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부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혀 죽은 사건
구라치 준 지음, 김윤수 옮김 / 작가정신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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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구라치 준의 신간 소설 『두부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혀 죽은 사건』은 출간 전 작가정신 출판사 블로그(이 출판사 블로그 잘한다!!)에서 제목 맞추기 이벤트를 하며 출간 예고 소식을 전했고 음식이라는 힌트만으로는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어 정체가 너무나도 궁금했던 소설이었다. 하지만 고백하자면 정답이 공개되고는 너무나도 터무니없는 제목에 기대감도 크지 않았던 게(오히려 기대감이 꺾였던 게) 사실이다. 두부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혀 죽었다니... 뻥을 조금 보태자면 이토록 황당한 제목이 공개된 이후 내 멘탈이 두부가 되어 으깨지고 뭉개질 지경이었다.

 

그런데 이 소설집 예사롭지 않다. 첫 번째로 수록된 「ABC 살인」부터 마지막 수록작 「네로마루 선배의 출장」까지 6편의 단편 소설들이 짧은 호흡으로 단숨에 읽히는 것은 물론이고 그야말로 골 때리는 사건, 상황들과 아귀가 딱 맞아떨어지는 추리와 철학적이고 사회적인 메시지를 던지는 기법이 너무나도 능수능란하다. 한국 문학 시장이 일본 문학이 안 팔리는 시장이 아닌데, 오히려 그 반대인데 구라치 준 작가를 왜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는지 미스터리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ABC 살인」은 묻지마 살인 사건이 모방 연쇄 살인으로 변하는 과정을 익살스럽게 보여준다. 수록된 첫 작품부터 강인한 인상을 남기며 남은 작품들의 기대감을 올려주는데 확실한 역할을 한다. 책을 다 읽고 마지막 김윤수 번역가의 <옮긴이의 말>을 통해 아가사 크리스티의 『ABC 살인사건』을 패러디한 작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덕분에 『ABC 살인사건』도 몹시 궁금해졌다. 「사내 편애」는 인공지능이 발달하여 회사에서 인사관리를 '마더컴'이라는 시스템을 이용하여 컴퓨터에 맡긴다는 설정이다. 컴퓨터가 인간을 지배하는 세상과 강자와 약자 사이에서 발생하는 속물근성을 유쾌하고 흥미롭게 펼쳐내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작품이다. 수록된 작품 중 가장 좋았다. 「파와 케이크의 살인 현장」부터 본격적인 추리가 시작되며 흥미를 자극한다. 많은 궁금증을 남긴 살인사건 현장에 본격적인 추리가 펼쳐지고 밝혀지는 사건에 대한 해석과 범인의 의도가 소설이 끝났음에도 긴장감과 씁쓸함을 놓치지 않게 한다. 「밤을 보는 고양이」는 수록 작품 중 유일하게 여성이 주인공인 작품이다. 본격적인 사건이 발생하기 전까지 시골 할머니 댁에 내려온 여성 캐릭터를 평온하게 잘 묘사하여 구라치 준 작가의 내공을 볼 수 있었다. 한 곳을 응시하는 고양이에 대한 호기심이 사건의 발견으로 변하는 순간 소설의 공기도 달라지는 것이 묘미다. 「파와 케이크의 살인 현장」과 마찬가지로 씁쓸함이 오래 남은 작품이다. 소설의 표제작인 「두부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혀 죽은 사건」​은 너무 터무니없어 기대감을 반감시킨 첫인상과 달리 소설의 호흡이 길어질수록 호기심을 자극시킨다. '두부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쳐 죽어라'라는 농담을 농담으로 받지 못하고 진지하게 받아들일 정도로 고지식한 사람을 야유할 때 쓰이는 말이라는 번역가의 친절한 설명이 소설의 재미를 더 높여 주었다. 「네코마루 선배의 출장」역시 구라치 준의 '네코마루 선배'시리즈라는 친절한 설명 덕분에 구라치 준의 다른 작품들에 대한 호기심까지 증폭시켰다.  

짧은 호흡에 단숨에 읽히는 작품들을 차근차근 읽어가며 구라치 준 작가가 장편으로 쓴 미스터리 소설에 대한 호기심과 시리즈가 있으면 좋을 것 같다는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런 내 마음을 인공지능 프로그램을 통해 읽기라도 한 건지 비교적 길이가 길었던 마지막 두 작품 「두부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혀 죽은 사건」과 「네코마루 선배의 출장」을 통해 장편과 시리즈에 대한 호기심과 기대감을 어느 정도 충족해주었다. 수록된 6작품을 통해 구라치 준의 작품세계를 골고루 맛본 것 같아 만족감이 컸다.

 

 "아아, 정말 진정이 안 돼!" 돌연 산본마쓰 연구원이 소리쳤다. 그는 부스스한 머리를 한 손으로 벅벅 긁어대면서 말한다. "이런 건 싫습니다. 범인이 사라지다니, 이런 합리성이 결여된 이야기를 방치한다는 건 용서할 수 없어요. 진정이 안 됩니다. 정말이지, 상식 밖의 사태를 간과하다니 기분이 안 좋아. 모든 것이 정연하고 딱 들어맞지 않으면 생리적으로 불쾌해집니다, 저는!" p.271-272

 

구라치 준의 작품은 처음이지만 그의 작품 세계가 얼마나 다채롭고 탄탄한지 잘 알 수 있는 작품이었다. 그야말로 골 때리는 이야기들이 단숨에 읽히지만 그의 작품들은 결코 가볍지 않다. 독자들의 요구를 너무나 완벽하게 파악하면서도 자신의 색을 잃지 않고 메시지를 단호하게 전하는 능숙함에서 작가의 영리함이 동시에 보인다. 한눈에 못 알아봐서 미안할 지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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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과 비평 184호 - 2019.여름
창작과비평 편집부 지음 / 창비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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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과비평』 여름호에 신경숙 작가의 4년 만의 복귀작이 발표된다는 소식을 들었다. 평소 출판계 소식을 출판사의 SNS를 통해 빠르게 접하는 편인데 빠르게 접하긴 했지만 출판사의 SNS가 아닌 뉴스를 통해 먼저 접했고(출판사에서 SNS를 통해 출간 소식을 전하면서도 신경숙 작가의 복귀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창작과비평』 여름호를 만나기도 전에 기사를 통해 신경숙 작가의 '작품을 발표하면'을 먼저 읽었다. 여름호가 출간되어 제일 먼저 찾아 읽은 작품 역시 신경숙 작가의 「배에 실린 것을 강은 알지 못한다」였지만 따로 서평을 쓰진 않았다.

 

페이지를 넘기며 읽은 작품들이 쌓이자 『창작과비평』 2019년 여름호는 신경숙의 복귀보단 천운영과 황인찬의 복귀작이 더 도드라짐을 느꼈다. 항상 그러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화려한 작가진과 우리 사회에 대한 진단과 여러 목소리를 심층 있게 다루면서 문학의 품격을 보여주었다. 발간 전부터 논란을 먼저 접하고 섭섭함과 실망을 느꼈던 감정들은 미안함과 부끄러움으로 변해있었다. 그러길래 앞서지 말았어야 했다.

 

김성중 작가의 「정상인」은 과거 운동권 끝물에 함께 마르크스를 공부했던 선후배가 맑스 탄생 200주년을 맞아 이십여 년 만에 다시 만나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세월이 흐르며 사회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후배와 여전히 마르크스주의자로 살아가는 선배 사이의 뚜렷한 경계와 긴장을 잘 묘사한 작품이었으며 인상 깊은 문장들도 많았다.

신경숙 작가의 「배에 실린 것을 강은 알지 못한다」는 허수경 시인 추모작이다. 친구의 병환 소식을 접하고 친구를 만나기 위해 선뜻 유럽으로 향하는 주인공과 그런 주인공에게 자신의 나약한 모습을 보여주길 꺼려 하는 친구의 모습에서 신경숙 작가와 허수경 시인의 우정을 볼 수 있다. 무수한 세월 쌓아온 두 사람의 우정을 익히 알기에 이별을 직감하고 상대에 대한 배려뿐인 마지막이 먹먹하게 읽힌다.

오선영 작가의 「우리들의 낙원」은 인간의 속물근성을 어린 두 소녀를 통해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번호 가장 좋았던 문장을 두고 김성중 작가의 「정상인」과 나란히 오래 고심했던 작품이다.

임국영 작가의 「헤드라이너」는 수록된 작품 중 가장 골때리는 이야기를 유쾌하게 들려주었다. 지금까지 보여준 작품들보다 앞으로 보여줄 작품이 훨씬 많은 작가이지만 몇몇 작품들로 작가의 패턴이 보였다. 박민규 작가와 이기호 작가가 동시에 떠오르는 발견이었다.

천운영 작가의 「금연캠프」는 소설 속 주인공들의 금단현상과는 대비되는 맛깔난 문장들이 쉼 없이 펼쳐진다. 인물들의 과거나 이후의 이야기들로 소설이 더 확장되어도 좋을 것 같다. 난 과거의 이야기에 한 표.

이기호 작가의 장편연재가 시작됐다. 아일랜드 태생으로 광주외국어대학교 교수로 일했던 「싸이먼 그레이」 (1981~2017)의 일대기를 실험적인 방식으로 전개하여 이기호 특유의 작품세계를 보여준다. 남은 연재를 통해 앞으로 보여줄 것이 더 많은 작품임을 바로 직감할 수 있었다. 기대감이 커진다.

 

소설뿐만 아니라 시도 화려한 작가진으로 가득 채웠다. 다양한 연령대와 작품세계를 지닌 12명의 시인들의 작품들이 시에 대한 조예가 깊지 않은 내가 리스트만 봐도 든든할 정도다. 정호승 시인의 「개똥」과 「새똥」은 가볍게 읽히지만 오래 되짚어보는 작품이었다.

지난 호에 이어 3.1운동에 관한 이야기가 이번호에도 이어졌다. 3,1운동과 혁명에 대한 두 방향의 논리(백낙청 「3.1과 한반도식 나라만들기)」와 외국인의 시선으로 돌아보는 우리의 과거사(브루스 커밍스 「독특한 식민지, 한국」)가 흥미롭게 읽힌다.

이외에도 문학사와 페미니즘에 대한 논단, 패스트트랙, 방위비 분담금 등 우리 사회의 다양한 현상에 대한 목소리를 문학을 통해 품격있게 들려준다. 촌평을 통해서도 작품의 주제와 작가가 던지는 메시지에 맞는 사회 현상에 관한 이야기가 심도 있게 다뤄지고 있다. 김민섭 작가가 윤지관 작가의 『위기의 대학을 넘어서』를 다룬 것은 그야말로 환상의 캐스팅이었다. 이향규 교수의 런던한겨례학교 자원봉사 수기도 흥미진진했는데 작년 봄 창비 주간 논평에 실린 김중미 작가의 「만남은 가까이에 있다 : 이향규 『후아유』」와 함께 읽으면서 이주민에 대해 진지한 시선으로 되돌아보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온라인클럽 창작과비평 활동을 하면서 전자 구독 서비스를 제공받는 것과 함께 전자책 대여 서비스를 경험할 수 있는 것도 큰 메리트이다. 1년 정기구독의 경우 4권의 전자책을 90일 동안 대여할 수 있는데 일부러 아끼느라 아직 이용은 못했다. 좋은 책들을 전투적으로 출간하는 출판사답게 소장하고 있는 작품들, 읽어본 작품들도 많지만 욕심나는 작품들 역시 넘치게 많아 즐거운 고민에 빠져 있다. 지방에 살아 온라인 클럽 활동을 했지만 오프라인 클럽의 합평회 풍경도 궁금하다. 문학 계간지를 다루면서 사회 전반의 현상과 소외된 사람들의 목소리를 함께 다루고 독자들과 소통하는 친절한 창비만의 방식에 빠져들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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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 되면 괜찮을 줄 알았다 - 심리학, 어른의 안부를 묻다
김혜남.박종석 지음 / 포르체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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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SNS를 하다가 공감되는 글을 봤다. 어린 시절 상상했던 어른이 된 자신의 모습은 <섹스 앤 더 시티>의 캐리처럼 당당하고 멋있게 살 줄 알았지만 현실은 <인간극장>이라는 것이었다. 분명 내가 상상해왔던 미래의 내 모습이 지금의 이 꼬라지는 절대 아니었다. 직장에서 인정받으며 성공한 커리어 우먼이 되고 그러한 업적들을 보상받으며 여유롭고 호화롭게 휴식을 즐기고 거기엔 모두가 부러워하고 샘내는 멋있는 남자친구가 나만 바라보며 옆에 있어야 하는 라이프스타일의 문제만이 아니다. 화려한 생활만큼이나 내면도 성숙하고 단단한 어른이 나이만 먹으면 거저 되는 줄 알았었다. 그리고 너무나도 당연하게 그런 어리석은 상상을 쉽게 했던 어린 시절에 대한 형벌이라도 받는 듯이 가혹한 현실을 살아가고 있다.

 

김혜남(정신분석 전문의), 박종석(정신의학 전문의)의 심리학 에세이 『어른이 되면 괜찮을 줄 알았다』는 우울과 불안에 잠식당한 채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이 짊어진 다양한 우울 증상과 원인을 짚어보며 극복해 나갈 방법들을 제시하고 있다. 당연히 어른이 되면 괜찮을 줄 알았지만 절대 그러지 못하고 있고 제시되는 21개의 증상들이 모두 내면에 어느 정도 잠재되어 있기에 조심스럽지만 꼼꼼하게 살펴보게 된다. 김혜남 박사의 글은 Rosso 박종석 박사의 글은 Blue로 구분되어 교차되는 두 작가의 글이 마치 에쿠니 가오리와 츠지 히토나리의 『냉정과 열정 사이』가 떠오르게 한다. 

 

 뚝심 있게 나의 속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타인과 비교하지 말아야 한다. 남들이 빨리 달리든 열심히 달리든 그것은 그들의 속도다. 그렇게 열심히 뛰다 어딘가에서 고꾸라진다고 해서 내가 일으켜줄 것도 아니고, 그들의 페이스에 휘말린 내가 지쳐 쓰러진다고 해서 누구 하나 나를 일으켜 세워주지 않는다. 내 삶은 내 것이니만큼 나의 속도를 즐겨야 한다. 힘들면 쉬어도 되고, 덜 노력하고 덜 열심히 살아도 된다. p.77 박종석 - 번아웃 증후군

 

책이든, 영화든, 노래든 나의 취향은 어둡고 우울한 것들이다.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는 베스트셀러, 1000만 영화들과 맞지 않는 경우도 빈번하다. 그렇다고 까다로운 건 절대 아니고 조금 별난 편이다. 우울하고 평소에 비해 상태가 좋지 않다고 해서 떨쳐내려 유난을 떠는 편이기보다는 바닥을 치는 편이라 작가들이 건네는 치유와 처방에 반응이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어른이 되면 괜찮을 줄 알았다』의 독서만이 주는 공감과 위로는 확실히 받았다. 화려한 삶을 살아가는 <섹스 앤 더 시티>의 주인공이 되지 못해도 어떤가, 자신에 대한 정확한 진단과 성찰로 자신의 <인간극장>을 건강하고 성실하게 완주해야 함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어른이 되어 안 괜찮아도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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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재가 노래하는 곳
델리아 오언스 지음, 김선형 옮김 / 살림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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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식자처럼 행동하면 상대도 먹잇감답게 행동한다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러나 습지 소녀 카야는 그렇지 못하다. 술을 먹으면 폭력적으로 변하는 아빠를 견디지 못하고 엄마, 언니, 오빠들이 차례로 집을 나가더니 아빠마저 집을 나가선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 학교는 딱 하루 나가본 게 전부이고 마을 사람들은 마치 늑대소년 보듯하며 그녀를 '마시 걸'이라고 부른다. 보금자리 습지와 주변 동물, 식물, 곤충들만이 카야의 친구이고 가족이고 스승이다. 외로운 소녀 카야는 가혹한 환경 속에서도 혼자 사는 법을 터득하고 자연을 이치를 배워가며 숙녀로 성장해간다.  

그런 카야에게 습지는 그녀의 어머니가 되었고 정신적 부모가 되어주는 흑인 부부 점핑 아저씨와 메이블 아줌마가 있고 테이트에게 글을 배우며 첫사랑이 시작된다. 하지만 대학에 진학한 테이트는 카야를 더 이상 찾아오지 않고 다시 외톨이가 된 카야의 습지에 체이스 앤드루스가 나타나 카야의 마음을 다시 뒤흔든다. 몇 년 후 늪에서 체이스 앤드루스의 시체가 발견이 되고 카야는 살인사건 용의자가 되어 법정에 서게 된다.



 

 한참 후에 카야가 말했다. "이제 원하는 게 뭐야, 테이트?"

 "어떤 식으로든, 네가, 나를 용서해주는 거." 테이트는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기다렸다.

 카야는 자기 발치를 내려다보았다. 왜 상처받은 사람들이, 아직도 피흘리고 있는 사람들이, 용서의 부담까지 짊어져야 하는 걸까? 카야는 대답하지 않았다. p.247

 

"아니, 갈매기랑 왜가리랑 판잣집을 떠날 수는 없어. 나한테 가족은 습지뿐인걸" 

평생을 야생동물을 연구하는 생태학자로 살다 일흔이 다 된 나이에 뉴욕타임즈 37주 연속 베스트셀러, 아마존 23주 연속 종합 1위, 2019 가장 많이 팔린 책, 리즈 위더스푼 북클럽 <헬로 선샤인 북클럽> 도서 선정, 영화화 확정 등 매일 새로운 흥행 기록을 달성해가고 있는 화제의 작품 『가재가 노래하는 곳』으로 화려하게 데뷔한 델리아 오언스는 습지 소녀 카야의 일생을 1부 '습지'를 통해 성장소설, 로맨스 소설을 보여주고 2부 '늪'을 통해 살인 미스터리, 추리소설을 보여주어 위태로운 소녀의 불안정한 감수성과 체이스 앤드루스의 살인사건으로 미스터리 서사를 이끌어가는 저력을 보여준다. 카야의 성장과 체이스의 살인사건이 교차되는 이야기와 습지와 늪을 대비시켜 소설의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부분이 흥미롭게 펼쳐지며 쉼 없이 독자들을 자극한다.

1952년부터 시작되는 소설의 당시 시대상은 물론이고 습지와 늪의 거대한 자연이 내 품고 있는 아름다움을 완벽하게 재연하고 세밀한 심리묘사와 자신과 지구 사이에 아무런 장막이 없는 카야를 비롯하여 입체적인 등장인물들의 묘사를 통해 독자들을 단숨에 사로잡고는 재미와 긴장감을 450페이지가 넘도록 쉬지 않고 전해준다. 습지의 동, 식물을 통해 자연이 전하는 지혜와 메시지를 전하는 부분은 가히 환상적이다. 영화화가 확정이라는데 과연 카야의 눈부신 성장과 습지의 아름다움이 스크린에서는 어떻게 펼쳐질지 기대가 된다.

 

 카야는 논문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구름을 바라보며 상념에 빠졌다. 곤충 암컷은 짝짓기 상대인 수컷을 잡아먹고, 과도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포유류 어미는 새끼를 버리며, 많은 수컷이 경쟁자보다 더 잘 파정하기 위해 위태롭고 아슬아슬한 방법을 고안해낸다. 생명의 시계가 똑딱똑딱 돌아가는 한, 천박하건 무례하건 아무 상관없다. 카야는 이것이 자연의 어두운 면이 아니라 그저 모든 위험요소에 맞서 살아남으려는 창의적인 방법이라는 걸 알았다. 인간이라면 물론 그보다는 훌륭하게 행동해야 하겠지만 말이다. p.229

 

이곳보다 더 절실하게 나침반이 필요한 장소가 어디 있을까?

『가재가 노래하는 곳』이라는 제목부터 한 편의 시 같더니 카야의 상황에 대비되어 등장하는 시들과 자연이 전하는 신비가 소설의 재미와 감동을 배로 전해준다. 카야의 어린 시절과 흑인 부부 점핑 아저씨와 메이블 아줌마의 이야기에선 하퍼 리의 『앵무새 죽이기』가 떠오르기도 했지만 두 작품의 매력은 비슷해 보이면서도 확실히 다르다. 습지의 동, 식물의 행동이 너무나도 훌륭하게 은유되었기에 중요한 사건의 마지막을 끝까지 확인사살 시켜준 것은 개인적으로 조금 아쉬웠지만 소설이 전하는 감동과 매력에 영향을 미칠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카야는 습지에 물이 어제의 이야기를 삼켜버리는 과정을 여러 번 보았지만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소녀 카야와 카야의 이야기 『가재가 노래하는 곳』은 절대 잊지 못할, 가슴속에 깊이 새겨질 소중한 작품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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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 고양이의 비밀 무라카미 하루키 에세이 걸작선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안자이 미즈마루 그림,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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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다고 이 고양이가 섬뜩하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 없다. 뮤즈는 같이 살기에 매우 이상적인 고양이였다. 예쁘고, 영리하고, 튼튼하고, 숱한 수수께끼를 품고 있었다. 우리와 고양이 사이에는 늘 가벼운 긴장감이 흘렀고, 그건 그것대로 또 상당히 안정적이었다. 그런 기분을 느끼게 해주는 고양이는 흔치 않다. 짐작건대 뮤즈는 몇백 마리에 한 마리 있을 귀중한 고양이였고, 그런 고양이를 만난 것은 내 인생 최고의 행운 중 하나였다고 생각한다. p. 145-146 

 

무라카미 하루키가 『장수 고양이의 비밀』이라는 에세이로 돌아왔다. 제목부터 취향 저격인데 심지어 무라카미 하루키와 안자이 미즈마루 콤비의 <무라카미 하루키 에세이 걸작선>의 새 시리즈다. 무려 6년 만에 발표하는 새 시리즈라 반가움은 말할 것도 없고 어느 시절의 이야기를 드려줄 것인지, 어떤 일상으로 행복을 전해줄지 궁금하다. 무려 1995년부터 1996년까지 일 년 한 달 동안 『주간 아사히』에 연재한 에세이를 모은 것이라고 한다. 『상실의 시대』의 성공으로 소설가로서 큰 획을 그은 이후 시기의 에세이다. 아직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하루키의 글이 남아있다는 사실이 놀랍지만 그 시절 우리가 사랑했던 하루키의 에세이는 무슨 이야기를 들려주고 어떤 감수성을 건드려줄지 기대감이 높아져만 간다.

 

조금 이야기를 옆으로 새자면 최근 비슷한 시기 문학동네에서 두 거장의 신작이 나란히 출간됐는데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 『장수 고양이의 비밀』과 이언 매큐언의 소설 『검은 개』이다. 장르는 다르지만 무라카미 하루키는 고양이, 이언 매큐언은 개를 데리고 한국 독자들과 만난다는 사실이 재미난 이벤트가 아닐 수 없다. 두 작가가 성향이 다른 두 동물로 나란히 발표한 신작 소식이 반갑고 든든하다. 두 거장이 한국 독자들을 위해 풍성하게 준비한 선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루키 에세이 클럽의 클러버로 나는 하루키의 고양이와 먼저 만났다.

 

 결국은 '별수없잖아, 다 그런 거지'라고 생각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일 것이다. 즉 비슷한 일을 몇 번이나 겪어본 결과, 무슨 일이 생겼을 때 '뭐야, 지난번이랑 똑같잖아'라는 생각이 들고, 매번 심각하게 고민하는 것이 바보처럼 느껴졌는지도 모른다. 좋게 말하면 터프해졌고, 나쁘게 말하면 내 안의 나이브한 감수성이 마모됐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뻔뻔해진 셈이다. 변명은 아니지만 사소한 개인적 경험에 비춰 말하자면, 어떤 나이브한 감수성을 품은 채 내가 속한 업계에서 살아남으려는 건 소방수가 레이온 셔츠를 입고 화재 현장에 뛰어드는 것과 마찬가지다. p.124 



 

취미는 번역, 달리기는 생활, 자주 꾸는 꿈은 공중부유, 고양이 뮤즈가 출산 때면 믿고 찾아가는 산파. 평범한 일상도 하루키의 에세이라면 독자들을 대책 없이 매료시키고야 만다. 재즈, 영문학, 번역, 외국 생활, 맥주, 달리기, 고양이 등 이번에도 역시나 여전하고 너무나 잘 아는 하루키의 일상과 만났지만 그의 에세이에 감응하여 발산하게 되는 감정들은 오조오억 개쯤 되는 것 같다. 시너지가 폭발하는 안자이 미즈마루의 일러스트와의 앙상블은 말할 것도 없다. 20여 년 전의 신문 연재글이지만 얼마 전 작성된 SNS 글이라 해도 믿을 만큼 세련되고 감각적이면서도 자주 엉뚱하고 집요하다. 친절한 뒷이야기에서는 독자들과의 '소통'이 읽히는 재미를 주는가 하면 하루키는 고객 불만 편지도 하나의 작품으로 승화시키는 진수를 볼 수 있다. 말랑말랑한 감성으로 읽히다가도 어느 지점에선 그의 목소리가 단호하다. '이 감성을 가깝고도 먼 나라의 일흔이 넘은 할아버지 작가도 알고 있다니!'라며 감탄하다가 이내 나의 어리석은 오만함을 부끄럽게 여기게 된다. 하루키에게 젊음은 무기한으로 보장되는 것 같다는 의심은 확신이 되었다. 높은 기대치와 끝없는 갈망에도 매번 높은 신뢰감을 주고 성실하게 부응하는 하루키의 작품들은 소중하고 확실한 행복이다. 하루키가 전해주는 행복 또한 무기한으로 보장되는 것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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