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기억을 보라 - 비통한 시대에 살아남은 자, 엘리 위젤과 함께한 수업
엘리 위젤.아리엘 버거 지음, 우진하 옮김 / 쌤앤파커스 / 2020년 4월
평점 :
절판




홀로코스트에 대해서라면 공부가 필요함을 많이 느끼고 있다. 역사적 사실을 제대로 알고, 생존자의 증언을 찾아보며 홀로코스트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고 역사를 되짚어보고 싶은 욕심은 예전부터 있었지만 말 그대로 오랜 시간 욕심으로만 그치고 있을 뿐이다. 오래전부터 아우슈비츠 생존자로 유명한 프리모 레비가 자신의 경험을 담은 유명 작품들을 읽어야 할 독서 목록에 올려두고 있지만 항상 다음으로 미뤄두고 다른 작품부터 챙겨 읽으며 어느새 오래 미뤄놓은 숙제가 돼버리기도 했다. 꽤 긴 시간을 그렇게 허비하고 있는 와중에 들려온 아리엘 버거가 지은 『나의 기억을 보라』의 출간 소식은 홀로코스트를 다룬다는 점에서 소재도 반가웠지만 홀로코스트 생존자이자 1986년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엘리 위젤이 생전 보스톤 대학에서 강의한 내용 필기와 수업시간 학생들과 대화하고 토론한 내용을 바탕으로 그의 제자이자 조교인 아리엘 버거가 지은 독특한 이력에 빠르게 끌렸다. 홀로코스트 생존자라는 이력에 대학 강의를 책으로 옮긴 작품이라 하니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떠오르기도 하면서 기대감과 다루는 이야기가 너무 높은 수준이라 내가 이해하기 어렵지 않을까 하는 노파심이 동시에 들었다.

 



책의 저자는 아리엘 버거지만 엘리 위젤의 강의를 바탕으로 엮어진 책이라 책날개에 작가 소개가 아닌 엘리 위젤의 소개가 먼저 되었다는 점부터 단번에 눈길을 사로잡는다. 『나의 기억을 보라』로 엘리 위젤을 처음 알게 됐는데 홀로코스트 생존자에서 홀로코스트 증언자가 되기까지의 과정과 노벨 평화상 수상자, 대학교수로 그의 일생은 소설이나 영화라 해도 믿을 정도라 본격적인 독서 전 책날개를 먼저 읽어봤을 뿐인데 벌써 흥미진진하다. 『나의 기억을 보라』는 문학적 색채가 짙은 제목에서부터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는데 원서 제목인 『Witness』 보다 한국어판 제목이 훨씬 마음에 들어 출판사에 대한 호감이 더불어 높아지기도 했다. 그러니까 본격적으로 책을 읽기도 전부터 반하게 되는 요소들이 넘치게 많았다.

 

 또 다른 강의에서 우리는 경건파에서 바라본 나치의 유대인 학살에 대한 이야기를 살펴보았다. 역사학자 야파 엘리아크가 수집해서 정리한 이야기였다. 제니퍼라는 대학원생이 위젤 교수에게 혹시 기적을 믿느냐고 물었다.

 "기적이라고요? 어느 정도는 믿고 또 어느 정도는 믿지 않는다고 대답해야 할까요? 기적과 관련된 모든 이야기에서, 나는 그런 기적이나 구원을 겪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모순적 모독을 느낍니다. 사실 나는 기적과 관련된 이야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특히나 특정한 때에 특정한 장소에서 일어난 기적 같은 것은요. 그러면 마치 하느님이 선택해서 자비를 베푼 것처럼 되는데, 나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입니다."

 강의 시간에, 특히 고대와 현대의 작가들이 쓴 비극이나 부조리 문학을 다룰 때 위젤 교수는 갑자기 묻곤 했다. "그런데 그런 모든 순간에 하느님은 어디에 계셨던 건가요?"

 때때로 그는 우스갯소리처럼 말하기도 했다. "이봐요, 하느님. 그게 정말인가요? 그런데 도대체 왜 그러셨나요?" 그가 그렇게 말할 때면 신앙심 깊은 몇몇 학생들이 신경질적으로 킥킥거렸고 다른 학생들은 그냥 웃곤 했다. p.166-167

 

작가의 이력과 더불어 흥미로운 요소들도 많았지만 개인적 취향과 달리 높은 진입장벽이나 수준에 대한 우려도 컸던 것이 사실이다. 각오를 단단히 한 우려만큼 책에서 전하는 이야기들 역시 넘치게 좋았다. '홀로코스트'에 대한 깊은 집중을 예상하고 기대했는데 강의와 강의 속 대화의 폭이 기대 이상으로 넓었다. 단순히 유명 대학 유명 강의의 노트, 강의 대화로 생각했던 예상과 달리 언어, 종교, 인종, 사상에 대한 사유가 꼬리에 꼬리를 문다. 정해진 양식의 커리큘럼이 아닌 무궁무진한 대화에서 현실과 이상을 넘나들어 지적 향유의 즐거움을 이끌어내면서 단순한 독서 이상의 재미와 폭넓은 관점을 보여준다. 문학적 색채가 짙은 한국어 버전 제목처럼 아리엘 버거가 엘리 위젤의 강의와 그 속에 오간 대화들을 촘촘하게 복원한 기법과 과장된 것처럼 느껴질 정도의 사례들은 마치 소설처럼 생동감 있고 탄탄하게 읽혀 재미를 더해주기도 한다.

 



책을 읽기 전 높은 기대감과 노파심이 동시에 들었지만 기대하고 겁먹은 이상으로 책이 좋았다. 원서 보다 더 좋은 한국어판 제목, 마치 소설이나 영화 시놉시스라 해도 믿을만한 엘리 위젤의 소개 글,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을 비롯한 유력 매체들의 추천사까지 본격적인 독서에 들어서기도 전부터 반하고 좋아할 만한 요소들이 넘치게 많았지만 본격적인 독서가 시작되면서 사고의 폭과 깊이를 넓혀주는 근사한 질문 법과 대화방식에 기대 이상으로 책이 좋았다. 다소 어려운 구간이 있었지만 작가나 엘리 위젤에 대한 원망이 아닌 나 자신의 수준 미달에 대한 원망으로 이어져 이런 책을 술술 읽으면서 지식적 깨달음과 감동의 여운을 이끌어 내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개인적 바람과 반성을 야무지게 가지게 되었다. 강의와 대화에 인용된 고전문학 작품을 다 읽어보고 싶다는 욕심과 함께 엘리 위젤을 일찍 알아 그의 작품들을 읽은 이후 『나의 기억을 보라』를 보았더라면 더 넓은 시야로 보이고 읽히는 것이 있을 텐데라는 아쉬움이 들었다. 그러니까 아는 만큼, 흡수해내는 만큼 재미와 깨달음을 톡톡히 얻을 책이라는 건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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