전, 70년대 최고의 미국 드라마였던 「형사 콜롬보」의 배우 피터 포크가 세상을 떠났어. 기억나니? 30여 년 전 최불암의 ‘수사반장’이 우리의 주말 밤을 훔쳐갈 시절, 미국엔 전 세계를 주름잡던 20세기 최고의 탐정 ‘형사 콜롬보’가 있었잖아. 허름한 바바리코트, 대칭이 깨진 얼빠진 표정, 특유의 코맹맹이 소리로 우리를 휘감았던 세계적인 아이콘이었어. 나중에 안 거지만, 세 살 때 이미 한쪽 눈을 잃고 인공안구를 이식했었다고 하더라. 피터 포크는 떠났지만 난 그 눈빛을 잊을 수가 없단다. 물론, 홈즈처럼 카리스마 넘치는 이미지는 아니었지만, 내 어린 시절을 함께한 세계적인 탐정은 단연 콜롬보였어. 그 아저씨도 우리가 “돌아와요, 제발!”이라고 절절하게 외친다면, 언젠가 다시 부활해서 우리 곁으로 올 수 있을까. 그냥 그렇게 희망을 품어봐.

 다음 편지엔 『바스커빌의 가문의 개』에 숨겨진 못다 한 이야기를 더 할게. 또, 앞에서 낸 퀴즈에 대한 답도 이야기해 줄게. 쉬운 문제니까, 금세 맞출 거라고 생각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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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셜록 홈즈 : 주홍색 연구> 

   아서 코난 도일 / 남명성 옮김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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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하나 2011-07-05 0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퀴즈를 보고 자꾸만 멍해지는 걸 보니 풀긴 글렀습니다 ㅋㅋ 다음 주 정답에 기대 잔뜩 겁니다 :) ㅋㅋㅋ

마리벨 2011-07-05 2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도 넘 ~ 퀴즈 궁굼해요 +0+~
셜록홈즈도 조아하지만 왓슨에게 더 정이가는 건 왜? 일까용? ^^
명탐정 코난과 도일이도 생각나네요~ ㅋㅋ
 

 

 <리어 왕> 한진중공업의 리어 왕들

  
정혜윤(CBS 라디오 프로듀서) 

 

안녕, 동쪽별 무더운 여름밤이구나.

 그래, 그 하숙집 살인 사건 나도 기억해.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오다 보니 네 하숙집에 경찰차랑 구급차가 서 있었어. 동네 사람들이 모여서 수군 수군대고 있었고 나는 혹시 네가 다친 것이 아닌지? 가슴이 쿵쾅거렸어. 그 하숙집 학생들은 모두 다 곧 떠날 거라고 해서 내가 너에게 달려갔던 기억이 나. 하지만, 내가 너를 그날 만났는지 그 다음 날 만났는지는 기억이 안 나. 하여간 넌 날 보자마자 꼭 지금처럼 그때 하숙집 아줌마가 하숙비를 돌려준 이야기부터 했어. 그때 우린 그 대화를 길거리에 서서 나눴는데 네 얼굴에 비치던 자책하는 표정이랑 힘없는 걸음이 지금도 생각나는구나. 그때 왜 하숙비를 돌려주세요? 라고 네가 아주머니에게 말을 걸었다면 그 일은 달라질 수도 있었을까? 우린 차마 그런 이야기는 입 밖에 내지도 못했던 거야. 

 그런데 그 일은 나에게도 잊히지가 않았어. 나중에 취직한 다음에 가정 폭력 문제를 취재할 때마다 그 일을 생각했었으니까. 나중에 그 하숙집 앞을 지날 때마다 항상 물이 뿌려져 있었던 게 기억나. 핏자국을 지우기 위한 것이었을까? 우리 심성의 어둡고 고통받는 마음을 지우기 위한 것이었을까? 언젠가 우리나라에 시집온 베트남 여인이 가정 폭력을 당하다가 살해당한 일이 있었어. 그때 그녀가 죽기 전에 남편에게 쓴 편지 같은 것을 본 일이 있는데 이런 구절이 있었던 것 같아. 나는 열심히 한국어를 배울 것이다. 당신과 많은 대화를 해보고 싶다. 나에겐 꿈이 있었다. 당신에게도 꿈이 있느냐고 물어보고 싶다. 그녀는 한국말을 채 익히기도 전에 죽었기 때문에 결국 단 한 번도 당신에게 꿈이 있느냐는 질문 따위는 던지지 못했겠지. 그래도 그녀가 좀 더 살아서 그런 질문을 할 수만 있었다면 그녀의 운명은 달라질 수 있었을까? 이 또한 차마 입 밖으로 낼 수 없는 말이다.

 그때 하숙집의 아이들도 이제 많이 자랐겠구나. 마당에서 호스로 물을 뿌리며 놀던 평범한 개구쟁이들이었는데. 내가 지나가면 나한테도 가끔 뿌리고. 그때 아이들은 아주머니의 친정집으로 간 것 같다고 들었어. 그 아이들이 잘 자라고 있을까? 제발 잘 자랐으면 좋겠다. 리어 왕에는 이런 구절이 나와. 나중에 두 딸에게 버림받은 리어 왕이 역시 아들에게 버림받고 눈까지 잃는 글로스터에게 하는 말이야.

   
  우리는 울면서 여기까지 왔다. 처음 세상의 공기를 마시면서 우리가 앙앙 울어대며 온 것을 너도 알지 않더냐……. 우리가 태어나면 이 거대한 바보들의 무대로 나왔다고 울어대는 거다…….  
   

 이런 일을 겪으면서 우리도 울면서 여기까지 왔지. 그래도 뭔가 조금이라도 좋은 일이 있으면 인생 살 만한 것이야, 라고 느낀다면 우리가 부도덕한 걸까? 

 동쪽별. 난 지난주에 이런 경험을 했어. 그 말 많은 희망버스에 탔던 사람 중 하나가 나야. 나는 85호 크레인의 사연에 대해서 약간 알고 있었어. 85호 크레인은 93년도에 정리해고 문제가 터졌을 때 한진 중공업 노조의 김주익 열사가 목을 매고 죽은 곳이야. 93년의 바로 그 크레인, 똑같은 크레인에 2011년에 또 다른 사람이 올라가서 김주익 열사보다 더 긴긴 날을 홀로 보내고 있었어. 부산 노총 김진숙 지도위원인데 그녀는 버스안내양으로 시작해서 최초의 여성 용접공이 되었고 나중에 해고되었어. 그녀는 김주익 열사가 죽은 후 미안함 때문에 팔 년 동안 방에 불을 때지 않고 살았어. 우린 한밤에 신영도 다리를 건넜어. 한진 중공업 정문은 용역들이 지키고 있기 때문에 우린 85호 크레인이 보이는 곳에 앉아서 김진숙 지도위원에게 인사를 했어. 안녕하세요? 뭐 그런 말을 했지. 힘내세요! 그런 말도 했던가? 정리해고 멈춰라. 그런 말도 했어. 우리가 한번 소리를 지를 때마다 그녀가 저 위에서 팔로 크게 포물선을 그리면서 인사를 했어. 그녀는 손에 손전등을 들고 있었어. 우리가 말하면 불빛이 한번 출렁이고 또 우리가 말하면 저 멀리서 불빛이 한 번 더 출렁이고 이걸 계속 하다 보니 마치 광활한 어둠을 배경으로 우린 모스 신호를 서로 나누는 사이처럼 느껴졌어. 한 사람이 그대로 거대하고 활활 타오르는 한 점 불빛으로 느껴지는 거야. 내장에서 빛을 토해내는 인간 반딧불이 같기도 했어. 그런데 이상한 것은 크레인 위에 홀로 올라가 있는 것은 그녀이고 우리는 수도 많고 안전한데도 점차로 그녀가 등대고 우리가 바다에서 길을 잃은 조난자 같은 느낌이 드는 거야. 위로하려고 간 것은 우리인데 위로받는 것이 우리인 것 같은 그 느낌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어.

 '희망버스를 타고 오신 분은 인도로 올라가세요.' 라고 누군가 말했고 우리는 그렇게 했어. 그런데 인도는 한진 중공업 담벼락 옆에 있었어. 그런데 또 누군가 담을 넘읍시다, 그러는 거야. 물론 우리는 절대로 그렇게 할 수 없었지. 담 높이가 삼 미터였거든. 그래서 우리가 좀 구시렁댔어. 제가 좀 체력이 약합니다. 다리가 좀 짧습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놀라운 일이 벌어졌어. 저 어둠 속에서 사다리가 내려오는 거야. 차례차례, 하나하나. 몇 개나 내려왔는지는 모르겠어. 열 개 정도는 될 것 같아. 호랑이에게 잡아먹히게 된 오누이 눈앞에 하늘에서 동아줄이 내려와 그들이 해와 달이 된 이야기는 알고 있지만 내 앞에 그런 게 내려올 줄은 몰랐어. 우리는 얼떨결에 담을 정신없이 넘었지. 트로이 성벽을 넘은 그리스 병사들 같았다고나 할까? 아니면 야곱의 사다리를 올라가는 이방인? 나는 너무나 가슴이 두근거렸고 긴장되었어. 뭔가 경계를 넘어서는 기분이 들었어. 내가 그날 넘은 담은 한진 중공업 담이 아니었어. 그 담을 넘을 때 나는 앞으로 내 앞에 펼쳐질 수많은 현실의 장애물들을 상상으로 넘어서고 있었던 거야.

 그런데 담을 넘고 보니 다들 표정이 아름답게 보자면 몽환적이고 적나라하게 보자면 넋이 나가고 얼이 빠져 있었어. 그리고 문정현 신부와 백기완 선생님, 그리고 박종철 열사의 아버지 박정기 씨가 연설했어. 그런데 이분들이 흰 머리칼과 수염을 날리며 노구를 이끌고 그 어둔 밤 한진 중공업 마당에 서 있는 것을 볼 때 나는 그만 폭풍 속의 리어 왕을 생각하고 만 거야. 폭풍 속의 리어 왕은 믿었던 두 딸에게 배신당하고 집도 절도 없이 반쯤 정신이 나가 폭풍 속에서 울부짖어.

   
  이 냉혹한 폭풍의 팔매질을 견뎌야 하는 불쌍하고 헐벗은 자들아. 어디에 있든지 간에 머리를 누일 집도 없이 굶주린 뱃가죽으로 그리고 구멍 뚫린 넝마를 걸친 채로 이토록 험악한 시절로부터 어찌 너희 스스로를 보호한단 말이냐? 오 그동안 내가 이것에 대해 너무 소홀했구나.! 치료를 받아라, 화려한 자여. 불쌍한 자들이 느끼는 바에 스스로를 노출하여 넘쳐 나는 것들을 그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고 하늘이 공평하다는 것을 보여라.  
   

  타락한 두 딸에게 쫓겨나고 나서 리어 왕이 가난한 자들에게 처음으로 눈길을 돌리게 되는 장면이야. 리어 왕의 전체 주제는 물론 포기에 관한 것이야. 리어 왕은 왕관과 재산을 포기하고 그 대신 모두들 자신을 계속해서 왕으로 대접해주길 바라. 그는 자신이 권력을 넘겨주면 남들이 그의 약점을 이용하리는 것을 꿈도 못 꾸는 거지. 우리가 뭔가를 그것도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포기했다고 그것이 우릴 행복하게 해주진 않아. 리어 왕처럼 오히려 그 포기 행위 때문에 괴로움을 당할 수도 있어. 이 문제에 대해서 가장 단호한 결론을 내린 사람은 조지 오웰이야. 조지오웰은 포기와 행복에 대해서 이렇게 말해.

   
  네가 원한다면 땅을 줘버리되 그렇게 함으로써 행복해지려고 하지는 마라. 행복을 얻지 못할 수도 있다. 남을 위해서 살 것이면 남을 위해서만 살아야 한다. 우회적으로 자신을 위하는 수단이어서는 안 된다.  
   

 그날 밤 네가 흰 수염 흰머리 날리는 늙은 선생님들을 보면서 리어 왕을 떠올렸다면 그건 셰익스피어의 리어 왕은 아니었을 거야. 셰익스피어가 리어 왕을 행복하게 그리고 싶었다면 유일하게 가능했을 모습. 그것이 바로 그날 밤 선생님들의 모습이었어. 편안한 잠, 무병장수, 쾌적한 여름밤. 그리고 우리가 알 수 없는 수많은 소중한 것들. 이런 것들 다 포기하고 달려와 하늘이 공평하다는 것을 보여 달라고 요구하는 그날 밤의 리어 왕들은 자신을 위해선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던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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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어 왕>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김태원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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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하나 2011-06-20 1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역시나 다녀오셨군요 :) 다녀오신 것도 모자라 근사한 리뷰까지 !

수이 2011-06-20 1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번 잘 읽고 있습니다.

JH 2011-06-21 0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오늘도 글이 아주 멋지네요 :)
오늘 글을 유난히 따뜻한 느낌이 드는것 같아요 'ㅁ'*

tupique 2011-06-21 0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 사다리가 내려오는 장면에서 울컥 했습니다. 조지 오웰의 구절도 멋지네요~

호우시절 2011-06-23 17: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같은 희망 버스를 타셨던 다른 분의 글에서도,
희망을 되려 얻어 온 느낌이라는 똑같은 구절이 있었는데요.....
뭘까요...
어렴풋이 알듯 말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