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랑콜리 해피엔딩
강화길 외 지음 / 작가정신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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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도 고개를 들어 멀리 보면, 박완서 선생님이 계시는 듯했다. 세상을 뜨고 나서도 그렇게 생생한, 계속 읽히는 작가가 있다는 게 좋은 가늠이 되었다. 사실 아라가 생전에 작가를 뵌 건 아주 잠깐, 아주 멀리서였고 그것도 뒷모습이었다. 그때 아라는 대작가의 뒷모습을 보며 머리카락을 가지고 싶다고 기이한 생각을 했다……. 한 올만 뽑으면 안 될까 하고 록스타에게 손을 뻗는 팬처럼 침을 꿀꺽했지만 물론 그런 망나니짓은 하지 않았다. 용기 내 앞에서 인사라도 할 걸, 뒤늦은 후회를 하다가 따라 걷는 자에겐 뒷모습이 상징적일 수도 있겠다고 여기게 된 건 요즘의 일이었다. p.229-230 정세랑 「아라의 소설」

 

박완서 작가의 서거 소식을 접했을 때를 생생히 기억한다. 생애 첫 해외여행을 혼자 자유여행으로 3주간 스페인에 가서는 설렘보다는 불안과 걱정으로 첫날의 일정을 일찍 마무리하고 돌아간 숙소 공용 컴퓨터의 포털사이트 메인 화면에서 박완서 작가의 서거 소식을 접했었다. 마침 그때는 내가 한참 박완서 작가에게 빠져있을 때라 낯선 타국에서 접한 좋아하고 존경하는 작가의 서거 소식은 받아들이기 힘든 상실감으로 남았었다. 그럭저럭 여행을 무사히 마치고 귀국해서 시차 적응을 하지 못해 잠들지 못하는 늦은 밤 박완서 작가를 기리는 글들과 기사, 팟캐스트 들을 챙겨 보고 들었지만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렇게 작가의 작품을 좋아하면서도 서거 이후로는 아직 읽지 못한 작품들을 되도록 아껴 읽으려고 하는 마음엔 박완서 작가의 작품들을 다 읽는 날이 오면 정말 박완서 작가가 우리 곁을 떠났다는 걸 인정해야 할까 봐 그게 두려워서인지도 모르겠다.

 

박완서 작가가 우리 곁을 떠난 지 벌써 8년이다. 8주기를 맞이해서 작가정신에서 『나의 아름다운 이웃』 개정판을 냈고 그와 더불어 29명의 작가들의 박완서 작가 콩트 오마주를 엮은 『멜랑콜리 해피엔딩』도 출간했다. 평소 박완서 작가에 대한 일화나 작가를 기리는 말이나 글을 마주할 때면 남다른 집중력과 관심을 표하는 나에게 더할 나위 없는 기획이 아닐 수 없다. 박완서 작가의 작품들은 어쩐지 아껴 읽게 되지만 29명의 작가들이 『멜랑콜리 해피엔딩』에 담아낸 이야기들은 어떤 이야기들로 박완서 작가를 기렸나 궁금해 빨리 읽어나갔다. 덕분에 연초부터 독서 목록의 품격이 높아졌다. 정말 연초부터 읽는 책마다 만족도가 너무 높아 행복한 비명을 지르고 있다. 

 

강화길, 권지예, 김사과, 김성중, 김숨, 김종광, 박민정, 백가흠, 백민석, 백수린, 손보미, 오한기, 윤고은, 윤이형, 이기호, 이장욱, 임현, 전성태, 정세랑, 정용준, 정지돈, 조경란, 조남주, 조해진, 천운영, 최수철, 한유주, 한창훈, 함정임.

『멜랑콜리 해피엔딩』에 참여한 작가들의 명단만 봐도 든든하다. 심지어 추천사는 오정희 작가가 썼다. 박완서라는 뿌리를 내리고 29명의 독자들이 들려주는 29개의 이야기들이 흥미진진하다. 같은 뿌리를 두고도 저마다의 개성이 드러난다 싶으면서도 박완서 작가의 작품들 특유의 정서나 낭만이 닮았다 싶기도한가하면 본인의 색을 드러내지 않으려 고민한 흔적이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이 글들은 오직 『멜랑콜리 해피엔딩』에 묶여 있을 때 빛을 발할 것 같다. 작가 개인의 짧은 글 모음집에 수록하더라도 그 글들 속에서 이렇게까지 빛을 발하는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 여기저기서 욕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빛나는 기획과 화려한 작가 라인업으로 탄생한 『멜랑콜리 해피엔딩』과 『나의 아름다운 이웃』 개정판이 정말 많은 독자들에게 사랑받아 『멜랑콜리 해피엔딩』을 시리즈로 더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생겼으면 좋겠다는 바램부터 요즘 즐겨듣는 <아무튼, 팟캐스트>처럼 『멜랑콜리 해피엔딩』의 작가진과 오정희, 호원숙 작가들로 팟캐스트를 해줬으면 좋겠다는 바램까지 좋은 책을 혼자만의 독서로 끝내기에 아쉽다는 생각이 드니 이런저런 바램들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많은 사람들과 함께 박완서 작가를 오래 기리고 싶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J는 선생님과의 식탁에서의 장면을 꿈결인 양 되짚어보곤 했다. 편집자와 작가, 까마득한 후배 작가와 대작가와의 만남이라기보다는 연애중인 딸과 엄마, 갓 시집간 딸과 친정 엄마 사이의 애틋하면서도 흥미진진한 수다의 향연이었다. J만이 그렇게 느낀 것이 아니었음을 훗날 선생님이 쓴 글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하니 그때 우리는 동업자끼리나, 저자와 기자 사이로 만난 게 아니라, 엄마말 안 듣고 고생길로 들어선 딸이 겨우 행복해진 걸 보고 대견하게 여기는 엄마와 딸처럼 마주 앉았던 게 아니었나 회상됩니다." p.332-333 함정임 「그 겨울의 사흘 동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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