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연습 - 부서진 심장과 고통과 상처와 당신에 관한 에세이
레슬리 제이미슨 지음, 오숙은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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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잘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늘 갈망한다. 말솜씨보다는 글솜씨가 그나마 나아 말을 잘 하는 사람이 되길, 말빨이 더 늘길 바라는 게 더 시급한 문제임에도 그 부분은 이제 그만 포기한 것인지 나의 욕심은 오로지 글빨만을 향해 있다. 글로 먹고사는 사람도 아닌데 이런 욕심이 쓸데없이 과한 면이 있긴 하지만 사실 욕심만 과할 뿐 거기에 대한 노력이나 시도는 전혀 하지 않고 있다.

말을 잘 하는 사람보다 글을 잘 쓰는 사람들이 늘 부러웠다. 머릿속에서 부유하는 수많은 생각들을 매끄럽게 말하고 쓰지 못하고 겨우 쥐어짜내며 자주 한계를 느끼는데 내가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감성들을 무수히 쏟아낸 글들을 대면할 때면 그런 능력 노력의 산물이 아닌 타고난 재능이라 감히 내가 욕심낼 부분이 아니라는 걸 수긍하게 된다.

가족계획연맹 상담실에 앉아 있던 나 자신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이제 중대한 어떤 일을 겪게 될 테지만 그 일의 크기에 겁먹어서는 안 된다고,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큰 일"을 하고 있다고 두려워해선 안 된다고 말해주고 싶다. 충분한 감정을 느끼지 않는다는 시실을 두려워해선 안 된다. 어차피 그 감정은 앞으로도 몇 년 동안 계속해서 다른 형태로 찾아올 테니까. 남들도 하는 일이라는 평범성이 아픔에 대한 예방접종이 되지는 않는다고 말해주고 싶다. 대기실에 있는 모든 여자가 내가 하고 있는 것과 똑같은 일을 한다고 해서 그 일이 더 쉬워지는 건 아니었다. p.29-30 「공감 연습」

레슬리 제이미슨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음에도 에세이집 『공감 연습』에 대한 기대치가 높았던 건 ‘수전 손택을 잇는 에세이스트’, ‘2014 뉴욕 타임즈 베스트셀러’, ‘미국 TOP10 베스트셀러’ 등의 화려한 수식어의 영향도 컸지만 문학과지성사라는 출판사의 후광이 더 컸음을 고백한다. 그러니까 어줍잖은 나의 지식과 촉으로 마음산책엔 사노 요코의 에세이가 있다면 문학과지성사가 지향하는 에세이를 내놓은 것이 레슬리 제이미슨의 『공감 연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기대가 컸다. 거창하게 쓰고 보니 거대 망상 같고 하찮아 보이지만 책을 읽고 나자 예감은 어느 정도 확신이 되었다.

그동안 주로 읽어왔던 에세이들과는 확실히 다르다. 주제는 물론이고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과정과 밀도, 길이 등 거의 모든 것들이 내가 알던 에세이와는 다른 결이다. 『공감 연습』이라는 제목에서 그동안 익히 읽어왔고 경험했던 저자와의 공감과 감동을 전하지도 않는다. ‘공감’보다는 ‘상처’와 ‘고통’이 더 읽힌다. 이런 주제로 무수한 이야기들을 전개하는 방법에 막힘이 없다. 어떻게 하면 이런 필력으로 이런 에세이를 쓸 수 있을까. 내가 해보지 않았던 작가의 경험들과 문화의 차이에서 오는 흥미로움도 분명 있지만 내가 작가와 같은 경험들을 쌓는다고 해서 나에게 ‘수전 손택을 잇는 에세이스트’라 불릴만한 에세이가 나올 리는 전무하다. 내가 알고 있었던 이야기, 나도 봤던 영화들이 나오지만 나는 절대 그런 밀도의 글을 그렇게 길게 이끌어가며 써내지 못한다. 역시 그런 글을 쓰는 사람은 타고나는 것이다.

우리가 감상성을 비판할 때, 아마도 우리가 두려워하는 부분은 그것이 우리가 읽는 텍스트를 침해하도록 우리 스스로 허락할 가능성일 것이다. 우리 자신과 우리의 감정적 욕구를 지나치게 공격적으로 그 서사 속에 끼워 넣고, 우리의 눈물로 그 상황과 그 구문을 방해하게 될 가능성 말이다. 이는 다시, 우리는 주로 우리 자신을 위해서 운다는, 아니 적어도 울고 싶은 심정을 느끼게 한다는 위험성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p.219 「사카린(문학)을 위한 변론」

책의 말미 부록으로 실린 작가의 짧은 에세이엔 의료 배우라는 낯선 직업에서부터 낙태와 심장 수술, 거리 폭행과 알코올 중독 등 개인적인 고통과 울트라마라톤, 교도소 수감자 등 타인들의 고통을 다룬 책을 출간 한 후 독자들로부터 많은 고백을 이끌어내 고해성사를 받는 신부가 된 것 같다고 털어놓았다. 나 역시 억울하고 부당함을 당해야만 했던 과거의 안 좋은 기억들이 소환되며 작가에게 공감을 갈구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그보다는 작가의 필력에 대한 감탄과 그에 반해 생각만큼 쉽게 읽어내지 못한 나의 반성과 부끄러움에 대한 고백이 우선되어야 할 것 같다. 넋두리를 이어가는 이 글은 『공감 연습』을 읽고 작가의 글에 응답하는 공감의 글로 읽힐까 작가의 글에 기가 죽은 나의 고통으로 읽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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