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지 않는 여름 1
에밀리 M. 댄포스 지음, 송섬별 옮김 / 다산책방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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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픽업트럭을 타고 오는 내내 할머니가 나 때문에 사람들 볼 낯이 없다고 한탄하는 소리를 듣게 될 줄 알고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한 뒤였는데, 할머니는 울고 있었고, 할머니가 이렇게 우는 모습을 본 게 처음이었고, 정확히는 그 누구든 이렇게 우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저 먼 곳에서 일어났다는 교통사고며, 뉴스며, 죽은 엄마 아빠며, 나를 용감한 아이라고 부르면서 머리를 쓰다듬고 부드러운 가슴에 안아주고 탤컴 파우더와 아쿠아 넷 스프레이 냄새를 풍기는 할머니가 하나도 이해되지 않았다. 온몸에 뜨거운 기운이 따끔거리면서 번지더니 문득 속이 메스거렸다. 마치 숨을 들이쉴 때마다 토사물이 목으로 넘어가는 것처럼, 머리가 미처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건에 몸이 먼저 반응하는 압도적인 메슥거림이 밀려왔다. 엄마 아빠가 죽었는데, 어떻게 마음속 어딘가에서 들키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할 수가 있었던 걸까? p. 49-50


에밀리 M. 댄포스의 『사라지지 않는 여름』의 출간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땐 제목과 표지 디자인도 확정되기 전이었다. 책에 대한 짤막한 소개와 『사라지지 않는 여름』을 원작으로 개봉한 영화 <캐머런 포스트의 잘못된 교육>의 포스터 이미지 만으로 책의 존재를 알게 됐지만 책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키는 요소들이 넘치게 많았다. 우선 선댄스 영화제 대상 수상작 <캐머런 포스트의 잘못된 교육>의 원작 소설이라는 타이틀 만으로도 기대감이 커지는데 영화 포스터에서 클레이 모리츠의 눈빛은 그야말로 압도적이었다.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듯도 했고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것 같기도 한 소녀의 눈빛을 꼭 읽어보고 싶었다. 


클레이 모리츠의 눈빛만큼이나 나를 헷갈리게 했던 건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대도시의 사랑법』, 『여름, 스피드』를 보신 분들이라면 더 재미있게 읽어 주실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는 출판사의 설명이었다. 퀴어 장르의 공통점은 알겠지만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은 아직 안 봐서 모르겠고) 박상영 작가의 『대도시의 사랑법』과 김봉곤 작가의 『여름, 스피드』는 서로 다른 매력으로 재미와 작품성을 인정받은 작품이기에 『사라지지 않는 여름』이 보여주는 작품의 이미지, 인물들이 안고 있는 고민과 감성들이 쉽게 짐작이 가지 않았고 그만큼 궁금했다.


책의 출간과 함께 확인한 표지는 영화 포스터 이미지와는 또 다르다. 턱을 괴고 정면을 응시하는 빨간 머리 여자의 눈빛 역시 영화 포스터처럼 도무지 읽어낼 수가 없다. 소녀와 사라지지 않는 여름이 더 궁금해진다. 곧 10대를 맞이하는 캐머런과 아이린은 둘도 없는 단짝 친구이자 라이벌 관계이다. 캐머런과 아이린이 키스를 하고 상점을 털 때 캠프를 떠난 캐머런의 부모님이 교통사고로 죽게 된다. 아이린과의 키스를 들키지 않아 안도하는 마음과 함께 죄책감, 정체성에 대한 혼란 등의 감정이 뒤섞이며 복잡하다. 외할머니와 이모의 손에서 자라게 된 캐머런에게 새로운 환경이 펼쳐지게 되는데 콜린을 만나게 되며 캐머런의 내면의 혼란은 더욱 가중된다. 


캐머런의 감정은 물론이고 시대적 배경과 캐릭터 묘사가 생생하다. 무엇보다 지금과 다른 1980년대 후반, 1990년대 초반의 시대에 자신의 성 정체성에 대한 혼란의 시기를 겪고 있는 10대 소녀의 고민과 시련의 과정이 흡인력 있게 읽히고 마음을 이끈다. 아슬아슬한 긴장이 이어지고 결국 기독교 교정 기숙사로 보내지는 캐머런의 모습을 보여주며 『사라지지 않는 여름』의 1권은 끝난다. 2권에서 이어지는 이야기들이 궁금해진다. 흡인력 있는 소설의 흐름이 끊겨 아쉽지만 그만큼 기대감도 커진다. 1권의 표지 배경색은 청록색인데 2권의 표지 배경은 파란색이다. 더 진해진 색만큼 진한 이야기를 들려줄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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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먹고 체하면 약도 없지
임선경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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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먹고 체하면 약도 없지

- 마음은 18세 풍랑기

- 장래희망은 웃긴 할머니

- 유쾌 발랄 인생 성장기

- 살면서 가장 꾸준히 한 일은 '나이 먹는 일'

- 본격 나이 탐구 에세이


책을 고르는데 표지가 우선순위가 된 적은 거의 없었는데 임선경 작가의 에세이 『나이 먹고 체하면 약도 없지』는 제목에 1차로 반하고 표지의 깨알 같은 카피들에 2차로 반하고 말았다. 엄밀히 말하면 표지 디자인보다는 제목과 카피에 반하고 만 것이지만 아무튼 반하게 하는 요소들로 가득한 표지가 강한 인상을 남기니 다른 것들은 더 이상 따져보지도 않게 되었다. 이어 '갱년기 안면홍조는 수줍음으로, 가슴 두근거림은 설렘으로 포장 중.', '재미가 있어야 의미도 있다는 소신으로 글을 쓴다.'라는 작가 소개 글을 보며 제대로 된 책을 만났다는 걸 바로 느낄 수 있었다.


새해가 밝아오고 설도 쇠고 나니 새롭게 맞이한 나이를 더 이상 부정할 수 없게 됐다. 해가 바뀌고 나이를 먹는 것에 무덤덤해지는 때가 있는가 하면 나이를 먹는 일만큼 끔찍한 것도 없다는 생각에 사로잡힐 때도 있는데 올해의 나는 후자의 마음으로 새해를 맞이했다. 그런 마음가짐은 『나이 먹고 체하면 약도 없지』를 읽으며 공감하고 감응하는데 더없이 좋은 조건이었다. 제목과 카피에 사로잡힌 마음에 방송국 작가 출신이라는 작가의 이력이 더해지니 책에 대한 신뢰감과 기대감이 동시에 상승한다. 에세이라는 장르에 마음을 자극하는 제목과 카피와 더불어 일러스트에서 김하나 작가의 에세이가 떠오르며 기대감이 더 높아지기도 했는데 첫 에피소드부터 난소의 노화와 갱년기를 다루면서 작가가 보통 내공이 아님을 알아보게 되었다.


제목과 카피가 너무나도 강렬했던 덕분에 이 책은 걸크러쉬 이미지의 인생 선배가 제대로 세상을 통찰하여 사이다를 날리는 그런 글들로 가득할 거라 예상했는데 친절한 언니가 미리 세상에 대해 알려주며 놓아주는 예방주사에 더 가까웠다. 더 이상 주사를 맞아도 울지 않지만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주사는 여전히 무섭고 아프듯 유쾌하고 경쾌한 글 속에서 예리하고 날카로움이 느껴지며 아프기도 한다. 무엇보다 공감하는 구절들이 많았고 나와는 다른 상황임에도 이해하게 되는 부분들이 많아 책을 읽어가는 내내 책과, 작가와 친밀감을 쌓아가는 기분이었지만 하필 가장 크게 공감한 부분이 '자라면서 빈말로라도 예쁘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는 나는 거울을 보는 일 자체를 싫어했다. 한창 민감한 시기인 청소년기에는 뻣뻣한 머리카락부터 넓은 발볼까지 그야말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어서 마음 깊은 곳부터 위축되기도 했다.'(p.53)는 구절이라는 점은 무척이나 슬프다. 


 병실에서의 할머니들, 일시적이든 평생이든 간에 주변부의 삶을 살아본 사람들, 서로의 사정을 알아주며 함께 나눠 본 사람들, 먹고 자고 입고 씻는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것들에 책임감을 느끼고 꾸준히 자신과 가족을 돌본 사람들, 그래서 혼자서도 잘하는 자생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가족이 장기 입원한 병원에서도 꽃놀이를 한다.


 나의 미래가 그런 할머니들 속으로의 편입이라니. 가슴 뛰는 일이 아닐 수 없다. p.239-240


그야말로 언니 또래의 감성과 공감을 작정하고 이끌어내는 에세이다. 육아에 치여, 살림에 치여, 업무에 치여 일 년에 책을 한 두 권 겨우 읽는(그마저도 베스트셀러 순위에만 의존하는) 언니들에게 이만한 책이 없음을 언니들은 좀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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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결이 바람 될 때 - 서른여섯 젊은 의사의 마지막 순간
폴 칼라니티 지음, 이종인 옮김 / 흐름출판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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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칼라티의 『숨결이 바람 될 때』를 알게 되고 읽게 된 건 팟캐스트 <이동진의 빨간책방> 덕분이었다. 어느새 추억이 돼버린 <이동진의 빨간책방>은 베스트셀러 순위와 작가의 유명세에 의존하던 나의 편협한 독서생활에 큰 변화와 영향을 끼쳤던 독보적인 매체였다. <이동진의 빨간책방>에서 다루는 책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신뢰감은 충족한데 2회에 걸친 방송 내내 이동진 평론가와 이다혜 기자의 찬사로 가득하니 책을 읽기도 전부터 기대치는 높아만 갔다. 하지만 높은 기대에 부응은 물론이고 그 이상의 만족을 선사해 <이동진의 빨간책방>에 대한 신뢰도까지 높여주었고 더불어 책에 대한 만족감은 출판사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는데 『숨결이 바람 될 때』는 흐름출판사를 알게 해준 책이기도 하다. 유독 스테디셀러를 많이 보유해 지금은 흐름출판사하면 떠올리는 책들이 무수히 많지만 나에게 흐름출판사를 알게 해준 첫번째 책은 바로 『숨결이 바람 될 때』이다.


거의 3년 만에 『숨결이 바람 될 때』를 다시 읽었다. 서른여섯의 외과의사 폴 칼라니티가 폐암을 선고받고 죽음에 직면하면서 써 내려가기 시작했지만 결국 완성하지 못하고 그의 아내가 마무리하는 2년여의 이야기가 마음의 동요를 크게 일으켰기에 책을 다시 읽는데 나름의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 그래도 두 번째 독서라 내용과 결과를 알고 있기에 애써 담담하게 책을 읽어갔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책을 처음 읽었을 때보다 더 크게 동요되고 무너져내리고 말았다. 나도 내가 이럴 줄은 정말이지 몰랐다.


 때때로 죽음의 무게가 손에 잡힐 듯 뚜렷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스트레스와 고통이 공기 중에 감돌았다. 평소에는 그 공기를 들이마시면서도 알아채지 못했다. 하지만 습하고 후텁지근한 날처럼, 공기의 무게 때문에 질식할 것 같은 날도 있었다. 또 어떤 날은 끝이 보이지 않는 여름날의 정글에 갇혀 온몸이 땀에 젖은 채, 환자의 가족이 흘리는 비처럼 맞고 있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2년차가 되면 레지던트는 응급실에 가장 먼저 달려간다. 내가 구할 수 없는 환자도 있고 구할 수 있는 환자도 있다. 어느 날 혼수상태에 빠진 환자를 응급실에서 수술실로 옮기고 두개골에서 피를 빼내자 환자는 깨어나서 가족에게 말을 건넸고 머리에 절개 자국이 남았다며 불평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모습을 지켜보며 성취감에 도취된 나머지 병원 안을 계속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새벽 두 시가 되어서야 길을 잃었다는 걸 깨달았다. 돌아가는 길을 찾는 데 45분이 걸렸다. p.102-103 


얼마 전 넷플릭스로 공개된 <빨간머리 앤 시즌3>에서 시한부 선고를 받은 메리가 앤의 도움을 받아 자신이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을 편지로 남기는 장면을 보면서 폴 칼라니티가 시한부 선고를 받고 딸에게 메시지로 남긴 대목이 떠올랐다. 이 책은 폴 칼라니티가 폐암을 선고받고 힘든 투병생활 속에서 의사이자 환자로서 삶과 죽음에 관해 적어가는 이야기이자 딸을 향한 유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폐암을 선고받고 인공수정으로 아이를 가지기 위한 준비를 하고 힘든 투병생활 속에서도 작가는 레지던트 과정을 완수하며 삶과 죽음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펼쳐간다. 자신에게 불어닥친 시련을 받아들이고 극복해가는 과정들이 덤덤하게 이어진다. 특별히 크게 슬픔이 몰아치는 것도 아닌데 어디서 이토록 큰 감정의 파고가 밀려왔는지 모를 일이다. 


『숨결이 바람 될 때』는 죽음을 선고받은 의사가 환자의 신분이 되어 삶과 죽음에 대한 성찰을 뒤돌아보고 삶을 정리해간다는 소재만으로도 흥미롭지만 작가가 생생하게 펼치는 철학과 사유로 존재감이 엄청난 책임을 부정할 수 없다. 명민한 지성, 의사로서의 직업적 사명감, 세심한 감수성으로 완성시킨 폴 칼라니티의 매력적인 에세이를  『숨결이 바람 될 때』로 밖에 만날 수 없어 안타깝다. 그래서 『숨결이 바람 될 때』가 더 빛나 보이고 특별해 보이는 건지도 모르겠다. 아껴 읽고 싶은 책이라는데 무조건 동감하게 되는 책이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다음에 다시 읽을 땐 제법 덤덤하게, 아껴가며 읽어보고 싶다.


내게 가장 그리운 폴은 연애하기 시작했을 때의 팔팔하고 눈부셨던 그 남자가 아니다. 뭔가에 집중하는 아름다운 남자였던 투병 말기의 폴, 이 책을 쓴 폴, 병약하지만 결코 나약하지 않았던 그 남자가 그립다. p.258 루시 칼라니디의 에필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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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대 감기 소설, 향
윤이형 지음 / 작가정신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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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을 앞두고 연휴 기간에 대해 미혼 친구들과 기혼 친구들 간의 입장차가 뚜렷하다. 달력에 빨간 날이 많으면 무조건 좋기만 했던 시절이 다 같이 있었는데 각자의 사정은 다르지만 어느 순간부터 명절은 달갑지 않은 날이 되었고 연휴 기간에 대한 극단적인 반응의 차이를 보며 우리가 나이를 먹었음을, 우리의 상황뿐만 아니라 사이도 어느 정도 멀어졌음을 느끼게 된다. 특히 어렸을 때 몰려다녔던 친구들의 경우 대학 졸업과 취업 후 모임의 1차적 균열 혹은 변형을 경험하고 이후 미혼자와 비혼자로 나뉘면서 2차적 균열 혹은 변형을 경험하기도 한다.

 

 율아와 자신이 서로 완전히 다른 인격체이며, 율아에게 자신의 오랜 박탈감을 투사해 예쁘장한 인형놀이를 해봤자 아이에게 전혀 도움이 될 것이 없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율아의 튜튜들을 헌옷 기부함에 넣으면서 뛸 듯이 기쁘지도 않았다. 아이의 옷을 처분하던 날 진경은 잠든 딸의 이마를 쓸어주며 생각했다. 사랑하는 딸, 너는 네가 되렴. 너는 분명히 아주 강하고 당당하고 용감한 사람이 될 거고 엄마는 온 힘을 다해 그걸 응원해줄 거란다. 하지만 엄마는 네가 약한 여자를, 너만큼 당당하지 못한 여자를, 외로움을 자주 느끼는 여자를, 겁이 많고 감정이 풍부해서 자주 우는 여자를, 귀엽고 사랑스러운 여자를, 결점이 많고 가끔씩 잘못된 선택을 하는 여자를, 그저 평범한 여자를, 그런 이유들로 미워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구나. 네가 어떤 사람으로 자라나도 나는 너를 변함없이 사랑할 거란다. p. 67-68

 

윤이형 작가의 신작 『붕대 감기』는 서로 다른 상황과 고민을 안고 사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그들의 우정이라는 관계를 통해 연쇄적으로 보여준다. 자신과는 다른 상황의 상대에 대한 짝사랑의 마음과 조심스러운 배려가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사이를 멀어지게 만드는 화자들이 계속해서 바뀌고 그들이 안고 있는 내면 혹은 사회적 문제(워킹맘, 탈코르셋, 불법 촬영, 세대갈등, 페미니스트, 새로운 가족관계 등)들은 다소 무겁고 버겁지만 그에 비해 소설은 재밌고 빠르게 읽힌다. 

 

유치원생부터 은퇴자까지, 다양한 연령층은 물론이고 다양한 직업군의 여성들을 배치시키고 각자의 이야기를 이어간다. 연쇄적으로 연결되는 인물들의 상황과 입장이 너무나도 이해되고 공감이 간다. 심지어 서로 대비되는 갈등의 상황과 입장도 각각의 상황과 입장이 다 이해가 되고 공감이 간다. 소설 속 인물들이 서로를 이해하고 연대를 이어가고 희망을 기대하는 과정을 따라 읽어가면서 각자의 이야기는 어느새 우리의 이야기가 되고 소설 속 많은 인물들과 겹쳐지고 연대하게 된다. 

 

 - 세연이가 제 고등학교 동창이거든요. 교련시간에, 둘씩 짝을 지어서 머리에 붕대를 감는 걸 했어요. 실기시험을 봤어요, 그걸로. 그때 저는 의자에 앉아 있었고, 걔가 제 머리에 붕대를 감았는데요. 한참 붕대를 감다가 걔가 갑자기 어? 그러는 거예요. 어? 어? 왜 이러지? 알고 보니 붕대가 모자랐던 거예요. 마무리를 어떻게 해야 했더라? 묶어서 매듭을 지었나, 아니면 밑으로 접어 넣었나, 둘 중 하나였는데. 아무튼 그걸 할 수가 없었나 봐요. 붕대가 갑자기 콱 조여들어서 제가 악! 소리를 질렀더니, 세연이가 아 어떡해, 미안해, 이러는 거예요. 모자라니까 당기면 될 줄 알고 당겼나 봐요. 머리가 그렇게 컸아? 어쨌든 걔는 시험을 망쳤고, 정작 저는 어떻게 시험을 봤는지 기억도 안 나요. 그 충격이 너무 커서. 그때도, 지금도,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너무 이상해요. 제가 머리가 그렇게 큰 편은 아니잖아요? 그런데, 요즘 이상하게 그 일이 자꾸 떠올라요. 붕대가 모자랐던 일이. 저는 보통 붕대로는 안 되나 봐요.

 - 걔 붕대가 짧았던 거겠지.

 - 그럴까요?

 - 그럼.

 - 언니, 사람들이 저를 많이 좋아해주는 거 아는데, 저는 왜 이렇죠? p.93-94

 

연쇄적으로 일어나는 화자들의 이야기가 소설의 말미에선 세연과 진경을 중심으로 오해와 갈등을 해결해가는 과정들을 보여주는데 많은 인물들과 그 관계 속에서 내 모습이 보이고 친구들의 모습이 보이고 선배 언니가, 사촌 언니가, 동생들이 보이는가 하면 고등학생 시절의, 대학생 시절의, 사회 초년생 시절의, 현재의 나와 우리가 보이기도 한다. 명절을 앞두고 연휴 기간에 서로 다른 입장 차이를 보이는 우리도 보인다. 등장인물들의 인물묘사와 심리묘사는 물론이고 그들이 살아가고 있는 현재의 시대적 묘사와 사회적 묘사와 그 짜임새가 더없이 탁월하고 섬세하다.

 

작가정신에서 리뉴얼된 '소설, 향' 시리즈는 미리 공개한 화려한 작가진들로 시리즈에 대한 기대감을 증폭시키더니 김사과 작가의 『0 영 ZERO 零』에 이어 윤이형 작가의  『붕대 감기』로 시리즈에 대한 신뢰와 믿음을 제대로 심어주었다. 『0 영 ZERO 零』에 함께 수록되었던 김사과 작가와 황예인 평론가의 대화가 소설만큼이나 좋았던 덕분에 『붕대 감기』에도 윤이형 작가의 인터뷰가 실렸더라면 좋았을 것 같다는 개인적인 아쉬움이 남는다. 해미, 은정, 지현, 율아, 진경, 세연, 윤슬, 경혜, 형은, 효령, 명옥, 채이. 이들이 소설 너머에서도 건강했으면 좋겠다. 더불어 서균이도. 소설이 남긴 여운과 울림을 오래도록 품고 싶다. 나에게도 붕대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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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섞이고 완벽히 녹아들 시간 - 스탠딩에그 커피에세이
에그 2호 지음 / 흐름출판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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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마도 커피에 관한 한 이런 아름다운 기억을 조금 더 많이 갖고 있는 사람일 거다.

 바로 지금, 5월 초의 오후, 은은한 라일락 향기를 머금은 신선한 공기가 코 끝에 닿는 기분 좋은 날이면, 10년 전 이맘때쯤 이제 막 친해지기 시작한 그 - 앞에서 언급했던 바로 그 지인 - 와 압구정의 어느 골목에 새로 문을 연 카페의 야외 테라스에 마주 앉아 이탈리아에서 마셨던 카푸치노에 대한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마신 카푸치노 맛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더불어 세계 각국의 도시들을 여행하면서 커피 한 잔을 앞에 두고 경험했던 모든 순간들도 떠오른다. 옆 테이블에서 들려오던 이국적인 언어, 그 도시만의 공기와 온도, 카페에서 흐르던 음악, 그때 함께 있던 이들과 나눈 유쾌한 여행담 등. (나는 그런 기억들을 바로 여기 『서로 섞이고 완벽히 녹아들 시간』에 옮겨놓곤 한다.) p.60-61

 

악마처럼 까맣고, 지옥처럼 뜨거우며, 천사처럼 순수하고, 사랑처럼 달콤한 커피는 악마의 음료라는 명성에 걸맞게 마시는 이들을 단숨에 매혹시킨다. 나 역시 일찍이 커피의 마력에 단단히 사로잡혀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빈속에 커피를 수혈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하루를 10년 넘게 이어가며 오랜 시간 중독 상태에 빠져있다. 여전히 커피에 대한 로망이 많지만 사실 오랜 시간 중독되어 있는 상태치곤 커피에 대한 조예는 그리 깊지 못해 커피의 맛과 향을 정확히 알고 표현할 줄 아는 사람들을 보면 그저 부러울 뿐이다. 커피에 대한 호의적이고 매력적인 표현을 마주치면 무조건적으로 공감하고 사로잡히고 마는데 개인적으로 커피에 관해 가장 공감 가는 글은 에쿠니 가오리의 시 「진실」이다. 아침에 혼자서 마시는 그 한 잔의 커피를 위해 사는 기분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진실

 

아침에 혼자서 마시는 커피

비 내리는 날에는 비 맛이 나고 

구름 낀 날에는 구름 맛이 나고

눈 오는 날에는 눈 맛이 나고 

맑게 갠 날에는 환한 햇살 맛이 나고 

오직 그 한 잔의 커피를 위해 

살고 있는 기분  

 

- 에쿠니 가오리 「진실」 (『제비꽃 설탕 절임』 수록)

 

스탠딩 에그의 멤버 에그 2호가 커피 에세이 『서로 섞이고 완벽히 녹아들 시간』을 출간했다. 망원동에서 모티프 커피바를 운영하는 에그 2호가 국내는 물론이고 해외의 많은 도시에서 발품 팔아 만난 카페에서 즐긴 커피에 관한 단상들을 들려준다. 몇몇 락페스티벌애서 스탠딩 에그의 공연을 즐겼던 기억에 개인적으로 커피보단 맥주와 더 매치가 잘 되고 판형 또한 에세이보단 시집에 더 잘 어울려 보이지만 덕분에 무엇을 기대하든 그 이상을 들려줄 것 같은 기대감을 증폭시킨다. 심지어 출판사는 말 그대로 시대의 흐름을 잘 읽어내는 출판사로 유명한 곳이니 책을 본격적으로 읽기도 전부터 기대감은 높아만 갔다.

 

국내와 해외를 불문한 장소는 물론이고 그곳에서 만난 가지각색의 커피들이 들려주는 이야기 하나하나에서 작가의 따뜻한 시선과 커피 고유의 향미와 풍미가 고스란히 전해진다. 커피의 맛과 향보다는 잠에서 깨어나는 각성효과가 절대적으로 중요한 나로서는 절대 느끼지 못하고 표현하지 못할 문장들과 작가의 마음을 사로잡고 시선이 머문 지점을 고스란히 담아낸 사진들이 책의 제목 그대로 서로 섞이고 완벽히 녹아들 시간을 선물해준다. 플랫화이트를 두툼하고 견고하게 짠 '영국산 모직 코트'의 온기를 연상시킨다고 비유하는 등 에세이 곳곳에 독자들을 감성에 섞이고 완벽히 녹아들게 할 요소들로 가득하다. 당장이라도 책에 소개된 카페를 방문해 작가의 시선이 머물렀던 풍경들을 겹쳐 보고 싶고 작가가 맛보고 극찬한 그 메뉴들을 똑같이 맛보고 싶어진다. 더불어 책을 읽어가며 내 인생의 최초의 커피와 최고의 커피 등 개인적인 기억과 추억들을 상기시켜주고 작가가 만난 낯선 공간들에서 낯선 사람들과 함께 한 기억들의 온기가 그대로 느껴져 책이 전하는 감동과 울림을 더해준다. 작은 판형의 책이 새삼 묵직해 보인다.

 

카페 주인만의 철학과 고집이 보이는 커피숍이 내 주위에 빈약하기도 하지만 워낙 커피 소비가 프랜차이즈에 과중되어 있다 보니 『서로 섞이고 완벽히 녹아들 시간』을 읽으며 한동안 잊고 지냈던 커피와 카페에 대한 로망들도 다시금 일깨워주었다. 내 생에 최초의 커피는 중학생 때 독서실을 다니면서 시작됐는데 그동안 부모님이 마시는 커피의 향만 맡으며 어른들의 전유물로만 느꼈던 커피를 독서실 휴게실에 있는 커피자판기에서 한두 잔 사 먹다가 마트에서 파는 가정 저렴한 믹스 커피를 독서실 사물함에 채워 넣으며 진화해갔다. 센스 있는 어른으로 성장해 상대에게 어울리는 커피나 와인을 선물할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었지만 그렇게 되지 못했고 앞으로도 그렇게는 진화가 안될 것 같다. 하지만 커피에 관한 감성 에세이라면, 커피에 관한 한 아름다운 기억을 조금 더 많이 가지고 있는 에그 2호의 『서로 섞이고 완벽히 녹아들 시간』을 자신 있게 추천하고 선물할 것 같다. 마법이라도 부린 건지 커피에 관한 작가의 견고한 철학과 아름다운 기억들이 서로 섞이고 완벽히 녹아든 책을 읽어가는 내내 몽글몽글, 말랑말랑했다. 한 권으론 부족해요. 많은 경험과 기억을 앞으로 더 나눠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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