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트의 세계
듀나 지음 / 창비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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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칼럼을 통해 영화평론가로 오래 알았던 듀나 평론가는 알고 보니 SF 소설도 쓰는 작가였고 아마  세계에서 손꼽히는 트위터 이용자일 것이다. 필력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SF 소설도 엄청 잘 쓰는 작가고 세상에 관한 관심사가 어마어마하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을 때 내가 듀나 작가에 대해 다 알게 되는 날이 과연 올까?라는 궁금증에 한동안 사로잡혔었다. 듀나 작가가 누구냐는 대한 정체성에 대한 궁금증이 아니라 듀나 작가가 자신이 가진 것들을 거리낌 없이 보여주는데 내가 그것들을 쫓아가며 나도 그것들에 대해 다 알아가는 날이 과연 올까 싶었던 거다.
영화 칼럼을 통해, SF 소설을 통해, 트위터를 통해 만나는 듀나 작가는 몸이 3개쯤 되거나 하루가 50시간쯤 되는 사람 같다. 문화계뿐만 아니라 사회문제들에 대한 스펙트럼이 엄청나게 넓고 부지런해서 따라가려 해도 듀나 작가는 너무 앞서있고 빨라서 거리가 좁혀지기는커녕 갈수록 멀어져만 간다. 그런 듀나 작가를 따라가려다 보면 동의할 수 없는 것들이 있기도 하고  어쩔 수 없이 그냥 지나치게 되는 것들이 생기기도 하는데 소설만큼은 무조건 동의하게 되고 절대로 지나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개인적으로 오랜 시간을 영화평론가로만 알고 있었고 아직 읽은 소설보다 읽어야 할 소설이 훨씬 많음에도 듀나 작가라는 호칭이 자연스러워진 정도로 작가로서의 매력에 확실히 빠져버렸기 때문이다. 미스터리한 자신의 존재만큼이나 매력적인 글을 쓰는 듀나 작가의 새 책이 나왔다. 역시나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그리고 예상했던 대로 단숨에 빠져들며 읽어갔다.

2026년 첫 배터리가 전주에서 나타나고 전 인류가 배터리에게서 에너지를 얻는 초능력자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더 이상 '초능력'이라는 단어는 사용하지 않는다. 2049년 대한민국은 정부와 거대 기업 LK의 탄압이 일어나고 그에 맞서는 봉기가 일어난다. 그 중심엔 아직 학교에 다니고 있어야 할 소녀 민트와 그녀가 결성한 초능력 엘리트팩 '민트갱'의 단원들이 있다. LK본사 건물에서 민트의 시신이 발견되고 민트의 과거 행적을 쫓아가며 현재와 과거를 추리해나가는 과정들을 따라가다 보면 이토록 엄청난 작품을 접하면서 '정말 한편의 영화 같다'라는 진부한 표현밖에 떠올리지 못하는 나의 표현력에 답답함을 느끼고 만다. 단순한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것을 넘어서 다양한 체험을 경험하게 해주는 4DX를 체험 한 것 같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고 화자의 시점이 바뀌며 펼쳐지는 민트의 세계의 문은 끝없이 펼쳐지고 새로운 문을 열 때마다 미스터리가 꼬리를 문다. 등장인물들의 행적을 함께 따라가며 추리를 해나가지만 반전이 거듭되면서 앞장을 다시 되짚어보고 작가가 깔아놓은 무수한 복선들을 찾아가게 되며 또 듀나 작가와의 거리가 멀어지고 만다. 330페이지의 흡인력 있는 소설이지만 절대 330페이지만 읽을 수 없는 이야기를 듀나는 자신이 창조한 민트를 비롯한 많은 등장인물들과 그들이 구축한 세계에 펼쳐놓았고 소설이 끝났음에도 오랫동안 그 세계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내가 이 소설이 주는 즐거움을 다 누렸다고는 말하지 못할 것 같다. 등장인물들과 그들이 처한 상황과 오가는 대화 속에서 함축되어 있는 바와 시사하는 바를 곳곳에 숨겨놨는데 작가가 소설을 통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들을 내가 반이나 알아차렸는지 모르겠다. 반복적으로 페이지를 다시 넘겨보며 민트의 세계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빠져있는 세계는 사실 듀나의 세계임을 깨닫게 된다.

그 아이는 미친 듯이 사랑스러웠다.
여기서 '사랑스럽다'는 LK 특수 학교의 은어이다. 바깥 세계에서 '사랑스럽다'는 표현은 성적 매력이나 유아적 귀여움, 기타 안전한 호감을 유발하는 특성을 지닌 사람들에게 주로 사용된다. 하지만 학교의 정신감응자들에게 '사랑스럽다'는 개별 정신의 특별한 상태를 의미했다. 주변의 다른 정신으로 쉽게 발산되지 않으면서 자극을 받을 때 독특한 탄성을 유지하는 정신 상태. 이나는 바로 그런 아이였다. 아이는 그 존재만으로도 주변 학생들에게 독특한 쾌락을 유발했다. 아이는 '사랑을 받았고' 바로 그런 이유로 다른 아이들로부터 고립되었다. 이나는 우리의 일부가 아닌 남일때에 가장 매력적인 존재였다. p.49-50


미친 듯이 사랑스러운 소설이다. 듀나 특유의 예측 불가능함에 이번에도 걸려들고 말았지만 작가로서 미친 듯이 사랑스럽고 정말 예쁜 소설을 쓰는 소설가 듀나를 알게 되고 듀나의 독자가 되어 자랑스럽다. 이야기가 펼쳐진 2049년에 읽어도 여전히 미친 듯이 사랑스럽고 정말 예쁜 소설일 것이 분명하다. 과연 2049년에 듀나 작가는 어떤 소설 세계를 구축하고 있을지 궁금해진다. 시대가 지나도 늙지 않는 매력적인 글을 쓸 것이라는 건 예측 가능하지만 그 이상은 짐작조차 안된다. 그게 듀나의 확실한 매력이다. 출구 없는 매력에 빠졌으니 그때까지 듀나의 세계에서 부지런히 작가의 글들을 쫓아다니고 공부를 해서 거리를 좁혀나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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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어비앤비의 청소부
박생강 지음 / 은행나무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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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친구와 이태원에 위치한 에어비앤비에서 묵고 이유 모를 이별을 하게 된다. 안 그래도 첫인상이 좋지 않았던 에어비앤비가 더 마음에 안 든다. 남자친구로서, 재무부서에서 일하는 회사원으로서, 서로 소, 닭 보듯 하는 가족의 큰아들로서 연애도, 일도, 가정도 피곤하기만 한 서른다섯의 영훈. 이태원의 에어비앤비를 다시 찾아 머무는 일이 몇 번 생기면서 그곳의 청소부이자 호스트인 운과 친밀해지고 그의 비밀을 알게 된다.

짤막한 책의 줄거리만 봐도 기대감이 컸는데 막상 책의 실물을 마주하자 의외라는 감정이 여기저기서 생겨나 당혹스럽게 했다.
소설이 이렇게나 짧을 거라는 건 미쳐 예상하지 못했던 부분인데 가독성도 좋아 정말 빨리 읽혔다. 거대한 서사가 없음에도 흥미롭게 읽혀 남은 페이지가 얼마 남지 않을수록 아쉬움이 커져가는데 빠르게 읽히는 사이에도 다시 읽어보게 되는 문장들이 곳곳에서 한숨 쉬어가게 해줬다. 
책의 제목과 줄거리만 봐도 젊은 작가의 현대적이고 감각적인 작품일 거라는 건 충분히 짐작이 가능했지만 영훈이 영훈으로 읽히고 운이 운으로 읽히는 건 짐작하지 못했던 대목이다. 소설을 읽다 보면 작가의 색이 녹아들어 등장인물들이 작가로 읽히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에어비앤비의 청소부』의 경우 단 한순간도 박생강 작가가 읽히지 않았다. 작가가 실제 이태원의 에어비앤비에서의 룸 세팅 및 청소 프리랜서 경험을 했다는 작가의 말을 읽고 나서야 작가의 경험을 녹여내고도 작가의 색을 전혀 못 느꼈음을 뒤는 게 깨달았다. 허를 찔린 느낌이 들었지만 범상치 않은 작가를 알게 된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이미 인터넷을 통해 책의 표지를 봤음에도 실물을 영접하고 책을 읽어갈수록 표지의 쨍한 컬러감이 이 책과 어울리지 않았던 건 소설이 빨리 끝난다는 아쉬움에 이은 이 책의 두 번째 아쉬움이었다. 영훈과 운은 선명한 캐릭터들이 아니고 소설 또한 강렬한 인상을 주는 스토리가 아니다. 정처 없이 부유하는 불완전한 존재들의 불완전한 이야기를 이태원의 에어비앤비라는 장소에 녹여낸 것이 『에어비앤비의 청소부』만의 확실한 매력인데 그 매력과 상반되는 표지가 아니었나 싶다. 많은 독자들이 그러하듯 나 역시 책의 띠지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이 책만큼은 띠지의 홍보문구가 책을 살렸다 싶을 정도로 표지가 하지 못한 역할을 해낸 것 같았다. 미술에 대한 조예라는 게 애초에 있지도 않았고 그런 센스가 1도 없는 사람이지만 소설이 좋았던 만큼 아쉬움도 컸던 부분이다. 작품에 대한 애정이 조금이라도 없었더라면 아쉬움이란 감정도 없이 그냥 무덤덤하게 지나갔을 일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니 여러분들도 오늘 하루, 이 책의 독자가 되어주시겠어요?

 

 

"좋습니다. 어차피 무슨 일 있으면……."
대놓고 최악의 후기를 만방에 널리 퍼뜨릴 작정이었다.
"감사합니다……."
"대신 다음에 또 야근하면 싼 가격에 예약하는 걸로 하죠."
"좋아요, 평일 오만 원인데, 삼만 원으로 깎아드릴게요. 대신 주말은 안 돼요. 그날은 깎을 수가 없어요. 대목 장사라."
내가 침실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가려는데 거의 잠으로 기어들어가는 듯한 빈방 청소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아, 그리고 감사한 건 나이도 많으신데...... 존댓말 써주시고, 저한테."
'그건 네가 전과자라 무서워서 그런 거야. 내가 반말하면 욱해서, 뭔 짓 할까봐.' p.52-53


좋은 소설을 읽었으니 작가에게, 출판사 관계자들에게 특별한 메세지를 보내고 싶다. 정말 좋은 소설이야요. 대박 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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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매일 직장상사의 도시락을 싼다 - 런치의 앗코짱 앗코짱 시리즈 1
유즈키 아사코 지음, 권남희 옮김 / 이봄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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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도해도 너무했던, 유난히도 더웠던 여름을 버티고 나니 마치 보상처럼 가을이 왔다. 질기게도 오래가는 여름과 겨울 사이에 잠깐 스쳐가는 가을인데 어째서인지 이번 가을은 조금 길게 느껴진다. 넉넉한 가을 덕분인지 없었던 마음의 여유도 생겨 일상에서 느끼는 감정들도 조금은 넉넉해진 것 같은데 그게 마치 나라는 인간도 이번 기회에 넉넉한 사람이 되어보라는 계시인 건지 유즈키 아사코의 화제작 『나는 매일 직장상사의 도시락을 싼다』를 누구보다 충만하게 만끽하고 있는 2018년 가을에 만난 게 누군가가 나에게 보내온 사인같이 느껴졌다.

어느 콘텐츠에서든 어떤 소재로 이야기를 들려주든 내가 봐온 회사라는 공간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들은 지겹게, 겨우 버텨내고 있는 현실과는 너무나 달랐기에 회사물이란 나에겐 판타지와 같았다. 그리하여 어느 영화나 드라마, 책들에서 만나는 어딘가의 회사에서 펼쳐지는 인물들 간의 갈등이 극복되어 가는 과정이나 회사에서 닥친 상황들을 해결해나가는 방법들을 해리포터의 마법 세계처럼 창작자들이 구축한 다른 세계의 이야기처럼 봐왔었다. 완벽한 일처리와 넘치는 인간미를 가진 직장 상사가 이제 갓 입시하여 실수투성이인 부하직원의 듬직한 멘토가 되어주거나 사회생활에 치이고 치인 상사가 순수한 신입직원 덕분에 그동안 바쁘게 사느라 놓쳤던 일상의 소중한 것들을 다시 깨우치게 되고 그들에게 닥친 위기를 함께 극복하면서 어느새 또 한 뼘 성장하게 된다는 훈훈한 이야기로 마무리되는 뻔한 판타지지만 직장인들에 관한 이야기라면 그럼에도 빠져들게 하는 뭔가가 있다.

또래의 일본 작가가 그려내는 직장인의 풍경에 대한 호기심과 기대는 출간 즉시 베스트셀러가 되며 드라마까지 성공한 화제의 원작이라는 타이틀만으로도 충분히 근거 있는 호기심과 기대가 되어주었다. 직장인 판타지라도 일본 소설 특유의 정서로 잔잔한 울림을 주는 색다른 독서가 되어 가을 정서와 잘 맞을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펼쳐든 책은 단숨에 읽혀갔다. 선망하는 직장 상사와 점심 바꾸며 서로의 점심시간을 각자 공유하는 방법이 색다르고 신선하다. 역시 현실에선 절대 일어날 수 없는 판타지다. 일주일간 서로의 점심을 바꾸며 앗코와 미치코의 이야기가 한 권의 책일 줄 알았는데 현재 일본 여성 직장인들의 감성을 어느 이야기에선 담담하게 또 다른 이야기에선 날카롭게 다룬 단편집이라 색다른 재미를 선사해주었다.

절대 현실에선 일어날 수 없는 유토피아적인 직장인들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지만 직장이란 테두리 안에서 펼쳐지는 이야기와 주인공들의 감정을 따라가다 보면 일본이나 한국이나 똑같다는 생각이 든다. 4개의 단편들에서 떠오르는 얼굴들이 있었고 잊고 지냈던 기억들이 떠올랐는데 「밤거리의 추격자」에선 루즈삭스같은 반가운 단어들과 함께 중학교 시절의 추억들이 소환되며 오랫동안 간직하고 있었던 보물상자를 오랜만에 개봉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하고 「여유넘치는 비어가든」에선 사람 복장 터지게 하는데 일가견 있었던 옛 직장동료가 떠올라 갑자기 열이 오르기도 했다.

직장생활에 관해서라면 우리 모두는 할 말이 너무나 많아진다. 그리고 직장종료들을 제외한 세상 모든 사람들과 공감대를 형성하게 되는 마법같은 일이 벌어진다. 누군가의 일이 남일같지 않고 때로는 내 상황이 그래도 누군가보다는 나은것 같아 다행이다 싶기도 하고 차마 말하지 못한 무언가를 누군가 대신 목소리를 내어주면 고맙기도 하다.

열정은 넘치지만 아직 요령이 없고 서툴기만 한 20대의 미치코와 업무도 사람을 다루는 일도 능숙하고 여유로운 40대 중반 앗코의 이야기도 좋았지만 그 사이의 지점에 있는 노유리의 이야기가 나와 나이나 처지가 비슷해서인지 더 마음을 동하게 했다. 한국어로 대화를 해도 도저히 내 마음을 다 드러내지 못하고 대화라는 게 안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언어의 장벽이 있어도 일본의 82년생 노유리와는 대화가 좀 통할 것 같고 마음이 잘 맞을 것 같아 그녀와 친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하루를 마무리하고 그대로 집에 들어가기 섭섭할 때 불시에 연락을 해도 반갑게 만날 수 있는 그런 친구가 되어 따뜻한 포토푀를 함께 먹으면서 영양가 없는 넋두리를 늘어놓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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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바, 제인
개브리얼 제빈 지음, 엄일녀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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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망받는 지역 유명 정치인과 이제 갓 스무 살인 정치 지망생 여자 인턴과의 스캔들이 터진다. 스캔들을 바라보는 대중들의 관심은 당연히 뜨겁다. 그리고 또 당연히 비난의 화살은 오직 여자 인턴에게만 향한다.
책에 관한 짤막한 줄거리만 보면 이 소설의 배경이 대한민국이라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어 보인다. 현재 우리에겐 이 짧은 줄거리 소개에 절로 떠오르는 뉴스들이 있고 인물들이 있다. 이 사건이 아니더라도 우리의 대한민국은 그런 사건이 일어나서 여자만 비난과 상처를 받는데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나라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 소설은 미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미투운동이 전 세계적으로 거창하게 일어났다가 가십거리가 되어버리기 이전 이미 원고가 완성된 이야기라고 한다.

소설보다 더 소설 같고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일들을 현실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뉴스로 접하며 살다 보니 소설의 스토리 구성이 오히려 밋밋해 보이기까지 한다. 하지만 입체적인 캐릭터들은 소설의 색채를 더해주고 숨을 불어넣는다. 자신이 아버지뻘인 하원의원과 헤어져야 한다는 걸 알지만 도무지 헤어지지 못하는 아비바, 자신의 딸과 에런을 어떡해서든 떨어뜨려야 하는 일이 사명이 되어버린 레이철, 평생을 정치인인 남편의 그림자에 가려 살아야 했던 엠베스, 엄마의 과거를 알아버리고 엄마의 시장 출마를 결사반대하는 루비와 딸의 반대에도 시장 출마를 강행하며 자신이 새롭게 건립한 새 인생이 다시 한순간에 무너지게 되더라도 각오가 되어있는 제인 등 등장인물들이 각자의 이유와 사정으로 상대와 대립하고 있지만 그들 모두의 입장이 이해가 되고 따뜻한 시선으로 그들의 인생을 바라보게 된다. 거기에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미국을 배경으로 미국인들이 등장인물들임에도 불구하고 홍상수 영화에서 많이 봐와서 우리에겐 남 같지 않고(?) 익숙한 남자 캐릭터들까지 소설의 즐거움을 더해준다.

언제부터인가 출간되는 책들에서, SNS에서 거론되는 페미니즘의 다양한 목소리들을 들으며 페미니즘에 관한 설전들이 성숙하고 건강해졌다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불과 1년도 크게 지나지 않았지만 그 견해는 폐기되어버렸다. 내가 생각이 너무 짧았다. 페미니즘에 대한 다양한 목소리들은 각자의 견해에서 존중되어야 할 것들보다 무시해야 할 것들이 더 많아졌다. 페미니즘과 안티 페미니즘에 대한 극단적인 입장들에 대해 우리 사회의 목소리와 그들의 태도는 미개하기까지 하여 아직 페미니즘에 대한 인식이 정립되지 않은 어린 학생들이 어떠한 입장에서든 잘못된 영향을 받을까 봐 페미니즘에 관한 논란과 저급한 설전들에 관해서는 청소년 유해물로 지정하여 차단시켜야 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걱정이 많이 된다.

얼마 전 TV 프로에서 출연자들이 수학 공부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힐베르트의 무한호텔을 예시로 들어 우리 교육 현실의 문제점을 꼬집었었다.

당시 읽고 있던 책이 이 책이었던 덕분에 절로 페미니즘 교육에 대해 생각이 이어졌다. 페미니즘이 여성만을 위한 사상이 아니라는 걸 재미있게 가르쳐줄 교육의 필요성이 느껴진다. 거기엔 많은 학자, 작가, 운동가 등 많은 지식인들의 역할이 필요할 것이다. 훌륭한 스토리텔링으로 개브리얼 제빈 역시 좋은 역할을 해줄 것이다. 아니 이미 해주고 있다. 그녀는 페미니즘이 미래라는 걸 힙합에 빗대어 표현할 줄 아는 영리한 작가다.

개브리얼 제빈이 앞으로도 이러한 소설들을 많이 발표했으면 좋겠다. 이런 귀한 능력을 가지고 페미니즘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건 재능 낭비이자 직무유기가 될 것이다. 부디 다작 작가가 되어 그녀의 작품들을 읽은 즐거움을 오래오래 누렸으면 좋겠다. 부디 이 바램이 2세기쯤 앞서가는 발상은 아니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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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온한 숨
박영 지음 / 은행나무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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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양되어 부모가 만들어낸 제인으로 완벽하게 다시 태어난 제인, 그녀의 목표는 오직 최고의 발레리나로서 다시 전성기 시절을 구가하고 싶은 것뿐이다. 사춘기 딸 레나는 그녀의 헬퍼 크리스티나를 닮아가며 애초에 그녀에겐 없었던 엄마로서의 자리를 위협받고 있고 자신을 다시 전성기 시절로 되돌려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안무가 텐은 그녀의 약점인 과거를 들춰내며 그녀의 숨통을 조여온다.

범상치 않은 제목만으로도 마냥 쉽게 읽히지는 않을 것이라는 예상에 나름의 각오를 하고 읽어나갔던 박영 작가의 『불온한 숨』은 흡인력있게 빠른 속도로 읽히면서도 내내 긴장감을 놓지 못하게 하는 작품이었다. 최고의 자리에서 이제 내리막길밖에 갈 곳 없는 제인의 섬세한 심리묘사와 그녀와 그녀에 딸 레나의 틀어진 관계, 그녀를 다시 정상의 자리로 올려 줄 존재인 줄 알았는데 그녀를 파멸시키려는 미스터리한 렌의 정체에 관한 궁금증까지 짧은 소설 속에 이 모든 것들을 녹여냈다. 아직 두 권의 책을 발표한 소설가라지만 왜 박영작가를 이제야 알게 된 건지 문학에 대한 나름의 애정으로 자부심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었는데 문학에 대해서 뭔가 뒤처진 사람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사계절 내내 무더운 싱가폴의 배경과 위태롭게 현재를 버티고 있는 등장인물들의 균형이 조화롭다. 모두가 파멸의 길에 들어서서 위태롭기만 한데 균형이 조화롭다니 무슨 아이러니인가 싶지만 박영작가의 세심함과 영리함이 단연 돋보인다. 문장들을 읽어가는 내내 박영작가가 인생의 경험이 풍부해 들을 이야기도, 배울 점도 많은 선배 같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사실은 내 또래라는 점이 놀랍다. 한국 소설가에 대한, 한국 문학에 대한 발견을 뒤늦게 하고 기뻐하는 중이다. 예전만큼 많은 독서를 하지 못해 읽어야 할 작가들이 많이 밀려있지만 빠져있는 또래 소설가들이 많아 행복한 요즘이다.

소설은 끝났지만 등장인물들은 어딘가에서 여전히 상처를 받고 타인에게 상처를 남기며 살아가고 있을 것 같다. 심지어 이미 과거형이 되어버린 인물들까지도 상처를 짊어지고 살아가고 있을 것 같다. 그들의 상처는 회복될 수 있을까? 개인적으로 감정 소모로 유난히 힘든 시기에 이 책을 읽어가며 빠져들어 썼는데 내 안의 상처가 없을 때 철저히 제3자가 되어 이 책을 다시 한 번 읽고 싶다. 그렇게 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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