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기자
모치즈키 이소코 지음, 임경택 옮김 / 동아시아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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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쿄신문, 모치즈키입니다."

 "제대로 된 답변을 듣지 못했기 때문에 되풀이해서 묻고 있는 겁니다."


우리나라의 사회부 기자도 잘 모르는데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의 사회부 기자에게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것은 심은경 배우가 주연한 일본 영화 <신문기자>에 대한 다양한 이슈들 때문이었다. 언론자유가 줄어든 아베 정권의 언론 길들이기에 반기를 들고 스가 요시히데 관방 장관의 기자회견에서 다른 언론사들이 절대 하지 않는 질문을 던지고 제대로 된 대답을 받기 위해 집요하게 날선 질문들을 던져 화제를 모으고 일본 언론 자유의 상징이 된 도쿄신문 모치즈키 이소코 기자를 모티브로 그녀의 에세이와 동명인 영화를 제작하며 캐스팅부터 개봉까지 험난했던 과정들을 전해 들으며 느꼈던 감정은 가짜 뉴스와 기레기가 넘치는 한국 언론에는 왜 모치즈키 이소코와 같은 상징적인 인물이 없을까 하는 아쉬움이 대부분이었다. 


심은경 배우의 일본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수상으로 모치즈키 이소코에 대한 관심이 몰리면서 뒤늦게 그녀의 에세이 『신문기자』가 한국에도 출간됐다. 개인적으로 『신문기자』가 동아시아 출판사에서 출간된 것이 의외인듯하면서도 반가웠는데 작년 이맘때 김초엽 작가의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을 즐겁게 읽었던 기억 덕분이었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을 통해 앞으로 출판계에서 주목해야 할 작가를 소개받은 것처럼 반가웠었는데 이번 여름에도 『신문기자』를 통해 확실하게 기억해야 할 이름이 또 하나 늘어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침 아베 정권은 코로나 사태에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며 언론자유 탄압으로 또다시 논란이 되고 있었고 『신문기자』는 지금 시기에 꼭 읽어야 할 책이 되어버렸다.


 경제부 시절, 제2차 아베 정권 아래서 해금된 무기 수출 문제를 취재하던 때부터 패전 후 일본이 줄곧 지켜온 민주주의의 형태가 바뀌고 있다는 위기감을 느꼈다. 지금의 평화를 아이들에게 넘겨주기 위해서 일본이라는 나라가 지금 모습 그대로 나아가도 괜찮을지 수없이 고민했다. 

 인터뷰를 계속해가면서 마에카씨가 품은 생각에 점점 감정이입을 하기 시작했다. 내 안에서 형용할 수 없는 생각들이 이어졌다. 이렇게 되면 이제부터는 나의 차례이다. 위기감을 느끼며 머리가 뜨거워질 때, 내 생각을 공유하고 글로 정리해야만 비로소 침착해진다.

 이튿날, 인터뷰의 핵심인 내부 문서 관련 내용을 조간 1면에 실어 내보냈고, 그다음 날 조간에는 주요한 1문 1답 인터뷰를 크게 게재했다. 

 마지막에는 마에카와 씨가 했던 말로 끝을 맺었다.

 '내 행동에 정치적인 의도가 숨어 있지 않을까 하는 의견도 있겠지만, 나는 단지 돈키호테일 뿐이다.' p.146-147


부모님의 영향을 받아 중학교 2학년 때 포토저널리스트 요시다 루이코의 책을 읽고 자극을 받아 기자의 꿈을 키워나가는 어렸을 적 이야기부터 동경해왔던 신문기자가 되어서 자신만의 취재원을 만들고 직업적 사명감, 긍지를 가지며 사건을 취재하며 그 과정에서 즐거움과 성취감을 느끼게 되는 과정들을 따라 읽어가다 보면 모치즈키 이소코의 넘치는 노력과 열정이 어느새 나에게도 전염된 것 같다. 유학에 오르기 위한 노력의 과정들을 따라 읽으며 그녀의 열정의 에너지에 감동을 받다가 발복을 삐어 목발을 짚고 떠난 여행에서 다이빙을 하다가 머리를 크게 다친 일화를 보곤 남다른 넘치는 에너지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무엇을 하든 열심히 열정적으로 하면서도 그 과정을 즐길 줄 아는 태도는 신문기자가 되어 취재를 하는 과정에서 빛을 보게 되는데 어린 시절부터 동경해왔던 기자라는 직업에 대한 긍지와 모치즈키 아소코만의 열정과 즐길 줄 아는 태도가 취재 현장에서 느끼는 일본 언론의 한계에 맞서 언론의 자살행위를 까발리는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었을 것이다.  한국에서도 이슈가 되었던 스가 요시히데 관방 장관의 기자회견 설전을 모치즈키 이소코가 들려주는 이야기로 흥미롭게 읽어가지만 당시의 생생한 현장 분위기보다 기자로서의 고민과 사명감이 크게 읽힌다. 


 질문에 대한 충분한 답이 되지 못한다고 느꼈기 때문에 다시 물어야 했다. 끈질기게 질문을 반복하는 것은 사회부에서 오랜 시간 취재하며 단련된 근성이다. p.173


모치즈키 이소코는 『신문기자』를 통해 스기 요시히데 관방 장관과의 설전뿐만 아니라 이직에 대한 고민, 취재 과정에서의 실수, 동료 기자와의 연대 혹은 외면, 기자로서 총체적으로 사건을 바라보는 시야 등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일본 유명 저널리스트의 미투 의혹을 다루며 피해 여성을 취재하는 과정에서의 기자로서의 태도와 고민이었다. 그 아름다운 모습을 보며 씁쓸하게도 세월호 사건을 취재하기 위해 단원고에 모였던 기자들이 생각났다. 본인의 장래희망이 기자였다는 학생은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기본적인 양심과 신념을 버리고 취재하는 기자들을 보며 장래희망이 바뀌었다고 고백했다. 그 고백은 '직업병에 걸린 기자분들께'로 시작했다. 기자의 직업병이 직업윤리를 져버린 채 취재 경쟁을 하는 것이어서는 안된다. 모치즈키 이소코가 요시다 루이코의 책을 읽고 감명받아 기자가 됐듯이 모치즈키 이소코의 모습을 보고 기자의 꿈을 키우는 '모치즈키 이소코 키드'들이 언론사를 누비는 날들도 곧 올 것이다. 우리에게도 모치즈키 이소코와 같은 모델이 있었으면, 모치즈키 이소코 키드가 많이 자라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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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시툰 : 용기 있게, 가볍게 마음 시툰
김성라 지음, 박성우 시 선정 / 창비교육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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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툰과 시가 만나 시툰이라는 새로운 장르가 탄생했다. 시를 어려워하고 시에 대한 엄살이 유독 큰 편이지만 시와 웹툰의 만남이라고 하니 관심이 커질 수밖에 없다. 새로운 장르에 대한 반가움과 더불어 신선한 기획은 기대감을 높여주었는데 '마음 시툰'이라는 시리즈로 박성우 시인이 시를 선정하고 앵무, 김성라 작가가 시를 웹툰으로 재해석한 작품이 각각  『마음 시툰 : 너무 애쓰지 말고』와 『마음 시툰 : 용기 있게, 가볍게』로 동시에 출간됐다. '너무 애쓰지 말고'도 내 이야기인 것 같고 '용기 있게, 가볍게'도 내 이야기인 것 같다. 어떤 시들이, 어떤 뭉클한 웹툰이 평소와 달리 쉽게 다가와 줄지 기대가 되고 궁금해진다.

 



마음 시툰 시리즈 중 먼저 만나본 작품은 박성우 시인과 김성라 작가의 『마음 시툰 : 용기 있게, 가볍게』였다. 두 작가의 말을 시작으로 김성라 작가의 동글동글하고 귀여운 그림체와 이야기의 웹툰과 박성우 시인이 선정한 시가 이어지는데 평소 아무리 시를 어려워해도 이건 반할 수밖에 없는 조합이다. 말랑말랑한 동화를 보면서 마치 마음이 정화되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되는데 이어지는 시를 음미하면서 잊고 지냈던 추억들이 떠오르며 예상 못 한 선물을 안겨주었다.

 



황동규 시인의 「즐거운 편지」를 오랜만에 다시 만나며 시를 처음 알게 해주었던 영화 <편지>가 생각난다. 백석 시인의 「흰 바람벽이 있어」 속에서 당나귀가 등장하자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가 떠오르며 백석 시인과 당나귀의 연관관계가 궁금해지기도 한다. 며칠 전 허수경 시인의 생일에 맞춰 유고 산문집이 출간됐다는 소식이 들려왔는데 「글로벌 블루스 2009」를 보자 또다시 마음이 찡해지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김성라 작가의 그림과 에피소드가 안겨주는 아기자기함과 소소한 행복들은 예전 신드롬을 일으켰던 심승현 작가의 『파페포포 메모리즈』가 떠오르면서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과거의 풋풋했던 나를 추억하게 해주었다. 

 



나에게 있어서 시는 마치 열리지 않는 문과도 같았는데 『마음 시툰 : 용기 있게, 가볍게』를 통해 문이 조금은 열리고 틈을 본 것 같은 느낌을 전해주었다. 김성라 작가의 웹툰을 다시 찾아보게 되는가 하면 박성우 시인이 선택한 시에 오랫동안 눈길이 머물기도 한다. 시를 선택한 시인의 코멘트가 더해져도 좋을 것 같고 박성우 시인과 앵무 작가의 『마음 시툰 : 너무 애쓰지 말고』에 대한 기대감도 커진다. 시리즈가 앞으로 계속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가져보게 된다.

 

덕분에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과거를 무수히 회상했고 떠오르는 사람들도 많았다. 모두가 평안했으면 좋겠다. 

나는 책을 읽는 내내 말랑말랑했고 당분간은 센치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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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타 전략 - 완벽함에 목매지 말고 ‘페어링’에 집중하라!
임춘성 지음 / 쌤앤파커스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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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타는 움직이는 무엇입니다. 마치 시계추처럼, 진동자처럼, 나와 너, 당신과 당신의 그대, 우리와 너희, 그리고 기업과 고객 사이에서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무엇입니다. 역동적으로 움직이며, '양편을 끊임없이, 끊김 없이 이어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끊임없고ceaseless 끊김 없는seamless 관계'. '끊끊한 관계'가 궁극적으로 베타가 지향하는 것입니다. 끊이지 않게, 끊기지 않게, 양편의 관계를 꺼지지 않는 불꽃으로, 살아 있는 연결로 만들어주는 무엇이 베타입니다. p.39 


임춘성 교수의 『베타 전략』이 관심을 끌고 호기심을 품게 했던 건 산업공학과 교수가 들려주는 비즈니스, 경영서라는 독특한 이력 때문이었다. 앞서 전작 『매개하라』로 인문, 사회, 경영, 기술을 아우르는 넓은 스펙트럼으로 눈도장을 확실히 찍었던 임춘성 교수가 시대의 변화와 현재 경영 현장에 맞은 베타 전략을 세분화하고 사례들을 들려주고 정리하고 활용을 도와주는 책이라 하니 기대감이 컸던 것도 사실이다. '완벽함에 목매지 말고 '페어링'에 집중하라!'라는 부제가 동의가 되면서 작가가 제시하는 전략들에 대한 궁금증이 커졌는데 타고난 스토리텔러인 저자가 쉽고 재밌게 알려주는 이야기 방식에 『베타 전략』과 쉽고 빠르게 페어링 될 수 있었다.


 책을 쓸 때도 그 점을 염두에 둡니다. 어떤 독자는 제 책이 못마땅하다고 할 수도 있고, 또 어떤 독자는 독특한 책이라며 칭찬할 수도 있습니다. 경제경영이나 과학기술이라는 진지한 논지에 얕은 인문, 사회적 소양을 끌어다 쓰니 그런 모양입니다. 그래도 적어도 취지만큼은, 독자들의 독서세계를 존중하여 각자의 지식세상을 스스로 펼치게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고자 하는 마음이라는 걸 알아주었으면 합니다. 스스로 따져보고, 통찰해보고, 자신의 경우에 대입하고, 적용해보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갑자기 속이 시원해졌으니, 힘내서 중요한 대목으로 넘어가보겠습니다. p.138




 출근길에 한두 번 본 게 아닙니다. '결혼, 답을 듀오', '결혼해 듀오', '결혼 인연, 만나게 해 듀오', '결혼의 인연, 꽉 잡아 듀오', 그리고 낯간지러운 '자기야, 결혼해 듀오'까지…. 결혼했으니 망정이지, 버스를 도배한 광고 덕분에 하마터면 듀오에 찾아갈 뻔했습니다. p.206


그야말로 신선한 충격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사무엘과 사만다의 스토리로 시작되는 것도 신선한 충격이고 1. 완벽함도 잊고, 2. 훌륭함도 잊고, 3. 오직 순간의 진실을 이야기하는 접근법 또한 신선한 충격이다. 이해를 쉽게 도와주면서 경영서가 이렇게나 빠른 속도로 읽힌다는 것도 신선한 충격인데 적재적소에 유머를 발휘하는 고도의 내공은 차원이 다른 신선한 충격이 아닐 수 없다. 질문을 건네고, 적절한 예시를 들려주고, 반문하고, 되물으며 이야기를 이끌어가고 정리해가는 방식은 마치 임춘성 교수의 강연에 참석하고 있는 듯한 착각에 들게 한다.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는 폭넓은 스펙트럼과 뛰어난 스토리텔링의 방식은 임춘성 교수만이 가진 작가로서의 강점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페어링'은 정말로 중요한 개념입니다. 베타 전략의 핵심이자 '순간의 진실'에 대한 핵심 중의 상당 부분이 이 한 단어로 표현됩니다. 기다리지 않게 하고, 충족되지 않게 하고, 그리고 순간 되지도 않게 합니다. 페어링하면 그렇게 됩니다. 존재인 '페어'가 아니고 관계인 '페어링'을 해야 합니다. 그것도 꾸준히 여러 방식으로 말입니다. 오죽했으면 아 책의 제목인 '베타 전략'을 '페어링 전략'으로 할까도 고민했을 정도입니다. p.205


임춘성 교수의 『베타 전략』은 기업과 고객의 관계와 서비스에 관한 넓고 얕은 지식과 전략, 솔루션을 제시함으로써 시대의 변화, 경영 환경의 변화에 관한 진입장벽을 낮춰주고 한눈에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준다. 변화를 어떻게 쫓아가고 대응해 갈 것인지 깊게 접근해나가는 것은 독자들의 몫으로 남겨둔다. 독서가 끝나도 『베타 전략』과의 페어링은 끊어지지 않는다. 


 관계에 기반한 전개, 관계 중심의 관점, 관계에 역점을 둔 전략이 절실합니다. 어차피 절대적인 존재는 없고, 절대적으로 변하지 않는 존재도 없습니다. 존재의 절대적인 특성은 없습니다. 절대적인 존재, 절대적인 존재의 특성으로 세상을 말하고 전략을 논하기는 상대적으로 쉽습니다. 바로 그 편이성, 이론이라 이름 붙이려면 확보해야 할 그 보편성 때문에 존재 중심의 전략이 널리 보급되었겠지요. p.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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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 클로이
마르크 레비 지음, 이원희 옮김 / 작가정신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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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 레비의 신작 『그녀, 클로이』의 출간 소식과 그에 따른 여러 홍보 포스트를 보면서 제일 눈에 들어왔던 것은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읽히는 프랑스 작가', '전 세계 독자층의 열렬한 지지를 받는 프랑스 소설가' 등의 작가 마르크 레비를 향한 화려한 수식어였다. 프랑스 소설가를 생각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작가가 마르크 레비는 아니었기에 세계 독서시장과 한국 독서시장의 온도 차이를 느끼며 의아한 마음 이면엔 『그녀, 클로이』를 통해 이번 기회에 나도 마르크 레비를 열렬히 지지하고 많이 읽는 독자가 되고 싶은 야무진 목표가 있었다.

"중요한 약속이라는 건 뭔데요? 실례가 안 된다면."

"어떤 배역을 따기 위한 캐스팅. 그러는 당신은 28번가 쪽에 무슨 일로 가는데요?"

"나도 캐스팅이죠, 투자자들을 만나러 가는 거니까."

"금융계에서 일해요?"

"그 배역은 텔레비전, 아니면 영화?"

"인도인들과 우리에게 이런 공통점이 있는지 몰랐네요."

"우리?"

"나는 유대인이에요. 무신론자지만 유대인이죠."

"우리에게 어떤 공통점이 있는데요?"

"질문을 다른 질문으로 대답하는 것."

"인도인과 유대인이라서 그러는 건 아니잖아요?"

"그렇게 대꾸하는 것이 바로 내 말이 맞다고 인정하는 거라고요!" p.47-48




디팍에게는 두 가지 종교가 있다. 힌두교와 종교적 신념에 가까운 과묵.

인도에서 촉망받는 크라켓 유망주였지만 인도의 카스트제도 때문에 랄리와 미국으로 이주해 수동식 엘리베이터가 설치된 아파트에 투철한 직업정신과 자부심을 가지고 일하는 엘리베이터 승무원 디팍. 뭄바이 팔레스호텔 대주주이자 데이팅어플 사업 확장을 위한 투자를 받기 위해 고모 랄리의 재정보증을 받고 뉴욕에 도착한 산지. 보스턴 마라톤 테러로 다리를 잃은 이후 휠체어와 한 몸이 되어 홀로서기를 시작한 클로이. 이들의 이야기가 맨허튼 5번가 12번지 9층짜리 석조 건물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디팍과 2인 1조로 아파트 수동식 엘리베이터를 운전하는 리베라가 계단에서 추락하면서 다리를 다쳐 일을 하지 못하게 되고 아파트 입주민들의 불편이 이어지자 임시 엘리베이터 승무원으로 산지가 투입된다.


"잠깐." 랄리는 핸드백에 손을 넣으면서 말했다. 

그녀는 지갑에서 25센트 동전 한 개를 꺼내서 산지의 손에 쥐어주고 손가락을 오므려주었다.

"주먹을 뒤집은 다음 손을 펴보렴."

산지는 고모가 하라는 대로 했고, 동전이 발에 떨어졌다. 

"네가 죽는 날 그게 네 전 재산일 거다. "

그렇게 말하고 랄리는 자리를 떴다. p.135​


"코끼리를 타고 나타났어야 했나……. 편견은 깨지지 않는군."

수많은 영화, 소설의 주무대가 되었던 익숙한 뉴욕을 배경으로 소설이 전개되지만 수동식 엘리베이터, 인도의 카스트제도와 인도인들을 향한 수많은 편견들, 자신을 향한 시선을 버티며 홀로서기 해나가는 장애인의 이야기는 익숙한 소재가 아니라서 신선하게 읽힌다. 디팍과 랄리 부부, 클로이와 산지를 비롯하여 개성 넘치는 입주민들과 좌충우돌 펼쳐지는 사건사고들이 호기심을 자극하며 빠르게 책장이 넘어가지만 마르크 레비가 『그녀, 클로이』에서 우리 사회에 만연한 차별과 편견을 인종, 장애, 신분, 세대 차이 등을 작정하고 보여주면서 묵직한 메시지를 전해준다. 과거 수많은 이민자들이 꿈꿨던 기회의 땅 미국에서, 그것도 뉴요커들의 도시 뉴욕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는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것처럼 재미와 감동을 안겨주며 읽혔는데 영화화해도 괜찮을 거란 생각이 책을 읽어가는 내내 들었다. 매력적인 인물들과 사건의 이야기가 할리우드에서 제작되면 좋을까 발리우드에서 제작되면 좋을까 혼자 고민을 해보기도 했는데 마르크 레비의 동생 로렌느 레비가 영화감독이라고 하니 프랑스 영화로 만들어져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러브스토리의 시작에는 이상한 패러독스가 있다. 두려움 때문에 머릿속에 가득 차 있는 말을 선뜻 꺼내지 못한다. 모든 걸 다 주고 싶으면서도 행복이 깨질까 감정을 아낀다. 싹트는 사랑은 깨지기 쉬운 만큼 무모하기도 하다. p.290

"이토록 터무니없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네요. 완전히 미치지 않고서야."

"완전히 미치지 않으려면 약간은 미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나는."

책을 읽는 동안 한국에선 경비원 폭행 뉴스가, 미국에선 흑인 사망 시위 뉴스로 전 세계가 분노하며 사회의 변화를 촉구했다. 마르크 레비가 『그녀, 클로이』를 통해 건드리고 경각심을 일깨우는 차별과 편견에 대한 현대사회의 병적인 문제들을 되짚어보면 『그녀, 클로이』는 재밌고 빠르게 읽히지만 확실히 '재미'보다는 '의미'가 크게 읽히는 소설이다. 작가에 대한 사전 정보 없이 읽었더라면 당연히 여성 작가가 썼을 거라 생각했을 정도로 마르크 레비는 『그녀, 클로이』 속에서 매력적인 여성 캐릭터들을 중심으로 사랑스러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원서 디자인을 그대로 가져온 표지를 살펴보면 책의 제목보다 작가의 이름이 더 크게 눈에 띄는데 이는 마치 마르크 레비라는 브랜드의 인지도, 파급력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 같다. 그의 작품들을 더 읽고 싶고 영화화된 『그녀, 클로이』를 만나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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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의 탄생 - 뇌과학으로 풀어내는 매혹적인 스토리의 원칙
윌 스토 지음, 문희경 옮김 / 흐름출판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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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텔링에 관한 고민과 연구는 더 이상 창작자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스토리텔링의 필요성, 중요성은 거의 모든 분야에서 강조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스토리텔링에 관한 책들과 콘텐츠들이 있지만 윌 스토의 『이야기의 탄생』은 스토리의 원칙을 뇌과학으로 풀어낸다는 흥미로운 소재로 뚜렷한 차별점을 둔다. 스토리텔링에 관한 기법들을 흥미롭게 나열한 책인 줄 알고 기대했는데 스토리텔링과 뇌과학이 만나 기대 이상, 상상이상의 재미와 지적 자극을 전해준다. 윌 스토는 서론에서 이 책이 스토리텔링에는 관심이 없어도 인간 조건의 과학에는 호기심을 느끼는 모든 사람의 관심을 끌길 바란다고 고백하지만 스토리텔링에 관심이 없고 과학에도 호기심을 느끼지 못하는 나의 관심을 완전히 끌어냈다. 

 

 은유와 은유의 사촌격인 직유는 텍스트에서 한두 가지 방식으로 작동한다. 예를 들어 마이클 커닝햄의 『세상 끝의 사랑』에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그녀는 낡은 비닐봉지를 씻어서 빨래줄에 걸어 말린다. 알뜰하고 축 처진 해파리가 햇빛 속에 줄줄이 떠 있다." 이 문장의 은유는 기본적으로 정보의 격차를 빌리는 식으로 작동한다. 우선 우리의 뇌에 이런 질문을 던진다. 비닐봉지가 어떻게 해파리가 될 수 있지? 우리는 이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 그 장면을 상상한다. 커닝햄은 우리가 그의 이야기에 관해 더 생생한 모형을 만들도록 유도한 것이다.

 마거릿 미첼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시각적인 장면이 아니라 개념을 이해시키기 위해 은유를 사용한다. "그의 수수께끼 같은 면이 자물쇠도 없고 열쇠도 없는 문처럼 그녀의 호기심을 끌어냈다." p.69

 

기자이자 소설가인 저자 윌 스토가 매력적인 인물과 이야기를 구성하는 방법들 속에서 뇌가 어떻게 작동하고 인식하는지 알려주는 방식에는 막힘이 없다(당연히 저자가 과학자인 줄 알았던 몹쓸 편견 덕분에 작가의 정체가 마치 반전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소재의 신선함에 대한 흥미와는 별개로 책이 어렵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와는 달리 쉽고 재밌게 거침없이 읽힌다, 소설, 영화, 드라마 등의 다양한 예시들이 쉼 없이 나열되며 이해를 도와주고 지적 유희를 안겨주는 윌 스토의 이야기 방식은 책을 읽어가는 내내 인상적이다. 작가가 엄청난 스토리텔러임을 책을 통해 증명하고 있는데 동의가 되고 더불어 꼬리에 꼬리를 무는 무수한 작품들의 예시와 비유에서 작가의 문화적 소양에 대한 감탄으로 이어진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작품들을 볼 때면 남다른 상상력에 감탄하며 그의 뇌가 궁금해지곤 했는데 『이야기의 탄생』을 읽으면서 뇌과학과 스토리텔링을 결부시켜 이토록 흥미로운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윌 스토의 뇌가 궁금해지기도 했다. 소설가로 그는 어떤 인물들을 창조해내고 어떤 서사와 플롯을 구축하는지도 궁금해진다.




예전 <알쓸신잡>에서 김영하 작가가 시나리오를 쓰는데 기본적인 원칙이 있는데 가끔 신인 작가들이 원칙을 지키지 않아 잘 안되는 경우가 있다고 말했었다. 당시엔 그 말이 쉽게 이해는 가지 않아도 머릿속에 오래 남아 있었는데 『이야기의 탄생』에서 들려주는 인물의 성격, 이야기의 플롯과 질문에 관한 과정의 세세한 탐구를 지켜보며 스토리텔링의 이론과 원칙 그리고 그에 관한 적용 방법이 눈에 들어왔다. 


 이야기가 주는 교훈은 우리가 얼마나 틀렸는지 우리 자신은 전혀 모른다는 데 있다. 우리의 신경 모형에서 취약한 부분을 발견하는 것은 그 부분의 외침에 길을 기울인다는 뜻인데, 우리가 비이성적으로 감정적이고 일방적일 때는 대개 우리 안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보호해야 할 부분을 넘겨주는 때이다. 이 지점에서 세계에 대한 우리의 지각이 가장 왜곡되고 예민해진다. 이런 결함을 마주하고 고쳐가는 일은 평생의 싸움이 된다. 이야기의 도전을 받아들이고 이기는 것이 영웅이 되는 길이다. p.265


서평 블로그를 운영하면서 글쓰기에 관심을 가지고 있지만 엄밀히 말해 내가 지향하는 글쓰기가 스토리텔링은 아니다. 오히려 글쓰기에 관해 추구하는 방향과 개인적 고민은 사실적 글쓰기와 글을 쓰는 속도에 관한 것들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스토리텔링도 과학도 관심분야가 아닌 나에게 윌 스토의 『이야기의 탄생』은 딱 내 책이었다. 영국의 배우이자 희극인인 로버트웹의 추천사처럼 『이야기의 탄생』은 인간의 마음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적어도 자신의 마음이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관심이 있는 모두를 위한 책이다. 작가, 창작자들로 독자들을 한정하지 않고 모두가 감탄을 자아내며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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