탬버린 - 김유담 소설집
김유담 지음 / 창비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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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담 작가를 처음으로 알게 해준 작품은 <창작과비평> 2019년 봄호에 수록된 「이완의 자세」였다. 인생에서 스포트라이트를 아주 짧게 받고 변두리로 밀려난 인물들과 자식에 대한 기대와 사랑이 지긋지긋한 엄마들을 보며 한국 문단에서 기억해야 할 작가가 늘었다는 반가움을 가졌던 건 그러니까 딱 작년 이맘때였다. 문예지에서 신예 작가를 발견했을 때, 문예지에 실렸던 작품들이 모여 단행본으로 출간될 때의 반가움과 즐거움의 감정은 마치 문학계의 얼리어답터, 문학계의 인싸가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하는데 김유담 작가의 첫 소설집 『탬버린』의 출간 소식을 듣자마자 그런 감정들로 반가움과 즐거움을 동시에 느꼈다(반가움에 「이완의 자세」부터 읽어보려고 했는데 아쉽게도 이번 소설집엔 수록되어 있지 않았다)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지방 국립대나 교대 대신 서울에 있는 대학에 가겠다고 했을 때, 나는 가족들 모두에게 이기적이라는 비난을 들어야 했다. 남동생은 일찌감치 실업계 고등학교 진학을 결정한 후였다. 소설을, 가슴 벅차는 일을 꿈꾸는 게 죄는 아니지 않느냐고 항변하며 고집을 피울 때만 하더라도 삶이 이렇게까지 벅찰 줄은 몰랐다. 자신이 특별하다는 오만한 믿음 하나만이 유일한 자존심이었더 그 소녀는 소도시에서의 평범한 삶을 세상에서 가장 경멸했다. 평범하게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몰랐던, 이곳을 떠나기만 하면 제법 근사한 미래가 그려질 거라 믿었던, 나조차 미워하고 있는 나의 열일곱을 L은 따뜻하게 기억해주었다. 자신만만하게 떠나놓고 이년도 되지 않아 풀 죽은 모습으로 다시 고향에 내려온 것에 대해서도 그는 잘했다고, 스스로를 다치게 만들면서까지 이뤄야 하는 건 아무것도 없다고 다독여준 사람이었다. p.67-68 「공설운동장」

 

「핀 캐리」의 인숙, 「공설운동장」의 하경, 「우리가 이웃하던 시간이 지나고」의 성희와 영주, 「탬버린」의 은수와 송이, 「멀고도 가벼운」의 지연 그리고 보배 이모, 「가져도 되는」의 승규와 인희 부부, 「두고두고 후회」의 선재, 「영국산 찻잔이 있는 집」의 피티와 소냐. 이들은 각자의 작품 속에서 인생을 제대로 헤매고 열패감을 맛보는데 마치 부모에게 같은 유전자를 물려받은 자매처럼 여덟 편의 작품이 닮아있음을 느끼게 된다. 그래도 인생을 살아가는데 적극적이고 열정적이었던 딸들이 닮아 있는 것처럼 과거의 가부장적인 권위가 무능함으로 꺾여 가족들 앞에서 힘을 잃고 약한 모습을 보이고 마는 아버지의 모습들도 많이 닮아 있다. 여덟 편의 단편들이 수록되어 있는 『탬버린』 속에는 지긋지긋한 유년시절과 고향을 도망치듯 떠나 서울로 도피한 사람들이 많다. 그리고 당연히 서울은 그들을 따뜻하게 품어주거나 안식처가 되어주는 도시가 되어주지 못한다. 마치 인생에서 패배 선언을 당한 듯 서울살이에 실패하고 다시 고향으로 내려가는 인물들도 있다. 룸으로 안내받지 못하고 홀에 앉아야 하는 사람들, 자신의 기분 따위를 돌보며 살 여력이 없는 사람들, 학업을 이어가고 생활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치는 사람들, 삶이 고단하고 버겁고 징글맞은 사람들을 이야기를 건조하고 먹먹하게 묘사하는데 김유담 작가는 그야말로 독보적인 존재감을 드러낸다. 

 

 발표 주제가 정리되지 않는다는 핑계로 학회 등록을 포기했다. 학회보다는 잠을 못 잘 정도로 괴로운 치통을 해결하는 것이 더 급했다. 독일 학회를 포기한다고 해서 유학길까지 막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기회조차 잡지 못하는 내가 계속 공부를 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점점 지쳐가고 마모되어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충치는 감기나 위장병과는 달랐다. 그냥 둔다고 저절로 나아질 가능성 따위는 없었다. 지금의 내 상황도 참고 견딘다고 해서 좋아질 가능성이 없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석사가 끝나면 독일로 유학을 가겠다는 꿈은 이미 천천히 썩어가고 있었다. 남은 석사과정조차 제대로 끝낼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썩은 꿈을 도려낸 자리에 무엇을 채울 수 있을지 막막하기만 했다. p.101 「우리가 이웃하던 시간이 지나가고」

 

고향, 지방에 대한 지역적, 감성적 묘사와 인물들이 처한 상황에 대한 묘사, 감정묘사가 그야말로 생생하다. 지긋지긋한 고향을 도망치듯이 떠나고 고단하게 서울살이를 하다가 패배감으로 고향에 다시 내려와서 느끼는 그 감정들을 다 알 것 같고 이해할 것 같은가 하면 「탬버린」에서 노래방 회식 장면은 마치 진짜 사무실 회식에 참석한 것 같은 지나치게 사실적이고 생동감 넘치는 묘사에 짜증이 몰려오기도 한다. 「탬버린」의 반장, 「멀고도 가벼운」의 보배 이모의 경우처럼 주인공 보다 더 마음이 가고 신경이 쓰이는 인물에 대한 묘사에선 김유담 작가의 따뜻함과 세심함이 보이기도 한다. 삶의 고단함, 지긋지긋함, 징글맞음이 마치 밀착된 것처럼 생생하고 뚜렷한데 여지를 남겨두는 마무리에선 빈자리가 크게 느껴지며 공허함이 몰려온다. 어쩜 수많은 인물들 중 현재 행복한 사람이 한 명도 없을까? 독서가 끝나고도 계속 신경이 쓰인다. 

 

 송과 나는 노래를 잘 부르는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매일 노래방에 다니다보니 나중에는 어지간한 노래는 수준급으로 부를 수 있는 실력이 돼버렸다. 뭐든지 계속하다보면 잘하게 되는 법이라고, 탬버린을 잘 치는 비결을 묻는 내게 송이 답했다. 송은 노래 부르는 것보다 탬버린을 치며 춤추는 것을 좋아했다. 좋아하는 수준을 넘어 거의 미쳐 있었다. 쉬는 시간이면 송은 선생님들의 눈을 피해 학교 뒤뜰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탬버린을 흔들어댔다. 다섯 손가락의 마디마디를 번갈아 치는가 하면, 팔뚝, 엉덩이, 무릎 등을 이용해 소리를 내면서 느낌을 비교했다. 나는 뭐든지 지나치게 열심히 사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어떤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편이었는데,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탬버린을 잘 치기 위해서 손등과 손바닥에 멍이 들고 손가락에 물집이 잡힐 정도로 노력하는 송과는 그래도 잘 붙어다녔다. 음악 실기 시간에도 다루지 않는 탬버린 연주를 혼신의 힘을 다해 연습하는 송의 모습은, 연습보다는 연마에 가까워 보였다. 이상하게도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나도 모르게 몸속 깊은 곳에 숨겨둔 감정의 덩어리가 탬버린의 박자를 타고 올라오는 것 같았다. 그것은 일종의 흥()에 가까운 감정이었는데 마냥 신이 나지만은 않아서 묘한 형태의 한()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나는 그것이 음악이 아니었다고 말하지 못하겠다. p.129-130 「탬버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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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흘 전 아버지의 소식을 전화로 전했을 때 엄마는 그럴 줄 알았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너는 그럼 그 인간이 오래 살 줄 알았니? 대체 뭘 기대한 거야.

 나는 서둘러 전화를 끊고 싶었지만 엄마와 거의 반년만에 통화를 하게 된 것이라 참고 있는 중이었다.

 엄마는 아버지한테 하고 싶은 말 없어?

 이제 와서 무슨 말을 해. 잘 죽으라고 해. 

 이 말을 끝으로 엄마가 먼저 전화를 끊었다. 통화가 끝난 후 나는 한참이나 잘 죽는다는 게 어떤 걸까 곰곰이 생각했으나, 아무래도 그것이 내 아버지의 몫은 아닐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p.264 「두고두고 후회」

 

김유담 작가는 첫 소설집 『탬버린』 속 여덟 편의 소설들을 통해 자신의 색을 확실히 보여준다. 봄날과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샛노란 표지처럼 김유담이라는 소설의 장르가 쨍한 색을 발산하며 뚜렷한 개성과 풍부한 감성을 끊임없이 담아낸다. 특히 이제 막 첫 번째 소설집을 발표했는데 「이완의 자세」가 수록될 다음 소설집이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아는 감정을 격하게 공감하게 만들고 모르는 감정도 아는 것처럼 만들어주는 김유담 식의 마법 같은 소설 세계를 자주, 오래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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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리츠스케일링 - 단숨에 ,거침없이 시장을 제패한 거대 기업들의 비밀
리드 호프먼.크리스 예 지음, 이영래 옮김 / 쌤앤파커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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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리츠스케일링은 믿기 힘든 속도로 엄청나게 규모를 확장시키는 전반적인 기업 체계와 구체적인 기술, 이 모두를 이르는 말이다. 경쟁사에 비해 너무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어서 꺼림칙한가? 불안해 마라. 그대로 나아가라. 당신이 하고 있는 그것이 바로 블리츠스케일링이다. p.47

 

블리츠스케일링이라는 단어는 『블리츠스케일링』이라는 책을 통해 처음 접하게 된 용어였다. 결코 가볍게 읽히지 않을 것 같은 장정에 요즘 보기 드문 양장본, 다소 비장해 보이는 표지디자인과 '단숨에, 거침없이 시장을 제패한 거대 기업들의 비밀'이라는 솔깃한 부제, "다가올 기회는 대단히 좁고 빨리 닫힌다!"라는 경각심을 깨워주는 빌게이츠 추천사를 강조한 띠지, 에어비앤비 CEO 브라이언 체스키, 페이스북 COO 셰릴 샌드버그, 에릭 슈미트 전 구글 CEO 등 유명 인사들의 찬사로 가득한 추천사까지 본격적인 독서를 하기도 전에 책의 장정과 표지 디자인에 그만 압도되고 말았다.

 

기습공격의 BlitzKrieg와 규모 확장의 Scale up의 합성어로 불확실한 상황에서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엄청난 속도로 회사를 키워 압도적인 경쟁우위를 선점하는 기업의 고도 전략이라는 용어로 이 시대에 새롭게 탄생한 '블리츠스케일링'이라는 단어는 초반의 생소함과 달리 단어에서 느껴지는 특유의 활기참, 스피드, 확장 등의 감정이 책에서 고스란히 읽히며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힘 있게 읽힌다. 아마존, 구글, 페이스북을 비롯하여 넷플릭스, 에어비앤비 등 세계적 기업들이 무수한 경쟁상대들 속에서 독보적인 성장과 성공을 할 수밖에 없었던 비결과 남다른 전략이 독서의 집중력을 높여주고 남다른 흡인력과 재미를 전해준다. '스타트업'에 집중해서 크게 감응할 부분이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내가 현재 살고 있는 글로벌 경제의 진단과 성공과 실패 사례들을 비중 있게 다루며 주목을 이끌어 기대 이상의 재미와 유익한 정보를 전해주었다.


 예를 들어 에어비앤비는 문화 전파를 극대화하는 데 광범위한 수단들을 사용하고 있다. 체스키가 모든 에어비앤비 직원들에게 매주 보내는 이메일도 그중 하나인데, 아주 강력하다. 그는 스탠퍼드대 강의에서 이렇게 말했다. "반복적인 일들을 계속해서 해야 합니다. 특히 문화를 추구하는 데 정말로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일들은 몇 번이고 계속해서 반복하세요. 이것이 무엇보다 주요합니다." 에어비앤비는 시각적으로 각인시키며 이런 언어 메시지들을 강화시킨다. 체스키는 픽사 출신의 화가를 고용해서 에어비앤비 고객들이 하는 경험의 처음부터 끝까지를 담은 스토리보드를 만들었다. 그들이 에어비앤비 문화의 특징이라고 생각하는 고객 중심 디자인을 강조한 스토리보드였다. 심지어 에어비앤비 회의실도 이런 스토리를 담고 있다. 각각의 회의실에는 에어비앤비 서비스에서 이용할 수 있는 방을 그대로 재현해놓았다. 에어비앤비 직원들은 이런 회의실 중 한 곳에서 회의를 할 때마다 손님들이 그곳에서 묵을 때 무엇을 느낄지 생각하게 된다.

 아마존에서 베조스는 파워포인트 사용을 금지하고 손으로 쓴 메모를 고집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매번 회의를 할 때마다 조용히 이 메모들을 읽는다. 이 메모 정책은 아마존이 진실을 전달하는 문화를 구축하는 방법 중 하나다. 메모는 구체적이고 포괄적이어야 한다. 또 메모를 읽는 사람들은 가만히 앉아서 파워포인트 슬라이드의 중요 항목들을 보고 고개를 끄덕이며 분명치 않은 동의 의사를 전달해선 안 된다. 그 대신 같은 방식으로 응답해야 한다. 베조스는 메모가 더 예민하게 질문하게끔 하고 깊은 사고를 촉진한다고 생각한다. 메모는 자기만족이기 때문에(슬라이드를 보여준 사람이 필요치 않고), 아마존 내의 더 많은 사람들이 더 쉽게 받아 볼 수 있다.

 잡스는 픽사에 몸담을 당시 커뮤니케이션 문화를 구축하기 위해 건축을 핵심 전략으로 이용했다. 픽사 본사 건물을 디자인한 것이 바로 그 전략이었는데, 정문부터 중앙계단, 중앙극장, 시사회실까지 모두 카페와 우편함이 있는 아트리움으로 이어지도록 만들었다. 이로써 모든 부서와 각 전문 분야의 직원들이 다른 분야의 동료들을 정기적으로 만나게 되었다. 덕분에 자연스럽게 픽사의 협력적이고 포괄적인 문화를 강화할 수 있었다. 아이작슨의 전기에서 잡스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 픽사의 최고창작책임자 존래시터(Jhon Lasseter)는 이렇게 말한다. "그의 전략은 첫날부터 효과를 발휘했습니다. 몇 달 동안 보지 못했던 사람들을 계속 마주치게 되었죠. 나는 이보다 협력과 창의성을 촉진하는 건물은 본 적이 없습니다." p342-344

 

시대가 빠르게 바뀌면서 기업의 성장전략과 속도도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그 흐름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여러 모델을 제시하며 진단을 도와주고 전략을 제시하는 리드 호프먼, 크리스 예의 『블리츠스케일링』은 지금보다 더 급속하게 세상이 변하고 기업 경영 환경이 바뀌어도 흔들리지 않고 변하지 않는 가치를 지닌 스타트업과 스케일업의 조언과 전략서가 되어줄 것이다. 시간이 흐른 뒤 다시 이 책을 읽을 땐 작가의 조언과 제시하는 전략들은 그대로 일 테지만 성공의 사례로 예시된 기업들은 빠르게 변화하는 글로벌 환경에서 어떤 모습으로 변화하였을지, 그때 새롭게 떠오르는 기업과 성공의 모델로 인정받는 기업들은 어떤 산업으로 어떤 성공의 방식을 창조해냈는지 비교하며 읽는 재미가 있을 것 같다. 그때의 독서가 벌써부터 궁금해지고 기대된다. 블리츠스케일링은 책의 저자이자 링크드인 설립자 리드 호프먼이 스탠퍼드대 특강을 계기로 화제가 되었고 학생들과 CEO들의 열광적인 반응이 책의 출간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저자가 시대의 흐름과 기업들의 성장과 성공을 정확하게 파악하여 블리츠스케일링이라는 신조어를 탄생시키고 그 현상과 진단을 명확히 하여 거대하고 튼튼한 뿌리를 내렸다. 거기에 파생된 다양한 요소들이 새로운 콘텐츠를 만들어 그 영역이 여러 방면에서 확장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싶다. 그러는 과정 속에서 또 다른 기업이 떠오르고 또 다른 기업이 역사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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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기억을 보라 - 비통한 시대에 살아남은 자, 엘리 위젤과 함께한 수업
엘리 위젤.아리엘 버거 지음, 우진하 옮김 / 쌤앤파커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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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코스트에 대해서라면 공부가 필요함을 많이 느끼고 있다. 역사적 사실을 제대로 알고, 생존자의 증언을 찾아보며 홀로코스트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고 역사를 되짚어보고 싶은 욕심은 예전부터 있었지만 말 그대로 오랜 시간 욕심으로만 그치고 있을 뿐이다. 오래전부터 아우슈비츠 생존자로 유명한 프리모 레비가 자신의 경험을 담은 유명 작품들을 읽어야 할 독서 목록에 올려두고 있지만 항상 다음으로 미뤄두고 다른 작품부터 챙겨 읽으며 어느새 오래 미뤄놓은 숙제가 돼버리기도 했다. 꽤 긴 시간을 그렇게 허비하고 있는 와중에 들려온 아리엘 버거가 지은 『나의 기억을 보라』의 출간 소식은 홀로코스트를 다룬다는 점에서 소재도 반가웠지만 홀로코스트 생존자이자 1986년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엘리 위젤이 생전 보스톤 대학에서 강의한 내용 필기와 수업시간 학생들과 대화하고 토론한 내용을 바탕으로 그의 제자이자 조교인 아리엘 버거가 지은 독특한 이력에 빠르게 끌렸다. 홀로코스트 생존자라는 이력에 대학 강의를 책으로 옮긴 작품이라 하니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떠오르기도 하면서 기대감과 다루는 이야기가 너무 높은 수준이라 내가 이해하기 어렵지 않을까 하는 노파심이 동시에 들었다.

 



책의 저자는 아리엘 버거지만 엘리 위젤의 강의를 바탕으로 엮어진 책이라 책날개에 작가 소개가 아닌 엘리 위젤의 소개가 먼저 되었다는 점부터 단번에 눈길을 사로잡는다. 『나의 기억을 보라』로 엘리 위젤을 처음 알게 됐는데 홀로코스트 생존자에서 홀로코스트 증언자가 되기까지의 과정과 노벨 평화상 수상자, 대학교수로 그의 일생은 소설이나 영화라 해도 믿을 정도라 본격적인 독서 전 책날개를 먼저 읽어봤을 뿐인데 벌써 흥미진진하다. 『나의 기억을 보라』는 문학적 색채가 짙은 제목에서부터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는데 원서 제목인 『Witness』 보다 한국어판 제목이 훨씬 마음에 들어 출판사에 대한 호감이 더불어 높아지기도 했다. 그러니까 본격적으로 책을 읽기도 전부터 반하게 되는 요소들이 넘치게 많았다.

 

 또 다른 강의에서 우리는 경건파에서 바라본 나치의 유대인 학살에 대한 이야기를 살펴보았다. 역사학자 야파 엘리아크가 수집해서 정리한 이야기였다. 제니퍼라는 대학원생이 위젤 교수에게 혹시 기적을 믿느냐고 물었다.

 "기적이라고요? 어느 정도는 믿고 또 어느 정도는 믿지 않는다고 대답해야 할까요? 기적과 관련된 모든 이야기에서, 나는 그런 기적이나 구원을 겪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모순적 모독을 느낍니다. 사실 나는 기적과 관련된 이야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특히나 특정한 때에 특정한 장소에서 일어난 기적 같은 것은요. 그러면 마치 하느님이 선택해서 자비를 베푼 것처럼 되는데, 나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입니다."

 강의 시간에, 특히 고대와 현대의 작가들이 쓴 비극이나 부조리 문학을 다룰 때 위젤 교수는 갑자기 묻곤 했다. "그런데 그런 모든 순간에 하느님은 어디에 계셨던 건가요?"

 때때로 그는 우스갯소리처럼 말하기도 했다. "이봐요, 하느님. 그게 정말인가요? 그런데 도대체 왜 그러셨나요?" 그가 그렇게 말할 때면 신앙심 깊은 몇몇 학생들이 신경질적으로 킥킥거렸고 다른 학생들은 그냥 웃곤 했다. p.166-167

 

작가의 이력과 더불어 흥미로운 요소들도 많았지만 개인적 취향과 달리 높은 진입장벽이나 수준에 대한 우려도 컸던 것이 사실이다. 각오를 단단히 한 우려만큼 책에서 전하는 이야기들 역시 넘치게 좋았다. '홀로코스트'에 대한 깊은 집중을 예상하고 기대했는데 강의와 강의 속 대화의 폭이 기대 이상으로 넓었다. 단순히 유명 대학 유명 강의의 노트, 강의 대화로 생각했던 예상과 달리 언어, 종교, 인종, 사상에 대한 사유가 꼬리에 꼬리를 문다. 정해진 양식의 커리큘럼이 아닌 무궁무진한 대화에서 현실과 이상을 넘나들어 지적 향유의 즐거움을 이끌어내면서 단순한 독서 이상의 재미와 폭넓은 관점을 보여준다. 문학적 색채가 짙은 한국어 버전 제목처럼 아리엘 버거가 엘리 위젤의 강의와 그 속에 오간 대화들을 촘촘하게 복원한 기법과 과장된 것처럼 느껴질 정도의 사례들은 마치 소설처럼 생동감 있고 탄탄하게 읽혀 재미를 더해주기도 한다.

 



책을 읽기 전 높은 기대감과 노파심이 동시에 들었지만 기대하고 겁먹은 이상으로 책이 좋았다. 원서 보다 더 좋은 한국어판 제목, 마치 소설이나 영화 시놉시스라 해도 믿을만한 엘리 위젤의 소개 글,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을 비롯한 유력 매체들의 추천사까지 본격적인 독서에 들어서기도 전부터 반하고 좋아할 만한 요소들이 넘치게 많았지만 본격적인 독서가 시작되면서 사고의 폭과 깊이를 넓혀주는 근사한 질문 법과 대화방식에 기대 이상으로 책이 좋았다. 다소 어려운 구간이 있었지만 작가나 엘리 위젤에 대한 원망이 아닌 나 자신의 수준 미달에 대한 원망으로 이어져 이런 책을 술술 읽으면서 지식적 깨달음과 감동의 여운을 이끌어 내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개인적 바람과 반성을 야무지게 가지게 되었다. 강의와 대화에 인용된 고전문학 작품을 다 읽어보고 싶다는 욕심과 함께 엘리 위젤을 일찍 알아 그의 작품들을 읽은 이후 『나의 기억을 보라』를 보았더라면 더 넓은 시야로 보이고 읽히는 것이 있을 텐데라는 아쉬움이 들었다. 그러니까 아는 만큼, 흡수해내는 만큼 재미와 깨달음을 톡톡히 얻을 책이라는 건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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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시설계, 초등부터 시작하라 - 서울대 입학사정관이 알려주는 입시 맞춤형 공부법
진동섭 지음 / 포르체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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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빠른 속도로 변화한다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경우가 많다. 대부분 기계를 조작하거나 유행을 따르는데 감각이 예전 같지 않을 때 그런 감정을 많이 느끼곤 하는데 내 경우엔 입시에 관련해서 세상이 빠른 속도로 변화하고 있음을 크게 느끼고 있다. 공부, 시험이야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도 대학 진학, 취업 준비, 자격증, 테스트 등을 통해 아직까지 완전히 끈을 놓지 않고 있는 상황이지만 입시에 관해서는 해당사항이 없으니 끈을 놓은지도 오래돼서 자유학기제, 고교학점제, 학종 등 입시 관련 생소한 단어들이 신조어보다 더 어렵고 가늠이 힘들 지경이다. 나야 해당사항이 없으니 입시제도가 아무리 바뀌어도 관심분야 밖이지만 학생, 교사, 학부모들에게 교과 공부만큼이나 입시에 관한 정보 수집과 대비가 중요한 관심분야이자 과제일 것이다. 


 "아이에게 물고기를 잡아주기보다는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는 말이 이제는 통하지 않는다.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주는 동안 다른 사람들이 더 좋은 기술로 다 잡아가니 스스로 잡는 법을 계속 개발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 하는 시대가 왔다. 교육은 변화에 발맞춰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물고기 잡는 법을 개발할 수 있는 역량을 스스로 계발할 수 있도록 바탕을 깔아줘야 한다. 그래서 고기 잡는 방법을 말해주지 말고 바다와 낚시를 보여주어 스스로 고기를 잡고 싶게 만들어야 한다. p.225


 서울대학교 입학사정관, 2015 개정 교육과정 연구위원,  교육과정심의회 위원이자 공부 예능 <공부가 머니?>의 전문가 패널, 그 유명한 SKY캐슬의 김주영 쓰앵님의 실존 모델로 유명한 진동섭 입시 전문가는 『입시설계, 초등부터 시작하라』를 통해 입시전쟁을 겪고 있는 학생과 학부모들에게 대입전형의 로드맵을 수립해주고 그에 대한 정확한 설명과 분석으로 개개인에 맞는 공부법과 입시 과정을 세울 수 있도록 코디해준다. 전문가가 현재의 대한민국 입시전형은 물론이고 앞으로의 전형까지 철저하고 정확하게 분석하고 대비해주니(현재 초등학교 5학년들이 입시를 치러야 할 2028년까지 입시전형을 꼼꼼하게 짚어준다.) 입시를 치러야 할 초, 중, 고등학생이 있는 집이라면 학생과 학부모 모두 챙겨봐야 할 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각종 공부법에 관한 책은 많지만 현재 우리 사회의 입시전형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은 드물다. 더군다나 입시전형에 관해 해당사항이 없는 입장에서 책을 처음 받았을 땐 심드렁했던 것도 사실이다. 오히려 입시전형보다 SKY캐슬 김주영 쓰앵님의 실존 모델이 되기까지 작가의 개인적인 경험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줬더라면 더 많은 층의 독자를 수용할 수 있었을 거란 아쉬움도 들었지만 입시 준비, 대학 지원에 관한 다양한 학생들의 사례를 들려주며 기대 이상의 재미와 정보도 분명히 전해주었다. 입시 문제와 해당사항이 전혀 없는 나에게도 흥미를 자극하는 부분들이 많았는데 자녀의 교육을 위해 혼란스럽고 어려운 입시 문제로 머리 아픈 학부모들에게 방대하고 정확한 맞춤형 자료와 컨설팅이 얼마나 큰 만족감을 전해줄지는 일일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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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노센트 와이프
에이미 로이드 지음, 김지선 옮김 / 흐름출판 / 2020년 4월
평점 :
절판


"영국에는 댁이 데이트할 만한 살인마가 없는 모양이지?"

마을에 어린 소녀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소녀들을 죽인 살인죄로 사형수로 복역 중인 데니스.

데니스의 결백을 믿으며 그와 사랑에 빠져 모든 것을 버리고 결혼을 감행하는 서맨사(샘).

데니스의 무죄가 입증되어 사면 받고 행복한 나날들을 꿈꾸지만 샘의 일상은 불안과 미묘한 공포로 잠식되어 편집증적인 망상에 휩싸이게 된다.

정말 소녀들의 실종과 데니스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일까?

샘을 불안하게 만드는 감정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그건 망상이야. 넌 그 남자에 관해 아무것도 몰라."

데니스 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보고 그의 결백을 믿으며 온라인 모임에 빠진 샘은 데니스와 사랑에 빠져 직장과 가족, 고향을 버리고 그와 결혼을 감행한다. 사건의 진범이 나타나 데니스는 무죄를 입증받고 사면되지만 교도소 밖에서의 데니스는 샘이 사랑에 빠졌던 교도소 안의 사형수 데니스와는 다른 사람이다. 데니스의 사면과 동시에 소설의 공기는 180도 달라지고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소설 초반 샘이 데니스에 빠져 모든 것을 버리고 사랑을 쟁취하는 모습이 공감 되지 않았는데 사면 이후 180도 달라진 데니스의 모습에 소설은 본격적인 '언니 그 남자 만나지 마요'의 흐름을 타며 긴장감과 흡인력을 높여준다. 주인공의 심리에 공감이 가지 않아 감정이입이 힘들지만 사건과 인물들에 대한 의문이 끊임없이 증폭되면서 소설의 결말을 향해 빠르게 책장이 넘어간다. 


 샘은 옛날에 키웠던 고양이 타이거를 떠올렸다. 타이거는 몇 번이나 사라졌고, 하루가 지나면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나타났다. 그때마다 얼마나 걱정을 했는지. 샘은 고양이를 걱정하는 게 싫었고, 걱정하게 만드는 고양이를 원망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건 너무 힘든 일이었다. 독립적인 삶과 독립적인 생각이 있는 존재를. 마음 내키는 대로 오고 갈 수 있는 존재를. 사랑은 샘을 힘들게 만들었다. 샘은 고양이가 죽었을 때 슬프기보다 안도감을 느꼈다. 샘을 힘들게 하는 존재가 더 이상 샘을 괴롭히지 못할 테니까. 사랑을 멈출 수 있을 테니까. 이제까지 녀석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는데 샘은 새삼 놀랐다. 벌써부터 샘은 그 좁은 공간 밑에 있는 고양이와 새끼들을 걱정하기 시작했다. 추울까? 비가 오면 어쩌지? 라쿤이 다시 오면? 라쿤이 새끼 고양이를 잡아가면 어쩌지? p.249-250


작가 에이미 로이드는 『이노센트 와이프』를 통해 미스터리 서스펜스로 긴장감 있는 스토리를 탄탄하게 완성하여 장르문학으로써의 재미를 확실히 전해주는 것뿐만 아니라 흡인력 있는 서사 속에서 학대 아동에 대한 사회적 문제, 페미니즘, 백인의 입장에서 역차별 당하는 인종차별 문제, 편견 등을 다루며 현대 사회가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의식들을 묵직하게 다루며 작가만의 색채를 제대로 구현해냈다. 데니스를 아는 이웃들은 거의 하나같이 그를 살인범으로 지목하고 동의하지만 그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이 다큐멘터리를 보고 그를 믿고 무죄를 지지하고 응원하는 것 또한 담담하면서도 묵직하게 풀어내 장르소설의 재미 그 이상을 전해준다. 


 샘은 속이 울렁거렸다. 데니스가 담배를 한 모금 더 빨아들이는 동안 샘이 생각한 것은 거미의 단말마보다는 데니스가 담배를 빨아들일 때 기침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혹시 데니스가 평생 담배를 피워왔는데 나만 몰랐던 건 아닐까. 불현듯 외톨이가 된 기분이 강렬하게 느껴졌다. 마치 샘과 결혼한 남자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고, 자다 깨보니 남의 삶을 살고 있는 것 같았다. 줄거리를 알지 못하는 이야기 한복판에 들어온 느낌이었다. p.339


『이노센트 와이프』는 흐름출판에서 처음 출간하는 소설이라 반가움과 기대감이 남달랐다. 스테디셀러를 많이 보유하고 있는 출판사에서 처음 출간하는 소설이 미스터리 서스펜스 장르라 하니 강력한 흡인력을 가진 스릴러 작품들을 출간해 기존의 출판사 색과는 또 다른 색을 확실히 발산하며 스릴러 맛집으로도 불리는 다른 출판사의 사례가 떠오르며 그만큼 기대치가 컸던 것도 사실이다. 거기에 <나를 찾아줘> 제작사의 영화화가 확정되었다고 하는데 인물들의 세밀한 심리묘사, 독자들을 자극하는 공포심, 작가가 다룬 사회 문제들이 스크린에서 어떻게 펼쳐질지 궁금해진다. 


개인적으로 '머리카락에만 흥분하는 남자, 그 남자를 완벽하게 사랑하는 여자'라는 홍보문구에 그대로 낚여 영화 <미녀 삼총사 2>에서 머리카락에 집착하는 변태남을 떠올리며 데니스가 머리카락에 흥분하는 장면이 나오길 기다리기도 했는데 이런 바보 같은 생각은 나만 가진 소설의 재미와 추억이 되었다. 샘은 데니스가 건네는 녹차를 마시며 녹차가 자신의 속을 정화해주고 자신은 정화될 필요가 있다고 느끼는데 『이노센트 와이프』의 독서 역시 그러했다. 소설을 읽고 난 후 나 역시 정화될 필요가 있었고 속을 정화해 줄 녹차 한 잔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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