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탬버린 - 김유담 소설집
김유담 지음 / 창비 / 2020년 3월
평점 :
김유담 작가를 처음으로 알게 해준 작품은 <창작과비평> 2019년 봄호에 수록된 「이완의 자세」였다. 인생에서 스포트라이트를 아주 짧게 받고 변두리로 밀려난 인물들과 자식에 대한 기대와 사랑이 지긋지긋한 엄마들을 보며 한국 문단에서 기억해야 할 작가가 늘었다는 반가움을 가졌던 건 그러니까 딱 작년 이맘때였다. 문예지에서 신예 작가를 발견했을 때, 문예지에 실렸던 작품들이 모여 단행본으로 출간될 때의 반가움과 즐거움의 감정은 마치 문학계의 얼리어답터, 문학계의 인싸가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하는데 김유담 작가의 첫 소설집 『탬버린』의 출간 소식을 듣자마자 그런 감정들로 반가움과 즐거움을 동시에 느꼈다(반가움에 「이완의 자세」부터 읽어보려고 했는데 아쉽게도 이번 소설집엔 수록되어 있지 않았다).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지방 국립대나 교대 대신 서울에 있는 대학에 가겠다고 했을 때, 나는 가족들 모두에게 이기적이라는 비난을 들어야 했다. 남동생은 일찌감치 실업계 고등학교 진학을 결정한 후였다. 소설을, 가슴 벅차는 일을 꿈꾸는 게 죄는 아니지 않느냐고 항변하며 고집을 피울 때만 하더라도 삶이 이렇게까지 벅찰 줄은 몰랐다. 자신이 특별하다는 오만한 믿음 하나만이 유일한 자존심이었더 그 소녀는 소도시에서의 평범한 삶을 세상에서 가장 경멸했다. 평범하게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몰랐던, 이곳을 떠나기만 하면 제법 근사한 미래가 그려질 거라 믿었던, 나조차 미워하고 있는 나의 열일곱을 L은 따뜻하게 기억해주었다. 자신만만하게 떠나놓고 이년도 되지 않아 풀 죽은 모습으로 다시 고향에 내려온 것에 대해서도 그는 잘했다고, 스스로를 다치게 만들면서까지 이뤄야 하는 건 아무것도 없다고 다독여준 사람이었다. p.67-68 「공설운동장」
「핀 캐리」의 인숙, 「공설운동장」의 하경, 「우리가 이웃하던 시간이 지나고」의 성희와 영주, 「탬버린」의 은수와 송이, 「멀고도 가벼운」의 지연 그리고 보배 이모, 「가져도 되는」의 승규와 인희 부부, 「두고두고 후회」의 선재, 「영국산 찻잔이 있는 집」의 피티와 소냐. 이들은 각자의 작품 속에서 인생을 제대로 헤매고 열패감을 맛보는데 마치 부모에게 같은 유전자를 물려받은 자매처럼 여덟 편의 작품이 닮아있음을 느끼게 된다. 그래도 인생을 살아가는데 적극적이고 열정적이었던 딸들이 닮아 있는 것처럼 과거의 가부장적인 권위가 무능함으로 꺾여 가족들 앞에서 힘을 잃고 약한 모습을 보이고 마는 아버지의 모습들도 많이 닮아 있다. 여덟 편의 단편들이 수록되어 있는 『탬버린』 속에는 지긋지긋한 유년시절과 고향을 도망치듯 떠나 서울로 도피한 사람들이 많다. 그리고 당연히 서울은 그들을 따뜻하게 품어주거나 안식처가 되어주는 도시가 되어주지 못한다. 마치 인생에서 패배 선언을 당한 듯 서울살이에 실패하고 다시 고향으로 내려가는 인물들도 있다. 룸으로 안내받지 못하고 홀에 앉아야 하는 사람들, 자신의 기분 따위를 돌보며 살 여력이 없는 사람들, 학업을 이어가고 생활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치는 사람들, 삶이 고단하고 버겁고 징글맞은 사람들을 이야기를 건조하고 먹먹하게 묘사하는데 김유담 작가는 그야말로 독보적인 존재감을 드러낸다.
발표 주제가 정리되지 않는다는 핑계로 학회 등록을 포기했다. 학회보다는 잠을 못 잘 정도로 괴로운 치통을 해결하는 것이 더 급했다. 독일 학회를 포기한다고 해서 유학길까지 막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기회조차 잡지 못하는 내가 계속 공부를 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점점 지쳐가고 마모되어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충치는 감기나 위장병과는 달랐다. 그냥 둔다고 저절로 나아질 가능성 따위는 없었다. 지금의 내 상황도 참고 견딘다고 해서 좋아질 가능성이 없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석사가 끝나면 독일로 유학을 가겠다는 꿈은 이미 천천히 썩어가고 있었다. 남은 석사과정조차 제대로 끝낼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썩은 꿈을 도려낸 자리에 무엇을 채울 수 있을지 막막하기만 했다. p.101 「우리가 이웃하던 시간이 지나가고」
고향, 지방에 대한 지역적, 감성적 묘사와 인물들이 처한 상황에 대한 묘사, 감정묘사가 그야말로 생생하다. 지긋지긋한 고향을 도망치듯이 떠나고 고단하게 서울살이를 하다가 패배감으로 고향에 다시 내려와서 느끼는 그 감정들을 다 알 것 같고 이해할 것 같은가 하면 「탬버린」에서 노래방 회식 장면은 마치 진짜 사무실 회식에 참석한 것 같은 지나치게 사실적이고 생동감 넘치는 묘사에 짜증이 몰려오기도 한다. 「탬버린」의 반장, 「멀고도 가벼운」의 보배 이모의 경우처럼 주인공 보다 더 마음이 가고 신경이 쓰이는 인물에 대한 묘사에선 김유담 작가의 따뜻함과 세심함이 보이기도 한다. 삶의 고단함, 지긋지긋함, 징글맞음이 마치 밀착된 것처럼 생생하고 뚜렷한데 여지를 남겨두는 마무리에선 빈자리가 크게 느껴지며 공허함이 몰려온다. 어쩜 수많은 인물들 중 현재 행복한 사람이 한 명도 없을까? 독서가 끝나고도 계속 신경이 쓰인다.
송과 나는 노래를 잘 부르는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매일 노래방에 다니다보니 나중에는 어지간한 노래는 수준급으로 부를 수 있는 실력이 돼버렸다. 뭐든지 계속하다보면 잘하게 되는 법이라고, 탬버린을 잘 치는 비결을 묻는 내게 송이 답했다. 송은 노래 부르는 것보다 탬버린을 치며 춤추는 것을 좋아했다. 좋아하는 수준을 넘어 거의 미쳐 있었다. 쉬는 시간이면 송은 선생님들의 눈을 피해 학교 뒤뜰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탬버린을 흔들어댔다. 다섯 손가락의 마디마디를 번갈아 치는가 하면, 팔뚝, 엉덩이, 무릎 등을 이용해 소리를 내면서 느낌을 비교했다. 나는 뭐든지 지나치게 열심히 사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어떤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편이었는데,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탬버린을 잘 치기 위해서 손등과 손바닥에 멍이 들고 손가락에 물집이 잡힐 정도로 노력하는 송과는 그래도 잘 붙어다녔다. 음악 실기 시간에도 다루지 않는 탬버린 연주를 혼신의 힘을 다해 연습하는 송의 모습은, 연습보다는 연마에 가까워 보였다. 이상하게도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나도 모르게 몸속 깊은 곳에 숨겨둔 감정의 덩어리가 탬버린의 박자를 타고 올라오는 것 같았다. 그것은 일종의 흥(興)에 가까운 감정이었는데 마냥 신이 나지만은 않아서 묘한 형태의 한(恨)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나는 그것이 음악이 아니었다고 말하지 못하겠다. p.129-130 「탬버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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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흘 전 아버지의 소식을 전화로 전했을 때 엄마는 그럴 줄 알았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너는 그럼 그 인간이 오래 살 줄 알았니? 대체 뭘 기대한 거야.
나는 서둘러 전화를 끊고 싶었지만 엄마와 거의 반년만에 통화를 하게 된 것이라 참고 있는 중이었다.
엄마는 아버지한테 하고 싶은 말 없어?
이제 와서 무슨 말을 해. 잘 죽으라고 해.
이 말을 끝으로 엄마가 먼저 전화를 끊었다. 통화가 끝난 후 나는 한참이나 잘 죽는다는 게 어떤 걸까 곰곰이 생각했으나, 아무래도 그것이 내 아버지의 몫은 아닐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p.264 「두고두고 후회」
김유담 작가는 첫 소설집 『탬버린』 속 여덟 편의 소설들을 통해 자신의 색을 확실히 보여준다. 봄날과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샛노란 표지처럼 김유담이라는 소설의 장르가 쨍한 색을 발산하며 뚜렷한 개성과 풍부한 감성을 끊임없이 담아낸다. 특히 이제 막 첫 번째 소설집을 발표했는데 「이완의 자세」가 수록될 다음 소설집이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아는 감정을 격하게 공감하게 만들고 모르는 감정도 아는 것처럼 만들어주는 김유담 식의 마법 같은 소설 세계를 자주, 오래 만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