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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김연수 지음 / 자음과모음 / 2012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1.
김연수는 ‘작가의 말’에서 이 소설의 주제가 소통임을 밝힌다. 사람 사이의 심연을 가로지르는 소통을 모색하기 위해 그가 택한 매개는 기억이며, 등장인물들이 기억을 재구성해가는 과정이 소설의 전체 서사를 구성한다. 제목부터가 이를 함축한다. 사실 제목은 본문에서 가져온 것으로(228쪽), 문장의 나머지는 이러하다. “너를 생각하는 것은 나의 일이었다.”
벤야민이 지적하였듯이 기억은 구원론적 모티브를 담지하고 있다. 기억의 수정은 정체성의 변형을 수반한다. 기억의 확장에 따른 서사의 재구성은 정체성의 변형을 통한 구원의 체험이다. 애초에 그녀가 자신의 뿌리(어머니)를 찾아나서는, 즉 망각에서 기억으로 나아가는 과정은 그녀의 구원을 향한 노정에 다름 아니다.
2.
양모(앤)와 딸(카밀라)의 관계는 양부 에릭이 보낸 여섯 개의 상자 속에 담긴 과거의 유물로 드러난다. 그 유물 속에 담긴 사진에서 비롯되고, 출판사의 요청으로 촉발된 과거에 대한 모색의 과정은 결국 정체성의 변형으로 완성된다. 즉 카밀라 포트만은 정희재가 된다(232쪽). 점을 이어 만들어지는 선이 달라질 때마다 존재 역시 바뀌게 마련인 것이다(203쪽).
더 이상 그녀가 카밀라로 돌아갈 수 없다면(138쪽) 유이치와 결별할 수밖에 없다. 그는 어디까지나 카밀라의 남자이기 때문이다. 카밀라가 어머니를 찾아 나설 때에는 유이치가 동행하였으나 정희재가 과거를 복원해가는 과정에는 지훈이 함께 한다. 유이치(와 세상으)로부터 떠나 바다에 몸을 던진 카밀라를 구해낸 이가 바로 지훈이다.
3.
야곱이 천사와 씨름하여 승리한 그날 밤에 승리의 결과로 새로운 이름(이스라엘)을 얻게 될 때에 그 부산물로 남은 생애 동안 다리를 절게 되듯이(창세기 32장 24-8절), 그녀의 구원 또한 ‘영혼의 어둔 밤’을 경유해야 한다. 그녀가 과거의 조각을 맞춰감에 따라 직면하게 되는 현실은 그녀에게 고통으로 다가온다(202-3쪽).
유이치가 사랑하는 카밀라는 자신의 어머니가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불행과 유이치의 프로포즈라는 행복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다가(150-1쪽) 바다에 몸을 던짐으로써 사라진 셈이다. 마치 기독교에서 물속으로 들어갔다 나옴으로써(침례)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이 되듯이 지훈이 물에서 건져낸 그녀는 이제 더 이상 카밀라가 아니다(138쪽).
양모와의 관계가 과거의 유물에 응결되어 있는 반면, 친모(정지은)와의 관계는 그녀의 현재하는 기억으로 드러난다(“너를 생각하는 것은 나의 일이었다”). 단 하루도 그녀를 잊지 않는(228쪽) 지은에게 그녀는 카밀라가 아니라 희재이다. 이는 희재가 자신의 근원이 되는 지은의 기억을 자기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데에 따른 것이다.
4.
하지만 자신의 근원을 찾아나서는 그녀의 노정이 종결되기 위해서는 아직 더 만나야 할 사람, 즉 아버지가 있다. 희재가 만나야 할 이는 "자살한 그 아이를 사랑하고 있었"던(162쪽) 사람이다. 그리고 희재가 그를 만날 때, 비로소 그녀의 정체성은 완성된다(232쪽). 그리고 이는 바로 다름 아닌 바로 서로의 이름에서 확인된다. 이름은 기억의 중심에 놓여 있다.
바람의 말 아카이브에 당도한 희재는 사랑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사랑의 증거는 기억이다. 그녀는 기억의 조각을 완성함과 동시에 그 기억 속에서 온전히 희재가 되는 것이다. “모든 것은 두 번 진행된다. 처음에는 서로 고립된 점의 우연으로, 그다음에는 그 우연들을 연결한 선의 이야기로. 우리는 점의 인생을 살고 난 뒤에 그걸 선의 인생으로 회상한다.”(201-2쪽)
5.
이러한 기억의 수정과 확장은 지은의 딸, 희재에게만 요구되는 것이 아니다. 외려 그녀보다 더 절실했던 이는 바로 지은의 친구들이 아니었을까. 특히 미옥은 지은의 아버지와 자신의 아버지 사이의 관계를 확인하게 되는 과정(282-3쪽)을 거쳐 과거의 주박에서 풀려난다. 이는 유치했던 "소녀 시절이 마침내 종말을 고“하는 순간이다(283쪽).
또한 백인 소녀 앨리스가 양관을 서성거리던 이유도 마찬 가지가 아닌가. 그녀가 가장 자주 발견되던 시기는 동시에 “기억나는 게 없기도 했고, 또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게 많기도 한, 말하자면 암흑기”(260쪽)였다. 망각되는 기억이 유령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리고 그녀를 기억하며 바라보던 이는 이선호 일가의 마지막 생존자, 이희재와 그의 어머니였다.
6.
이희재의 고통은 어머니에 대한 기억과 관련된다. 에릭이 아내(앤)의 사후에 새로운 여자와의 관계를 위해 그녀가 가장 사랑한 카밀라(13쪽)의 물건을 보내서 아내에 대한 기억을 정리하듯이 그의 아버지(이상수) 또한 마찬가지 이유로 죽은 아내의 물건을 처분해버리는데(293쪽), 이는 이희재의 부친을 향한 분노(와 이로 말미암은 그의 살부 충동)의 원인이 된다.
이로 말미암아 그는 바람의 말 아카이브를 통해 옛 기억의 수집과 보존을 추구하게 되었을 게다. 이는 구원을 향한 몸부림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 아카이브에서 상영되고 있는, 지은와 미옥의 친구 유진의 필름 역시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유진이 필름을 통해 보존하고 복원했던 과거 역시 그녀(들)의 과거를 새롭게 하고, 치유하고자 하는 노력의 일단이다.
7.
앞서 언급한 지훈의 경우는 어떠한가? 그와 여자친구(미연) 사이의 결별은 사투리(라는 빌미)에 기인하는 소통의 좌절 때문이다. 그는 바람의 말 아카이브와 함께 제작한 라디오 방송(<우리들의 사랑 이야기>)에서 제공되는 숱한 사랑 이야기들, 즉 다른 이들의 만남과 이별에 대한 기억 속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발견하고, 그 동일시 가운데 위로를 얻게 된다.
지훈과 희재의 만남은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심연으로 말미암은 상처(327쪽)와 이의 극복(곧 구원)에 관계되는 것이다. 바람의 말 아카이브에 “영구 보존”되는 “사랑의 이야기”(157쪽) 속에 희재의 부모 이야기가 들어있다. 이곳에 소장된 이야기들을 통해 위로 받은 지훈으로 말미암아 희재는 마침내 이곳에 당도한다.
그리고 24년 전과 동일하게 이곳에는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231; 323쪽). 그의 기다림은 곧 지은의 기다림이기도 하다(150; 223; 230쪽). 희망(327쪽)은 기다림이다. 둘의 기다림은 오로지 그녀(희재)의 당도를 통해서만 종결될 수 있으며, 기억과 현재가 그녀를 통해 연결된다. 정희재는 심연을 가로질러 정지은과 이희재를 다시 이어주는 날개인 것이다(278쪽).
8.
구원은 기억과 이를 경유한 소통의 다른 이름이다. 소설의 인물들은 기억을 통해 구원을 경험한다. 정지은의 기억 속에서 카밀라는 정희재가 된다. 유진의 필름 속에서 미옥은 아이에서 어른으로 성장한다. 바람의 말 아카이브에서 지훈은 이별의 상처를 치유 받는다. 이희재와 모친의 관심으로 인해 앨리스는 이제 유령으로 떠돌지 않는다.
반면 최성식 부부에게는 구원이 없다. 아내의 강요로 인해 제자(지은)에게 낙태를 요구한 최성식은 평생을 그 죄책감 속에서 살아야 했다(211쪽). 남편과 지은 사이를 의심하던 신혜숙은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고자 희재의 과거를 조작하여 강제 입양시킨다. 마침내 남편의 결백을 알게 된 후에도 여전히 그를 사랑하지 못하는 것(216쪽)은 이러한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은이 죽음에 이르게 한 거짓말의 장본인인 미옥과 신혜숙의 차이는 어디에 있는가? 신혜숙의 거짓은 자존심에 그 동기가 있지만, 미옥의 거짓은 실제 고통에 기인한다. 지은의 아버지가 선동하여 일어난 일단의 사건, 즉 아버지의 죽음과 이로 인한 가정의 파탄이 그녀의 소녀 시절을 드리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유진의 필름을 통해 자신의 과오를 직면하는 가운데 드디어 어른이 된다.
기억을 통한 구원을 둘러싼 이 모든 이야기를 관통하는 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심연”이며(326쪽), 소통은 이러한 심연을 넘어서는 것이다. 그러나 심연을 넘어서는 소통은 “신비”에 다름 아니며, 우리는 이를 “희망”하는 가운데 최선을 다할 따름이다. 그러므로 ‘작가의 말’의 마지막 문장에 담긴 희망은 우리 모두의 희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