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NGE 9 체인지 나인 - 포노 사피엔스 코드
최재붕 지음 / 쌤앤파커스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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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셀러 『포노 사피엔스』로 우리에게 친숙한 문명 공학자 최재붕 교수의 신간 『CHANGE 9』(이하 체인지 나인)이 출간됐다. 문명의 대전환기를 관통하는 코로나 시대에 다시 세워지는 '생각의 기준', 즉 새로운 언어인 '포노 사피엔스 코드'를 알아야 함을 강조하며 최재붕 교수는 아홉 가지 키워드- 메타인지, 이매지네이션, 휴머니티, 다양성,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 회복탄력성, 실력, 팬덤, 진정성 - 을 제시한다. 유난과 혐오, 공포가 뒤섞여 도무지 침착해지기가 어려운 새로운 시대가 갑작스레 들이닥쳐 질기게 이어지고 있다. 세계 문명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명확하게 보고 그 변화 속에서 새로운 시대를 준비할 힘을 길러야 함을, 우리 사회에 대한 근본적이고 깊은 성찰을 위해 변화된 아홉가지 코드를 읽어야 함을 최재붕 교수는 단호하게 말한다. 

 

 상상은 경험을 토대로 만들어집니다. 축적된 지식을 바탕으로 그림을 그려가는 과정입니다. 상상을 현실로 만들어가는 힘은 현재의 능력에 기초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멋진 미래를 상상하고 그것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죠. 적지 않은 노력의 과정을 거쳐 그곳에 이르게 됩니다.

 인류의 표준이 포노 사피엔스로 바뀐 지금, 우리가 상상하는 미래와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노력의 기준도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요? 무엇이 멋진 미래일까요? 과거와 다른 멋진 미래에 대한 기준은 어떻게 세워질까요?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나는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요? p.113-114

 



과거의 그 누구도 미래사회 2020년에 전 세계가 전쟁과 견줄만한 코로나 사태가 일어날 거라곤 예상을 못했다. 하늘을 나는 자동차, 인간의 일을 대신해주는 로봇, 식사를 대신해줄 한 알의 약이 존재하는 세상을 꿈꿔왔지만 실상은 외출 한 번 하는데 큰 결심이 필요하고 최선의 예방인 마스크에 의지하는 인류가 되어 2020년을 허무하게 살아가고 있다. 최재붕 교수는 『체인지 나인』을 통해 문명 공학자의 시선으로 시대의 변화를 예리하게 통찰하고 미래를 예측한다. 현재 한국 사회, 더 넓게는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다양한 변화와 사례를 살펴보면서 앞으로 변화하고 진화할 문명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생각하게 한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작가의 질문에는 '위기를 기회로'라는 메시지가 녹아있다.

 

 출발점과 지향점이 있어야 방향성을 갖고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야 시간과 노력의 축적을 통해 실력을 키울 수 있습니다. 내 생각과 의지가 그만큼 중요해진 것입니다. 나의 노력 여하에 따라 실력을 키울 수 있는 환경이 주어져 있고 그것이 나의 미래를 결정하는 승부처가 되는 사회, 바로 우리가 마주한 포노 사피엔스 사회입니다. 내 마음을 견고하게 다지고 진정한 실력을 키우는 일이 혁명 시대를 사는 가장 중요한 기반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p.266

 

같은 시대를 살아가고 있지만 최재붕 교수가 『체인지 나인』을 통해 보여주는 우리 사회의 다양한 모습들은 마치 처음 알게 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면서 엄청난 공부가 됐다. 아홉가지 코드들을 폭넓고 깊게 다루면서 이야기하는 여러 가지 이슈, 기업, 인물들의 이야기를 이어가는 방식을 따라 읽어가며 다양한 관점을 가지고 가치를 발견하게 된다. 작가의 글이 특별히 와닿고 공감이 가는데 이런 방식의 성공은 포노 인사이트 10번에 들기 충분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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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란 무엇인가
김영민 지음 / 어크로스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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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민 교수의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를 읽고 난 직후부터 줄곧 다음 작품을 기다려왔었는데 논어 에세이집 『우리가 간신히 희망할 수 있는 것』에 이어 들려온 신간 소식은 조금 의외였다. 그토록 기다려온 교수님의 신간 제목이 하필 『공부란 무엇인가』라니, 마침 나는 2년 전 큰마음을 먹고 다시 시작한 공부를 겨우 마치고 다음 주 그 결과물인 학위 취득을 앞두고 있었다. 비싼 돈과 시간을 투자해 얻은 가장 큰 깨달음은 나이를 먹으니 벼락치기 능력도 예전만 못하다는 것이었고 내 생애 더 이상의 공부는 없다는 선언을 한 뒤라 개인적으로 시기가 조금 안 맞았지만 그럼에도 김영민 교수라면 의외의 것들도 상상이상의 것으로 전해줄 거라는 합리적인 기대를 안겨준다.


 섬세함은 사회적 삶에서도 중요하다. 섬세한 언어를 매개로 하여 자신을 타인에게 이해시키고 또 타인을 이해하고자 하는 훈련을 할 때, 비로소 공동체를 이루고 살 수 있다. 거칠게 일반화해도 좋을 만큼 인간의 삶이 단순하지는 않다. 거친 안목과 언어로 상대를 대하다 보면, 상대를 부수거나 난도질할 수 있을는지는 몰라도 제대로 이해하기는 어렵다. 그런 식의 거친 공부라면, 편견을 강화해줄 뿐, 편견을 교정해주지는 않는다. 섬세한 언어야말로 자신의 정신을 진전시킬 정교한 쇄빙선이다. 자신의 세계를 확장하고 싶다면, 다른 세계를 가진 사람을 만나야 하고, 그 만남에는 섬세한 언어가 필수적이다. 언어라는 쇄빙선을 잘 운용할 수 있다면, 물리적 의미의 세계는 불변하더라도 자신이 체험하는 우주는 확장할 수 있다. 그 과정 전체에 대해 메타적인 이해마저 더한다면, 그 우주는 입체적으로 변할 것이다. 언어는 이 사회의 혐오 시설이 아니다. 섬세한 언어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공부를 고무하지 않는 사회에서 명철함과 공동체 의식을 갖춘 시민을 기대하는 것은 사막에서 수재민을 찾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공부의 기대효과」


나는 공부에 대한 콤플렉스가 심한 편이라 평소 공부 잘 하는 사람에 대한 동경이 조금 비정상일 정도인데 김영민 교수가 『공부란 무엇인가』에서 말하는 것들을 통해 내가 동경하는 부류의 사람들이 가진 성실한 태도와 자세를 엿보는 것 같다. 가제본에 수록된 일곱 편의 칼럼을 통해 공부와 독서의 필요성과 기대효과 등을 진지하게 생각해보며 『공부란 무엇인가』에서 김영민 교수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학생들의 공부에는 물론이고 학교 밖 사회에서도 유효함을 깨닫게 된다. 김영민 교수의 성실한 독자들이라면 문제가 없지만 잘 모르는 사람들이 '공부'라는 키워드만 보고 그냥 지나치게 될까 봐 걱정이 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어릴 때부터 공부습관을 잘 잡는 것이 중요하듯 공부와 독서 등에 대한 태도 역시 잘 잡는 것이 중요하다는걸, 이런 말씀을 해주는 좋은 스승을 만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이토록 근사하게 이야기할 줄 아는 김영민 교수에 대한 신뢰가 더욱 높아지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런가 하면 학부모를 대동한 성적 정정 요구에 자신도 어머니를 부르겠다는 유머를 잃지 않는 센스는 보너스다.


 중년이 되면, 차라리 결핍을 받아들이는 게 낫다. 결핍이 오히려 가능성을 만들기도 하는 법이다. 청장년 시절의 결핍이 오히려 자원이 되어 있기를. 그래서 결핍으로 고통받기는 했지만, 결핍이라는 것을 아예 모르고 사는 인생이고 싶지는 않았다고 나직하게 중얼거릴 수 있기를 바란다. 「공부의 생애 주기」


우리 사회가 닥친 현실과 문제를 너무나도 잘 보여주는, 질문을 던지며 독자 몫의 여지를 남기는 김영민 교수의 글이 가지는 힘은 작은 가제본도 묵직하게 느끼게 해준다. 책의 전반적인 분위기와 표지의 일러스트가 너무나 잘 어울리는 것은 물론이고 일곱 편의 칼럼은 정식으로 출간된 단행본에 대한 기대감을 키워준다. 목차만 봐도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 기대가 되는 것은 물론이고 든든함을 느끼게 해준다. 대학생 때 이 책을 만났더라면, 2년 전 다시 공부를 시작하기 전 이 책이 존재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지만 생에 더 이상의 공부는 없다는 따끈따끈한 선언을 마친 나에게 여전히 유효한 책이다. 작은 가제본을 읽었을 뿐이지만 오랜 시간 꾸준히 꺼내 볼 책이라는데 동의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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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래희망은 이기적인 년 - 날카로운 직감과 영리한 태도로 험난한 세상에서 살아남는 법
캐런 킬거리프.조지아 허드스타크 지음, 오일문 옮김 / 놀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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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래희망은 이기적인 년』이라니 유교걸, 유교보이의 나라에서 제목부터 너무 세다. 파격적이다. 그래서 더 눈길이 갈 수밖에 없었는데 '날카로운 직감과 영리한 태도로 험난한 세상에서 살아남는 법'이라는 부제와 '인생 좀 조져본 언니들의 유쾌한 카운슬링'이란 카피가 관심을 폭발시킨다. 거기에 두 언니의 팟캐스트 <My Favorite Murder>의 성공에 힘입어 책의 출간으로 이어졌다고 하니 바로 송은이&김숙의 <비밀보장>이 떠오르며 기대감을 키워준다. <비밀보장> 역시 두 언니의 명쾌한 사이다 카운슬링이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두 언니의 전성기를 되돌려 준 것은 물론이고 동명의 책 출간까지 이어지며 큰 성공을 거뒀는데 『비밀보장』을 출간했던 바로 그 출판사에서 『장래희망은 이기적인 년』이란 책의 출간 소식을 알려왔으니 본격적인 독서가 시작되기도 전에 신뢰감과 만족감이 넘치게 밀려온다. 


 엄마의 삶은 위대했어요. 엄마는 스스로 어리석게 행동하는 걸 용납하지 못했죠. 자식들이 권력 앞에서 바보처럼 행동하면 권위에 맞서 싸웠고요. 공격적이거나 독선적인 게 아니라 옳고 그름을 명확히 할 줄 아는 여자였어요. 엄마는 옳다고 믿는 걸 실천할 줄 알았어요. 주어진 하루에 감사하다고 다른 사람과 그 감사를 나눌 줄 알았죠. 이런 면에서 엄마는 참 운이 좋은 사람이에요. 엄마는 산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즐거운 순간이 오면 아이처럼 기뻐했어요. 엄마의 눈에는 언제나 생기가 넘쳤죠.

 난 엄마가 알츠하이머에 걸릴 걸 어느 정도 예상했을 거라고 생각해요. 간호사인 엄마는 알츠하이머가 유전이란 것도, 병에 걸리면 살날이 얼마 안 남는다는 것도 알고 있었죠. 이건 가족 모두 알고 있었어요. 우리는 이 세상에 잠시 머물렀다 가는 존재예요. 타인을 만족시키려고 시간을 낭비하지 마세요. 예의 따위 엿이나 먹으라지.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사세요. 그러면 스스로 일군 인생을 사랑하게 될 거예요. 자랑스러운 우리 엄마처럼요. p.65 




파격적인 제목에 자극적이고 톡 쏘는 카운슬링을 기대했지만 기대와 달리 무겁고 진지한 이야기가 내내 펼쳐진다. 그런데 이 언니들 너무 솔직해도 너무 솔직해 당황스럽다. 안 빠져 본 중독이 없고 안 해본 실패가 없을 정도인 과거의 경험들을 거침없이 들려주며 따뜻하게 위로해주고 조언해준다. 이것은 마치 기대를 잔뜩 하고 MT를 떠났는데 도착해보니 MT가 아닌 강연, 세미나였지만 거기서 인생 선배를 만난 기분이다. 『Stay sexy and don't get murdered』의 원제가 『장래희망은 이기적인 년』이란 제목으로 유교국에 출간된 것이 낚시처럼 느껴지지만 그렇게 낚여서 이 책을 만나게 된 것이 고맙게 느껴진다. 또한 책에서 다루는 고민들이 지금까지 내가 살아오면서 미친 듯이 고민하고 오랫동안 스트레스받아왔던 것들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어 공감력과 집중력을 높여준다. 


 음, 인생은 능력에 비례해 굴러가지 않아요. 아무리 완벽한 인간으로 태어나도 상처받는 일은 늘 있죠. 분명 그럴 거예요. 그건 삶을 얻은 대가예요. 상처가 없다는 사람은 들어본 적이 없네요. 집에만 있는 사람이 아닌 이상. 생각해보면 말 한마디에 괜히 기분이 나빴던 적도 있잖아요. 그나마 다행이에요. 이제는 그 감정이 사라졌다는 의미니까요. 어떤 이들은 외로워서 마음에 상처를 입기도 하죠,

 우리는 '최고'가 되기 위해 비참해질 때까지 미친 듯이 자기 자신을 몰아붙여요. 하지만 우리 목표는 '진정한 자신'이 되는 거예요. 그러려면 뭔가를 맹신하는 습관을 버리고 새로이 눈을 떠야 해요. 지금 너무 괴롭고 아프다면 뭐가 잘못되었는지를 먼저 찾으세요. 지금의 고통은 훗날 10년 동안 웃으며 얘기할 수 있는 재미난 화제가 될 거예요. 결점 때문에 숨지 마세요. 결점은 불완전한 사람들과 여러분을 연결해주는 끈이에요. 내 심리치료사인 미셸이 해준 말이죠. 그녀는 계속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어요. 처음에는 그녀가 쓸데없는 말만 한다고 생각했는데 지나고 보니 그녀가 맞았어요. p.132-133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가 무례하고 이기적인 걸 '세다'라고 포장하는 게 거슬린다. 누가 봐도 인간이 덜 된 사람이라 말이 통하지 않고 상대하기 싫은 건데 그게 왜 세다는 건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나는 부드럽지만 강단있는 사람들을 부러워하기도 하고 무서워하기도 하는데 '세다'는 것은 그런 사람들에게 더 어울리는 것 같다. 팟캐스트 진행자이자 책의 저자 캐런 킬거리프와 조지아 허드스타크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이 번갈아가며 들려주는 이야기는 부드럽고 진지하지만 강단이 있어 신뢰가 가고 배울 점이 많다.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면 스스로 일군 인생을 사랑하게 될 것이라 말하는 진정한 센언니 캐런과 조지아를 많은 사람들이 만나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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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
마리 유키코 지음, 김은모 옮김 / 작가정신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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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악몽을 꾸는 듯한 기분이었다.

지난 겨울 야마시로 아사코의 『내 머리가 정상이라면』을 읽고 매년 여름마다 공포, 기담소설을 챙겨 읽는 이벤트를 가지겠다는 결심을 세웠었다. 생전 관심을 준 적이 없었던 장르에 막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면서인지 올여름엔 유독 공포, 기담 소설 출간 소식이 예전보다 많이 들려오는 것 처럼 느껴지는데 『내 머리가 정상이라면』을 출간했던 작가정신 출판사에서 2020년 여름을 겨냥하여 마리 유키코의 『이사』를 출간했다. 마침 공포소설을 찾고 있었는데, 마침 마리 유키코의 작품이 궁금했었는데 올여름 공포소설을 제대로 만난 것 같아 소설을 읽기도 전에 만족도는 이미 최고치에 달했다.

 

 하지만 사실 '이사'에서 재미를 얻을 수 있는 건 집을 찾는 기간에 한정된다. 집이 결정되면 그때까지 두근대고 설레던 기분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일상에 매몰되고 만다. 뿐만 아니라 바쁜 이사준비와 뒷정리가 오히려 고통으로 다가온다. 특히 이사 당일부터 며칠간은 완전히 녹초가 되어 가벼운 신경쇠약에 걸린다. 이런 귀찮은 일은 두 번 다시 하기 싫다, 이제 죽어도 이사 안 한다! 그렇게 마음에도 없는 생각에 빠진다. p.197 「끈」

 

이사라는 공통 주제와 관련된 6편의 도시 괴담이 모호한 분위기와 독특한 구조로 이어진다. 이사할 집을 보러 다니는 사람, 이삿짐을 싸는 사람, 이사센터에서 일하는 사람, 회사 자리 이동으로 이삿짐을 정리하는 사람, 이사 온 이웃사람, '방랑자' 기질을 타고난 '이사 귀신' 등 이사로 일어나는 일들에 관한 다양한 상황에서 펼쳐지는 마리 유키코의 공포소설은 '오싹'보단 '서늘'하다. 이해하지 못할 상황에 놓인 인물들과의 깊은 교감이 이루어지면서 미스터리한 상황과 그에 대한 주인공들의 치밀한 심리묘사, 팽팽한 긴장의 끈이 소설의 몰입도를 높여주는데 소설에 깊이 빠져 빠른 속도감으로 읽어가지만 허를 찌르는 반전에 멍해지며 복선들을 되짚어보게 된다. 

 

여섯 편의 단편에서 마리 유키코가 여지를 남겨두었던 부분은 아오시마 사부로의 작품 해설로 뚜렷하고 명확해진다. 어떤 실제 사건이 소설의 모티브가 되었는지 친절하게 설명해주며 미스터리로 남았던 벽의 구멍의 정체를 알게 되는가 하면 소설보다 더 엽기적이고 불쾌한 실제 상황들을 보며 뒤늦게 간담이 서늘해지기도 한다. 소설이 끝나도 여운이 진하게 남는 데 마리 유키코의 소설 세계에 제대로 홀린 것 같다. 『이사』의 만족도가 높아 자연스레 작가의 다른 작품으로 관심이 옮겨지는데 김은모 번역가의 옮긴이의 말을 보며 작가에 대한 호감과 호기심이 더불어 커진다(김은모 번역가는 마리 유키코 최고의 성덕이자 최고의 홍보대사다). 이야미스 장르의 대가 마리 유키코의 다른 작품들이 너무나 궁금해지는 대목이기도 하다.

 

 아아,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결국 나는 내내 비정규직이겠지. 경기가 좋아졌다느니, 취직률이 높아졌다느니 하지만, 그런 건 우리하고는 아무 상관도 없잖아요. 일단 비정규직으로 시작한 이상, 우리는 중고품인걸요. 기업도 따끈따끈한 대학의 신규 졸업생들을 정사원으로 채용하고 싶을 거라고요. 순결 신앙이랄까요. 요즘 세상에 순결에 연연하는 남자가 그렇게 많겠냐마는, 기업은 그런 점에 엄청 연연하잖아요? 저도 취준생 때 취업과 사람이 그러더라고요. '신규 졸업생'이라는 브랜드의 힘을 써먹을 수 있는 건 일생에 단 한 번뿐이니 유용하게 사용하라고요. 하지만 써먹고 싶어도 저희는 아직 잃어버린 20년인지 25년인지에 속한 세대였잖아요. ……어휴, 진짜 그런 시대에 태어난 게 원망스럽네요. 지금 생각해보면 대학원이라도 갈걸 그랬나 싶어요. 지금쯤 대기업에 합격했을지도…… 이렇게 망상해본들 허무할 뿐이지만요. p.166-167 「벽」

 

『이사』에서 공포적 상황에 직면한 주인공들의 심리묘사와 독특한 소설의 구조, 상상 이상의 반전도 좋았지만 일본은 물론이고 우리 사회에도 만연한 정규직과 비정규직 차별 문제, 직장 왕따, 가정폭력 등의 문제들을 녹여내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를 직면하게 해주는 장치들도 무척이나 좋았다. 또한 여섯 편의 단편은 '이사'라는 소재와 또 하나의 소재로 묶여있는데 작가의 치밀함에 감탄하게 된다. 개인적으로 마리 유키코와의 첫 만남이 여름이라는 점도 기념비적으로 느껴진다. 한 권의 소설을 봤을 뿐이지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단언컨대 마리 유키코는 공포소설 천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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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시작하는 힘 - 생각이 너무 많은 나를 행동하게 하는 법
윤희철 지음 / 비에이블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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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학창시절 신조는 '사고는 저지르고 본다'였다. 공부를 그런 신조로 했었더라면 지금쯤 뭐라도 되어있었을 텐데 아쉽게도 공부가 아닌 다른 쪽으로 꽂힌 일에는 용기 있게 행동하고 가열차게 달려나갔었다. 정말이지 용감하고 무식했던 그 시절의 내가 있었는데 그때가 전생으로 느껴질 만큼 시간도 많이 흘렀고 지금의 나는 많이 달라져있다. 빌어먹을 이 사회는 사고는 일단 저지르고 보는 여학생을 안전제일주의 사회인으로 만들어놨고 나에게 용기는 멸종된 것이나 진배없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미래에 좋은 뭔가가 다가오고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물론 그게 뭔지는 몰랐다. 하지만 분명 뭔가가 오고 있다고 믿으며 스스로를 안아주고 달래줬다.

 Fake it until you make it.

 이뤄질 때까지 이뤄진 척하기.

 자기 세뇌. 믿어보기로 했다. 이제 나에게 필요한 건 막연한 자신감이 아니라 나에 대한 믿음으로 바닥을 단단하게 다지는 것이었다. p.79


유튜브 채널 <희철리즘> 운영자 윤희철 작가의 『일단 시작하는 힘』은 제목만 봐도 그 힘이 전해지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한다. 또한 대학 3학년 때 영어 스터디 사업으로 6개월 만에 1억이 수익을 내고 해외여행 콘텐츠를 성공시키며 실패도 경험과 기회로 만든 작가의 남다른 이력이 확실한 믿음의 근거가 되어주어 작가가 들려주는 경험과 동기부여가 궁금해진다. 거기에 부제 '생각이 너무 많은 나를 행동하게 하는 법'은 나를 저격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 내가 일단 시작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데에는 게으름이 아닌 많은 생각임을 들켜버린 것 같아 뜨끔하다.


 건강한 자존감을 가진 사람들은 남에게 인정받기 위해 쓸데없이 시간을 허비하지 않는 것 같다. 무엇보다 자신의 장점과 좋아하는 일에 집중하는 만큼 삶에 대한 만족도도 높을 것이다. 

 이런 게 바로 행복한 삶이 아닐까. 나에 대한 사랑만큼 삶을 풍족하게 만드는 건 없으니까. 어쩌면 행복을 찾는 과정은 나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찾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p.126


자신만의 대체 불가능한 콘텐츠는 필수가 되어버린 시대에 남들보다 일찍, 남들보다 빠르게 자신만의 콘텐츠를 출시한 윤희철 작가가 들려주는 이야기들을 따라 읽어가다 보면 어느새 작가의 용기와 자신감, 자존감이 나에게도 전염되는 것 같다. 뭐든 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과 용기를 얼마 만에 가져보는 것인지 모르겠다. 콘텐츠 크리에이터로도 인생의 경험치로도 그는 인생 선배가 되어 든든함을 안겨준다. 책을 읽어가는 내내 끊임없이 자극을 받는데 이 책을 더 일찍 만났더라면 더 큰 자극을 받고 동기부여가 됐을 것이란 아쉬움이 든다. 그러니까 이 자극을 하루라도 더 젊을 때 수혈받아야 한다. 일단 『일단 시작하는 힘』을 읽어보는 것부터 시작해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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