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인가, 미신인가
조성노 지음 / 넥서스CROSS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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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를 통해 교리를 배우다

- <믿음인가, 미신인가>에 대한 단평 -

 

학부 때에 현대 신학에 대해 큰 그림을 그리기 위해 여러 책을 섭렵했다. 일차문헌과 더불어 이차문헌도 숱하게 읽었다. 어떤 책들은 반복해서 읽었다. 중요한 고전들과 명쾌한 교과서들을 주로 그렇게 여러 차례에 걸쳐 탐독했다. 그 당시에 내가 주로 참고했던 책들 가운데 국내 신학자가 쓴 것은 많지 않았다. 그 중 하나가 독일에서 유학한 조성노 교수의 개설서인 <현대신학개관>이다.

 

한데 얼마 전에 내 손에 <믿음인가, 미신인가>(넥서스CROSS)라는 제목의 설교집이 들어왔다. 그 부제가 “설교로 배우는 기독교 교리”이다. 현직 목회자가 교리 설교를 묶어 책으로 낸 것이다. 그래서 저자 이름을 확인해 보니 바로 조성노라고 나와 있는 게 아닌가. 이분의 저서가 조직신학으로 전공을 밟기 전에 내가 거친 디딤돌 가운데 하나지 않나. 반가운 마음이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분이 신학교를 떠나 교회를 개척하였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개척 이후의 소식은 거의 들은 바가 없었다. 그러다 이렇게 신작으로 나타나니 감회가 새롭다. 더욱이 교리 설교집이 아닌가. 목회자로서 설교집을 내놓았지만, 동시에 신학자로서 교리책을 내놓은 것이기도 하다. 아닌 게 아니라 “설교로 배우는 기독교 교리”라는 제목에 어울리게 명쾌하기 그지없다. 심지어 자신의 설교가 “간결하고 명쾌하며 독하기까지”(5쪽) 하다며 자평할 정도다.

 

“제 설교에 임팩트가 있습니다.”(5쪽)라는 단언에는 조금 당황했지만, 확실히 내용의 전개가 명쾌하고, 언어의 표현도 간결하다. 목회자로서의 파토스 못지않게 신학자로서의 로고스가 드러나고 있다. 하나님, 창조, 인간, 구원, 개혁, 교회, 종말이라는 일곱 개의 키워드로 총 마흔 개의 설교가 진행된다. 매 설교마다 그 말미에는 “한걸음 더”라는 제목으로 생각을 정리하도록 도와주는 질문들이 붙어 있다.

 

흥미로운 것은 구원(4부)과 교회(6부) 사이에 개혁이라는 항목(5부)이 들어있다는 점에 있다. 이는 한 면으로는 종교개혁에서 말하는 바로 그 신앙의 개혁을 가리킨다(162-3쪽). 즉 개신교의 입장이다. 또한 다른 한 면으로는 특정 교파, 즉 “개혁교회라고 명명하는 장로교”(162쪽)의 입장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장로교 소속으로 목회하고 있는 저자 자신의 입장이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장로교가 바로 이런 개혁교회의 전통에 서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개혁가들의 정신을 계승하는 개혁교회 성도로서의 존재감이 필요합니다. 교회만이 아닙니다. 사회도, 정치도, 경제도, 문화도 다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거기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것입니다. 그게 개혁이며 우리가 살 길입니다.”(162-3쪽)

 

<믿음인가, 미신인가>의 각 페이지마다 신학자의 명쾌한 지성과 목회자의 따스한 마음이 빛난다. 이 설교집은 신학자와 목회자가 하나된 모범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반가운 마음에 곧장 펼쳐들어 읽게 되었지만, 기대 이상으로 책이 좋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어서 기쁘다. 이 설교집은 기독교 교리 탐구의 장구한 여정에 갓 입문한 평신도들에게 좋은 친구가 되어줄 책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개혁가들의 정신을 계승하는 개혁교회 성도로서의 존재감이 필요합니다. 교회만이 아닙니다. 사회도, 정치도, 경제도, 문화도 다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거기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것입니다. 그게 개혁이며 우리가 살 길입니다."(16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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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김연수 지음 / 자음과모음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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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연수는 작가의 말에서 이 소설의 주제가 소통임을 밝힌다. 사람 사이의 심연을 가로지르는 소통을 모색하기 위해 그가 택한 매개는 기억이며, 등장인물들이 기억을 재구성해가는 과정이 소설의 전체 서사를 구성한다. 제목부터가 이를 함축한다. 사실 제목은 본문에서 가져온 것으로(228), 문장의 나머지는 이러하다. “너를 생각하는 것은 나의 일이었다.”

 

벤야민이 지적하였듯이 기억은 구원론적 모티브를 담지하고 있다. 기억의 수정은 정체성의 변형을 수반한다. 기억의 확장에 따른 서사의 재구성은 정체성의 변형을 통한 구원의 체험이다. 애초에 그녀가 자신의 뿌리(어머니)를 찾아나서는, 즉 망각에서 기억으로 나아가는 과정은 그녀의 구원을 향한 노정에 다름 아니다.

 

2.

 

양모()와 딸(카밀라)의 관계는 양부 에릭이 보낸 여섯 개의 상자 속에 담긴 과거의 유물로 드러난다. 그 유물 속에 담긴 사진에서 비롯되고, 출판사의 요청으로 촉발된 과거에 대한 모색의 과정은 결국 정체성의 변형으로 완성된다. 즉 카밀라 포트만은 정희재가 된다(232). 점을 이어 만들어지는 선이 달라질 때마다 존재 역시 바뀌게 마련인 것이다(203).

 

더 이상 그녀가 카밀라로 돌아갈 수 없다면(138) 유이치와 결별할 수밖에 없다. 그는 어디까지나 카밀라의 남자이기 때문이다. 카밀라가 어머니를 찾아 나설 때에는 유이치가 동행하였으나 정희재가 과거를 복원해가는 과정에는 지훈이 함께 한다. 유이치(와 세상으)로부터 떠나 바다에 몸을 던진 카밀라를 구해낸 이가 바로 지훈이다.

 

3.

 

야곱이 천사와 씨름하여 승리한 그날 밤에 승리의 결과로 새로운 이름(이스라엘)을 얻게 될 때에 그 부산물로 남은 생애 동안 다리를 절게 되듯이(창세기 3224-8), 그녀의 구원 또한 영혼의 어둔 밤을 경유해야 한다. 그녀가 과거의 조각을 맞춰감에 따라 직면하게 되는 현실은 그녀에게 고통으로 다가온다(202-3).

 

유이치가 사랑하는 카밀라는 자신의 어머니가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불행과 유이치의 프로포즈라는 행복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다가(150-1) 바다에 몸을 던짐으로써 사라진 셈이다. 마치 기독교에서 물속으로 들어갔다 나옴으로써(침례)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이 되듯이 지훈이 물에서 건져낸 그녀는 이제 더 이상 카밀라가 아니다(138).

 

양모와의 관계가 과거의 유물에 응결되어 있는 반면, 친모(정지은)와의 관계는 그녀의 현재하는 기억으로 드러난다(“너를 생각하는 것은 나의 일이었다”). 단 하루도 그녀를 잊지 않는(228) 지은에게 그녀는 카밀라가 아니라 희재이다. 이는 희재가 자신의 근원이 되는 지은의 기억을 자기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데에 따른 것이다.

 

4.

 

하지만 자신의 근원을 찾아나서는 그녀의 노정이 종결되기 위해서는 아직 더 만나야 할 사람, 즉 아버지가 있다. 희재가 만나야 할 이는 "자살한 그 아이를 사랑하고 있었"(162) 사람이다. 그리고 희재가 그를 만날 때, 비로소 그녀의 정체성은 완성된다(232). 그리고 이는 바로 다름 아닌 바로 서로의 이름에서 확인된다. 이름은 기억의 중심에 놓여 있다.

 

바람의 말 아카이브에 당도한 희재는 사랑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사랑의 증거는 기억이다. 그녀는 기억의 조각을 완성함과 동시에 그 기억 속에서 온전히 희재가 되는 것이다. “모든 것은 두 번 진행된다. 처음에는 서로 고립된 점의 우연으로, 그다음에는 그 우연들을 연결한 선의 이야기로. 우리는 점의 인생을 살고 난 뒤에 그걸 선의 인생으로 회상한다.”(201-2)

 

5.

 

이러한 기억의 수정과 확장은 지은의 딸, 희재에게만 요구되는 것이 아니다. 외려 그녀보다 더 절실했던 이는 바로 지은의 친구들이 아니었을까. 특히 미옥은 지은의 아버지와 자신의 아버지 사이의 관계를 확인하게 되는 과정(282-3)을 거쳐 과거의 주박에서 풀려난다. 이는 유치했던 "소녀 시절이 마침내 종말을 고하는 순간이다(283).

 

또한 백인 소녀 앨리스가 양관을 서성거리던 이유도 마찬 가지가 아닌가. 그녀가 가장 자주 발견되던 시기는 동시에 기억나는 게 없기도 했고, 또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게 많기도 한, 말하자면 암흑기”(260)였다. 망각되는 기억이 유령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리고 그녀를 기억하며 바라보던 이는 이선호 일가의 마지막 생존자, 이희재와 그의 어머니였다.

 

6.

 

이희재의 고통은 어머니에 대한 기억과 관련된다. 에릭이 아내()의 사후에 새로운 여자와의 관계를 위해 그녀가 가장 사랑한 카밀라(13)의 물건을 보내서 아내에 대한 기억을 정리하듯이 그의 아버지(이상수) 또한 마찬가지 이유로 죽은 아내의 물건을 처분해버리는데(293), 이는 이희재의 부친을 향한 분노(와 이로 말미암은 그의 살부 충동)의 원인이 된다.

 

이로 말미암아 그는 바람의 말 아카이브를 통해 옛 기억의 수집과 보존을 추구하게 되었을 게다. 이는 구원을 향한 몸부림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 아카이브에서 상영되고 있는, 지은와 미옥의 친구 유진의 필름 역시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유진이 필름을 통해 보존하고 복원했던 과거 역시 그녀()의 과거를 새롭게 하고, 치유하고자 하는 노력의 일단이다.

 

7.

 

앞서 언급한 지훈의 경우는 어떠한가? 그와 여자친구(미연) 사이의 결별은 사투리(라는 빌미)에 기인하는 소통의 좌절 때문이다. 그는 바람의 말 아카이브와 함께 제작한 라디오 방송(<우리들의 사랑 이야기>)에서 제공되는 숱한 사랑 이야기들, 즉 다른 이들의 만남과 이별에 대한 기억 속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발견하고, 그 동일시 가운데 위로를 얻게 된다.

 

지훈과 희재의 만남은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심연으로 말미암은 상처(327)와 이의 극복(곧 구원)에 관계되는 것이다. 바람의 말 아카이브에 영구 보존되는 사랑의 이야기”(157) 속에 희재의 부모 이야기가 들어있다. 이곳에 소장된 이야기들을 통해 위로 받은 지훈으로 말미암아 희재는 마침내 이곳에 당도한다.

 

그리고 24년 전과 동일하게 이곳에는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231; 323). 그의 기다림은 곧 지은의 기다림이기도 하다(150; 223; 230). 희망(327)은 기다림이다. 둘의 기다림은 오로지 그녀(희재)의 당도를 통해서만 종결될 수 있으며, 기억과 현재가 그녀를 통해 연결된다. 정희재는 심연을 가로질러 정지은과 이희재를 다시 이어주는 날개인 것이다(278).

 

8.

 

구원은 기억과 이를 경유한 소통의 다른 이름이다. 소설의 인물들은 기억을 통해 구원을 경험한다. 정지은의 기억 속에서 카밀라는 정희재가 된다. 유진의 필름 속에서 미옥은 아이에서 어른으로 성장한다. 바람의 말 아카이브에서 지훈은 이별의 상처를 치유 받는다. 이희재와 모친의 관심으로 인해 앨리스는 이제 유령으로 떠돌지 않는다.

 

반면 최성식 부부에게는 구원이 없다. 아내의 강요로 인해 제자(지은)에게 낙태를 요구한 최성식은 평생을 그 죄책감 속에서 살아야 했다(211). 남편과 지은 사이를 의심하던 신혜숙은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고자 희재의 과거를 조작하여 강제 입양시킨다. 마침내 남편의 결백을 알게 된 후에도 여전히 그를 사랑하지 못하는 것(216)은 이러한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은이 죽음에 이르게 한 거짓말의 장본인인 미옥과 신혜숙의 차이는 어디에 있는가? 신혜숙의 거짓은 자존심에 그 동기가 있지만, 미옥의 거짓은 실제 고통에 기인한다. 지은의 아버지가 선동하여 일어난 일단의 사건, 즉 아버지의 죽음과 이로 인한 가정의 파탄이 그녀의 소녀 시절을 드리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유진의 필름을 통해 자신의 과오를 직면하는 가운데 드디어 어른이 된다.

 

기억을 통한 구원을 둘러싼 이 모든 이야기를 관통하는 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심연이며(326), 소통은 이러한 심연을 넘어서는 것이다. 그러나 심연을 넘어서는 소통은 신비에 다름 아니며, 우리는 이를 희망하는 가운데 최선을 다할 따름이다. 그러므로 작가의 말의 마지막 문장에 담긴 희망은 우리 모두의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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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심층을 보다
오강남 지음 / 현암사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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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의 본질은 모든 신자들의 경험의 평균이 아니라, 깊은 체험을 한 신자들의 경험에서 발견된다. 학부 때, 종교심리학 수업 시간에 교수님이 들려주신 말씀의 요지다. 나는 지금도 그 말씀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한국 대형교회의 전횡을 보면, 원래 기독교 혹은 예수님이 주신 가르침의 본질과 무관하다고 외치고 싶다.

그러나 한국 대형교회의 언행이 바로 기독교의 언행이다. 이들은 분명 기독교를 참칭하고 있다. 비록 예수가 그들 안에 계실 지는 의문이지만, 그들은 예수를 말하며, 예수를 따른다고 주장한다(진짜?). 그들은 필경 기독교 공동체를 구성하는 기본 경전인 성서의 문자적(표층적) 의미 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실정이다.

예수가 다시 오신다면 대형교회로 들어가실까? 그들의 거창한 환대 속에서 방송 설교를 통해 전국적으로 자신을 드러내실까? 아마도 예루살렘 성전에서 그러셨듯이 분노하시면서 대형교회를 뒤엎지 않으실까?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것이다. 한국 대형교회의 모습을 통해 기독교의 본질을 알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기독교의 본질을 알 수 있을까? 진정으로 성숙한 신자들의 삶을 들여다보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알 수 있다. 우리는 그들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마침 오강남 교수가 우리에게 친절하게 알려준다. 일부만 적어보자. 도마, 프란체스코, 에크하르트, 줄리안, 루터, 본회퍼, 틸리히, 머튼, 큉, 나우웬 등.

이 명단에 포함된 인물들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답은 간단하다. 이들은 모두 신비주의자들이다. 신비주의자란 교리(머리의 이해)가 아니라 체험(가슴의 깨달음)을 통해 신을 만나는 이들이다. 바로 자신의 내면에서 신을 발견한 이들이다. 이들이 말하는 기독교가 진정한 기독교다. 그들을 통해 우리는 기독교의 본질을 알 수 있다.

종교의 역기능이 팽배한 오늘날, 오강남 교수는 <종교, 심층을 보다>를 통해 종교가 원래의 순기능을 찾으려면 어떻게 해야할 지를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표층에서 심층으로 내려가라고. 그러니까 제도와 교리와 문자에 붙박혀서 표층적 종교인으로 존재하지 말고, 체험과 각성과 의미를 추구하며 심층적 종교인으로 성숙해가라는 것이다.

이를 위해 오강남 교수는 각 종교 안에서 심층적 차원을 열어젖힌 진정한 신비주의자들을 소개하고 있다. 그들의 생애와 그들의 교훈을 매우 간결하게 정리하고 있기에 각 종교의 정수를 한 눈에 일별할 수 있게 해준다. 지면 전체를 통해 평생을 비교종교학 연구에 매진한 노대가의 탁월한 균형감각이 돋보인다.

520쪽에 달하는 <종교, 심층을 보다>를 읽어내기 위해서는 마음의 인내와 육체의 근육이 중요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요구되는 것은 각 종교계의 여러 선현들을 통해 '심층 종교의 존재를 인지하고 그 차원으로 [자신]의 눈을 돌리려 하는'(509쪽) 열망이다. 이러한 열망을 가지고 있는 독자분은 반드시 이 책을 열어보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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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론, 운명을 넘어서는 역량의 정치학 리라이팅 클래식 14
정정훈 지음 / 그린비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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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군주론>을 읽기 위해 한 권의 가이드를 골라야 한다면, 바로 이 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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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영어는 영화관에서 시작됐다
이미도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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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벤트를 통해 나는 [나의 영화는 영화관에서 시작됐다]를 만났다. 물론 내게는 이미도라는 네임 브랜드에 대한 기대감이 어느 정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따끈따끈한 신간을 펼쳐보고, 내 기대가 배신당했음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기분 좋은 배신이었다. 내 기대가 책의 수준을 따라잡지 못했던 것이다. 내 기대보다 훨씬 더 재밌는 책이라니!
 
전체 구성은 영화 예찬, 영어 예찬, 인생 예찬의 삼 부로 나뉘어 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책의 어디를 보나 삶과 영어, 그리고 영화가 공존한다. 사실 우리에게 알려진 이미도의 삶이란, 영어와 영화가 전부이다. 그리고 그의 영어는 영화의 자막을 통해 번역된 영어가 아닌가. 그러니 영어와 영화를 통한 그의 인생 지혜가 책 전반을 흐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정작 내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책이 재밌다는 것이다. 도처에서 우리는 그의 넘치는 재기를 발견할 수 있다. 그가 명번역가로 명성을 날리는 이유를 이 책에서 여실히 확인할 수 있다.
 
가령 그는 와인 카페의 이름으로 臥人 혹은 臥人多人(WINE DINE)을 제시하고(나아가 그는 이 제명을 가지고 인장이나 상형문자 식으로 직접 디자인하기도 했다), 또 연인들이 와서 쉴 수 있는 아늑한 분위기의 술집 이름으로 몸둘BAR를 제안한다.
 
단순히 풍부한 영어 지식과 영화 상식을 제공하는 것 이상으로 돋보이는 것이 바로 이러한 재기와 웃음이다. 이 책을 통해 독자 분들은 웃음과 더불어 영어를 그리고 영화를 배울 수 있다. 영화는 우리 시대의 교양이고, 영어는 -비통하지만- 우리 시대의 상식이다. 그러나 이 책은 우리에게 교양과 상식을 즐거이 배울 수 있게 해 준다. 마치 놀이하듯이 말이다. 그러므로 나는 글의 제목을 정정해야 한다, "이제 영어 놀이는 이 책에서 시작될 것이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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