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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매일 직장상사의 도시락을 싼다 - 런치의 앗코짱 ㅣ 앗코짱 시리즈 1
유즈키 아사코 지음, 권남희 옮김 / 이봄 / 2018년 10월
평점 :
절판

해도해도 너무했던, 유난히도 더웠던 여름을 버티고 나니 마치 보상처럼 가을이 왔다.
질기게도 오래가는 여름과 겨울 사이에 잠깐 스쳐가는 가을인데 어째서인지 이번 가을은 조금 길게 느껴진다. 넉넉한 가을 덕분인지 없었던 마음의
여유도 생겨 일상에서 느끼는 감정들도 조금은 넉넉해진 것 같은데 그게 마치 나라는 인간도 이번 기회에 넉넉한 사람이 되어보라는 계시인 건지
유즈키 아사코의 화제작 『나는 매일 직장상사의 도시락을 싼다』를 누구보다 충만하게 만끽하고 있는 2018년 가을에 만난 게 누군가가 나에게
보내온 사인같이 느껴졌다.
어느 콘텐츠에서든 어떤 소재로
이야기를 들려주든 내가 봐온 회사라는 공간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들은 지겹게, 겨우 버텨내고 있는 현실과는 너무나 달랐기에 회사물이란 나에겐
판타지와 같았다. 그리하여 어느 영화나 드라마, 책들에서 만나는 어딘가의 회사에서 펼쳐지는 인물들 간의 갈등이 극복되어 가는 과정이나 회사에서
닥친 상황들을 해결해나가는 방법들을 해리포터의 마법 세계처럼 창작자들이 구축한 다른 세계의 이야기처럼 봐왔었다. 완벽한 일처리와 넘치는 인간미를
가진 직장 상사가 이제 갓 입시하여 실수투성이인 부하직원의 듬직한 멘토가 되어주거나 사회생활에 치이고 치인 상사가 순수한 신입직원 덕분에 그동안
바쁘게 사느라 놓쳤던 일상의 소중한 것들을 다시 깨우치게 되고 그들에게 닥친 위기를 함께 극복하면서 어느새 또 한 뼘 성장하게 된다는 훈훈한
이야기로 마무리되는 뻔한 판타지지만 직장인들에 관한 이야기라면 그럼에도 빠져들게 하는 뭔가가 있다.
또래의 일본 작가가 그려내는 직장인의 풍경에 대한 호기심과 기대는 출간 즉시 베스트셀러가 되며
드라마까지 성공한 화제의 원작이라는 타이틀만으로도 충분히 근거 있는 호기심과 기대가 되어주었다. 직장인 판타지라도 일본 소설 특유의 정서로
잔잔한 울림을 주는 색다른 독서가 되어 가을 정서와 잘 맞을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펼쳐든 책은 단숨에 읽혀갔다. 선망하는 직장 상사와 점심 바꾸며
서로의 점심시간을 각자 공유하는 방법이 색다르고 신선하다. 역시 현실에선 절대 일어날 수 없는 판타지다. 일주일간 서로의 점심을 바꾸며 앗코와
미치코의 이야기가 한 권의 책일 줄 알았는데 현재 일본 여성 직장인들의 감성을 어느 이야기에선 담담하게 또 다른 이야기에선 날카롭게 다룬
단편집이라 색다른 재미를 선사해주었다.
절대 현실에선 일어날
수 없는 유토피아적인 직장인들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지만 직장이란 테두리 안에서 펼쳐지는 이야기와 주인공들의 감정을 따라가다 보면 일본이나
한국이나 똑같다는 생각이 든다. 4개의 단편들에서 떠오르는 얼굴들이 있었고 잊고 지냈던 기억들이 떠올랐는데 「밤거리의 추격자」에선 루즈삭스같은
반가운 단어들과 함께 중학교 시절의 추억들이 소환되며 오랫동안 간직하고 있었던 보물상자를 오랜만에 개봉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하고
「여유넘치는 비어가든」에선 사람 복장 터지게 하는데 일가견 있었던 옛 직장동료가 떠올라 갑자기 열이 오르기도
했다.
직장생활에 관해서라면 우리 모두는 할 말이 너무나
많아진다. 그리고 직장종료들을 제외한 세상 모든 사람들과 공감대를 형성하게 되는 마법같은 일이 벌어진다. 누군가의 일이 남일같지 않고 때로는 내
상황이 그래도 누군가보다는 나은것 같아 다행이다 싶기도 하고 차마 말하지 못한 무언가를 누군가 대신 목소리를 내어주면 고맙기도 하다.
열정은 넘치지만 아직 요령이 없고 서툴기만 한
20대의 미치코와 업무도 사람을 다루는 일도 능숙하고 여유로운 40대 중반 앗코의 이야기도 좋았지만 그 사이의 지점에 있는 노유리의 이야기가
나와 나이나 처지가 비슷해서인지 더 마음을 동하게 했다. 한국어로 대화를 해도 도저히 내 마음을 다 드러내지 못하고 대화라는 게 안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언어의 장벽이 있어도 일본의 82년생 노유리와는 대화가 좀 통할 것 같고 마음이 잘 맞을 것 같아 그녀와 친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하루를 마무리하고 그대로 집에 들어가기 섭섭할 때 불시에 연락을 해도 반갑게 만날 수 있는 그런 친구가 되어 따뜻한 포토푀를 함께
먹으면서 영양가 없는 넋두리를 늘어놓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