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연습 - 부서진 심장과 고통과 상처와 당신에 관한 에세이
레슬리 제이미슨 지음, 오숙은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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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잘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늘 갈망한다. 말솜씨보다는 글솜씨가 그나마 나아 말을 잘 하는 사람이 되길, 말빨이 더 늘길 바라는 게 더 시급한 문제임에도 그 부분은 이제 그만 포기한 것인지 나의 욕심은 오로지 글빨만을 향해 있다. 글로 먹고사는 사람도 아닌데 이런 욕심이 쓸데없이 과한 면이 있긴 하지만 사실 욕심만 과할 뿐 거기에 대한 노력이나 시도는 전혀 하지 않고 있다.

말을 잘 하는 사람보다 글을 잘 쓰는 사람들이 늘 부러웠다. 머릿속에서 부유하는 수많은 생각들을 매끄럽게 말하고 쓰지 못하고 겨우 쥐어짜내며 자주 한계를 느끼는데 내가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감성들을 무수히 쏟아낸 글들을 대면할 때면 그런 능력 노력의 산물이 아닌 타고난 재능이라 감히 내가 욕심낼 부분이 아니라는 걸 수긍하게 된다.

가족계획연맹 상담실에 앉아 있던 나 자신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이제 중대한 어떤 일을 겪게 될 테지만 그 일의 크기에 겁먹어서는 안 된다고,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큰 일"을 하고 있다고 두려워해선 안 된다고 말해주고 싶다. 충분한 감정을 느끼지 않는다는 시실을 두려워해선 안 된다. 어차피 그 감정은 앞으로도 몇 년 동안 계속해서 다른 형태로 찾아올 테니까. 남들도 하는 일이라는 평범성이 아픔에 대한 예방접종이 되지는 않는다고 말해주고 싶다. 대기실에 있는 모든 여자가 내가 하고 있는 것과 똑같은 일을 한다고 해서 그 일이 더 쉬워지는 건 아니었다. p.29-30 「공감 연습」

레슬리 제이미슨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음에도 에세이집 『공감 연습』에 대한 기대치가 높았던 건 ‘수전 손택을 잇는 에세이스트’, ‘2014 뉴욕 타임즈 베스트셀러’, ‘미국 TOP10 베스트셀러’ 등의 화려한 수식어의 영향도 컸지만 문학과지성사라는 출판사의 후광이 더 컸음을 고백한다. 그러니까 어줍잖은 나의 지식과 촉으로 마음산책엔 사노 요코의 에세이가 있다면 문학과지성사가 지향하는 에세이를 내놓은 것이 레슬리 제이미슨의 『공감 연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기대가 컸다. 거창하게 쓰고 보니 거대 망상 같고 하찮아 보이지만 책을 읽고 나자 예감은 어느 정도 확신이 되었다.

그동안 주로 읽어왔던 에세이들과는 확실히 다르다. 주제는 물론이고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과정과 밀도, 길이 등 거의 모든 것들이 내가 알던 에세이와는 다른 결이다. 『공감 연습』이라는 제목에서 그동안 익히 읽어왔고 경험했던 저자와의 공감과 감동을 전하지도 않는다. ‘공감’보다는 ‘상처’와 ‘고통’이 더 읽힌다. 이런 주제로 무수한 이야기들을 전개하는 방법에 막힘이 없다. 어떻게 하면 이런 필력으로 이런 에세이를 쓸 수 있을까. 내가 해보지 않았던 작가의 경험들과 문화의 차이에서 오는 흥미로움도 분명 있지만 내가 작가와 같은 경험들을 쌓는다고 해서 나에게 ‘수전 손택을 잇는 에세이스트’라 불릴만한 에세이가 나올 리는 전무하다. 내가 알고 있었던 이야기, 나도 봤던 영화들이 나오지만 나는 절대 그런 밀도의 글을 그렇게 길게 이끌어가며 써내지 못한다. 역시 그런 글을 쓰는 사람은 타고나는 것이다.

우리가 감상성을 비판할 때, 아마도 우리가 두려워하는 부분은 그것이 우리가 읽는 텍스트를 침해하도록 우리 스스로 허락할 가능성일 것이다. 우리 자신과 우리의 감정적 욕구를 지나치게 공격적으로 그 서사 속에 끼워 넣고, 우리의 눈물로 그 상황과 그 구문을 방해하게 될 가능성 말이다. 이는 다시, 우리는 주로 우리 자신을 위해서 운다는, 아니 적어도 울고 싶은 심정을 느끼게 한다는 위험성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p.219 「사카린(문학)을 위한 변론」

책의 말미 부록으로 실린 작가의 짧은 에세이엔 의료 배우라는 낯선 직업에서부터 낙태와 심장 수술, 거리 폭행과 알코올 중독 등 개인적인 고통과 울트라마라톤, 교도소 수감자 등 타인들의 고통을 다룬 책을 출간 한 후 독자들로부터 많은 고백을 이끌어내 고해성사를 받는 신부가 된 것 같다고 털어놓았다. 나 역시 억울하고 부당함을 당해야만 했던 과거의 안 좋은 기억들이 소환되며 작가에게 공감을 갈구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그보다는 작가의 필력에 대한 감탄과 그에 반해 생각만큼 쉽게 읽어내지 못한 나의 반성과 부끄러움에 대한 고백이 우선되어야 할 것 같다. 넋두리를 이어가는 이 글은 『공감 연습』을 읽고 작가의 글에 응답하는 공감의 글로 읽힐까 작가의 글에 기가 죽은 나의 고통으로 읽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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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랑콜리 해피엔딩
강화길 외 지음 / 작가정신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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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도 고개를 들어 멀리 보면, 박완서 선생님이 계시는 듯했다. 세상을 뜨고 나서도 그렇게 생생한, 계속 읽히는 작가가 있다는 게 좋은 가늠이 되었다. 사실 아라가 생전에 작가를 뵌 건 아주 잠깐, 아주 멀리서였고 그것도 뒷모습이었다. 그때 아라는 대작가의 뒷모습을 보며 머리카락을 가지고 싶다고 기이한 생각을 했다……. 한 올만 뽑으면 안 될까 하고 록스타에게 손을 뻗는 팬처럼 침을 꿀꺽했지만 물론 그런 망나니짓은 하지 않았다. 용기 내 앞에서 인사라도 할 걸, 뒤늦은 후회를 하다가 따라 걷는 자에겐 뒷모습이 상징적일 수도 있겠다고 여기게 된 건 요즘의 일이었다. p.229-230 정세랑 「아라의 소설」

 

박완서 작가의 서거 소식을 접했을 때를 생생히 기억한다. 생애 첫 해외여행을 혼자 자유여행으로 3주간 스페인에 가서는 설렘보다는 불안과 걱정으로 첫날의 일정을 일찍 마무리하고 돌아간 숙소 공용 컴퓨터의 포털사이트 메인 화면에서 박완서 작가의 서거 소식을 접했었다. 마침 그때는 내가 한참 박완서 작가에게 빠져있을 때라 낯선 타국에서 접한 좋아하고 존경하는 작가의 서거 소식은 받아들이기 힘든 상실감으로 남았었다. 그럭저럭 여행을 무사히 마치고 귀국해서 시차 적응을 하지 못해 잠들지 못하는 늦은 밤 박완서 작가를 기리는 글들과 기사, 팟캐스트 들을 챙겨 보고 들었지만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렇게 작가의 작품을 좋아하면서도 서거 이후로는 아직 읽지 못한 작품들을 되도록 아껴 읽으려고 하는 마음엔 박완서 작가의 작품들을 다 읽는 날이 오면 정말 박완서 작가가 우리 곁을 떠났다는 걸 인정해야 할까 봐 그게 두려워서인지도 모르겠다.

 

박완서 작가가 우리 곁을 떠난 지 벌써 8년이다. 8주기를 맞이해서 작가정신에서 『나의 아름다운 이웃』 개정판을 냈고 그와 더불어 29명의 작가들의 박완서 작가 콩트 오마주를 엮은 『멜랑콜리 해피엔딩』도 출간했다. 평소 박완서 작가에 대한 일화나 작가를 기리는 말이나 글을 마주할 때면 남다른 집중력과 관심을 표하는 나에게 더할 나위 없는 기획이 아닐 수 없다. 박완서 작가의 작품들은 어쩐지 아껴 읽게 되지만 29명의 작가들이 『멜랑콜리 해피엔딩』에 담아낸 이야기들은 어떤 이야기들로 박완서 작가를 기렸나 궁금해 빨리 읽어나갔다. 덕분에 연초부터 독서 목록의 품격이 높아졌다. 정말 연초부터 읽는 책마다 만족도가 너무 높아 행복한 비명을 지르고 있다. 

 

강화길, 권지예, 김사과, 김성중, 김숨, 김종광, 박민정, 백가흠, 백민석, 백수린, 손보미, 오한기, 윤고은, 윤이형, 이기호, 이장욱, 임현, 전성태, 정세랑, 정용준, 정지돈, 조경란, 조남주, 조해진, 천운영, 최수철, 한유주, 한창훈, 함정임.

『멜랑콜리 해피엔딩』에 참여한 작가들의 명단만 봐도 든든하다. 심지어 추천사는 오정희 작가가 썼다. 박완서라는 뿌리를 내리고 29명의 독자들이 들려주는 29개의 이야기들이 흥미진진하다. 같은 뿌리를 두고도 저마다의 개성이 드러난다 싶으면서도 박완서 작가의 작품들 특유의 정서나 낭만이 닮았다 싶기도한가하면 본인의 색을 드러내지 않으려 고민한 흔적이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이 글들은 오직 『멜랑콜리 해피엔딩』에 묶여 있을 때 빛을 발할 것 같다. 작가 개인의 짧은 글 모음집에 수록하더라도 그 글들 속에서 이렇게까지 빛을 발하는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 여기저기서 욕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빛나는 기획과 화려한 작가 라인업으로 탄생한 『멜랑콜리 해피엔딩』과 『나의 아름다운 이웃』 개정판이 정말 많은 독자들에게 사랑받아 『멜랑콜리 해피엔딩』을 시리즈로 더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생겼으면 좋겠다는 바램부터 요즘 즐겨듣는 <아무튼, 팟캐스트>처럼 『멜랑콜리 해피엔딩』의 작가진과 오정희, 호원숙 작가들로 팟캐스트를 해줬으면 좋겠다는 바램까지 좋은 책을 혼자만의 독서로 끝내기에 아쉽다는 생각이 드니 이런저런 바램들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많은 사람들과 함께 박완서 작가를 오래 기리고 싶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J는 선생님과의 식탁에서의 장면을 꿈결인 양 되짚어보곤 했다. 편집자와 작가, 까마득한 후배 작가와 대작가와의 만남이라기보다는 연애중인 딸과 엄마, 갓 시집간 딸과 친정 엄마 사이의 애틋하면서도 흥미진진한 수다의 향연이었다. J만이 그렇게 느낀 것이 아니었음을 훗날 선생님이 쓴 글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하니 그때 우리는 동업자끼리나, 저자와 기자 사이로 만난 게 아니라, 엄마말 안 듣고 고생길로 들어선 딸이 겨우 행복해진 걸 보고 대견하게 여기는 엄마와 딸처럼 마주 앉았던 게 아니었나 회상됩니다." p.332-333 함정임 「그 겨울의 사흘 동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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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름다운 이웃 - 박완서 짧은 소설
박완서 지음 / 작가정신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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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읽는 재미를 느끼고 더 이상 서점의 베스트셀러 순위에만 의존하지 않고 나의 안목이라는 게 생기기 시작하려고 할 때, 어느 소설가를 읽고 다른 어느 소설가로 넘어가고 그렇게 몇몇 소설가들을 거쳐 박완서 소설가로 넘어가 한참 박완서 작가의 글들에 빠져 있었을 때 박완서 작가의 서거 소식을 낯선 외국 땅에서 들었었다. 좋아하는 박완서 작가의 작품들이 많았던 만큼 앞으로 읽어야 할 작품들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박완서 작가의 작품세계를 깊게 파지 못하며 남은 작품들을 주저하며 아껴 읽게 되었는데 그건 마치 돌아가신 친정엄마가 남기고 간 마지막 김치나 장을 먹지 못하고 몇 년 동안이고 간직하고 있다는 사람들처럼 지금까지 읽지 못한 남은 박완서 작가의 작품은 박완서 작가를 그리워하며 되도록 아끼고 싶은 그런 심정이었다.

 

박완서 작가가 70년대에 주로 기업 사보에 기고한 짧은 소설들을 묶은 『나의 아름다운 이웃』이 박완서 작가의 8주기를 맞이해 개정판을 냈다. 『나의 아름다운 이웃』에 수록된 짧은 소설들을 쓸 70년대 당시 사보 기자들이 원고를 받으러 자택을 드나들고 원고 심부름을 하던 풍경을 들려주는 호원숙 작가의 회고부터 그 시절 박완서 작가가 들려주었던 48편의 짧은 이야기들을 담아낸 책을 마주하고도 마치 꿈처럼 느꼈다. 출간 자체가 독자들에겐 너무나 큰 이벤트인데 『나의 아름다운 이웃』 개정판 출간과 더불어 작가정신 출판사에서 29명의 작가의 박완서 작가 콩트 오마주 『멜랑콜리 해피엔딩』을 함께 발표했다. 아직 연초인데 이 출판사 올해 할 일 벌써 다 끝낸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엄청난 일이 아닐 수 없다. 

 

70년대 농업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변화하면서 우리 사회에서 빠르게 일어나는 의식주 생활의 변화와 그 변화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데서 오는 갈등과 부작용들을 그 시대의 결혼 풍습이나 가족, 이웃들의 이야기로 들려준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줄곧 아파트에서만 살아왔던 나로서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의 옛날이야기를 박완서 작가의 텍스트로 읽으면서 내가 모르는 시대의 낭만이 읽히는 즐거움에 내내 감탄하며 읽었다. 「아직 끝나지 않은 음모 3」에선 여자 주인공이 김승옥의 「야행」을 읽고 「야행」이 쓰여진 시대보다 조금 늦게 태어나 다행이라고 말하는 대목이 있는데 나 역시 『나의 아름다운 이웃』을 읽으며 『나의 아름다운 이웃』이 쓰여진 시대보다 조금 늦게 태어나 다행이라고 느끼기도 했다. 이 대목은 대를 이어 끝나지 않는 공감을 자아낼 것이 분명해 보이는데 언젠가 『82년생 김지영』을 읽으며 지금 시대보다 늦게 태어나 다행이라고 말하는 시대가 오겠지.

 

박완서 작가는 산문집 『못 가본 길이 아름답다』에서 '시는 낡지 않는다. 시간이 지났다고 한물가는 시는 시가 아닐 것이다.'라고 썼었다. 박완서 작가의 작품을 읽을 때마다 낡지 않는 박완서의 문학에 감동하고 감탄해왔는데 아직 읽어야 할 박완서 작가의 작품이 많아 기쁘고 여전히 박완서 작가를 이야기하는 작가들이 많아 기쁘고 이렇게 예쁜 개정판과 특별한 기획의 책을 엮어내는 출판사가 있어 기쁘다. 이 여운을 오래 즐기고자 그동안 아껴왔던 작품을 찾아읽고 좋아하는 작품들을 다시 꺼내 읽어볼까 한다. 지금 내 기분 마치 '죽고 싶지만 박완서는 읽고 싶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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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디의 우산 - 황정은 연작소설
황정은 지음 / 창비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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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정은 작가는 완성형이다. 지금까지 발표한 작품의 수가 손에 꼽을 정도인 작가에게 '완성'이라는 단어보다는 '발전 가능성'이나 '기대'라는 단어가 더 적절한 수식어겠지만 황정은 작가의 작품들을 들여다보면 '완성형'이라는 수식어가 어색한 작품은 하나도 없다. 그러니까 황정은 작가는 등단 때부터 이미 모든 것이 정갈하게 다듬어진 타고난 완성형이었다. 

황정은 작가의 작품을 처음 만났을 때 느꼈던 감정들은 신비함을 넘어 혼란스러움이 컸다. 몇 권의 작품을 더 읽으며 작가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굳건한 충성심이 생겨도 그 감정들은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데 황정은 작가가 구축한 그녀의 작품세계는 내가 지금까지 얇게 파오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만나왔던 이 세상의 소설 세계가 아니었다. 경장편은 물론이고 단편 하나도 쉽게 술술 읽히는 작품이 없고 작가가 선사하는 아름다운 문장들을 잔잔하게 읽다 보면 어느새 거대한 폭풍을 맞이하게 되어 독서가 끝나도 끝나지 않는 여운에 압사당하곤 하는데 그래서 황정은 작가의 신작 소식이 들려오면 격하게 반기며 환영하면서도 황정은이라는 소설 세계를 맞이할 나름의 준비가 필요하다.

 

 

2019년의 새해 복을 창비출판사에서는 황정은 작가의 신작 『디디의 우산』으로 건넸다. 연초부터 황정은 작가라니 정말이지 출간 소식만으로도 이미 고마워 죽을 지경인데 기본 버전과 동네서점 에디션 특별버전을 제작해 소장 욕구를 자극하는 마케팅으로 독자들을 또 한 번 감동시키고 있다(동네서점 에디션을 소장하기 위해서 동네서점을 찾는 여정을 떠나야 하는 지방인은 조금 슬프지만 이런 이벤트에 대한 반가움이 훨씬 더 크다). 황정은이라는 이름 세 글자만 적혀있는 책날개의 작가 소개는 역시 황정은 작가답다. 목차를 확인하며 이 책에 작가의 말이 수록되어 있음을 확인한 순간에는 작가와 출판사를 향해 절이라도 올리고 싶을 정도로 반갑고 고마웠다.

1년 반 전 지겨운 여름이 얼른 가고 가을이 오길 기다렸던 계절에 제11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에서 「웃는 남자」라는 제목으로 읽었던 문장들을 시간이 흐른 후 새해를 맞이하며 읽기 더할 나위 없는 책이라며 출간을 격하게 환영한 황정은 연작소설 『디디의 우산』에서  「d」라는 제목으로 다시 만나 읽었다. d와 dd는 동급생들이 하교한 교실에서 함께 낙뢰를 보고같이 우산을 쓰고 집으로 가지만 d에게는 그 기억이 없었다. 시간이 흐르고 동창회에서 다시 만나 dd를 통해 함께 낙뢰를 봤다는 없었던 기억이 생기고 꿈도 꾸지만 dd와 우산을 쓰고 집까지 걸었다는 기억은 없고 자기가 잘못해 그 기억을 잃어버린 것 같다는 죄책감을 가지고 있다. 
​d가 dd를 통해 과거의 기억을 다시 떠올리고 끝내 떠올리지 못하는 기억에 대해 죄책감을 보이는 것처럼 1년 반 만에 다시 읽은 「d」는 읽기도 전에 「웃는 남자」가 떠오르기도 했고 읽으며 그동안 잊었던 기억을 다시 떠올려주기도 하고 끝내 기억을 소환하지 못해 「d」로 처음 읽히기도 했는데 『디디의 우산』에 수록된 「d」와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를 통해 황정은 작가가 이야기하는 등장인물들이 세상을 통해 받게 되는 폭력과 상처들과 대한민국에서 일어난 무수한 말도 안 되는 사건들과 아물지 않는 상처들 역시 그렇게 떠오르기도 했고 끝내 떠올리지 못해 죄책감을 가지게 해주었다. 
 
황정은 작가를 그녀의 작품뿐만 아니라 팟캐스트를 통해서도 만날 수 있었던 때가 있었다. 어떤 작품을 다루는지, 어떤 게스트가 나오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고 오직 황정은 작가의 덕심으로 구독했던 팟캐스트에서 황정은 작가는 정말 그런 작품을 쓰는 소설가 다운 목소리로 조곤조곤 이야기들을 들려주고 게스트들의 이야기를 이끌어주었었다. 작품 이외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꺼내는 걸 꺼려 하고 게스트들이 이야기하는 무수한 책들 중 안 읽어본 작품이 없을 정도로 책도 많이 읽고 대한민국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한 관심도 많은 모습들을 황정은 작가의 작품을 통해서도 만나왔다고 생각한다. 황정은 작가만의 고집이, 세상을 통해 받은 씻을 수 없는 상처와 무수한 공허와 쓸쓸함이 읽히지만 황정은 작가의 소설에는 특유의 온기가 있다. 갈수록 온기가 더 느껴지는 건 황정은 작가의 작품이 따뜻해서 일까 황정은 작가를 향한 덕심이 갈수록 커져서일까? 계속 읽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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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카의 장갑
오가와 이토 지음, 히라사와 마리코 그림, 이윤정 옮김 / 작가정신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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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프마이제공화국에서 엄지장갑은 마음을 전하는 세상에 하나뿐인 선물이다. 

엄지장갑은 털실로 쓴 편지 같은 것.

엄지장갑을 떠준다는 것은 온기를 선물하는 것. 

직접 손을 잡아줄 수 없어 엄지장갑을 떠서 주는 것이다. 

 

겨울엔 몹시 추워서 엄지장갑 없이는 살 수 없는 루프마이제공화국의 한 가정에서 온 가족의 축복을 받으며 탄생한 마리카의 이야기로 잔잔하게 소설 『마리카의 장갑』은 시작된다. 발트 3국 중 하나인 라트비아를 모델로 오가와 이토 작가가 건설한 루프마이제공화국의 사람들은 더없이 선하고 따뜻하다. 소설 또한 마찬가지로 선하고 따뜻한 시선으로 읽힌다. 루프마이제공화국과는 180도 다른 날씨와 이미지인 아프리카의 유명 속담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가 책을 읽어가는 내내 떠올랐는데 가족들과 이웃들뿐만 아니라 자연과 루프마이제공화국만의 풍습이나 문화 등이 따뜻하게 어우러져 그 안에서 마리카가 뜨개질이라면 질색을 하며 턱걸이로 겨우 시험을 통과하는 아이에서 첫사랑을 경험하는 소녀가 되고 어엿한 숙녀가 되어 사랑의 결실을 이루지만 나라를 잃고 전쟁에 연행된 남편을 기다리는 모습을 뭉클하게 그려냈다. 

 

『마리카의 장갑』은 더없이 따뜻하고 포근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동화이다. 뜨개질에 소질이 없어 시험도 겨우 통과한 소녀 마리카는 첫사랑을 경험하며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뜨개질을 배우고 장갑을 선물한다. 야니스는 마리카를 만날 때마다 꽃이 아닌 꽃씨를 선물한다. 마리카와 야니스의 간질간질하고 말랑말랑한 사랑 이야기를 보고 있노라면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지다 못해 너무 달달해서 당뇨 걸릴 것 같을 지경이다. 그리하여 여느 동화들처럼 마리카와 야니스는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끝날 줄 알았던 이야기가 나의 예상과 전혀 반대로 가면서 이 책이 더 좋아졌는데 따뜻하고 포근한 시선으로 읽어갔지만 어느새 눈시울이 뜨거워져 있었다. 소설의 후반뿐만 아니라 라트비아 여행 에세이와 오가와 이토 작가의 인터뷰까지 뒷심을 톡톡히 발휘해주었다. 라트비아 여행 에세이 『계란을 사러』에 대한 기대와 호기심이 크다. 국내에 빨리 출간되었으면 좋겠다. 

 

마리카처럼, 루프마이제공화국 사람들처럼 누군가에게 장갑을 선물하며 온기를 나누고 싶다. 야니스처럼 꽃이 아닌 꽃씨를 선물하는 사람이 되고 싶기도 하다. 누군가의 마음에 닿아 씨앗에 싹이 텄으면 좋겠다. 연말을 보내고 연초를 맞이하는 시점에 이 책을 읽은 터라 오가와 이토 작가에게 새해 선물로 엄지장갑과 꽃씨를 선물 받은 것 같다. 내 손잡아 줘서 고마워요. 씨앗도 잘 틔워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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