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영국인 아편 중독자의 고백

  
정혜윤(CBS 라디오 프로듀서) 

 

  동쪽별. 장마철에도 제자리를 지키며 빛나고 있었지? 어디 가버린 것 아니지? 난 지난 일주일 동안 지방 취재를 네 건이나 해서 녹초가 되었어. 높은 산에 가로막혀 이제 그만 쉬면서 이 고장에 비를 뿌릴까 말까 망설이는 검은 구름도 보았고 천문대 지붕에 떨어지던 빗소리도 들었단다. 계곡물이 퉁퉁 불어서 젖이 분 여자처럼 우는소리를 내는 것도 들었고 구름을 뚫고 배부른 반달이 나오는 것도 보았어. 낯익은 것이 놀라운 것으로 다가오고, 그 놀라운 것들은 다시 돌아보니 낯익은 것이 되곤 했어. 동쪽별. 난 왜 그리운 것들을 제대로 설명해 내지 못하는 걸까? 난 구름에 달에 빗방울에 대고 마치 너에게 묻듯 그렇게 물어봤단다. 그리운 것들을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것들을 볼 때 가끔 가슴이 아리게 아픈 걸까? 스티븐슨이 여름밤은 살아 움직이는 책 같다고 했을 때 아마 그는 내가 본 그런 여름밤들을 떠올렸을 거야. 그래, 지난 일주일 동안 모든 것이 살아 있었단다. 내가 읽어주길 기다리는 상형문자로.

  내가 본 가장 아름다운 여름 풍경 하나 말해줄까? 나는 오래전 일본 규슈의 어느 숲으로 반딧불이 투어를 갔단다. 평생을 그 지방에 산 일본 아저씨가 손전등을 들고 앞장서 걷고 호텔 투숙객 몇 명이 그 뒤를 따랐지. 반딧불이는 작은 보석 같았어. 계곡 물소리가 시원했던 것도 기억나. 그런데 그 아저씨가 갑자기 보름달을 가리키는 거야. 정말 큰 보름달이었어. 우리더러 보름달을 보란 뜻이겠지. 무슨 일이라도 좋으니 제발 벌어지길 바라던 우리는 아저씨의 지시를 따랐지. 그런데 어느 순간 아저씨가 손전등을 들어 달을 비췄어. 그러자 뭐가 나타났는지 아니? 커다란 부엉이 한 마리가 보름달을 배경으로 날아가는 게 보이는 것 아니겠니? 정말로 우아하고 아름다운 동작이었어. 그런데 어떻게 그 아저씨는 부엉이가 보름달 한중간을 날아가는 순간을 포착했지?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인데 말이야. 상상해봐. 노란 보름달, 그리고 커다란 날개를 펄럭이던 까만 부엉이. 마치 영화 E.T에서 소년들이 자전거를 타고 날아가는 그 장면 같았어. 난 그 순간 아저씨를 숭배했어.

  “실례합니다만. 어떻게 아셨어요? 그러니까 부엉이가 하필이면 그때 거기 보름달 앞을 날아갈 거란 걸요?”

  아저씨가 레비스트로스라면 ‘이것이야말로 야생의 사고입니다.’라고 대답했겠지만 그는 이렇게 말했어.

  “평생 그리던 장면. 언제나 상상하던 장면. 꿈속에서 만나고 싶던 장면이었으니까요”

  음, 그분은 그러니까 초능력자였던 것일까? 하지만 어떤 장면을 반복해 생각하다 보면, 꿈꾸게 되고 보게 되고 나중엔 남들에게 보여줄 수도 있게 된다는 것을, 나는 그 뒤부터 조금씩 믿기 시작했던 것 같아. 너도 꿈속에서라도 좋으니 반복적으로 보고 싶은 장면이 있니?

  좀 다른 이야기지만 이만큼 멋진 다른 이야기도 들려주고 싶어. 제주도 앞에 있는 우도엔 사빈 백사란 해변이 있어. 백사. 그러니까 하얀 모래 해변이란 뜻인데 그저 모래가 고운 게 아니라 말 그대로 색깔이 ‘white’야. 눈처럼 하얀 모래들인데 도대체 그 모래는 어디서 온 것인지 참을 수 없이 궁금해진 나는 또 그 고장 아저씨에게 물어봤지.
  “아저씨 태어날 때부터 저렇게 모래가 하얀색이었어요?”
  너도 이 대답을 들으면 나처럼 그 어부 아저씨를 숭배하게 될 거야. 
  “그럼요. 나 갓난아기 때부터 하얗지요. 날이 맑으면 우리는 너무나 눈이 부셔서 눈을 뜨지도 못하고 다녔어요. 우리는 모래를 감히 똑바로 볼 수 없었어요.”  
생각해 봐. 너무나 눈부셔서 제대로 볼 수도 없는데 그게 다이아몬드가 아니라 모래라니.

  번쩍번쩍 빛나는 모래 해안 이야기는 천일 야화에서도 보질 못했어. 난 다음엔 기필코 그 해변에서 새벽을 맞을 거야. 텐트치고 자면서 다이아몬드급 모래가 내는 소리를 들을 거야. 그리고 아침엔 눈을 비비며 이것은 꿈인가? 라고 말하고 말 거야. 눈부신 모래에 대해 말을 하고 다니는 사람은 눈부신 모래에 대한 꿈을 꿀 수 있고 보름달 위를 날아가던 부엉이에 대해 말을 하고 다니는 사람은 부엉이에 대해 꿈을 꿀 수 있어. (그리고 그 꿈들은 언젠가 현실이 될 거야. 만약 현실이 되지 못한다면 그건 아래처럼 너무나 아름답고 슬픈 이야기일 거야.)

  토마스 드 퀸시는 <어느 영국인 아편 중독자의 고백>이란 책에서 아편을 하던 밤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던 꿈을 소개해. 드 퀸시가 이 자품에서 궁극적으로 드러내고 싶었던 것은 아편의 효용이나 부작용, 아편이 불러일으키는 환각작용, 아편 중독 탈출법이 아니라 인간의 잠재성 안에 들어 있는 꿈의 광휘였어. 드 퀸시는 이렇게 말했어.

   
  인간의 생활조건이란 사고를 고양하는 일과는 양립할 수 없는 일상 경험으로 대다수 사람들을 옥죄고 있어서 마음이 장엄한 이미지들로 흘러넘치는 사람들조차 꿈으로 재생할 때에는 그 장엄함의 색조가 퇴색된다……. 일상성으로 고통받는 인간의 능력 가운데 꿈꾸는 능력보다 더 고통받는 것은 없다. 누구도 이 점을 가볍게 여겨선 안 된다. 꿈꾸는 능력은 어둠의 신비와 손을 잡고 인간이 심연과 교류하는 통로를 열어 준다. 꿈꾸는 기관은 심장, 눈, 귀와 연결되어 인간 두뇌의 방들 속에 무한대의 감각을 집어넣어 주어 생명의 심연에 존재하는 영원성에서 어두운 영상들을 끌어내, 그 신비한 어둠 상자 거울인 인간의 마음에 멋지게 비춰준다.  
   

  (물론 그다음엔 꿈꾸는 데 아편이 도움된다는 말이 나오겠지.) 이 부분을 읽다 보니 밤의 꿈, 그 꿈마저 얼마나 초라해졌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좀 서글퍼졌어. 부장님께 혼나거나 방송 사고를 내서 경위서를 쓰는 것, 건널목을 건너다 교통사고를 당하는 것, 고양이 얼굴을 할퀸 것, 곰에게 쫓겨 다닌 것 말고 내가 무슨 꿈을 꿨는지 아스라해. 한 편의 꿈을 꾸기엔 우리에겐 사랑도 미움도 부족한 걸까? 우린 자기 전에 낮 동안의 사랑과 미움을 쫓아낼 수 있을 만큼만 사랑하고 미워하며 사는 걸까?

  드 퀸시의 꿈에는 가엾은 매춘부 소녀 앤이 자주 나와. 어느 날 드 퀸시가 아직 아편을 하기 전, 어렸을 때 드 퀸시와 매춘부 앤은 (그즈음 드 퀸시가 돈 한 푼 없이 런던거리를 떠돌게 된 사연은 그가 학교를 탈출했기 때문이야.) 옥스퍼드 거리를 천천히 걷고 있었어. 드 퀸시는 잘 먹지 못해서 힘이 없었어. 그들은 어느 집 현관에 주저앉았어. 그런데 그곳에 앉았을 때 드 퀸시는 갑자기 아프기 시작했어. 그래서 그녀에게 기댔는데 그만 계단 아래로 굴러 떨어지고 말았어. 그때 이 세상에서 앤만이 그의 고통을 느꼈어. 앤은 공포에 질려 소리를 지르며 옥스퍼드 거리 쪽으로 달려가 포도주 한잔과 과자 몇 조각을 들고 왔어. 그 착한 소녀는 그녀가 가지고 있던 몇 푼의 돈을 그를 위해 다 써버린 거야. 그 일 뒤로 드 퀸시는 이런 생각을 해. 런던 사창가의 중심부까지 쫓아가 가능하다면 무덤까지라도 쫓아가 그녀를 위해 축복과 평화와 용서, 화해의 말을 할 수 있길 난 얼마나 원했던가? 꿈속 같은 가로등 불빛 아래 옥스퍼드 거릴 걸으며 그와 앤에게 위안이 되었던 손풍금 연주를 들으며 드 퀸시를 눈물을 흘리며 그녀를 그리워해. 왜냐하면, 그들은 곧 영영 헤어지고 말았으니까. 드 퀸시는 돈을 구하려 길을 떠나. 앤에겐 이렇게 말해. 길어야 일주일 안에 돌아올 것이라고. 그러니 지금부터 5일 후부터 매일 밤 여섯 시에 그레이트 티치필드가 맨 끝에서 나를 기다려 달라고. 그런데 헤어지는 순간 드 퀸시는 평생 후회할 실수를 저지르고 말아. 한 번도 그녀의 성을 물어보지 않았던 거야. 당시 앤은 발작성 기침 때문에 고생하고 있었기 때문에 약을 꼭 챙겨 먹으란 당부를 하느라 이름을 묻는 걸 잊었던 거야. 그 여행길 뒤에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그 뒤 드 퀸시는 런던을 떠나 대학에 진학했어. 앤은 어떻게 되었을까? 약속한 대로 드 퀸시는 매일매일 그곳을 찾았지만, 결코 그녀를 만날 수 없었어. 드 퀸시는 생각해. 만약 그녀가 죽지 않고 살아있다면 그녀도 미로 같은 런던 거리를 헤매며 자신을 절망적으로 찾고 있을 것이라고. 몇 년 동안이나 드 퀸시는 런던에 갈 때마다 수많은 여자의 얼굴을 살펴보지만, 눈길만 스쳐도 금세 알아볼 수 있는 그 다정한 얼굴을 다신 보지 못했어. 아편을 복용하기 시작한 뒤로 드 퀸시의 꿈에는 버림받은 가여운 소녀들의 이미지가 나타나.

  그런데 드 퀸시의 이 꿈은 꼭 워즈워스의 시 <루시>를 연상시켜. 워즈워스는 사랑하는 누군가의 죽음을 차마 받아들이지 못하고 입 밖으로 낼 수가 없어서 그녀는 지구와 함께 돌고 있다고 생각해.

   
  잠이 나의 영혼을 봉인하여
내겐 인간의 두려움이 없었지.
그녀는 지상의 세월의 흔적을
느끼지 못하는 존재 같았네!

그녀는 이제 멈추었고, 아무 힘도 없다네.
그녀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다네
지구의 자전 주기를 따라
바위와 돌과 나무와 함께 돌며…….
 
   

  드 퀸시의 소녀도 차마 그의 곁을 떠나지 못해 꿈속에 나오는 걸까? 한 편의 아름답고 슬픈 꿈을 꾸기 전에, 이미 오래전에 우리는 사랑하고 고통받고 그리워하는 것인가 봐.

  아편은 아니지만, 아편 같은 어떤 것--시, 펼쳐진 책, 꽃, 밤하늘, 사랑, 인간--에 취해, 아편 중독자처럼 꿈꾸고 싶은 지금은 한밤! 나의 영혼은 사랑하고 고통받았던 많은 것을 있는 힘껏 그리워하기 시작하는구나! 꿈속에서 만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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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영국인 아편 중독자의 고백> 

   토머스 드 퀸시 / 김명복 옮김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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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하나 2011-07-22 14: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도서 제목만으로도 어두운 과거가 찔리는구만요 ㅋㅋㅋ

얄리 2011-07-22 18: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글 좋네요. 문학은 스포가 있을까봐 안 읽은 작품 리뷰는 잘 읽지 않는데 이 작품은 제가 읽고 있는 거라서 개의치 않고 읽어봤는데 좀 더 일찍 읽어볼걸 그랬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렸을 때에 비해 어떤 꿈을 꿨는지도 기억이 나질 않고 그 꿈마저 지극히 일상적이라 심심했는데, 아편의 힘 말고 아편같은 맛을 가진 책을 읽고선 정말 멋지고 이상하고 독특한 꿈을 꿔 보고 싶어요.

마리벨 2011-07-22 19: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어떤 고백일지 궁굼해요.....
아편은 아니지만 ㅡ 아편같은 그 어느 것?
나에겐? ㅡ 뮤직, 커피 그리고 책~ 펭.클~ ^^;

모기 2011-07-22 2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마지막 문장이 마음에 와 닿네요 ^^ 꼭 한 번 읽어보고 싶네요~

까꿍메롱 2011-07-23 05: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늦은 밤에 읽는 글이 이렇게 달콤할수가 없네요. 인용구절까지도 달콤하고 애절하고 씁쓸하기까지한. 어울릴지는 모르겠지만 귀에서 '중독된 사랑'이라는 노래가 울리는 듯합니다. 헤헷-

starover 2011-07-23 1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퀸시가 앤을 만났으면 좋겠는데.... 정말 아쉽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