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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대 감기 ㅣ 소설, 향
윤이형 지음 / 작가정신 / 2020년 1월
평점 :
명절을 앞두고 연휴 기간에 대해 미혼 친구들과 기혼 친구들 간의 입장차가 뚜렷하다. 달력에 빨간 날이 많으면 무조건 좋기만 했던 시절이 다 같이 있었는데 각자의 사정은 다르지만 어느 순간부터 명절은 달갑지 않은 날이 되었고 연휴 기간에 대한 극단적인 반응의 차이를 보며 우리가 나이를 먹었음을, 우리의 상황뿐만 아니라 사이도 어느 정도 멀어졌음을 느끼게 된다. 특히 어렸을 때 몰려다녔던 친구들의 경우 대학 졸업과 취업 후 모임의 1차적 균열 혹은 변형을 경험하고 이후 미혼자와 비혼자로 나뉘면서 2차적 균열 혹은 변형을 경험하기도 한다.
율아와 자신이 서로 완전히 다른 인격체이며, 율아에게 자신의 오랜 박탈감을 투사해 예쁘장한 인형놀이를 해봤자 아이에게 전혀 도움이 될 것이 없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율아의 튜튜들을 헌옷 기부함에 넣으면서 뛸 듯이 기쁘지도 않았다. 아이의 옷을 처분하던 날 진경은 잠든 딸의 이마를 쓸어주며 생각했다. 사랑하는 딸, 너는 네가 되렴. 너는 분명히 아주 강하고 당당하고 용감한 사람이 될 거고 엄마는 온 힘을 다해 그걸 응원해줄 거란다. 하지만 엄마는 네가 약한 여자를, 너만큼 당당하지 못한 여자를, 외로움을 자주 느끼는 여자를, 겁이 많고 감정이 풍부해서 자주 우는 여자를, 귀엽고 사랑스러운 여자를, 결점이 많고 가끔씩 잘못된 선택을 하는 여자를, 그저 평범한 여자를, 그런 이유들로 미워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구나. 네가 어떤 사람으로 자라나도 나는 너를 변함없이 사랑할 거란다. p. 67-68
윤이형 작가의 신작 『붕대 감기』는 서로 다른 상황과 고민을 안고 사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그들의 우정이라는 관계를 통해 연쇄적으로 보여준다. 자신과는 다른 상황의 상대에 대한 짝사랑의 마음과 조심스러운 배려가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사이를 멀어지게 만드는 화자들이 계속해서 바뀌고 그들이 안고 있는 내면 혹은 사회적 문제(워킹맘, 탈코르셋, 불법 촬영, 세대갈등, 페미니스트, 새로운 가족관계 등)들은 다소 무겁고 버겁지만 그에 비해 소설은 재밌고 빠르게 읽힌다.
유치원생부터 은퇴자까지, 다양한 연령층은 물론이고 다양한 직업군의 여성들을 배치시키고 각자의 이야기를 이어간다. 연쇄적으로 연결되는 인물들의 상황과 입장이 너무나도 이해되고 공감이 간다. 심지어 서로 대비되는 갈등의 상황과 입장도 각각의 상황과 입장이 다 이해가 되고 공감이 간다. 소설 속 인물들이 서로를 이해하고 연대를 이어가고 희망을 기대하는 과정을 따라 읽어가면서 각자의 이야기는 어느새 우리의 이야기가 되고 소설 속 많은 인물들과 겹쳐지고 연대하게 된다.
- 세연이가 제 고등학교 동창이거든요. 교련시간에, 둘씩 짝을 지어서 머리에 붕대를 감는 걸 했어요. 실기시험을 봤어요, 그걸로. 그때 저는 의자에 앉아 있었고, 걔가 제 머리에 붕대를 감았는데요. 한참 붕대를 감다가 걔가 갑자기 어? 그러는 거예요. 어? 어? 왜 이러지? 알고 보니 붕대가 모자랐던 거예요. 마무리를 어떻게 해야 했더라? 묶어서 매듭을 지었나, 아니면 밑으로 접어 넣었나, 둘 중 하나였는데. 아무튼 그걸 할 수가 없었나 봐요. 붕대가 갑자기 콱 조여들어서 제가 악! 소리를 질렀더니, 세연이가 아 어떡해, 미안해, 이러는 거예요. 모자라니까 당기면 될 줄 알고 당겼나 봐요. 머리가 그렇게 컸아? 어쨌든 걔는 시험을 망쳤고, 정작 저는 어떻게 시험을 봤는지 기억도 안 나요. 그 충격이 너무 커서. 그때도, 지금도,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너무 이상해요. 제가 머리가 그렇게 큰 편은 아니잖아요? 그런데, 요즘 이상하게 그 일이 자꾸 떠올라요. 붕대가 모자랐던 일이. 저는 보통 붕대로는 안 되나 봐요.
- 걔 붕대가 짧았던 거겠지.
- 그럴까요?
- 그럼.
- 언니, 사람들이 저를 많이 좋아해주는 거 아는데, 저는 왜 이렇죠? p.93-94
연쇄적으로 일어나는 화자들의 이야기가 소설의 말미에선 세연과 진경을 중심으로 오해와 갈등을 해결해가는 과정들을 보여주는데 많은 인물들과 그 관계 속에서 내 모습이 보이고 친구들의 모습이 보이고 선배 언니가, 사촌 언니가, 동생들이 보이는가 하면 고등학생 시절의, 대학생 시절의, 사회 초년생 시절의, 현재의 나와 우리가 보이기도 한다. 명절을 앞두고 연휴 기간에 서로 다른 입장 차이를 보이는 우리도 보인다. 등장인물들의 인물묘사와 심리묘사는 물론이고 그들이 살아가고 있는 현재의 시대적 묘사와 사회적 묘사와 그 짜임새가 더없이 탁월하고 섬세하다.
작가정신에서 리뉴얼된 '소설, 향' 시리즈는 미리 공개한 화려한 작가진들로 시리즈에 대한 기대감을 증폭시키더니 김사과 작가의 『0 영 ZERO 零』에 이어 윤이형 작가의 『붕대 감기』로 시리즈에 대한 신뢰와 믿음을 제대로 심어주었다. 『0 영 ZERO 零』에 함께 수록되었던 김사과 작가와 황예인 평론가의 대화가 소설만큼이나 좋았던 덕분에 『붕대 감기』에도 윤이형 작가의 인터뷰가 실렸더라면 좋았을 것 같다는 개인적인 아쉬움이 남는다. 해미, 은정, 지현, 율아, 진경, 세연, 윤슬, 경혜, 형은, 효령, 명옥, 채이. 이들이 소설 너머에서도 건강했으면 좋겠다. 더불어 서균이도. 소설이 남긴 여운과 울림을 오래도록 품고 싶다. 나에게도 붕대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