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자들
W. G. 제발트 지음, 이재영 옮김 / 창비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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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G.제발트를 알게 해준 건 <창비 라디오 책다방> 시즌 1을 통해서였다. 배수아 작가님이 출연하셔서 소설가로서, 번역가로서의 이야기를 내내 경쾌하게 해주면서 독일에서 생활하며 제발트를 발견했던 기쁨을 즐겁게 들려주셨고 바로 다음 방송에서 제발트의 작품을 다루며 제발트와 그의 작품들에 대한 호기심과 기대감을 높여주어 나도 곧 제발디언이 되리라 다짐했었다. 그때가 무려 6년 전이다. 배수아 소설가와 황정은 소설가의 케미가 너무나도 잘 맞아 팟캐스트를 몇 번이고 반복해서 들었음에도 제발트와의 첫 만남까지 너무나도 긴 시간이 걸렸다. 언제나 내가 읽는 속도보다 읽고 싶은 책들이 넘치게 많았고 어쩐지 배수아 소설가와 황정은 소설가가 동시에 환호하는 작가의 작품은 장벽이 높을 거란 생각에 항상 우선순위로 미뤄뒀던 탓이라고 변명을 해보지만 그래도 6년은 너무 심했다. 

 

제발트의 작품을 읽어보고 싶지만 쉽게 읽힐 작품은 아닌 것 같아 보이고 엄청난 소설을 쓰는 작가들이 그의 작품을 숭배하지만 그들이 느끼는 감정을 조금도 따라가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노파심에 그의 작품 중 어느 작품으로 제발트를 처음 만나야 하는가도 고민거리였다. 그런 고민을 한방에 해소시켜준 것은 "작가에게 커다란 명성을 가져다준 작품이자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된 제발트 소설"이라는 『이민자들』의 소개 글이었다. 제발트를 처음 만나기에 더할 나위 없이 딱인 작품이라는 걸 한눈에 알아보게 해준 한 줄이었다. 

 

『이민자들』은 4편의 단편이 수록된 소설집으로 「헨리 쎌윈 박사」, 「파울 베라이터」, 「암브로스 아델바르트」, 「막스 페르버」가 수록되어 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네 사람의 이민자들의 연작 단편 형식의 이야기이다. 암브로스 아델바르트를 제외하면 모두 유대인들이며 「암브로스 아델바르트」에도 유대인의 이야기가 실려있다. 고향을 상실하고 인생의 불운한 시기를 겪었던 이들의 죽음 뒤 그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형식으로 4명의 인물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버거웠던 시대와 녹록지 않았던 당시의 상황들을 증명한다. 특유의 무겁고 음울한 분위기가 내내 이어지면서 네 편의 단편이 하나의 소설로 읽히기도 한다. 그리 가까웠던 관계도 아니었던 인물들(집주인, 선생님, 먼 친척, 나이 차이를 초월한 친구)의 과거 발자취를 따라가서 그 시대를 살아가는 그 인물과 상황을 이해하며 이야기하는 과정이 펼쳐지는 그의 문장들이 마치 웅장한 건축물처럼 견고하게 느껴진다. 세계적인 명성을 지닌 작가의 소설 세계를 한 권의 책을 읽고 안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따르겠지만 작가의 색을 잘 드러낸 작품으로 제발트를 처음 읽는데 더없이 좋은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배수아 작가가 출연한 <창비 라디오 책다방>에서 배수아 작가와 황정은 작가의 케미가 빛나 더 좋았던 에피소드로 기억되고 있다. 자기 색이 너무 강해 좀처럼 '케미'라는 단어가 좀처럼 어울리지 않는 두 소설가가 방송에서 언급되는 작품마다 격하게 공감하고 상대의 공감을 크게 반가워하는데 나도 같이 공감하고 반가워하고 싶었다. 나도 제발디언이 되고 싶었다. 너무나도 몸을 사렸던 탓에 제발트를 읽는데 6년이라는 시간이 걸렸지만 내가 『이민자들』을 읽고 느낀 감정들이 배수아 작가가, 황정은 작가가 제발트에 열광하는 그 감정인지는 잘 모르겠다. 예상보다 빨리 읽혔고 예상대로 좋았지만 우려대로 작가들이 열광하는 그 감정까지는 따라가지 못한 것 같다. 하지만 앞으로 남은 제발트의 작품들을 찾아 읽을 것이고 언젠가 『이민자들』도 다시 읽어 볼 것이다. 남은 제발트의 작품이 몇 권 없어서 안타깝지만 여전히 제발트를 이야기하는 작가들이 있어 기쁘고 개정판을 내주는 출판사가 있어서 다행이다. 그러니 여러분, 우리 모두 죽고싶어도(?) 제발디언은 되고 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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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과 비평 183호 - 2019.봄
창작과비평 편집부 지음 / 창비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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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잘 쓰고 싶다고 늘 갈망한다. 머릿속 무수한 생각과 여러 가지 감상들을 깔끔하게 정리하고 정돈된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에 글쓰기 훈련을 매일매일이 모여 몇 년이나 똑같았던 일기 쓰기에서 서평 작성으로 바꾼지도 시간이 많이 흘렀다. 좀처럼 글이 나아지지 않아 매번 한계를 실감하지만 몇 가지 긍정적인 변화들도 있긴 하다. 그중 가장 크게 체감하는 것이 예전과 다른 문학 계간지를 읽는 방식이다. 예전의 나는 좋아하는 작가의 소설이 어느 계간지에 수록됐다는 소식을 접하면 그 작품만 찾아 읽고 시간이 흐른 후 소설집을 읽으며 예전에 본 적 있다고 희미하게 기억해내곤 했었다. 하지만 좋은 작품을 많이 읽고 싶다는 욕심에 좋은 서평을 쓰고 싶다는 욕심이 더해지니 평론도 일삼아 읽게 되고 찾아 읽게 되는 문학평론가도 생기면서 계간지를 읽는 시야는 물론이고 작품을 읽는 시야도 조금은 넓어졌다고 생각한다. 아직은 개인적인 한계에 대한 인정이 더 크게 읽히지만 나의 편협한 시각을 더 깊고 넓혀줄 기회라 생각해 창작과비평 온라인 클럽에 지원을 했고 창비에서 나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 주었다.

 

마침 시기도 적절했다. 오랫동안 들어왔던 팟캐스트가 예고도 없이 휴식기를 가지더니 예고도 없이 유튜브로 돌아왔고 나는 거기 따라가지 않았다. 그리하여 요즘 예전 <창비 라디오 책다방>을 다시 정주행하고 있고 황정은 소설가와 김두식 교수와 수많은 게스트들이 함께 작품을 탐독하고 다각도에서 바라보고 이야기하는 것은 물론이고 문학을 넘어 한국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한 관심과 시선을 따라가며 예전 팟캐스트를 듣고, 틈틈이 『창작과비평』을 읽으며 창비의 시선을 부지런히 따라갔다. 덕분에 『창작과비평』 리뷰 곳곳에 <창비 라디오 책다방>의 에피소드가 등장하기도 했다.

 

당연히(?) 수록된 소설에 가장 먼저 눈길이 갔고 다행히 수록된 작품 모두 너무나 좋았다. 김중혁 작가의 「휴가 중인 시체」는 작가 이름 없이 작품을 읽었더라면 김중혁 작가를 떠올리지 못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는데 김중혁 작가의 소설을 읽으면 읽을수록 김중혁 작가의 소설에 대해 정의하기가 힘들어진다. 그 예측 불가능이 나는 좋다. 백수린 작가의 「아직 집에는 가지 않을래요」는 나중에 소설집이 나오면 표제작으로 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작품도 좋았고 제목도 좋았다. 백수린 작가의 소설 속 주인공들이 갈수록 성숙해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그것은 마치 소설가로서 백수린 작가의 성숙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황정은 작가의 「파묘」는 마침 3월 13일 위트 앤 시니컬에서 낭독회가 있어서 낭독회에 참여는 못해도 낭독회가 열리는 시간에 맞춰 같이 읽어보고 싶었지만 일이 있어 그렇게 하지는 못했다. 『디디의 우산』에 함께 수록돼도 될 정도로 그 연장선상의 이야기라 생각했는데 낭독회 다녀오신 분들의 후기를 보니 가부장제를 주제로 한 4개의 단편의 시작 작품이라고 한다. 앞으로 발표될 나머지 3편의 작품들도 몹시 궁금해진다. 김유담 작가의 「이완의 자세」의 과거 잘 나가던 엄마 모습의 묘사에서 이슬아 작가의 『나는 울 때마다 엄마 얼굴이 된다』의 엄마 모습이 떠올랐는데 유라도 울 때면 오혜자의 얼굴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다른 작품들에 비해 2배가 넘는 분량임에도 제일 빨리 읽혔다. 

 

문학에 대한 애정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있다면 『창작과비평』을 읽는 재미를 배로 높여준다. 3˙1운동 100주년에 맞춰 3˙1운동을 재조명하고 현재 한국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아직 끝나지 않은 용산참사와 지구온난화, 오끼나와 미군기지 반대운동까지 폭넓게 다루며 품격 있는 문학을 전방위적으로 다루고 있다. 문학 비평의 경우 내가 읽었던 작품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 감상은 어떤지 궁금하기도 하고 아직 읽지 못한 작품에 대해서는 작품과 작가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데 한기욱 편집진이 <책머리에>에서 다룬 황정은 작가의 『디디의 우산』과 박여선 영문학자가 앨런 홀링허스트의 『아름다움의 선』에 대해 다룬 촌평을 읽으며 비루하고 누비하기 짝이 없는 내 과거 서평들이 부끄러워 지구를 떠나고 싶은 심정이었다. 거기에 많은 시인들의 시들과 송종원 문학평론가의 신동엽 시인에 대한 평론을 읽고도 단 한 줄의 리뷰도 남기지 못하면서 개인적인 한계에 직면했는데 김미정, 김수이 문학평론가와 하성란 소설가의 「이 계절에 주목할 신간들」에서 김미정 문학평론가의 '여전히 시는 어렵다'라는 고백이 큰 위로가 됐다. 그럼에도 발견이 있었다면 김수영 문학상 수상자 이소호 시인에 대해 궁금했던 차에 「자기고백 예술가 1인의 무언록」이 너무나 흥미로운 작품이었다는 것이다. 예전 <창비 라디오 책다방>에서 황정은 작가가 백석 시인의 시에 대해 "맛이 느껴지고 탄력이 느껴진다"라고 했었는데 나도 시 좀 읽을 줄 알고 좋아하는 시에 대해 근사하게 말할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수록된 시를 읽을 때마다 했다.

 

『창작과비평』을 구독하면 할인과 단행본 증정, 포인트 적립 등 많은 혜택을 누릴 수 있는데 그 중 『창작과비평』 전자구독 서비스 무료를 온라인클럽 창작과비평을 통해 경험할 수 있었다. 이번 『2019년 봄호 창작과 비평』뿐만 아니라 과거 『창작과비평』도 온라인으로 누릴 수 있어서 좋아하는 작가들의 과거 수록 작품들을 찾아 읽어보는 재미를 맛보느라 정말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창작과비평』에 수록된 문학과 비문학을 균형 있게 다뤄야 하는데 관심사가 그러하다 보니 문학 리뷰에 많은 비중이 쏠린 건 개인적인 반성이 필요한 부분이다. 계간지 한 권을 두루 읽어낸 경험이 『창작과비평』과 함께여서 배로 더 값졌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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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드 스트라이크
구병모 지음 / 창비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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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단 맛집 창비에서 눈가리고 책읽는당 3기를 모집했다. 3년 전 눈가리고 책읽는당 2기에 참여하여 가제본의 도서를 받고 작가에 대한 아무런 사전 정보와 편견 없이 오로지 나만의 시각으로 한 권의 책을 읽고 마치 셜록처럼 작가에 대해 추리하며 서평을 작성했던 일을 즐겁게 추억하고 있는 나에게 지나칠 수 없는 이벤트였다. 당시 서평을 작성하고 난 이후 책의 출간이 늦어져 책의 정체도 늦게 발표되어 숨넘어갈 뻔했는데 평소 즐겨보던 블로거분이 비밀댓글로 살며시 알려주고 가셔서 책을 혼자 읽은 것이 아닌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읽은 것 같은 느낌까지 받아 정말 특별했던 경험으로 남아있었다. 

기분 좋게 눈가리고 책읽는당 3기에 선정됐다는 소식을 듣고 오랜만에 셜록도 정주행하면서(읭??) 가제본 도서를 받아 즐겁게 독서를 해나가기 시작했는데 서평 등록일이 정해지지 않아 너무 여유를 가지며 책을 읽어나갔고 그것이 중대한 실수가 돼버렸다. 가제본 표지에 명시된 단서 #새인간 #작은날개 #영어덜트소설을 봐도 아무것도 떠올리지 못하다가 '익인'이라는 단어가 등장하자 『아가미』의 구명모 작가가 떠오르기도 했지만 아직 소설 초반이고 다른 가능성들이 무궁무진했다. 주인공 루는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소녀였고 SF 요소들이 등장한다면 듀나작가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하며 책을 읽어나갔는데 어느 날 갑자기 예고도 없이 책의 정체가 발표된 것이다. 눈가리고 책읽는당 3기 도서 발표 안 본 눈 삽니다. 안 본 뇌 삽니다를 외치며 책을 빠르게 읽지 못한 나를 향한 자책은 금방 구병모 작가의 신작 『버드 스트라이크』에 대한 반가움과 환호로 바뀌었다.

 

전 시행과 그의 비서 사이의 아이로 태어나 외조부의 죽음 후 청사에 입성했지만 가족과 청사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불안정한 10대 소녀 루와 보통의 익인에 비해 큰 키와 왜소한 날개로 익인 사회에서 소외받고 있는 바오는 각자가 속한 세계에서 자신들의 존재만으로 누군가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생명들이다. 어느 날 청사에 익인들의 습격이 발생하고 작은 날개로 무리와 함께 도망치지 못한 바오는 청사에 갇히지만 루를 인질로 삼아 탈출에 성공하여 익인사회로 돌아온다. 

구병모 작가는 루와 바오를 통해 집단에 속하지 못하고 거부당한 아이들의 내면의 상처를 보여주고 도시인과 익인 사이의 갈등과 인간의 끝없는 이기심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작가의 전작 『위저드 베이커리』와 『아가미』에서 보여줬던 구병모 특유의 판타지와 몽환적인 이미지가 보이는가 하면 『파과』에서 보여줬던 입체적이고 강렬한 캐릭터와 흡인력 있는 서사가 보이기도 한다. 소설 속 익인들이 생활하는 고원지대에는 인체에 마취 작용과 흥분을 가져다주는 미과라는 열매가 있는데 『버드 스트라이크』 자체가 구병모 작가가 주는 환상에 사로잡히는 미과 같은 소설이었다. 

환상과 흥분에도 불구하고 구병모 작가 특유의 어두움 또한 『버드 스트라이크』에서도 빠지지 않지만 익인의 날개에는 치유의 힘이 있듯이 구병모 작가의 문장에도 치유의 힘이 있어 마치 큰 날개로 독자들을 감싸 안아주는 것 같다. 지장과 루의 대면에서 지장은 큰 어른답게 "아주 잠깐이라도, 그 인연을 귀하게 여기세요."라고 말하는데 데뷔작 『위저드 베이커리』 이후 이어온 구병모 작가의 작품들과의 인연이 정말 귀하게 여겨진다.

 

지난 3월 27일은 구병모 작가의 『위저드 베이커리』가 출간된 지 10주년 되는 날이었다. 지난 10년간 구병모 작가가 성실하게 발표한 작품들의 성과도 놀랍고 엄청나게 넓어진 스펙트럼도 놀랍다. 작년 여름에 발표되어 너무나 현실적이라 짜증이 난다던 원성(?)을 들었던 『네 이웃의 식탁』과 올봄에 발표된 익인 소년과 인간 소녀를 통해 성장기를 보여주는 『버드 스트라이크』가 같은 작가가 일 년도 안되는 시간 동안 발표한 작품이라니 믿기지가 않는다. 구병모 작가의 다음 작품은 어떤 작품일지, 구병모 작가의 앞으로의 10년은 어떤 작품들로 채워질지 기대가 크다. 구병모 작가를 성실히 오래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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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터스 브라더스
패트릭 드윗 지음, 김시현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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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총독문학상, 로저스 문예재단 소설상, 스티븐 리 콕상, 캐나다 작가협회상

맨부커상  최종후보

워싱턴 포스트 '주목할 만한 책'

퍼블리셔스 위클리, 아마존 선정 '올해 최고의 책'

와킨 피닉스, 존 C. 라일리, 제이크 질런홀 주연 영화 <시스터스 브라더스> 원작 소설

베니스 국제영화제 은사자상

 

패트릭 드윗의 『시스터스 브라더스』의 스펙은 그야말로 빵빵하다. 온갖 수식어와 찬사들이 작품성은 물론이고 재미까지 겸비한 소설이라는 걸 보증해준다는데 이견이 없어 보이지만 내가 이 책에 사로잡힌 데에는 거창한 스펙들보다 표지가 먼저였음을 고백한다. 달아래 카우보이모자를 쓴 두 사람의 모습이 하나의 해골로 보이기도 하면서 위트와 센스가 단연 돋보인다. 지금은 폐쇄됐지만 예전 ‘소설리스트’라는 사이트가 운영되었을 때 국내 유일, 세계 최고 표지 평론가 김중혁 작가가 선정하는 ‘표지갑’코너가 있었다. 매달 어떤 작품들이 선정될까 업로드되기만 기다리던 때가 있었는데 ‘소설리스트’ 사이트가 계속 유지되었더라면 아마 이번 달 ‘표지갑’에 당당히 올라올만한 작품이라는 생각이 표지 이미지를 보자마자 들었다(좋은 소설, 좋은 표지, 소설 속 음악들을 접할 때면 늘 생각나는 그 사이트...ㅠㅠ). 표지에 빠져들면서 소설이 과연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까 상상하는 재미를 더해주며 소설을 본격적으로 읽기도 전부터 기대감을 마냥 높여주었다. 

 

 레지널드 와츠는 갖가지 실패와 재앙으로 점철된 불행한 삶을 살아왔다. 하지만 씁쓸해하거나 한탄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수많은 헛발질을 재미나게 여기는 듯했다. “나는 정직한 일에서도 실패했고, 불법적인 사업에서도 실패했네. 사랑에도 실패하고 우정에도 실패했지. 뭐든 아무거나 대봐요. 분명 내가 실패한 것일테니. 어서, 아무거나 말해봐요. 뭐든 좋으니.” p.34

 

청부살인업자 찰리 시스터스와 일라이 시스터스 형제는 캘리포니아로 가서 커밋 웜이라는 금 채굴꾼을 죽이라는 고용주 제독의 청탁을 받고 여정을 떠난다. 캘리포니아에서 금이 발견되고 일확천금을 꿈꾸며 각지에서 몰려든 금 채굴꾼들이 들끓는다. 1851년 골드러시로 광기가 폭발하는 미국 서부를 배경으로 시스터스 브라더스의 살인 청탁 여정이 펼쳐진다. 평소 즐겨 보는 장르의 소설이 아니더라도 서부를 배경으로 청부살인업자 형제들의 여정이라는 소재만으로 몇몇 이미지들이 절로 떠오르지만 패드릭 드윗의 『시스터스 브라더스』는 지금까지 없었던 서부극을 보여준다. 탄탄한 소재와 입체감 있는 상반된 두 형제 캐릭터와 그들이 여정에서 마주치는 인물들과 함께 소설을 이끌어 나가면서 곳곳에 블랙 유머를 배치해 기대했던 작품성과 재미를 동시에 선사해주는데 표지에 가려졌던 각종 수식어들과 찬사들이 눈에 들어오고 수긍이 된다. 

 

 “당신 몸에는 낭만의 피가 흐르는 것 같은데, 그렇죠?”

 “우리 형제에게는 같은 피가 흘러. 그저 다르게 사용할 뿐이지.” p.186

 

악명 높은 시스터스 브라더스지만 그들의 청부살인 여정을 함께하다 보면 삐걱거리는 두 형제의 정반대 성격과 그들이 여정에서 예고 없이 마주하게 되는 예측 불가능한 상황과 갈등 속에서 긴장과 재미가 느껴지고 낭만이 읽힌다. 폭발하는 흡인력은 말할 것도 없다. 골드러시 열풍에 기대감에 부풀어 캘리포니아로 몰려든 포티나이너스들의 허황된 꿈과 욕망을 풍자적으로 풀어놓으며 흥미를 유발한다. 패트릭 드윗의 다른 작품들이 궁금해지고 영화가 궁금해진다.  

 

금 채굴꾼을 죽이러 가는 여정 중 우연히 현상금이 걸린 곰 가죽 사건에 가담하게 되어 사냥꾼들과 대치하는 과정에서 찰리는 사냥꾼들에게 “네놈이 나한테서 얻어갈 건 죽음뿐이야.”라고 경고한다. 예상치 못한 상황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그들의 여정은 계속해서 지연되지만 그 과정에서 만나는 인물들과 그들에게 펼쳐지는 상황들이 긴장감을 불어넣으면서도 서부식 블랙 유머를 공격적으로 건네며 지금까지 본 적 없는 새로운 장르의 소설을 경험시켜준다. 패트릭 드윗이 “독자들이 나한테서 얻어갈 건 소설뿐이야.”라며 건네는 이야기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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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마지막 히어로
엠마뉘엘 베르네임 지음, 이원희 옮김 / 작가정신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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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는 개의 인생이 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인생은 바로 당신이 인생은 뿐이라는 것을 깨달을 시작됩니다.” - 히들스턴

우연히 영화 <로키3> 보고 인생의 터닝포인트를 만나 중단했던 공부를 다시 시작하며 로키 발모아처럼 인생을 새롭게 시작하는 주인공 리지의 두 번째 인생을 사랑스럽게 그려낸 엠마뉘엘 베르네임의 『나의 마지막 히어로』는 영화 <토르> 악당 로키로 유명한 배우 히들스턴의 어록이 절로 떠오르게 했다. 

그게, 사실은... 

내가 식당에서 책을 읽고 있는데 어떤 남자가 다가와 내용을 물었고 그이가 남편이야.”

그렇구나. 그래서?”

내가 영화를 보러 갔더라면? 다른 식당에 갔다면 어떻게 됐을까?

10분만 늦게 식당에 갔다면? 우리는 만날 운명이었던 거야.”

-영화 <500일의 썸머>

그런가하면 영화 <500일의 썸머> 떠오르기도 하는데 <500일의 썸머>에서 톰과 썸머가 이별을 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는 영화 <졸업>이었다. 리즈가 친구들과 <로키3> 보지 않았더라면 혹은 <로키3> 아닌 다른 영화를 인생 영화로 만나 그녀의 히어로가 다른 사람이 되었더라면 리즈의 인생 2막은 어떻게 펼쳐졌을지 상상해보게 한다. 하지만 썸머의 운명처럼 리즈 역시 <로키3> 어떻게서든 만나 자신을 변화시킬 운명이었을 것이다.

 영화 초반의 록키 발모아처럼 그녀는 되는 대로 살면서 죽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잔을 내려놓고 일어났다. 계속해서 몸을 움직였다.

 록키 발모아처럼 일어날 것이다.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할 것이다. 스물다섯 살이었다. 지금이야말로 다시없는 기회였다. 

 다시 훈련을 시작하는 록키 발모아처럼 그녀는 공부를 재개할 것이다. 

 공부를 것이다.

 의과대학 공부를 다시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는 공부를 마칠 것이다.

 결심이 섰다.

 의사가 것이다. p.15-16

<로키3> 보고 열병을 앓은 작품을 발표하고 본격적으로 소설가가 되었다는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이자 자신의 히어로 실버스타 스탤론에게 바치는 소설이라는 사실만으로도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한데 100페이지 남짓한 짧은 소설에 씨네21 이다혜 기자와 이종산 소설가의 대담이 더해져 매력을 더해준다. 

 

다혜  설정 자체가 그냥 덕질 코스예요.

종산  ‘나의 마지막 히어로라는 제목도 뭔가 덕스럽고요.

다혜  그렇죠 『나의 마지막 히어로』는 분량이 길지 않아서 빠르게 읽히는 데다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도 아니예요. 계속 말하지만, 다른 소설들과 달리 남편과의 관계도 안정적이고요. (...) p.91 대담

인생 영화 <로키3> 만나 자신이 잊고 살았던 꿈을 스스로 이뤄 나가는 리즈의 모습과 함께 짧은 소설은 내내 경쾌하다. 모두가 다시 공부를 시작하기엔 이미 늦었다고 우려하지만 바로 실행에 옮겨 어린 학생들 틈에서마담이란 칭호를 들으며 묵묵히 학업을 마치고 남자들 틈에서 복싱을 배우다가 평생의 반려자 장을 만나고 일과 육아를 병행하는 와중에도 지속되는 실버스타 스텔론을 향한 덕질과 조금은 엉뚱한 걱정들이 사랑스럽게 펼쳐진다. 길게 이야기를 펼쳐나갈 거리들이 넘쳐남에도 짧고 빠르게 이야기를 펼쳐가는 방식은 무심한 듯 시크하지만 빨리 읽히는 흡인력만큼이나 처음 만나는 특이한 형태의 소설에 금방 빠지게 된다. 영화에 빠지고 실버스타 스텔론에 빠져버리는 리지의 모습을 어느 지점까지는 공감을 하며 읽어가다가 덕질의 수위가 상상을 초월하면서 느끼는 대목들에서는 이다혜 기자와 이종산 소설가의 대담에서 공감을 이끌어내며 소설이 끝나도 소설이 전해준 재미와 감동을 오래 느끼고 곱씹어 볼 있게 해준다. 이다혜 기자와 이종산 소설가의 대담을 통해 시리즈의 나머지 소설들이 궁금해지면서 엠마뉘엘 베르네임을, 그녀의 짧은 소설 시리즈를 깊게 파보고 싶어진다. 어쩐지 혼자 알기엔 아까운 작가와 시리즈라는 생각이 든다. 다섯 시리즈의 대담집만 따로 묶어도 권의 흥미로운 책이 되어 즐거움을 선사해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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