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 고양이의 비밀 무라카미 하루키 에세이 걸작선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안자이 미즈마루 그림,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그렇다고 이 고양이가 섬뜩하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 없다. 뮤즈는 같이 살기에 매우 이상적인 고양이였다. 예쁘고, 영리하고, 튼튼하고, 숱한 수수께끼를 품고 있었다. 우리와 고양이 사이에는 늘 가벼운 긴장감이 흘렀고, 그건 그것대로 또 상당히 안정적이었다. 그런 기분을 느끼게 해주는 고양이는 흔치 않다. 짐작건대 뮤즈는 몇백 마리에 한 마리 있을 귀중한 고양이였고, 그런 고양이를 만난 것은 내 인생 최고의 행운 중 하나였다고 생각한다. p. 145-146 

 

무라카미 하루키가 『장수 고양이의 비밀』이라는 에세이로 돌아왔다. 제목부터 취향 저격인데 심지어 무라카미 하루키와 안자이 미즈마루 콤비의 <무라카미 하루키 에세이 걸작선>의 새 시리즈다. 무려 6년 만에 발표하는 새 시리즈라 반가움은 말할 것도 없고 어느 시절의 이야기를 드려줄 것인지, 어떤 일상으로 행복을 전해줄지 궁금하다. 무려 1995년부터 1996년까지 일 년 한 달 동안 『주간 아사히』에 연재한 에세이를 모은 것이라고 한다. 『상실의 시대』의 성공으로 소설가로서 큰 획을 그은 이후 시기의 에세이다. 아직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하루키의 글이 남아있다는 사실이 놀랍지만 그 시절 우리가 사랑했던 하루키의 에세이는 무슨 이야기를 들려주고 어떤 감수성을 건드려줄지 기대감이 높아져만 간다.

 

조금 이야기를 옆으로 새자면 최근 비슷한 시기 문학동네에서 두 거장의 신작이 나란히 출간됐는데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 『장수 고양이의 비밀』과 이언 매큐언의 소설 『검은 개』이다. 장르는 다르지만 무라카미 하루키는 고양이, 이언 매큐언은 개를 데리고 한국 독자들과 만난다는 사실이 재미난 이벤트가 아닐 수 없다. 두 작가가 성향이 다른 두 동물로 나란히 발표한 신작 소식이 반갑고 든든하다. 두 거장이 한국 독자들을 위해 풍성하게 준비한 선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루키 에세이 클럽의 클러버로 나는 하루키의 고양이와 먼저 만났다.

 

 결국은 '별수없잖아, 다 그런 거지'라고 생각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일 것이다. 즉 비슷한 일을 몇 번이나 겪어본 결과, 무슨 일이 생겼을 때 '뭐야, 지난번이랑 똑같잖아'라는 생각이 들고, 매번 심각하게 고민하는 것이 바보처럼 느껴졌는지도 모른다. 좋게 말하면 터프해졌고, 나쁘게 말하면 내 안의 나이브한 감수성이 마모됐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뻔뻔해진 셈이다. 변명은 아니지만 사소한 개인적 경험에 비춰 말하자면, 어떤 나이브한 감수성을 품은 채 내가 속한 업계에서 살아남으려는 건 소방수가 레이온 셔츠를 입고 화재 현장에 뛰어드는 것과 마찬가지다. p.124 



 

취미는 번역, 달리기는 생활, 자주 꾸는 꿈은 공중부유, 고양이 뮤즈가 출산 때면 믿고 찾아가는 산파. 평범한 일상도 하루키의 에세이라면 독자들을 대책 없이 매료시키고야 만다. 재즈, 영문학, 번역, 외국 생활, 맥주, 달리기, 고양이 등 이번에도 역시나 여전하고 너무나 잘 아는 하루키의 일상과 만났지만 그의 에세이에 감응하여 발산하게 되는 감정들은 오조오억 개쯤 되는 것 같다. 시너지가 폭발하는 안자이 미즈마루의 일러스트와의 앙상블은 말할 것도 없다. 20여 년 전의 신문 연재글이지만 얼마 전 작성된 SNS 글이라 해도 믿을 만큼 세련되고 감각적이면서도 자주 엉뚱하고 집요하다. 친절한 뒷이야기에서는 독자들과의 '소통'이 읽히는 재미를 주는가 하면 하루키는 고객 불만 편지도 하나의 작품으로 승화시키는 진수를 볼 수 있다. 말랑말랑한 감성으로 읽히다가도 어느 지점에선 그의 목소리가 단호하다. '이 감성을 가깝고도 먼 나라의 일흔이 넘은 할아버지 작가도 알고 있다니!'라며 감탄하다가 이내 나의 어리석은 오만함을 부끄럽게 여기게 된다. 하루키에게 젊음은 무기한으로 보장되는 것 같다는 의심은 확신이 되었다. 높은 기대치와 끝없는 갈망에도 매번 높은 신뢰감을 주고 성실하게 부응하는 하루키의 작품들은 소중하고 확실한 행복이다. 하루키가 전해주는 행복 또한 무기한으로 보장되는 것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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