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하라
스테판 에셀 지음, 임희근 옮김 / 돌베개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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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베개에서 지난 총선 즈음해서 스테판 헤셀의 <분노하라>를 꼭 투표하라며 선물로 주었다.

책의 뒤 표지에 홍세화 선생은 이 책이 감격으로 다가온다고 적었다. 그건 아흔이 넘은 노선생의 '앙가주망' 때문이었다고 덧붙였다. 그가 자기 자신을 레지스탕스를 위해 구속한 건 주어진 삶에 대한 감사였음이 드러난다.

전 유럽과 한국을 휩쓴 이 책은 끊임없이 '분노하기 위한 역사 인식'이 있는지 묻는다. 근현대를 온몸으로 살아온 노학자이기에 '분노하라'는 목소리에 힘이 실리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지금 필요한 건 우리네 인식 속에서 단절된 과거와 지금을 잇는 것 아닌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자, 이 싸움이 결코 금방 끝나지 않으리라는 것과 한번 불붙었다 이내 사그라들어서도 안 된다는 절박함에 다다랐다. 과거와 지금을 잇는 노력, 그람시가 말했던 진지전과 같은 꾸준한 노력과 치열함이 필요한 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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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쿠시센트로, 베코라, 딜리(Becusi-Centro, Becora, Dili). 동티모르에서 1년간 살게 된 곳은 동티모르 수도 딜리의 동쪽 끝에 있는 마을이었다. 마이크로넷이라고 부르는 작은 버스, 01번이나 02번을 타고 베코라성당 앞에서 내려 골목길로 쭉 5분정도 걸으면 왼편으로 우리가 사는 집이 있었다. 두 그루의 큰 망고나무, 이제 막 자라기 시작한 바나나나무, 집주인 마나 마리아가 가꾸는 화분들이 집 주위를 두르고 있었다. 우린 이 집을 희망공장(Esperansa Factory)라고 부르기로 했다. 마나 마리아 가족이 동의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같이 모여 찍은 첫 번째 사진. 왼쪽부터 마이클, 짤레스, 엠마, 윤애, 우노, 떼와스, 얀초(개), 나)


일곱 색깔 공동체

개척자들이 2000년부터 진행한 동티모르 평화캠프에 처음부터 참여하고, 2005년부터 이곳에 사무실을 꾸리고 삶을 시작한 마나 윤애(마나는 언니 혹은 누나의 경칭이다. 그러나 아무에게나 붙이는 호칭은 아니다. 오빠나 형의 경칭인 마웅도 마찬가지 신뢰와 애정이 쌓이면 자연스럽게 붙여 부른다.)가 공장장이었다. 윤애 누나는 자기 기준이 확고했다. 20065월에 동티모르에 내전이 터져 자국민 대피령이 내려졌을 때, 윤애 누나는 총탄을 피해 수녀원으로 모인 난민들 곁에서 며칠 밤을 보냈다. "고통받는 사람과 함께한다"는 개척자들의 원칙과 자기 신념을 지키기 위한 결정이었다.

 

까 우노(Yunus Karpada. 까는 인도네시아어 까까의 준말이다. 형·오빠·누나·언니 같은 바로 윗사람을 부르는 말이다.)'자유' 그 자체였다. 어느 것 하나, 그 누구도 그를 구속하지 못했다. 서티모르의 주도 쿠팡에서 온 그는 저녁이면 기타를 치거나 그림을 그렸다. 동티모르 사람들은 인도네시아에 대한 반감이 있었지만 서티모르인에 대해서는 관대했다. 오히려 그들의 삶과 문화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였다. 사람들을 좋아하는 우노의 주변에는 늘 '호기심'으로 가득 찬 동티모르 청년들이 모여 그와 대화하기를 즐겼다. 아침·점심·저녁을 바나나로 먹어도 좋다고 말하는 '바나나 광'이기도 했는데, 그 덕분에 온갖 종류의 바나나를 맛보는 호사를 누렸다. (필자는 그 후로 한국에서 바나나를 먹지 못한다. 너무 싱겁고, 떫기 때문이다.) 그에 대해서는 서티모르, 오에쿠시 지방 여행에서 더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 같다.

 

우노가 쿠팡에서 나서 자란 '서티모르 토박이'라면 짤레스(Aprys Charles Meluk)는 쿠팡에서 태어나 딜리에서 공부한 '티모르 떠돌이'라고 할 수 있다. 친화력이 뛰어나서 티모르섬 전역에 인맥이 뻗어 있다. 어디를 가든 그와 함께 가면 숙식은 해결됐다. 짤레스는 봉사 정신이 투철한 사나이였는데, 그를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은 분단의 경험이었다. 청년기를 딜리에서 공부하며 보내던 2000년대 초반 동티모르의 독립은 짤레스에겐 분단이었다. 짤레스만 경험한 것이 아니었다. 동티모르와 서티모르의 국경에는 하룻밤 사이에 지도 위에 그은 선 하나로 국적이 갈린 이산가족들이 산적했다. '동병상련'. 짤레스는 분리 이후 헤어짐의 아픔을 겪은 이들을 찾아 영상편지를 전달하는 '메신저'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2008년 동티모르에서 활동을 시작한 짤레스는 2012년 지금도 동티모르 전역을 돌며 자신이 맡은 일을 감당하고 있다.

 

1975년부터 25년간 있었던 인도네시아의 식민통치는 피로 얼룩진 역사였다. 한국인이 일본인을 바라보는 시선과 감정, 그러한 것이 이곳 동티모르인에게도 존재한다. 특히 인도네시아 행정과 경제의 중심에 있는 자바인들을 보면 더욱 그렇다. 떼와스(Teguh Waskito)는 자바에서 왔다. 무슬림이 많은 자바인 중에는 드물게 기독교인으로 목사 지망생이었다. 쿠팡에서 처음 그를 봤을 때 그는 자신의 신앙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자신의 신앙에 대한 확고함이 간결한 언어에서 묻어났다. 진지하게 생긴 풍채와는 달리 유쾌하고 경쾌했다. 무슬림인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할아버지 슬하에서 자랐다는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신앙과 삶의 진정성에 대해서 끊임 없이 질문할 수 있었다. 그의 진정성은 짤레스와 함께 이산가족을 만나며 빛이 났다.

 

마이클 안토니우스 우리(Michael A. Uri)는 연구 대상이었다. 가장 키가 컸지만, 가장 가벼웠다. 작은 바람에도 쓰러질 것 같은 체구였다. 그가 동티모르 전역을 돌며 평화학교를 무사히치렀다는 것은 사실 기적이었다. 용서와 희망의 상징인 무지개를 좋아했다. 성경을 늘 묵상하고, 다른 이를 위해 기도해 주는 것을 기쁨으로 여겼다. 작은 징표, 남들에겐 사소해 보이는 경험조차 소중하게 간직하고 기억할 정도로 정이 많았다. 공동체에선 가장 나이가 많은 형 오빠였음에도 불구하고 종종 놀림감이 되기도 했는데, 순수하고 순박한 성정이라 화도 내지 않았다. 인도네시아 요가카르타에서 온 모태솔로는 이제 대만에서 온 엠마를 좋아해 수개월 동안을 속앓이를 해야했다.

 

엠마(Shin, Ying-Chu)는 대만에서 왔다. 늑대 같은 남자 다섯은 엠마를 좋아했다. 짝지를 삼고 싶어하며 속앓이 하는 친구도 있었지만, 우리가 엠마를 좋아한 이유는 성실함과 사교성 때문이었다. 함께 오에쿠시 지역 평화학교를 운영하며 몇 번을 놀라곤 했다. 이른 아침 일어나 주인 아주머니를 도와 밥을 하고, 식사 정리가 끝나기 무섭게 수업 준비를 위한 토론을 시작한다. 1~2시간 정도 평화학교를 진행하고 오면 지쳐 쉬고 싶을 법도 한데, 이제는 집주인 가족들과 사귐의 시간이 이어진다. 무엇이든 궁금하면 물었고, 해보고 싶은 것은 먼저 나서 해보고 싶다고 할 정도로 자기 표현도 적극적이었다. 국제 분쟁, 빈곤, 여성 문제에 대한 관심이 깊어 여러 나라를 돌며 활동을 하고 있다. 지금은 이집트에서 변화의 바람을 온 몸으로 받고 있는 엠마. 1년 동안 동티모르 사람처럼 살았던 엠마, 지금은 이집트 사람이 되어 진짜 민주화를 열망하고 있을 그를 다시 만나 이야기 보따리를 풀고 싶다.

 

빨간 배경 사진

 

우리는 가족이었다. 여느 보통의 가족들처럼 같이 찍은 사진이 별로 없다면 우리가 얼마나 친했는지 설명이 될까. 다같이 모여 사진을 찍을 시간이 없기도 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우노가 사진을 찍기 싫어했기 때문이다. 4~5장 정도인 단체 사진 그나마 우노는 뒤돌아 서있거나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다.

 

13개월 동안 가장 기억에 남는 사진 찍기는 우연하게 그리고 불쾌하게 찾아왔다. 3개월에 한 번씩 동티모르 비자 연장을 위해 인도네시아를 방문해야 했다. 비자 연장 업무는 공동체 지원을 맡은 내가 해야 하는 일이었다. 인도네시아 대사관은 비자 발급 인원을 하루에 50명 안으로 제한하는데 순서를 받기 위해서 오전 8시부터 나가 길게 줄을 서야 했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1시간을 기다려 신청서를 냈는데, 사무관이 비자를 줄 수 없다고 결정했다. 사유가 황당했다. ‘빨간색을 배경으로 하는 사진을 제출해야 한다는 이유였다. 한 달 전에 법령이 바꼈는데 공지가 제대로 되지 않아 몰랐던 것이다.

 

씩씩거리며 집에 돌아와선 우노, 짤레스, 떼와스, 마이클을 불러 분노를 쏟았다. 그들의 죄는 단 하나였다. 인도네시아인이라는 거다. "니들 나라 뭐냐, 빨간색이 무슨 의미냐, 비자를 신청하는 데 색깔이 무슨 의미냐?"라는 그들도 답하기 곤란한 질문들을 한참 퍼부었다. 그 물음과 성냄 이면에는 '다시 한 번 이른 아침에 일어나 대사관을 찾아야 한다'는 늦잠의 욕망과 하루 생활비에 맞먹는 비용을 증명사진 촬영에 소모해야 한다는 불편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우노가 화가 난 나를 달래고 나섰다. 언제 빨았는 지 알 수 없는 빨간 타월을 들고 내려와서는 창문에 걸고 한 사람씩 세웠다. 찰칵. 찰칵. 평소라면 절대 안 된다며 뒤돌아 서던 우노도 이날은 정면을 응시했다. 다소 우스꽝스럽고, 촌스러운 빨간색을 배경으로 한 증명 사진은 이렇게 탄생했다

 

다음에는 이들과 함께한 첫 번째 여행, 스펙타클했던 동티모르 역사 평화 기행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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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bedireVeritati 2012-04-25 0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빨간 배경 사진을 아무리 찾아도 나오지 않는다. 이번 주말 개척자들 사무실에서 사진을 찾아봐야 할 것 같다.
 

전국이 시끄럽다. 어제 오늘 하던 일도 아닌데 갑자기 큰 이슈가 되고 있다. 경북 영주에서 한 학생이 학교폭력 가해자에게 장례식에 오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숨을 던졌다. 정부는 갑자기 전수 조사 결과를 공개하며 학교 폭력을 근절하겠다고 나섰다. 소위 문제 학교를 아웃팅하겠다는 이야기다. 언론이나 일선 교사들이 전수 통계 조사 과정의 문제점과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라고 지적했음에도 정부는 통계 자료를 공개했다.

 

추이를 지켜보며 학교 폭력을 대하는 정부의 정책과 우리 사회의 태도는 협박과 망각에 기초하는 것 같아 씁쓸하다. 왕따 문제의 근본 해결책이 사랑과 관심이라면 우리의 접근 방식은 얽혀있는 실타래를 풀기보다는 더 비비 꼬아 실마리조차 잡기 힘든 지경으로 몰고 가는 건 아닐까. 더 직설적으로 이야기하면 이것이야말로 폭력의 재생산인 셈이다.

 

찬찬히 우리 자신의 기억을 더듬어야 한다. 학교 폭력의 관찰자로서의 자기 자신을 성찰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20~30대 대부분은 학교 폭력의 가해자이거나 피해자였다. 가해자의 범위를 방조자로까지 넓히면 누구도 내 손은 깨끗하다고 이야기할 수 없다. 그 정도는 달랐을지 모르지만 그 윗세대도 비슷한 경험들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학교 폭력의 근본 원인이 무엇이었는지 고민하며 자신의, 우리의 청소년 청년 시절을 반성해야 한다. 가해자의 죄의식도 좋고, 피해자의 수치도 좋다. 이야기를 꺼내놓고 풀어내야 화해와 치유의 길로 갈 수 있다. 주먹구구식 정책이 아닌 전인격적인 정책, 교사와 학생, 학부모와 교육 기관이 함께 고민하는 해결책이 나오길 바란다.

 

여기 내 경험들을 기록해 둔다.

 

무모했던 일진과의 싸움

 

중학교 2학년. 한 친구와 치고받았다. 무슨 이유로 싸웠는지는 기억나지 않는 걸 보니, 별 대수롭지 않은 이유로 싸운 듯하다. 짧은 쉬는 시간에 벌어난 일이었지만 사태는 커졌다. 친구가 홧김에 던진 의자가 뒷문을 들이박아 문이 깨지고 말았다. 다음 시간은 도덕 시간. 팔뚝만한 사랑의 매를 들고 다니던 선생님은 당사자 2명의 엉덩이가 불이 나도록 때렸다. 내가 21, 친구가 13대를 맞았다. 맞은 매 수가 차이 나는 이유는 단순했다. 나는 오래 버텼고, 그 녀석은 빨리 쓰러졌기 때문이다. 쓰라린 엉덩이를 부여잡고 뚝뚝 떨어지는 아픔의 눈물을 꾹 참으며 우린 쿨하게 화해했다.

 

그러나 우리가 화해했다는 데서 문제가 끝나지 않았다. 녀석은 소위 일진이었다. 건들지 말았어야 할 녀석을 건든 거다. 우리가 맺은 평화협정은 일진의 패거리 문화에 의해 깨지고 말았다. 감히 자기네 사람을 때린 몹쓸 놈이 누구인지 보겠다며 5~6명이 우르르 몰려왔다. 예고 없이 날아온 옆차기에 볼을 맞은 후에야 실감했다. 이게 일진이구나. 두려움, 공포라는 단어가 몸에 새겨진 시간이었다.

 

종수. 종수가 아니었다면 남은 중학교 생활을 비루하게 살았을지도 모르겠다. 1~2달 전 일진의 우두머리와 끝까지 싸우며 괴력을 보였던 종수를 건드릴 수 있는 건 학교에선 아무도 없었다. 종수가 나서서 싸움을 말린 덕에 일진과의 분쟁은 거기서 멈췄고, 싸운 친구와도 다시 친하게 지냈다. 1996년 여름이었다. 16년 전이다. 일진이라는 패거리 문화는 그 이전부터 존재했다.

 

대규모 근신 사태를 부른 폭력 사건

 

자진 신고해야겠다. 나는 쉽게 화내고 열 받는 편이다. 욱하는 성격 덕에 코 성형수술을 할 수 있었다. 정신없이 받은 수술이라 얼마나 높아졌고, 멋있어졌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1 가을이었다. 3 선배들이 수능을 100일 정도 앞둔 날이었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수열을 배우던 때였다. 야간자율학습 중간 20분의 자유시간에 친구들과 농구를 하곤 했다. 농구장 옆 족구장은 늘 선배들 차지였다. ‘’, 날아온 축구공에 머리를 맞았다. 괜찮냐는 물음이 이어져야 정상이었는데, 박장대소가 터졌다. 괜찮냐고 물은 건 친구들이었다. 기분이 상했다. 공을 집어 던지고 교실로 올라간 건 과잉 행동이었다.

 

3 교실이 뒤집어졌다는 건 2교시 야자가 시작되고야 알았다. 교실로 끌려가 죽도록 맞았다. 멈추지 않는 코를 부여잡고 병원에 도착한 건 930분쯤이었다. 누가 때렸는지, 몇 명이 때렸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처음 때린 녀석의 니킥으로 코가 주저앉았다는 기억만 선명하다. 1주를 입원하고 한 달가량 마스크를 쓰고 다녔다. 구타한 선배들에게는 교내 봉사, 근신, 정학 등의 중징계가 떨어졌다.

 

1주나 학교 안 간 건 좋았지만, 한 달 동안 마스크를 쓰고 다닌 기억은 씁쓸하게 남아있다. 전교생들, 모든 선생님들이 '제가 걔구나' 하고 손가락질 하는 듯했다. 낙인처럼 남은 기억에는 다 이유가 있다. 퇴원하고 학교에서 처음 들은 이야기가 그랬다. "너 잘못도 크다." 대충 이런 이야기였다. 국어 시간, 연세가 지긋해 두꺼운 돋보기를 끼고 있던 선생님이 굳이 교실 앞으로 불러 한 이야기였다. 니킥의 순간과 함께 가장 강한 기억으로 머릿속에 남아 있다. 이 낙인은 고3들이 졸업하던 다음해 2월까지 계속됐다. 1998년 가을에서 1999년 초까지 계속된 이 기억이 생생한 만큼 두려운 건 나만의 경험이 아닐 것이다.

 

왕따와 짝사랑

 

신입생이던 2002. 나보다 다섯 살 많은 선배가 자신의 신앙을 이야기하며 자신이 '왕따'를 시켰던 경험을 나눴다. 형은 예수와 처음 만나던 날, 자신의 지난날을 돌아보며 같은 반 친구들을 괴롭혔던 사실에 대해 통렬하게 회개했다고 했다. 짧게 이야기했지만 가볍진 않았다. 돌아 나오는 길에 2명의 얼굴이 떠올랐다. 한 번은 방조했고, 한 번은 무시했다. 같은 반 친구가 당하는 왕따에는 신경을 껐고, 중학교부터 알고 지내던 녀석이 고등학교 때 왕따가 되자 난 그 친구의 존재를 무시했다.

 

아니 무시 정도가 아니었다. 면전은 아니었지만 "재수 없어"라는 말과 함께 마른 바닥에 침을 뱉었다. '난 너 싫으니 앞으론 말도 걸지 말라'는 의미였다. 간혹 그 녀석의 반에 놀러가곤 했는데, 큰 헤드폰을 끼고 드럼 스틱으로 비트를 맞추며 노래하던 녀석의 모습을 경멸하곤 했다. 다른 반 아이들은 애써 무시하는 것 같았다.

 

긴 무시의 시간은 고3 10월에 깨졌다. 매점에서 빵을 먹고 나오는데, 녀석이 성큼 성큼 다가왔다. " oo 죽은 거 알아?" 중학교 3학년 남자 셋 여자 셋 같이 모여 여기저기 놀러 다녔는데, 그 중 한 친구가 꽃다운 나이에 하늘로 간 사건 앞에 정신을 놓았다. 몇 번을 되물었고, 연락이 끊겼던 친구들에게도 전화해 확인했다. 남몰래 가슴 설레던 시간이 기억났다.

 

어린 나는 좋았던 중3의 기억과 살았어야 할 친구가 죽었다는 괴리감 속에서 어찌할 바를 몰라 한참을 방황했다. 마음 한켠에는 내가 그토록 무시하던 친구에게 빚을 졌다는 부채감도 생겼다. 어렴풋이 생각났다. 우리 셋은 짝이었다. 그녀를 가운데 두고 양 옆에 나와 그 친구가 앉았었다. 그 친구와 많이 친하진 않았지만 내가 그를 무시할 이유는 없었다. 나는 비겁했지만, 그녀의 부고를 알려 준 그 친구는 용감했다.

 

눈을 감고 방조하던 왕따 친구에 대한 기억은 많지 않다. 학교 선배의 이야기를 들으며 언젠가 다시 만난 날을 상상하곤 하지만, 그때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지는 사실 잘 모르겠다. 여전히 탕감되지 않은 미안함이 가슴 깊이 자리 잡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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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bedireVeritati 2012-04-24 2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학교 폭력은 이지메라는 단어가 일본에서 수입되기 훨씬 전부터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경쟁의 시대 (눈에 보이지 않는) 폭력이 정당한 사회에서 학생들을 구출해야 한다.
 
헌법의 풍경 - 잃어버린 헌법을 위한 변론, 개정증보판
김두식 지음 / 교양인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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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더 송이 끝내 구속됐다. 강정마을에서 해상시위를 진두지휘하던 그였다. 민의를 잊은 국책사업을 두고 우리가 승리한다(We Shall Overcome)”고 내내 노래하던 그였다. 연행 중에 이가 다섯 개나 부서졌지만 경찰은 아랑곳하지 않았다고 한다. “저들은 나를 사람으로 보지 않나봐”, 그의 절규가 가슴을 때린다이보다 6개월 앞서 윤애 누나는 레미콘 기사에게 폭행을 당했다. 가해자도 시인한 사건을 검찰은 기소조차 하지 않았다. 억울하고 분해 마른 눈물을 삼키던 누나를 옆에서 지켜봐야 했다.

 

강정을 안 뒤 민주주의와 인권이 무엇인지 고민하게 된다. 김두식 교수의 헌법의 풍경: 잃어버린 헌법을 위한 변론(개정증보판, 교양인, 2011)을 집어 들고 답을 찾았다. 20046월 출간돼 노무현 대통령의 추천 도서’, ‘책따세 권장도서에 이름을 올리더니 20051월에는 45회 백상출판문화상을 받았다. 저자 자신도 개정증보판의 머리말에서 법과 사회를 공부하는 학생들의 필독서가 되었고, 지난 7년간 스테디셀러로 자리잡았다고 말할 정도다. 소수자 인권, 평화, 정의, 민주주의에 대해 각종 매체와 단행본에서 꾸준히 목소리를 내온 그는 ‘2004년의 기본 틀을 그대로 남겨둔 채 2011년의 목소리를 추가하는 길을 선택했다. 2011년 작년 한 해 심각한 위기에 처한 한국의 헌법, 즉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근간을 지키고자 하는 법학전문교수의 치열한 성찰 아닐까.

 

정의가 아닌 전관예우가 판단의 기준인 사법부, 사회 약자들을 위하겠다는 포부가 사라진 검사·판사·변호사들, 약자들의 권리가 아닌 수사의 편리함만 생각하며 차별에 앞서는 이들. 지난 한 해 사법개혁은 큰 화두 중에 하나였지만, 결국 이뤄지지 못했다. 차기 국회나 정부에서는 이뤄질지, 이뤄지더라도 진정성이 있는 개혁안이 나올지 여전히 의문이다.

 

각 장 하나하나 모두를 꼼꼼하게 읽었다. 그만큼 그동안 품었던 고민들에 딱딱 떨어지는 명쾌한 답변이 책 곳곳에 숨어 있었다. 저자는 실미도 북파 공작원 살해와 제주4·3사건을 독일의 인종 청소와 연결하며 국가 폭력의 원인을 이렇게 진단한다.

 

국가의 범죄는 절대 권력을 지닌 소수 독재자들의 야욕과 그들에게 복종하는 다수 봉사자들의 협력에 의해 현실화됩니다. 정신 나간 사람들 몇 명의 손으로는 이런 거대한 범죄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이 독재 권력의 전횡에 참여하거나 방관할 때에만 비로소 국가라고 하는 괴물이 힘을 발휘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국가란 이름의 괴물’, 135)

 

국가가 괴물이 되지 않도록 우리나라는 입법권, 행정권, 사법권을 분리하는 삼권분립을 기초로 한다. 그러나 국회의원, 고위관료, 법조 인사들이 기득권층이 되면서 이들이 결탁하고 야합하기 시작한다. 법조계가 지켜야 할 국민의 권리는 휴지조각이 되어 버린다. 헌법이 기본권을 지키기 위해 앞세운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정신은 사라지고, 법을 내세워 민을 속박한다. 국가보안법 같은 악법은 사라져야 하는 이유다.

 

원래는 공산주의자들처럼 우리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을 그럼에도 불구하고인정해주는 것이 사상의 자유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게 또 민주적 기본질서의 핵심이기도 하지요. 그런데 그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 공산주의자들을 탄압하기 시작하면, 어느새 알맹이는 빠져버린 민주주의의 껍질만 남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헌법 정신, 258)

 

김두식 교수는 이 책에서 국민의 권리를 강조한다. 검찰, 변호사, 판사는 그 권리를 지키기 위해 특권을 버리고 똥개가 돼야 한다’(‘똥개 법률가들의 시대’)고 강조한다. 이 책을 관통하는 주제를 책 안에서 찾을 수 있었다.

 

역시 그럼에도 불구하고수사기관에 의한 인권 침해로 한 명의 범인을 잡는 것보다는 백 명의 무고한 시민의 희생을 예방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와 같은 권리(말하지 않을 권리,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들을 보장해온 것입니다. (‘말하지 않을 권리, 그 위대한 방패’, 301)

 

이 문장을 곰곰이 생각하다 수사기관에 의한 인권 침해로 백 명의 범인을 잡는 것보다는 한 명의 무고한 시민의 희생을 예방하는 것이 옳다고 바꿔 보았다. 소수의 권리를 적극적으로 인정하는 사법부와 법조인들을 기대하는 바람에서다.

 

애초에 가진 질문은 책을 읽으며 해소됐지만, 질문은 점점 깊어만 간다. 2012년 한국사회 현실은 민주주의와 헌법의 정신과 많이 어긋나있다. 국민의 의견은 아무리 다수여도 정책에 반영되지 않는다. 아니 공론의 장에 나오지조차 못한다. 4대강 사업도 그랬고 제주해군기지도 그렇다. 주민들과 시민사회 활동가들은 배제하고 권력자들과 자본가들이 책상에 모여 결정하고 고집스럽게밀어붙인다. 헌법을 수호하겠다는 맹세, 그건 내 생각과 다르더라도 경청하겠다는 자세 아닐까. ‘잃어버린 헌법을 되찾아야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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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모르는 호주 서부지방 위에 있는 파푸아 뉴기니의 서쪽에 있는 작은 섬이다. 인도네시아 령인 서티모르 지역 중 오에쿠시 지방과 티모르 섬의 동부 지방이 동티모르 령이다. 그 크기는 경기도와 강원도를 합친 정도.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던 티모르에 네덜란드 군이 진주하면서 동과 서로 나뉘어진다. 그 이후로 티모르섬의 서쪽과 동쪽은 서로 다른 문화로 발전한다. 이는 제국주의 종결 이후에 양 지방이 서로 다른 정체성을 갖게 되는 원인으로 작용한다.

 

75년에 동티모르가 포르투갈로부터 독립하자 이미 독립을 쟁취한 인도네시아 군이 치안의 공백을 틈타 동티모르에 진주한다. 서구 열강은 이 사건을 냉전체제 하에서 해석한다. 75년 당시 사회주의 좌파정당이 집권했고 이 상황에서 우파 정당이 정권을 잡은 인도네시아의 침략을 미국과 호주 등의 나라들이 묵인한 것이다. 이렇게 25년간 인도네시아의 식민 통치가 이어진다.

 

1999년 독립이 결정되고 2002년 실질적으로 독립하기까지 동티모르는 인구의 25%가 피를 흘려야 했다. 2001년 동티모르의 독립을 인정하며 철군하던 인도네시아군이 가던 길을 돌려 다시 동티모르를 침입했다. 이를 동티모르 사태라고 부른다.

 

남반구 아열대 지대에 있으며 시간대는 한국과 같다. 아직 개발 자본이 닿지 않아 자연 그대로의 바닷가를 간직하고 있다. 해발 1,000m 이상의 고산지대에서는 커피도 자란다. 동티모르의 커피는 유전자 조작을 하지 않아 커피 그대로의 커피맛과 향을 원하는 이들에게 큰 사랑을 받고 있다.

 

말라리아, 뎅기열 등의 위험이 있다. 인터넷은 수도인 딜리와 지방의 주도에서는 가능하지만 주도에서 멀어지면 할 수 없다. 전기 공급도 안정적이지 않다.

 

언어는 포르투갈어와 떼뚬어(동티모르어)를 공용어로 하지만 각 지방별로 고유의 언어를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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