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섞이고 완벽히 녹아들 시간 - 스탠딩에그 커피에세이
에그 2호 지음 / 흐름출판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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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마도 커피에 관한 한 이런 아름다운 기억을 조금 더 많이 갖고 있는 사람일 거다.

 바로 지금, 5월 초의 오후, 은은한 라일락 향기를 머금은 신선한 공기가 코 끝에 닿는 기분 좋은 날이면, 10년 전 이맘때쯤 이제 막 친해지기 시작한 그 - 앞에서 언급했던 바로 그 지인 - 와 압구정의 어느 골목에 새로 문을 연 카페의 야외 테라스에 마주 앉아 이탈리아에서 마셨던 카푸치노에 대한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마신 카푸치노 맛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더불어 세계 각국의 도시들을 여행하면서 커피 한 잔을 앞에 두고 경험했던 모든 순간들도 떠오른다. 옆 테이블에서 들려오던 이국적인 언어, 그 도시만의 공기와 온도, 카페에서 흐르던 음악, 그때 함께 있던 이들과 나눈 유쾌한 여행담 등. (나는 그런 기억들을 바로 여기 『서로 섞이고 완벽히 녹아들 시간』에 옮겨놓곤 한다.) p.60-61

 

악마처럼 까맣고, 지옥처럼 뜨거우며, 천사처럼 순수하고, 사랑처럼 달콤한 커피는 악마의 음료라는 명성에 걸맞게 마시는 이들을 단숨에 매혹시킨다. 나 역시 일찍이 커피의 마력에 단단히 사로잡혀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빈속에 커피를 수혈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하루를 10년 넘게 이어가며 오랜 시간 중독 상태에 빠져있다. 여전히 커피에 대한 로망이 많지만 사실 오랜 시간 중독되어 있는 상태치곤 커피에 대한 조예는 그리 깊지 못해 커피의 맛과 향을 정확히 알고 표현할 줄 아는 사람들을 보면 그저 부러울 뿐이다. 커피에 대한 호의적이고 매력적인 표현을 마주치면 무조건적으로 공감하고 사로잡히고 마는데 개인적으로 커피에 관해 가장 공감 가는 글은 에쿠니 가오리의 시 「진실」이다. 아침에 혼자서 마시는 그 한 잔의 커피를 위해 사는 기분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진실

 

아침에 혼자서 마시는 커피

비 내리는 날에는 비 맛이 나고 

구름 낀 날에는 구름 맛이 나고

눈 오는 날에는 눈 맛이 나고 

맑게 갠 날에는 환한 햇살 맛이 나고 

오직 그 한 잔의 커피를 위해 

살고 있는 기분  

 

- 에쿠니 가오리 「진실」 (『제비꽃 설탕 절임』 수록)

 

스탠딩 에그의 멤버 에그 2호가 커피 에세이 『서로 섞이고 완벽히 녹아들 시간』을 출간했다. 망원동에서 모티프 커피바를 운영하는 에그 2호가 국내는 물론이고 해외의 많은 도시에서 발품 팔아 만난 카페에서 즐긴 커피에 관한 단상들을 들려준다. 몇몇 락페스티벌애서 스탠딩 에그의 공연을 즐겼던 기억에 개인적으로 커피보단 맥주와 더 매치가 잘 되고 판형 또한 에세이보단 시집에 더 잘 어울려 보이지만 덕분에 무엇을 기대하든 그 이상을 들려줄 것 같은 기대감을 증폭시킨다. 심지어 출판사는 말 그대로 시대의 흐름을 잘 읽어내는 출판사로 유명한 곳이니 책을 본격적으로 읽기도 전부터 기대감은 높아만 갔다.

 

국내와 해외를 불문한 장소는 물론이고 그곳에서 만난 가지각색의 커피들이 들려주는 이야기 하나하나에서 작가의 따뜻한 시선과 커피 고유의 향미와 풍미가 고스란히 전해진다. 커피의 맛과 향보다는 잠에서 깨어나는 각성효과가 절대적으로 중요한 나로서는 절대 느끼지 못하고 표현하지 못할 문장들과 작가의 마음을 사로잡고 시선이 머문 지점을 고스란히 담아낸 사진들이 책의 제목 그대로 서로 섞이고 완벽히 녹아들 시간을 선물해준다. 플랫화이트를 두툼하고 견고하게 짠 '영국산 모직 코트'의 온기를 연상시킨다고 비유하는 등 에세이 곳곳에 독자들을 감성에 섞이고 완벽히 녹아들게 할 요소들로 가득하다. 당장이라도 책에 소개된 카페를 방문해 작가의 시선이 머물렀던 풍경들을 겹쳐 보고 싶고 작가가 맛보고 극찬한 그 메뉴들을 똑같이 맛보고 싶어진다. 더불어 책을 읽어가며 내 인생의 최초의 커피와 최고의 커피 등 개인적인 기억과 추억들을 상기시켜주고 작가가 만난 낯선 공간들에서 낯선 사람들과 함께 한 기억들의 온기가 그대로 느껴져 책이 전하는 감동과 울림을 더해준다. 작은 판형의 책이 새삼 묵직해 보인다.

 

카페 주인만의 철학과 고집이 보이는 커피숍이 내 주위에 빈약하기도 하지만 워낙 커피 소비가 프랜차이즈에 과중되어 있다 보니 『서로 섞이고 완벽히 녹아들 시간』을 읽으며 한동안 잊고 지냈던 커피와 카페에 대한 로망들도 다시금 일깨워주었다. 내 생에 최초의 커피는 중학생 때 독서실을 다니면서 시작됐는데 그동안 부모님이 마시는 커피의 향만 맡으며 어른들의 전유물로만 느꼈던 커피를 독서실 휴게실에 있는 커피자판기에서 한두 잔 사 먹다가 마트에서 파는 가정 저렴한 믹스 커피를 독서실 사물함에 채워 넣으며 진화해갔다. 센스 있는 어른으로 성장해 상대에게 어울리는 커피나 와인을 선물할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었지만 그렇게 되지 못했고 앞으로도 그렇게는 진화가 안될 것 같다. 하지만 커피에 관한 감성 에세이라면, 커피에 관한 한 아름다운 기억을 조금 더 많이 가지고 있는 에그 2호의 『서로 섞이고 완벽히 녹아들 시간』을 자신 있게 추천하고 선물할 것 같다. 마법이라도 부린 건지 커피에 관한 작가의 견고한 철학과 아름다운 기억들이 서로 섞이고 완벽히 녹아든 책을 읽어가는 내내 몽글몽글, 말랑말랑했다. 한 권으론 부족해요. 많은 경험과 기억을 앞으로 더 나눠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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