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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부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혀 죽은 사건
구라치 준 지음, 김윤수 옮김 / 작가정신 / 2019년 6월
평점 :
절판
구라치 준의 신간 소설 『두부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혀 죽은 사건』은 출간 전 작가정신 출판사 블로그(이 출판사 블로그 잘한다!!)에서 제목 맞추기 이벤트를 하며 출간 예고 소식을 전했고 음식이라는 힌트만으로는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어 정체가 너무나도 궁금했던 소설이었다. 하지만 고백하자면 정답이 공개되고는 너무나도 터무니없는 제목에 기대감도 크지 않았던 게(오히려 기대감이 꺾였던 게) 사실이다. 두부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혀 죽었다니... 뻥을 조금 보태자면 이토록 황당한 제목이 공개된 이후 내 멘탈이 두부가 되어 으깨지고 뭉개질 지경이었다.
그런데 이 소설집 예사롭지 않다. 첫 번째로 수록된 「ABC 살인」부터 마지막 수록작 「네로마루 선배의 출장」까지 6편의 단편 소설들이 짧은 호흡으로 단숨에 읽히는 것은 물론이고 그야말로 골 때리는 사건, 상황들과 아귀가 딱 맞아떨어지는 추리와 철학적이고 사회적인 메시지를 던지는 기법이 너무나도 능수능란하다. 한국 문학 시장이 일본 문학이 안 팔리는 시장이 아닌데, 오히려 그 반대인데 구라치 준 작가를 왜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는지 미스터리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ABC 살인」은 묻지마 살인 사건이 모방 연쇄 살인으로 변하는 과정을 익살스럽게 보여준다. 수록된 첫 작품부터 강인한 인상을 남기며 남은 작품들의 기대감을 올려주는데 확실한 역할을 한다. 책을 다 읽고 마지막 김윤수 번역가의 <옮긴이의 말>을 통해 아가사 크리스티의 『ABC 살인사건』을 패러디한 작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덕분에 『ABC 살인사건』도 몹시 궁금해졌다. 「사내 편애」는 인공지능이 발달하여 회사에서 인사관리를 '마더컴'이라는 시스템을 이용하여 컴퓨터에 맡긴다는 설정이다. 컴퓨터가 인간을 지배하는 세상과 강자와 약자 사이에서 발생하는 속물근성을 유쾌하고 흥미롭게 펼쳐내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작품이다. 수록된 작품 중 가장 좋았다. 「파와 케이크의 살인 현장」부터 본격적인 추리가 시작되며 흥미를 자극한다. 많은 궁금증을 남긴 살인사건 현장에 본격적인 추리가 펼쳐지고 밝혀지는 사건에 대한 해석과 범인의 의도가 소설이 끝났음에도 긴장감과 씁쓸함을 놓치지 않게 한다. 「밤을 보는 고양이」는 수록 작품 중 유일하게 여성이 주인공인 작품이다. 본격적인 사건이 발생하기 전까지 시골 할머니 댁에 내려온 여성 캐릭터를 평온하게 잘 묘사하여 구라치 준 작가의 내공을 볼 수 있었다. 한 곳을 응시하는 고양이에 대한 호기심이 사건의 발견으로 변하는 순간 소설의 공기도 달라지는 것이 묘미다. 「파와 케이크의 살인 현장」과 마찬가지로 씁쓸함이 오래 남은 작품이다. 소설의 표제작인 「두부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혀 죽은 사건」은 너무 터무니없어 기대감을 반감시킨 첫인상과 달리 소설의 호흡이 길어질수록 호기심을 자극시킨다. '두부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쳐 죽어라'라는 농담을 농담으로 받지 못하고 진지하게 받아들일 정도로 고지식한 사람을 야유할 때 쓰이는 말이라는 번역가의 친절한 설명이 소설의 재미를 더 높여 주었다. 「네코마루 선배의 출장」역시 구라치 준의 '네코마루 선배'시리즈라는 친절한 설명 덕분에 구라치 준의 다른 작품들에 대한 호기심까지 증폭시켰다.
짧은 호흡에 단숨에 읽히는 작품들을 차근차근 읽어가며 구라치 준 작가가 장편으로 쓴 미스터리 소설에 대한 호기심과 시리즈가 있으면 좋을 것 같다는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런 내 마음을 인공지능 프로그램을 통해 읽기라도 한 건지 비교적 길이가 길었던 마지막 두 작품 「두부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혀 죽은 사건」과 「네코마루 선배의 출장」을 통해 장편과 시리즈에 대한 호기심과 기대감을 어느 정도 충족해주었다. 수록된 6작품을 통해 구라치 준의 작품세계를 골고루 맛본 것 같아 만족감이 컸다.
"아아, 정말 진정이 안 돼!" 돌연 산본마쓰 연구원이 소리쳤다. 그는 부스스한 머리를 한 손으로 벅벅 긁어대면서 말한다. "이런 건 싫습니다. 범인이 사라지다니, 이런 합리성이 결여된 이야기를 방치한다는 건 용서할 수 없어요. 진정이 안 됩니다. 정말이지, 상식 밖의 사태를 간과하다니 기분이 안 좋아. 모든 것이 정연하고 딱 들어맞지 않으면 생리적으로 불쾌해집니다, 저는!" p.271-272
구라치 준의 작품은 처음이지만 그의 작품 세계가 얼마나 다채롭고 탄탄한지 잘 알 수 있는 작품이었다. 그야말로 골 때리는 이야기들이 단숨에 읽히지만 그의 작품들은 결코 가볍지 않다. 독자들의 요구를 너무나 완벽하게 파악하면서도 자신의 색을 잃지 않고 메시지를 단호하게 전하는 능숙함에서 작가의 영리함이 동시에 보인다. 한눈에 못 알아봐서 미안할 지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