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 클로이
마르크 레비 지음, 이원희 옮김 / 작가정신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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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 레비의 신작 『그녀, 클로이』의 출간 소식과 그에 따른 여러 홍보 포스트를 보면서 제일 눈에 들어왔던 것은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읽히는 프랑스 작가', '전 세계 독자층의 열렬한 지지를 받는 프랑스 소설가' 등의 작가 마르크 레비를 향한 화려한 수식어였다. 프랑스 소설가를 생각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작가가 마르크 레비는 아니었기에 세계 독서시장과 한국 독서시장의 온도 차이를 느끼며 의아한 마음 이면엔 『그녀, 클로이』를 통해 이번 기회에 나도 마르크 레비를 열렬히 지지하고 많이 읽는 독자가 되고 싶은 야무진 목표가 있었다.

"중요한 약속이라는 건 뭔데요? 실례가 안 된다면."

"어떤 배역을 따기 위한 캐스팅. 그러는 당신은 28번가 쪽에 무슨 일로 가는데요?"

"나도 캐스팅이죠, 투자자들을 만나러 가는 거니까."

"금융계에서 일해요?"

"그 배역은 텔레비전, 아니면 영화?"

"인도인들과 우리에게 이런 공통점이 있는지 몰랐네요."

"우리?"

"나는 유대인이에요. 무신론자지만 유대인이죠."

"우리에게 어떤 공통점이 있는데요?"

"질문을 다른 질문으로 대답하는 것."

"인도인과 유대인이라서 그러는 건 아니잖아요?"

"그렇게 대꾸하는 것이 바로 내 말이 맞다고 인정하는 거라고요!" p.47-48




디팍에게는 두 가지 종교가 있다. 힌두교와 종교적 신념에 가까운 과묵.

인도에서 촉망받는 크라켓 유망주였지만 인도의 카스트제도 때문에 랄리와 미국으로 이주해 수동식 엘리베이터가 설치된 아파트에 투철한 직업정신과 자부심을 가지고 일하는 엘리베이터 승무원 디팍. 뭄바이 팔레스호텔 대주주이자 데이팅어플 사업 확장을 위한 투자를 받기 위해 고모 랄리의 재정보증을 받고 뉴욕에 도착한 산지. 보스턴 마라톤 테러로 다리를 잃은 이후 휠체어와 한 몸이 되어 홀로서기를 시작한 클로이. 이들의 이야기가 맨허튼 5번가 12번지 9층짜리 석조 건물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디팍과 2인 1조로 아파트 수동식 엘리베이터를 운전하는 리베라가 계단에서 추락하면서 다리를 다쳐 일을 하지 못하게 되고 아파트 입주민들의 불편이 이어지자 임시 엘리베이터 승무원으로 산지가 투입된다.


"잠깐." 랄리는 핸드백에 손을 넣으면서 말했다. 

그녀는 지갑에서 25센트 동전 한 개를 꺼내서 산지의 손에 쥐어주고 손가락을 오므려주었다.

"주먹을 뒤집은 다음 손을 펴보렴."

산지는 고모가 하라는 대로 했고, 동전이 발에 떨어졌다. 

"네가 죽는 날 그게 네 전 재산일 거다. "

그렇게 말하고 랄리는 자리를 떴다. p.135​


"코끼리를 타고 나타났어야 했나……. 편견은 깨지지 않는군."

수많은 영화, 소설의 주무대가 되었던 익숙한 뉴욕을 배경으로 소설이 전개되지만 수동식 엘리베이터, 인도의 카스트제도와 인도인들을 향한 수많은 편견들, 자신을 향한 시선을 버티며 홀로서기 해나가는 장애인의 이야기는 익숙한 소재가 아니라서 신선하게 읽힌다. 디팍과 랄리 부부, 클로이와 산지를 비롯하여 개성 넘치는 입주민들과 좌충우돌 펼쳐지는 사건사고들이 호기심을 자극하며 빠르게 책장이 넘어가지만 마르크 레비가 『그녀, 클로이』에서 우리 사회에 만연한 차별과 편견을 인종, 장애, 신분, 세대 차이 등을 작정하고 보여주면서 묵직한 메시지를 전해준다. 과거 수많은 이민자들이 꿈꿨던 기회의 땅 미국에서, 그것도 뉴요커들의 도시 뉴욕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는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것처럼 재미와 감동을 안겨주며 읽혔는데 영화화해도 괜찮을 거란 생각이 책을 읽어가는 내내 들었다. 매력적인 인물들과 사건의 이야기가 할리우드에서 제작되면 좋을까 발리우드에서 제작되면 좋을까 혼자 고민을 해보기도 했는데 마르크 레비의 동생 로렌느 레비가 영화감독이라고 하니 프랑스 영화로 만들어져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러브스토리의 시작에는 이상한 패러독스가 있다. 두려움 때문에 머릿속에 가득 차 있는 말을 선뜻 꺼내지 못한다. 모든 걸 다 주고 싶으면서도 행복이 깨질까 감정을 아낀다. 싹트는 사랑은 깨지기 쉬운 만큼 무모하기도 하다. p.290

"이토록 터무니없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네요. 완전히 미치지 않고서야."

"완전히 미치지 않으려면 약간은 미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나는."

책을 읽는 동안 한국에선 경비원 폭행 뉴스가, 미국에선 흑인 사망 시위 뉴스로 전 세계가 분노하며 사회의 변화를 촉구했다. 마르크 레비가 『그녀, 클로이』를 통해 건드리고 경각심을 일깨우는 차별과 편견에 대한 현대사회의 병적인 문제들을 되짚어보면 『그녀, 클로이』는 재밌고 빠르게 읽히지만 확실히 '재미'보다는 '의미'가 크게 읽히는 소설이다. 작가에 대한 사전 정보 없이 읽었더라면 당연히 여성 작가가 썼을 거라 생각했을 정도로 마르크 레비는 『그녀, 클로이』 속에서 매력적인 여성 캐릭터들을 중심으로 사랑스러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원서 디자인을 그대로 가져온 표지를 살펴보면 책의 제목보다 작가의 이름이 더 크게 눈에 띄는데 이는 마치 마르크 레비라는 브랜드의 인지도, 파급력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 같다. 그의 작품들을 더 읽고 싶고 영화화된 『그녀, 클로이』를 만나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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